쇼팽 스케르초 2번 Scherzo No.2 in B-flat minor, Op.31
호로비츠( Vladimir Horowitz, 1904.10.1.~1989.11.5. )는 아마도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피아니스트 중 하나일 것이다. 그의 건조하지만 밝게 빛나는 강조는 여러 사람을 이미 매혹시켰다. 피아노의 색채가 크게 울림과 찌름으로 짜인다고 볼 때 찌름 쪽에 더 기우는 사람들에게 호로비츠의 톤은 그 이상을 가장 잘 구현한 사람일 수 있다. 그렇지만 아예 건조하지는 않게 늘 기품을 유지하는 그의 연주는 이 쇼케르초 2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현의 튕김이 직접 연상되는 호로비츠의 강조점들은 마치 클라브생을 추억하는 듯하다. 갈필법의 쇼팽.
반면에 미켈란젤리( Arturo, Benedetti Michelangeli, 1920. 1. 5.~1995. 6. 12. )의 연주는 언제나 울림을 재발굴해낸다. 사실 약간 희귀 음반인 스케르초 1번 연주도 그러한데, 여기서 훨씬더 고아하게 해낸다. 수체화 같은 톤의 색채감은 한 태어나는 운동(le mouvement naissant)의 기호작용이다. 질료의 큰덩어리와 작은 덩어리가 서로 떨어지면서도 붙는다, 이어서 하나로 서로 스며들면서도 제 극성을 보존한다, 마침내 다채로운 하나를 완수한다. 그는 질료의 흐름으로서의 운동을 피아노가 묘사하게 할 수 있었던 미증유의 인사이다. 이러한 바 감각에 공명하고 싶다면 오직 그의 연주를 들어야한다.
아마도 한국에서 아무렇게나 흘러나오는 쇼팽 야상곡은 거의 이반 모라벡( Ivan Moravec, 1930~2015 )의 연주 같다. 이 연주를 들으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는 특히나 '노래하듯이' 피아노를 연주한다. 쇼팽의 이곡은 앞부분에서부터 격정적인 물음과 단호한 답이 교차하는데, 그의 연주를 듣노라면 마치 오페라에서 성악가들의 대사처럼 이것이 들린다. 다른 연주자들은 만들어내지 못하는 인상이다. 그런데 한 호곡을 묵중하지 않게 전달하는 이런 연주는 자칫하면 상투의 감상이 되어버리기 쉽다. 물론 극히 대다수의 연주가, 반대로, 야릇한 감상을 공유하지만, 그의 연주 중에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유리 에고로프( Youri Egorov, 1954~1988 )의 연주는 언제나 명석판명하다. 고화질의 사진은 확대해도 사물들의 경계가 분명하다. 그는 속주에서나 서주에서나 음의 알갱이가 모두다 살아있게 연주하는데 비상한 재능을 갖고있다. 그는 이른바 또랑또랑한 소리를 낸다. 손가락을 제어하는 불가사의한 기예. 가끔 나는 이 사람 연주야 말로 한국 입시, 나아가 세계 유수의 경연장이 원하는 그것이 아닐까 생각하고는 한다. 폴리니 연주를 들을 때와 비슷하다. 오해하지마라, 그렇다고 에고로프의 연주가 개성 없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반대로, 극도의 정밀함을 바탕으로 서정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근대 연주법의 최고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 이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렇게되니 낭만파보다는 고전파의 연주, 바흐의 연주가 제격일 것 같은데, 그것도 뛰어나지만, 슈만의 크라이슬레리아나 연주 만큼은 감히 말하건대, 이 곡 연주들 중에서도 별이다. 그 밝고 또렷한 그러나 날카롭지는 않은 그 소리가, 극히 섬세하지만 쾌활한 고양이를 제대로 움직이게한다. 지금은 이정도로만 말해두고, 이 곡에 대해서는 다른 지면에서 더 말해보자.
반대로 프랑소아 상송( François, Samson, 1924~1970 )의 연주는 역시 담대하다. 심지어 물음과 답 모티브가 바로 등장하는 가장 중요한 이 앞부분에서 잘못된 타건까지 들린다. 시쳇말로 막귀인 내 귀에 들릴 정도이니 예민한 사람들은 크게 거슬릴 것이고, 이를 비호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만큼 이 이가 작은 오류는 쇼팽의 큰 흐름을 멈추게 할 수 없다 생각하는 대범함을 여기서 표현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사실 처음 들으면 샹송의 연주는 거칠기만 한데, 여러번 들으면 꼭 어떤 사연이 있는 것처럼 곡진하다. 감성의 방향이 음악의 논리를 압도한다. 어떠한 의미에서는 그는 음의 가장 진실한 순간에서 사는 사람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세평으로는 쇼팽의 가장 유명한 전문연주가이지만 나는 이 사람의 연주를 들을 때마다 베토벤의 곡들이 꼭 생각난다. 이 사람은 베토벤 연주는 스스로 피했다던데, 이미 쇼팽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겼음직하다. 베토벤의 음악이 하나같이 정신의 서사를 말하고 싶어한다면, 상송과 더불어서 쇼팽은 감성과 의식의 서사야말로 온자연의 실체라고 여겼던 것이다- 마치 버지니아 울프.... 상송의 연주는 이런 비평이 가능할 만큼 몰아의 경지를 항상 보여주지만 정밀하지 않은 것이 장점일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