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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소소선방 원문보기 글쓴이: 梅君子
모악성지 순례 - 한국 고유종교의 모태인 엄마뫼 모악산
모악성지 순례 1 - 영화 보리울의 본향인 수류성당
장 소 : 전북 김제시 금산면 화율리 223번지에 있는 전주교구 소속의 카톨릭 천주교회
수류성당 [水流聖堂]
1889년 봄 배재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1895년 10월 성당을 이전하고 수류 본당으로 개칭되었다. 초대 신부로 베르모렐 요셉 신부가 부임하였다. 1889년 베르모렐 신부가 완주군 구이면 안덕리에 설립한 배재 본당은 수류 본당의 모태가 되는 본당이다. 배재 본당의 전신인 배재공소는 1882년 리우빌 신부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후 베르모렐 신부는 전라도 남쪽 지방 공소들의 판공 성사를 돌보아 주는 과정에서, 다른 공소의 가운데에 놓여져 있는 배재 공소로 거처를 옮기고 곧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1894년 갑오 농민 전쟁으로 2대 주임 조조 신부가 살해되고 3대 라크루 주임신부가 부임하면서 면 소재지가 있는 수류로 성당은 이전되고 이곳은 수류 본당으로 개명되었다. 1901년 10월 1일 드망즈 신부 주례로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수류성당 [水流聖堂] (두산백과)
- 보리울의 여름이라는 영화를 촬영했던 입구 돌계단 -
[영화] 보리울의 여름
스토리 : 천당극락 드림팀, 이기면 하늘이 쏜다!!
한적한 보리울 마을, 버스에서 내리는 두 사람. 보리울 성당의 주임신부로 첫발을 내딛는 30대 초반의 김신부와 6년전 스님이 되겠다고 출가한 아버지(우남)를 만나러 온 초등학교 6학년 형우다. 그들을 맞아주는 사람은 단정한 자태의 원장수녀와 진한 사투리로 너스레를 떠는 아빠스님 우남, 형우는 아무래도 어색한 우남 스님과 시골 생활에 무료함을 느끼고, 김신부 또한 원장수녀, 성당 고아들과의 이어지는 마찰 때문에 보리울에서의 생활이 쉽지많은 않게 느껴진다.
한편 골목대장 동숙을 주축으로 이루어진 보리울 마을팀 아이들은 읍내 축구팀에 기세좋게 도전했다가 형편없이 무너지고 햄버거를 헌납한 후, 축구 실력 향상을 위해 평소 축구 이론에 해박한 우남 스님에게 축구 감독을 부탁하고 여자라고 무시하는 성당 아이들과의 시합을 승리로 이끈다. 형우 또한 보리울 마을팀에서 섞여 축구를 즐기면서 점점 우남과의 벽을 허문다.
마을팀에 대패 후 창피해서 마을을 뜨고 싶을 정도로 절망하는 성당 아이들. 원장 수녀와의 마찰과 아이들의 반항에 고심하던 김신부는 바실라 수녀의 격려에 힘입어, 풀이 죽은 성당 아이들에게 축구공을 선물하며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어주고, 아이들의 축구 감독이 되어 훈련을 시작한다. 우남 스님과 김신부가 가세하여 점점 고조되어가는 보리울의 축구 열기.
수중전으로 펼쳐진 두 팀의 경기는 한치의 양보 없이 치열하게 펼쳐지고 승부는 무승부를 기록한다. 서로의 우정을 회복하고 드디어 단일팀으로 탄생하는 보리울 소년축구단! 이들은 읍내 축구부에 기세좋게 도전장을 내민다. 보리울 마을 잔치처럼 치러진 축구시합. 필살의 90분. 과연 보리울 마을 아이들은 그들의 꿈을 이룰 수 있을까?
- 수류성당 -
- 본당에서는 수녀님이 오르간 연습중이셨다 -
수류성당에서
오! 주님,
제가 왔나이다
회한을 모두 잊으려고
찾아 온 여정이었답니다
슬픔은 기쁨으로
고통은 축복으로
변케 해 주시라는 기도는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간절히 올리는 기도는
주님,
세상의 모든 옳지 않음이
회개할 수 있게 하여 주소서
너와 내가
둘이 아닌 하나임을 깨닫고서
모두를 껴안고 가는 동안
감사의 눈물을 흘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 小 鄕
- 사제관 잎뜰 -
- 성모님이 좋아하시는 장미꽃 -
- 순례자 -
모악산 등정을 위한 여정길에 제일 먼저 수류성당을 찾았다. 모악산 성지순례의 시발점으로 삼은 수류성당은 군이나 면소재지도 아니고, 한참을 벽지로 들어가는 깊은 시골 오지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100년 넘게 운영되어온 성당 자체가 의문시 되었다. 또한 교우들이 800여명이라 하니 이 또한 믿기지 않는 사실이었다. 1800년대말 갑오농민 전쟁 때 무참히 살해당한 제2대 조조신부의 넋이 깃든 이곳은 모악산 남쪽 능선의 기운을 강하게 받는 곳에 위치한 수승한 자리임에는 틀림없어 보였다. 본당 내에서 묵상으로 앉아있는 마음이 무겁다.
사람들은 자연의 모든 생명체와 하나이고 또한 다름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서 보다 더 겸허해져야 한다......
누가 누구를 이단이라 할 수 있으며, 누가 누구를 감히 단죄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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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악성지 순례 2 - 미국남장로교의 정성이 함축된 금산교회와 원평교회
장 소 :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290-1
- 수류성당에서 이십여리 떨어진 곳에 있는 금산교회 -
금산교회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36호. ㄱ자형 평면의 한옥교회로 전주선교부의 테이트(Tate, L. B.) 선교사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史記)에 따르면, 처음의 교회는 1905년에 5칸을 신축하였으나, 1908년 지금의 자리에 옮겨 건축하였다고 한다. 남북방향으로 놓여진 장축의 평면은 5칸의 장방형이며, 여기에서 동측으로 2칸이 덧붙여져 ㄱ자가 뒤집힌 평면형태를 이룬다. 내부는 통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장축과 단축이 만나는 곳에 강단을 설치하였다. 장축인 남측은 남자석, 단축인 동측은 여자석으로 분리하여 남녀가 나뉘어 예배를 보도록 하였다.
교회의 출입도 남녀를 분리하여 각각의 박공(牔栱)면에 별도의 출입문을 만들었다. 또한 강단 뒤쪽에는 목사의 출입을 위하여 작은 출입문이 있다. 강단은 신도석보다 2단 높게 구성하였다. 5량의 가구구조로서 대들보 위에 바로 중도리와 종보가 결구되어 얹혀지고, 종도리도 종보에서 거의 맞대어 있어 지붕의 물매가 완만하다. 종도리 하단에는 상량문이 남아 있다. 남쪽 부분(남자석)에는 한자로, 동쪽 부분(여자석)에는 한글로 씌어 있다.
바닥은 장마루를 깔았고 내부 벽체 및 천장부에는 목부재를 제외하고 흰색 수성페인트로 마감하고 있다. 지붕은 시멘트기와를 얹은 우진각지붕이다. 벽체는 칸마다 중방(中榜 : 벽 한가운데로 가로지르는 부재)을 지르고, 그 위에 미세기창(두 짝을 한편으로 밀어 겹쳐서 여닫는 문)을 만들어 채광(採光)하고 있다. 이와 같은 ㄱ자형 교회형태는 한국 전통사회의 남녀유별이라는 큰 과제를 건축적으로 해결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평면유형이다. 교회 내부 중앙에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에 휘장을 쳐 좌우로 남녀의 예배공간을 구분하던 초기적 방법에서 건축적으로 분리시키고자 찾아낸 해결책이었다.
한식과 양식교회의 특징을 조화롭게 결합시킨 금산교회는 초기 교회건축의 토착화과정을 보여 준다. 1988년 한옥교회 옆에 현대식 2층 교회를 새로 건립하여 지금은 가끔 주일학교의 용도로 이용되고 있다.
참고문헌
『김제시사(金堤市史)』(김제시, 1995)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금산교회 [金山敎會]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남녀 내외를 구분한 이조말의 풍습을 그대로 간직한 금산교회의 구 한옥예배당 -
- 대들보가 다 드러나 보이는 구조다 -
[금산교회 개설]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36호로 지정된 금산교회(金山敎會)는 1905년 미국 선교사 테이트(Lewis Boyd Tate)가 처음 세운 뒤, 1908년 새 건물을 마련하여 지금의 자리로 옮겨 왔다. 교회 건물은 한옥으로 ㄱ자형인데 이러한 건축 구조는 남녀 신도의 자리를 분리하기 위한 것으로, 당시 남녀유별이라는 전통 사회의 관습을 해치지 않으려는 방안이었다.
[개화기 전라북도 지역의 개신교와 ㄱ자형 교회]
1882년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이후 개신교가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선교사들은 의료 사업과 교육 사업을 앞세우고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선교 지역 분할 정책에 따라 전라북도 지역은 미국 남장로교회의 선교 구역에 속하였다.
전라북도 교회의 역사는 남장로교회에서 선교사를 전주에 파송하고 성문 밖 은송리에 주택을 매입하여 선교부[현재 서문교회 전신]를 열면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매입한 주택을 개조하여 사용하다가 교세가 늘어나자 증축하였고, 1905년에 지금의 위치에 예배당을 신축하였다.
건물 형태는 장방형이며 벽체는 붉은 벽돌로 쌓았고 지붕은 기와를 얹은 팔작지붕이다. 그 후 전국적인 대 부흥 운동이 일어나며 교인 수가 급증하자 기존의 건물에 새로운 건물을 덧붙여 ㄱ자형이 되었다. ㄱ자형 교회는 남녀 신도석을 양 날개로 분리하고 꺾어지는 중앙부에 강단을 배치한 결과였다.
이와 같은 ㄱ자형 교회는 남녀유별의 문제를 평면적으로 완전히 구분할 수 있는 장점 때문에 기독교가 전래되던 초기에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교회의 부흥에 따른 재건축 등으로 ㄱ자형 교회는 거의 사라지고 현재 전라북도 지역에서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의 금산교회와 익산시 성당면 두동리의 두동교회가 남아 있을 뿐이다.
[초기 기독교의 토착화 과정을 보여 주는 금산교회]
금산교회는 1908년 전주선교부의 테이트 선교사가 지은 한옥 교회이다. 조선 예수교 장로회의 사기(事記)에 따르면, 1905년 5칸 건물을 지었다가 1908년 배재에 있던 이씨 문중의 재실을 사서 지금의 자리에 옮겨 지었고, 1988년 교회 옆에 교회 본당과 사택을 새로 지었다.
건물 형태는 남북 방향의 5칸 건물에 동쪽으로 2칸을 덧붙여 뒤집힌 ㄱ자 형태를 이룬다. 내부는 통칸이며, 북서쪽 모서리에 있는 약 16.53㎡[약 5평]의 강단을 2단으로 꾸며 결과적으로 3층 구조를 취하고 있는데, 이는 한국 전래의 제단 구조이면서 동시에 ‘뜰, 성소, 지성소’로 이루어지는 성막의 3중 구조를 상징하고 있다. 강단 뒤쪽에는 목사들이 드나들던 조그마한 쪽문이 있다. 이 문을 지나려면 자연스럽게 몸을 숙여야 하는데, 목회자들은 이 문을 드나들면서 겸손을 배웠다고 한다.
신도석은 강단 오른쪽에 남자석, 왼쪽에 여자석으로 분리되어 있다. 이 같은 구조는 한국 초기 교회 건축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형태로 건물을 ㄱ자형으로 설계하여 남녀가 떨어져 앉아 예배를 볼 수 있게 함으로써 남녀가 유별했던 당시의 정서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방안이었다. 처음에는 남녀가 서로 바라보지 못하게 커튼을 드리웠으나 시대의 변천에 따라 1940년대에 거두었다고 한다.
금산교회는 한국 기독교 초창기 ㄱ자형 교회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전통 건축 양식과 서양식 교회의 특징을 조화롭게 결합시켜 초기 교회 건축의 한국적 토착화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건물로, 건물 각 구조물의 보존 상태가 좋아 1997년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36호로 지정되었다.
[금산교회와 이자익 목사]
1. 이자익과 조덕삼의 만남
1904년 테이트 선교사가 설립한 금산교회는 옛날에는 팟정이교회·팟정리교회·두정리교회(豆頂里敎會)로 불렸다. 금산사 바로 코앞에 있는 이곳은 예부터 팟정이[두정리]라 불렀는데, 서울로 가려면 이곳에서 말을 빌려 팟정이를 지나 청도리와 유곽을 거쳐 재를 넘어가야 했다. 그 때문에 팟정이에는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테이트 선교사도 조랑말을 타고 팟정이로 와서 선교 활동을 펼치면서 조덕삼(趙德三), 이자익(李自益), 박회서(朴化西), 왕순칠(王巡七) 등을 만나 전도하고 조덕삼의 사랑채에서 예배를 드림으로써 금산교회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자익은 경상남도 남해 출신으로 6세 때 부모를 잃고 친척 집에서 성장했다. 16세가 될 때까지 열심히 일했지만 가난을 면치 못하자 집을 떠나 하동으로 갔다. 하지만 하동에서도 있을 만한 곳을 찾을 수 없어 전라도 남원과 전주를 거쳐 김제 금산리 삼거리에 도착하였다.
이자익은 삼거리에서 똑바로 가면 유명한 금산사가 있었으나 그 길로 가지 않고 두정리 쪽으로 발걸음을 돌려 가장 큰 집을 찾았다. “여보세요, 주인 어르신 계신가요? 저는 경상도 남해도란 섬에서 왔는데 주인 어르신을 뵙고 여쭐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주인인 조덕삼은 이자익을 안으로 들여 사정 이야기를 듣고는 딱하게 여겨 당장 일감을 주었는데 바로 마부 일이었다. 이자익은 열심히 일하면서 테이트 선교사의 전도를 받아 전주선교부를 오가며 성경을 배우고 매 주일마다 사랑채에서 예배를 올리면서 신앙을 키워 나갔고, 조덕삼·박희서 등과 함께 금산교회에서 테이트의 집례로 세례를 받았다.
2. 금산교회 장로에서 목회자의 길로
금산교회는 해가 지나면서 교인들이 늘어나자 1908년 장로를 선출하였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지주인 조덕삼이 장로로 선출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머슴이며 마부인 이자익이 장로로 선출된 것이다. 마부가 장로가 되었다는 소식이 금산 지역에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이 금산교회로 몰려 왔다.
이때 조덕삼이 자신의 배밭 일부를 교회에 기증하자 힘을 얻은 테이트 선교사는 이자익과 의논하여 교회당을 신축하기로 하였다. 조덕삼은 또 모악산 중턱에 있는 제각을 판다는 소식을 듣고 그 제각을 사들이기도 하였다.
1908년 3월 남녀 신도석을 따로 갖춘 교회당이 완성되어 당회장인 테이트의 집례로 헌당식을 치렀다. 다음 주일부터 여자 신도석에서 따로 예배를 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여성들이 모여 들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소문은 곧 금산리뿐만 아니라 원평에도 전해져 원평에서도 사람들이 모여들였다.
한편 용화동에 살고 있는 사람이 이자익을 좋게 보고 자신의 딸과 결혼시키고 논 다섯 마지기까지 내주었으나 장로가 된 이자익은 목사가 되고자 장인에게서 받은 논을 팔아 평양의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때 조덕삼은 이자익의 학비는 물론 기숙사비도 지원해 주었다.
이자익은 신학을 공부하면서 임실 지방의 순회 조사로 활약하였고, 1909년부터는 전라북도를 대표해서 황운성·최태국·김필수·최흥서 등과 함께 총회 대의원으로 활동하면서 흥덕·남원 지방의 조사를 겸하였다.
1915년 입학한 지 7년 만에 신학교를 졸업한 이자익은 전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뒤 김제군 구봉리교회와 금산교회의 목사로 청빙되었고, 남장로교 선교부는 이자익을 인정하여 고부·정읍·고창·김제 지역을 선교 구역으로 할당하여 주었다. 조덕삼은 이자익의 뒤를 따라 다시 금산교회의 장로가 되었는데, 1919년 세상을 떠났고, 아들 조영호가 뒤를 이어 장로가 되었다.
1917년 이자익은 원평교회의 전신인 구봉리교회로 전임하였다. 구봉리교회는 구봉리에 사는 정창화·김기환이 구봉리에서 금산교회까지 먼 거리를 다니자 테이트 목사와 이자익이 이들을 위해 세운 교회이다. 이자익이 부임한 뒤 구봉리교회는 크게 발전하였고, 원평들의 많은 토지를 소유한 지주들이 신자가 되었다.
이자익은 특히 법 이론에 밝아서 예수교 장로회 총회의 법통으로 전국에 이름을 떨쳤고, 그에 힘입어 1924년 교세가 강한 이북 지역의 인사를 물리치고 제13대 총회장에 당선되었다. 이후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총독부의 간섭에 저항하면서 교회를 잘 이끌어 33대, 34대 총회장에 연이어 선출되어 이 방면의 신화를 창조하였다.
구봉리교회에서는 김준기(金準基)가 장로로 시무하면서 이자익을 보필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구봉리보다 원평리에 사는 신도들이 늘어나자 김준기는 이자익과 상의하여 교회를 원평으로 옮기고 교회 이름을 원평교회로 고쳤다. 김준기는 전라북도에서 장로 출신으로는 최초로 노회장을 역임하였다.
1949년 이자익은 대전성경학교를 세워 교장으로 취임하였고, 1952년에는 대전노회를 조직하여 첫 노회장이 되었다. 1954년에는 대전신학교를 세워 교장으로 추임하였고, 만년에 건강이 악화되어 제2의 고향인 원평에서 여생을 보냈다.
[참고문헌]
• 『김제의 전통』(김제군, 1982)
• 『김제군사』(김제군사편찬위원회, 1994)
• 『김제시사』(김제시사편찬위원회, 1995)
• 『문화유적분포지도』-김제시(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2007)
• 김수진, 『마부 이자익을 섬긴 조덕삼 장로이야기』(진흥, 2008)
• 『한국장로신문』(2009. 5. 23.)
• 새전북신문(http://www.sjbnews.com/)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관리
- 많은 순례객들이 찾아오는 금산의 명소다 -
- 원평마을로 찾아갔던 원평교회 -
- 꽃들도 정결하고 단정하다 -
금산교회는 이조말의 사회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귀중한 문화재로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ㄱ자로 꺾여져서 남녀가 따로 예배를 보던 그때의 정경을 상상하게 해 주는 곳이었다. 구한말 시절에는 그렇게 남녀를 구별하는 시설을 뚜렷하게 해 두어야만 여성들이 자유롭게 교회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에, 신자를 많이 유치하기 위해서는 필수로 칸막이를 준비해야만 했다고 한다. 그러니 얼마나 봉건적이고 폐쇄적이었는지 미루어 짐작을 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금산교회 한옥에는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활동하던 구한말의 많은 자료도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좋은 공부가 되었다. 남장로교의 선교사들이 광주와 목포, 전주를 선교무대로 삼았던 흔적이 뚜렷해 보이는 자료들이었다. 그러니까 미국남장로교는 조미통상조약후인 구한말 시절에 전라도를 선교지역으로 할당받았던 것이며, 그렇게 이 땅의 개신교는 서서히 선교가 진행되어 나갔다.
금산교회를 나와 순례지 코스로 정해져 있는 원평교회를 발견하고서 그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정작 성지 선정에 대한 안내판이 그곳에는 하나도 없었다. 이자익 장로라는 분이 남해에서 이곳으로 흘러들어와 선교사의 마부로 출발해서 금산교회의 장로가 되었고, 그후 평양신학교에서 7년만에 목사안수를 받았으며, 이후 일제시대에는 대전노회를 창립하고 초대 당회장을 맡는 등, 그 활약상이 눈부시다는 자료들을 그곳에서 건질 수는 없었다. 대신 입구 유리문에는 타종교의 침투를 원천봉쇄하는 경고성 메모글이 나붙어 있어서, 역시 모악산 주변에 산재해 있던 많은 신흥종교들의 창궐을 단적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이자익 장로는 금산교회 출신이면서, 이곳 원평교회를 창립한 분으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지만 정작 순례지로서 추앙받는 그런 흔적을 읽을 수는 없었다. 김제시가 이곳을 순례의 코스로 지정하고 있는 까닭은, 특히 증산교의 본부가 있는 이 지역의 강점을 살려서 모든 종교의 성지화로 관광유치를 도모해 보려는 의도를 시도하면서 천주교와 개신교도 함게 끼워맞춘듯한 감이 없지 않아 들게 하였다. 그러나 어찌 보면 유달리 유교의 사상이 근 오백년을 이어온 조선의 산하에서 천주교와 개신교가 자생적으로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그 자체가 벌써 성스럽게도 고결한 일이지 않았나 싶은 생각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런 마음을 안고서 원평리를 지나 증산교의 성지들을 찾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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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악성지 순례 3 - 구한말의 미륵신앙이 응결된 증산교
장 소 : 전북 김제시 금산면 일원
- 대순진리회의 본당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
- 왜 이곳은 외부인의 출입을 막으면서 스스로 쇄교의 정책을 취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게 하였다 -
- 다음으로 길을 떠나 모악산 남릉의 깊은 터에 있는 동곡약방을 찾아가 본다 -
- 동곡약방은 강증산 선생이 시골에서 혜민활동을 하던 곳인데, 지금은 너무 으리한 한옥으로 개조를 시켜 놓아 버렸다 -
- 육송 한그루와 평상석의 조화는 담백함의 극치인 조경미를 보여 주었다 -
- 다음으로 찾아간 증산법종교 본부 -
- 중앙의 이층누각 한옥에 강증산 선생 내외분의 묘소가 안치되어 있다 -
- 미륵불의 도래를 열심히 흠모했던 남도의 구원신앙을 엿볼 수가 있는 곳이다(삼청전) -
- 묘소에서 바라본 모악산 남릉 지세 -
증산교는 교주였던 강증산 선생의 많은 가르침들이 결집되어 한마디로 미륵이 도래하는 미륵세상을 꿈꾸었던 성격이 강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후백제의 견훤이 꿈꾸던 미륵세상이 모악산 금산사에 존재하고 있다 한다면, 구한말 시절 동학란의 무너짐으로 인한 민초들의 간절함이 결집된 신미륵세상의 도래는 이곳 증산교에서 부터 출발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강증산 선생의 일대기를 읽어 보면 모악산 동릉 계곡의 대원사에서 입산수도 7일만에 대오각성하여 부처의 반열에 이르렀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제가 강점하려던 조선의 역사에서 민초들이 기댈 곳이라고는 새로운 미륵불의 도래였던 것은 이미 예고된 수순이었다. 고창, 장성, 태인 등지에서 유독 기세를 올렸던 동학교도들은 동학란의 패배 이후에, 한국에서 지평선이 오로지 하나만 존재한다는 부유한 김제평야에 무수히 많이 숨어 들었으리라, 그리고 대접주였던 전봉준 장군 보다 더 강력한 지도자의 도래를 크게 열망하였을 것이다. 그런 시점에, 모악산 대원사에서 대오각성한 인물이 출현하였다 하니 모두들 미륵불의 도래를 믿어 의심치 않았으리라. 그리고 유불선에 막힘이 없었던 강증산 선생의 행적에 대해서 크게 열광하였으리라. 그렇게 해서 모악산 기슭의 신흥종교 증산교는 크게 교세의 뿌리를 내릴 수가 있었으며, 많은 파생종교의 난립 또한 이곳에서 그 기원을 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대순진리회나 증산법종교 등은 모두 강증산 선생을 교주로 하는 한 뿌리이면서 또한 서로 다른 신흥종교로 성장해서 이곳에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대저 종교라는 그 총체적인 기원이 모두 한 뿌리에서 출발했다고 여기고 있는 필자의 우매한 생각은 과연 옳은 것일까? 틀린 것일까?
종교의 뿌리는 초능력의 기적을 기다리는 원시행위에서 모두가 출발하였다.
아무리 미래세에서 인간이 위대하게 진화할지라도 결코 실현시킬 수 없는 명제가 바로 초능력의 실현이다.
3차원의 생명체가 4차원적인 능력을 겸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기적을 믿는 것이 바로 종교의 도래요 출발이 되었다고 한다면 과연 틀리다 하실 것인가.
그 맥에서 보자면 모든 종교는 한뿌리이다.
틀렸는가.
틀렸다 하여도 틀렸고, 맞았다하여도 틀렸다.
맞았다 하여도 맞았고, 틀렸다하여도 맞았다.
왜 그런 논리가 성립되는가.
불이不二이기 때문이다.
둘이 아니고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죽음이나 부활에서도 걸림이 없기 위해서는 앞으로 나아 갈 밖에 없다.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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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악성지 순례 4 - 믿음이 돌아오는 고결한 자리 귀신사
장 소 :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81
- 깊은 고요가 있다는 대적광전 -
- 중앙에 비로자나불, 협시불로 좌우측에 아미타불과 약사불을 모시고 있다 -
귀신사 [歸信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이다. 676년(문무왕 16)에 의상(義湘)이 창건하여 국신사(國信寺)라 하였으며, 국신사(國神寺)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최치원(崔致遠)은 이곳에서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을 편찬하였다.
고려시대 국사 원명(圓明)이 중창하였다. 그 뒤 임진왜란의 전화로 폐허가 된 것을 1873년(고종 10)에 춘봉(春峯)이 중창한 뒤 현재의 이름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고려 말에는 왜병 300여 기(騎)가 성을 함락한 후 이 절에 주둔하였는데, 병마사 유실(柳實)이 격퇴하였다고 하며, 당시에는 건물과 암자가 즐비했던 대찰이었다고 전한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보물 제826호로 지정된 대적광전(大寂光殿)을 비롯하여 명부전ㆍ산신각ㆍ요사채 등이 있다. 주요 문화재로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2호인 귀신사삼층석탑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3호인 귀신사부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4호인 귀신사석수(石獸)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삼층석탑은 높이 4.5m의 화강암재 석탑으로, 귀신사의 창건과 함께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탑의 선이 정밀하고 옥개석의 곡선이 거의 평행을 이루면서도 신라시대의 미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빼어난 작품이다.
부도는 청도원 마을 입구의 논 가운데 있는데, 전성기에는 이 부도가 있는 곳까지가 절의 경내였음을 알 수 있다. 석탑과 통일된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는 이 부도는 정교한 조각의 예술성을 보이고 있으며, 높이 2.5m이다. 또 석수는 딴 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것으로, 앉아 있는 석수의 등 위 중간에 남근(男根) 같은 석주가 꽂혀 있고 도약 하려는 듯한 석수의 모습에는 당당한 위용이 엿보인다. 석수나 남근은 모두 화강석으로 되어 있고, 높이 1.65m, 너비 1.65m이다.
참고문헌 : 『한국사찰전서(韓國寺刹全書) 상(上)』(권상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귀신사 [歸信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연蓮 -
- 아름다운 만살빗살무늬 창호 -
- 석탑으로 오르는 계단 -
- 어느 곳에서든지 주인이 되라 -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면 그가 서있는 곳이 모두 참되다"는 뜻의 불교용어. 임제 의현(臨濟義玄)의 설법으로 《임제록》에 나온다. 서 있는 곳 모두가 바로 진여라는 뜻으로 주체적인 삶을 강조한 말이다. 《임제록》에서는 “불법은 인위적인 조작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평상시 있는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옛사람도 말하기를 ‘밖을 향하여 공부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들의 짓이다. 그것은 언젠가는 흩어지고 떠나게 된다. 오직 자신의 마음에서부터 진실의 눈이 깨어나야 한다.’고 하였다. 어느 장소에서든지 주체적일 수 있다면(隨處作主), 그 서는 곳은 모두 참된 곳이다(立處皆眞).
전부터 있어온 나쁜 행동이나 지옥에 떨어질 큰죄가 있더라도 삶은 자연히 해탈의 큰바다로 변한다. 수행자들이 진리의 자유로운 본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마치 코에 닿는 모든 것을 입에 물어넣는 염소의 행동과도 같다. 종과 주인, 손님과 객도 구별할 줄 모르는 것이다. 이러한 염소떼들이 불문에 들어와 온갖 이해득실과 웅성거림이 뒤섞이는 곳으로 발길을 향하고 만다. 이것은 진실한 출가인이라 할 수 없고, 이런 자들은 누구보다도 천하고 속된 사람이다.”라고 하여 수행하는 자의 확고한 주체성을 강조하였다.
참조항목: 임제록, 의현
[네이버 지식백과] 입처개진 [立處皆眞] (두산백과)
- 모악산을 향하고 있는 석수(石獸) -
- 백제시대의 양식을 보여주는 석탑 -
- 시원한 바람과 함께하고 있는 곳 -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연꽃 만나고 온 바람처럼'
모악산의 신흥종교들을 일별한 뒤에 찾아간 곳은 금산면 청도리에 있는 귀신사歸信寺였다. 의상대사와 최치원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라 하니 당시에는 대찰이었음이 분명한데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었다 한다. 저번에 일본에 건너가 굵직굵직한 문화재들을 보면서 느꼈던 생각은, 병화가 끊이지 않았던 조선에 비해 섬나라인 그들은 지금껏 많은 문화재를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었으니 마치 선진국인양 크게 뻐기고 있지만, 생각해 보면 그 문화의 많은 부분이 한반도를 통해서 흘러들어 갔고, 반도인이 일본에 도래해서 문화를 형성시켰으니 그들은 그렇게 민족우월적인 국수주장을 되풀이해서는 결코 안된다.
한반도의 가는 곳곳마다 왜구 무리들이 불사르지 않은 곳이 없을 지경이니, 그들의 만행은 가히 최상급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도 요즘 일본의 일부 정신나간 국수주의자들은 독도 문제나 정신대 문제 등등으로 또다시 우리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게 해 주고 있으니 우리는 정말 자각을 해야만 한다.
그뿐인가.
한국동란은 또 어떻고?
서양세력은 공산당을 섬멸한다는 명분으로 또한 이 땅의 모든 당우들을 폭격이나 방화로 불태워 버렸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왜구와 오랑캐, 양이들에게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강국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분단은 그들의 이권다툼으로 생겨난 것이지 우리가 원했던 것이 결코 아니지 않는가.
그러므로 스스로 지키지 않는 한 이런 수모는 세세생생 계속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지금 세계수출경제 8위권의 국부國富를 이용하여 자주국의 지위를 재빨리 획득해야만 한다.
그러나 주체성이 결코 없는 이 나라의 사부私富들은 오직 자신들의 영달만을 위해서 주체확립을 외면하고 있으니 이를 반드시 경계해야만 한다.
반드시, 반드시...... 새겨들어야 할 사안 아니겠는가.
믿음이 다시 돌아 온다는 귀신사歸信寺에서,
보물로 지정된 아름다운 한옥의 법당에 들어가 비로자나불에게 빌어 본다.
이 땅에도 자주국의 지위가 빨리 되돌아 오게 해 달라고......
통일신라, 발해, 고려, 조선으로 이어졌던 그 자주권이 다시 돌아오게 해 달라고......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면 그가 서있는 곳이 모두 참되다"는 뜻의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을 되새기자.
그렇게 비는 마음 속에 자신의 평온! 또한 다시 돌아오게 해달라는 염원도 함께하고 있었다.
모태母胎에 들기 전, 우주의 자주의지(Free Will)였던 우리는 정말 얼마나 자유로웠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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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악성지 순례 5 - 한국종교의 모태신앙지인 엄마뫼 모악산
장 소 :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 모악산 정상은 중계소가 산재해 있는 모습이다 -
모악산 주변의 유명한 성지를 순례하고서 찾아든 곳은 완주군의 전북도립미술관이었다. 그곳 주차장에 차를 파킹하고서 모악산을 올라 정상의 남릉에서 하룻밤 야영하고 서진하여 금산사로 내려섰다가, 다시 이곳에 들러 차를 회수하려고 마음 먹었다. 전주에서 가까워 그런지 평일인데도 꽤나 많은 인파들이 몰려 들어 한여름의 피서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망중한의 대열에 끼어들기는 했으나 마음만은 무지 바빴다. 오전의 순례로 인해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금 생각해 보니 그렇게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모악산 남봉에서 하룻밤 텐트를 치고 숙영할 계획이기 때문에 시간이 촉박할 이유가 하등 없었다. 그러나 심적으로 오후에 산에 든다는 사실 때문에 그렇게 서둘렀던 모양이다.
- 숙명같은 짐덩어리 박배낭을 한번 담아 보고 -
- 시인 고은의 모악산 시비 -
모악산
내고장 모악산은 산이 아니외다
어머니외다
저혼자 떨쳐 높지 않고
험하지 않은
먼데 사람들마저
어서 오라 어서 오라
내자식으로 품에 안은 어머니외다
여기 고스락 정상에 올라
거룩한 숨 내쉬며
저 아래 바람진 골마다
온갖 풀과 나무 어린 짐승들 한핏줄이외다
세세생생
함께 살아가는 사람과도 한핏줄이외다
이다지도 이다지도
내고장 모악산은 천년의 사람이외다
오 저 마음 여기 두어
- 고은 시
- 선녀폭포에서 잠시 숨을 내린다 -
- 박배낭을 많이 슬림화했는데, 여전히 무겁다 -
- 대원사 코스를 버리고서 가파른 능선을 치고 올라 어느덧 정상에 이르렀다 -
- 정상으로 찾아드는 구름무리들 -
모악산[母岳山]
『금산사지(金山寺誌)』를 보면 ‘엄뫼’라는 말이나 ‘큰뫼’라는 말은 아주 높은 산을 의미하는데, 한자가 들어오면서 ‘엄뫼’는 어머니산이라는 뜻으로 의역해서 ‘모악’이라 했고, ‘큰뫼’는 ‘큼’을 음역하고 ‘뫼’는 의역해서 ‘금산(金山)’이라고 적었다고 되어 있다. 구전에 의하면 모악산 꼭대기에서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닮은 큰 바위가 있어 모악산이라 했다고 한다.
모악산에는 산금(山金)이 있고, 주변의 금산면·금구면을 흐르는 원평천(院坪川)·두월천(斗月川)의 하상(河床)에는 사금(砂金)이 있다. 주능선은 북동∼남서 방향이나 지능선이 동과 서로 뻗어 있다. 동쪽 사면은 만경강의 집수역(集水域)으로 계곡의 물은 구이면의 전주저수지에 흘러들어 전주 서쪽을 흐르는 삼천(三川)이 된다. 서쪽 사면은 만경강과 동진강 사이의 원평천 집수역이 된다. 서쪽 사면에서 발원하는 북쪽 금구면의 두월천과 남쪽 원평천은 330년(비류왕 27)에 축조된 벽골제(碧骨堤)의 수원이 되었다.
모악산은 우리나라 남부의 대륙성 기후의 특징을 보이며, 맑은 날이 많고 북서계절풍의 영향을 받기도 한다. 식물분포학상으로 온대형에 속한다. 식생은 대체로 고도가 높은 곳에서는 신갈나무가 우점하고 정상부에 아교목층의 철쭉꽃이 군락을 이루며 저지재는 소나무가, 계곡에는 층층나무와 느티나무 군락이 분포한다.
이 산은 저평한 호남평야에 우뚝 솟은 산이어서 예로부터 미륵신앙의 본거지가 되었다. 산의 이름도 ‘엄뫼’에서 유래되었으며 이를 한자로 표기하여 모악이 되었다. 서쪽 사면에 있는 금산사(金山寺)는 599년(법왕 1)에 창건된 것으로 신라 불교의 5교9산(五敎九山)의 하나이며, 여러 보물을 소장하고 있다. 금산사미륵전(국보 제62호로 지정)은 겉보기에는 3층이나 실제로 통층(通層)으로 되어 있으며, 그 안의 미륵불상은 높이가 11.82m나 된다. 절 안에는 금산사노주(보물 제22호)·금산사석련대(石蓮臺, 보물 제23호)·금산사혜덕왕사진응탑비(보물 제24호)·금산사오층석탑(보물 제25호)·금산사방등계단(보물 제26호)·금산사육각다층석탑(보물 제27호)·금산사당간지주(보물 제28호)·금산사심원암북강삼층석탑(보물 제29호)·금산사대장전(大藏殿, 보물 제827호)·금산사석등(보물 제828호) 등의 귀중한 문화재가 있다.
그러나 보물 제476호였던 대적광전(大寂光殿)은 28칸의 웅장한 목조건물이었는데, 1986년 12월 화재로 소실되었고, 그 안에 있던 비로자나불과 아미타불 불상도 소진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처영(處英)이 금산사에서 승병 1,000인을 일으켜 왜병을 무찔렀던 장거(壯擧)도 있었다. 또한 옛 기록에는 모악산에 무려 80여 개소의 암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심원암(深源庵)·청련암(靑蓮庵)·용천암(龍天庵)·부도전(浮屠殿)·대원사(大院寺)·귀신사(歸信寺) 등이 있고 미륵신앙의 기도처가 곳곳에 있다. 귀신사는 서쪽 사면의 금산면 청도리에 있는 것으로 676년(문무왕 16)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고 하며, 이 절에는 대적광전(보물 제826호)·석탑(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2호)·부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3호) 등의 문화재가 있다.
미륵신앙이나 풍수지리설 등의 영향으로 여러 신흥종교의 집회소가 있다. 특히 금산면 청도리의 백운동은 모악산이 후천세계(後天世界)의 중심지라 믿어서, 1927년 이후 신도들이 집단 이주하였고 증산교(甑山敎)의 의식인 오대치성(五大致誠)으로 결속되어 종교취락을 이루었다. 1976년 모악산도립공원 개발계획이 수립되어 숙박 시설과 토산품 가게의 집단화, 주변의 신흥 종교집단의 단속·철거 등이 이루어졌다. 봄철에는 금산사 입구의 벚꽃이 유명하다.
참고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한국의 산지(山誌)』(건설교통부 국토지리정보원, 2007)
『한국관광자원총람(韓國觀光資源總覽)』(한국관광공사, 1985)
『산(山)』(조선일보사, 1983. 2)
「전북 모악산의 식생」(김병삼, 원광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8)
「신흥종교취락(新興宗敎聚落)의 발생(發生)과 변천(變遷)에 관(關)한 연구(硏究)」(김상식 외, 『지리학보고』3, 1984)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모악산 [母岳山]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멀리서 바라본 남봉전망대는 수직절벽위에 있다 -
- 정상 부근의 남봉전망대가 오늘의 숙영지다 -
- 서둘러 숙영준비를 한다 -
- 젊은 등산객 두 분이 석양을 관조하러 잠시 들렀다 -
- 모악산에 섪디 서러운 석양이 걸리고 있다 -
- 우리가 환호했던 남릉에 걸린 운해! -
- 800미터급 산에서는 보기 힘든 운해가 반겨 주었다 -
- 그리고 섪디 서러운 황혼이 걸리었다 -
- 고은 선생은 이곳에서 모두가 한핏줄이라 우시었다 -
- 그 섪디 설운 마음을 아시는지 황혼 또한 섪도록 찬란하다 -
- 운해가 어머니산을 어루 만지고 -
- 서러울 일 없다, 조국은 다시 광영으로 등장하시리라 -
- 해발 794미터의 모악산 -
- 오늘 바람은 시속 2Km 정도이니 잔잔한 정도가 되리라 -
- 스마트폰에는 나침반 기능의 어플도 있다 -
- 그리고 GPS 어플로 현 위치도 파악할 수 있으니 비상시에 참 편리하다 -
- 실내등 올빗 -
- 블랙다이아몬드 헤드랜턴 -
- 밤내 여러가지 잡념으로 기도명상에 들기가 쉽지 않았다 -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대원사 초입에서 잠깐 계곡을 버린 사이에 가파른 산길로 접어들게 되어 강증산 선생의 수도터였던 대원사와 그보다 훨씬 더 상부에 있는 수왕사를 일별할 수가 없어서 매우 아쉬웠다. 그리고 다시금 곰곰 생각해 보니 대원사의 지기가 필자를 밀어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다. 아니면 내 자유의지의 사대원소가 대원사를 밀어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강증산 선생이 오도했던 수도터 대원사는 필자의 곁에서 멀어졌다. 아무튼 이것도 인연길이라 싶으니 가파른 산길을 마다않고 떠안는다.
덕분에 가파른 직벽을 오르느라 숨이 고르지를 못하고 무거운 박배낭에 하소연할 길 없는 고통이 뒤따른다.
그러나......
이따금씩 지나가는 산짐승과 지저귀는 새소리와 하늘거리는 흰구름에 취하다 보면 어느새 고통은 신비로운 환희심으로 가득차 오르며 필자에게 새로운 힘을 안겨준다.
맞아! 이 맛에 산에 오르는게야!
그런 마음으로 오르다 보니 어느덧 정상의 중계소 앞 전망대에 이르른다.
무등산의 KBS중계소는 개방이 된데다 미니카페도 개설해 두어서 커피에다 식수 보충도 가능하였는데, 이곳은 그렇지 않은 성 싶었으나 중계소 경비분에게서 간신히 마실 물 정도는 구할 수가 있었다. 수왕사에서 식수를 조달하고 정상에 오를 요량이었는데 길이 바뀌어 식수가 절대 부족한 형편이었기 때문에 사정을 드릴 수 밖에 없었다. 그래 이제 편안한 마음으로 정상을 지나 남봉에 이르러 야영지를 물색했다. 남봉의 북쪽으로는 kT중계소가 자리하고 있는 모양인데 계속해서 라디오를 틀어대고 있어서 숙영하기가 마땅치가 않아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남봉전망대 데크에 사이트를 구축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가파른 칠십여미터의 직벽 위에 새워진 데크라 바람을 맞으면 위험해 보였는데, 다행히 스마트폰 어플로 찾아본 모악산의 날씨는 시속 2Km의 느린 바람만 통과하고 있다고 예보하고 있었으니 오늘밤 바람의 공포에서는 벗어날 수 있으리라 진단하고 텐트를 치기로 하였다.
황혼이 가까워 오면서 운해 또한 장관을 연출하기 시작하고 있었는데, 젊은 산객 두 분이 노을을 보려고 일부러 오후에 산행에 들었다며 전망대로 올라 오신다. 행색을 보아하니 프로급의 산꾼이 분명하여 수인사를 나눈 후에 식수가 부족하다는 애로점을 피력하였다. 그랬더니, 당일 등반객임에도 불구하고 충분하게 준비해 왔다며 물 2리터 정도를 아낌없이 내어 주신다. 그러니 이제 식수 문제는 모두 해결이 된 셈이다 그래 다시한번 하늘님에게 감사를 드린다. 대원사를 버릴 때부터 걱정이 안되던 식수문제는 예견한 그대로 이렇게 간단히 해결이 되어 버린 것이다.
감사한 마음으로 즉석에서 커피를 꿇여 대접하면서, 두 분의 동반산행에 대해 깊은 부러움을 표해 본다. 이 나이쯤 되면 모두다 뿔뿔히 흝어져 동반등반은 쉽지 않은 아쉬움이 있다고 필자가 의견을 토로하였더니, 젊은 산객들은 솔로등반이 더 멋있다며 필자를 추켜 세운다. 결과적으로는 서로가 추켜주는 타화타찬이 되어버린 셈이다. 그런들 어쩌랴? 모두 다 멋지지 아니한가?
밤이 깊어지면서 마음을 모두어 작정한 명상에 몰입하여 기도 또한 정성으로 드려 본다.
하늘 아래 모두가 한핏줄임을 토로하셨던 고은 선생의 서러운 모악산 시詩를 떠올리며 '은근과 끈기'를 자랑으로 내세우며 섪게 살아온 이 민족에 대해서 깊은 연민을 가져 본다. 사랑스런 우리 민족이시여. 할 수만 있으시면 떨쳐 일어나 타민족에게 밟혀 서럽다 하지 마시고, 기쁘게! 멋지게! 한번 살아 보소서!
그렇게 기도하는 내 모습이 그래도 아직은 섪디 서럽다.
평상시에는 모두 초월하였는데,
산정山頂에만 이르르면 이렇게 섪디 서러운 눈물이 마르지 않는다.
이 또한 집착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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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소 :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 하현달이 밤 내내 동무해 주었다 -
- 그리고 남봉의 전망대는 조금 위태해 보였다 -
- 그러나 조망은 너무나 좋았다 -
- 산수화의 화폭이 살아서 움직이는 이 진경에 넋을 잃는다 -
- 그렇게 모악산의 새날은 밝아오고 있었다 -
- 운해의 늪에 빠져 헤어나오지 않고 싶을 정도의 절경이었다 -
- 아! 언제 또 이곳을 찾을 수 있으랴? -
- 신흥종교의 태동지들에도 여명이 트여오고 있었다 -
- 부디 밝은 얼굴로만 나타 나소서 -
- 밝고 맑고 강한 내조국이 되게 하여 주소서! -
- 그렇게 새벽명상을 마무리한다 -
- 아침고요 속에 운해는 더디게 가시고 싶은 모양이다 -
- 운해의 점령 속에서 결국 새벽일출은 포기하고 말았다 -
- 한참을 지나 겨우 얼굴을 보여 주시던 햇님 -
- 그래도 운해의 기세는 수그러들 줄 모른다 -
- 햇님이시어, 오늘도 어김없이 저를 채찍질해 주소서 -
- 다함없는 통쾌함으로 이 강산을 껴안게 해 주소서 -
- 모악산의 새날이 밝았다 -
- 이스턴 킬로를 햇볕에 말리며 슬슬 철수 준비하는 시간이 오전 칠곱시경 -
- 플라이를 말리는 동안, 또 하염없이 조망의 바다에 빠져든다 -
- 중단에 중계소로 출근하러 올라오는 케이블카가 보인다 -
- 금산사도 여명에서 깨어 났다 -
- 남봉에서 바라본 모악산 정상 -
- 그리고 KBS건물 옥상을 정상 등정 삼아 올랐다 -
- 정상에서 바라본 어제의 숙영자리 남봉 -
- 거의 70여미터 수직 절벽 위의 데크에 텐트를 쳤다는 사실이 안 믿겨진다 -
- 하산하기 위해 내려간 북봉 -
- 북봉에서 정상을 바라 보며 -
- 박짐에 쓰레기 주머니가 캥거루의 애기보처럼 달라 붙었다 -
- 1.5키로정도 북사면을 내려가서 만난 영험하다는 금산사 심원암북강삼층석탑 -
- 오백여미터 아래에는 심원암이 있었다 -
- 법당 순례를 하기에는 학승들의 거주처로 보여 망설여 졌다 -
- 그래 간 적도 없으니 온 적도 없는 이 처럼 이별하는 거야 -
- 고사한 연리목 앞에서 템플스테이객들만 한가로워 보였다 -
- 금산사 계곡은 가뭄에 많이 목말라하는 모습이었다 -
모악산 남봉에서의 맑은 숙영을 끝내고 서둘러 철영을 준비한다. 혹시라도 이른 아침에 올라오는 산객들을 위해서 이곳을 비워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전망대 시설은 야영하는 이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수많은 산객들의 쉼터이기 때문에 예의상 이른 새벽에 비워두는 것이 비박꾼의 도리인 것이다.
아쉽게도 아쉽게도 구름잔치가 너무나 진해서 마음먹고 일출 작품사진을 건지려했던 의도는 포기하기로 한다. 대신 어제의 찬란한 석양을 보게해 주심에 위로를 삼는다. 또한 새벽의 운해도 너무나 좋지 않았는가 말이다. 매사에 이런 아름다운 자연을 조건없이 향유하라 하시는 하늘님에게 감사를 올린다. 지구별은 너무나 아름다운 까닭이다. 필자가 요즘 마음먹고 산정에서 야영하는 이유는 서서히 망가져가고 있는 무릅을 느끼기 때문이다. 더 이상 오를 수 없을 때 후회하기 보다는 기력이 남아 있을 때 이 조국의 산하를 마음껏 껴안아 보리라 작정했던 것이다.
그리고......
소년시절에 누비며 바라보던 산정의 느낌과......
이순에 이르러 바라보는 자연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차이를 다시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다.
피가 뜨거웠던 시절에는 산 정상만 시야에 들어왔는데, 지금은 눈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귀로는 자연의 온갖 살아있는 아름다운 소리를 들으며, 코로는 숲이 내어주는 맑고 청량한 향기에 취하는 여유의 시각을 겸비하게 되었으니......
이만하면 잘 사는 인생이지 싶다.
온전한 신체를 주시고, 자연을 껴안는 깨달음의 축복을 안겨주신 하늘님에게 다만 감사를 드린다.
모악산 정상을 다시금 올라 전북의 웅혼한 경계를 다시한번 살펴보고, 북봉을 지나 오층석탑을 지나 심원암으로 하산하였다. 심원암 삼거리를 지나며 점점 강해지는 미륵세상의 징표들을 느끼면서 왜 이곳에서 미래세의 미륵신앙을 힘으로 키워왔는지에 대해서 살펴 보았다.
김제평야의 부농들이 아낌없이 내어주는 시주미는 이곳 금산사를 살찌우게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부농들이 가졌던 아름다운 포만의 기원은, 세세생생 영원할 수 있도록 김제평야가 자신들을 살찌워 주기만을 기원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왜구의 기세가 욱일승천하여 그 살찐 평야를 삼키려하니 어찌 위기의식을 아니 느끼게 되었을까. 분연히 일어나 죽창으로 맞섰지만 그 동학란마저도 패망을 하게되었으니, 미륵불의 도래를 꿈꾸며 미륵세상을 펼치려 나왔던 신흥종교들에 어찌 아니 열광할 수 있으랴.
그것은 김제평야가 갖는 질곡의 아픔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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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악성지 순례 7 - 미륵신앙의 총본산 금산사
장 소 :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39
- 금산사 천왕문 -
- 금산사도 옛 모습은 거의 사라지고 있는 중이다 -
-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모신 대적광전 -
- 안테나가 보이는 곳이 바로 모악산 정상 -
- 대적광전 우측 상단이 적멸보궁의 오층석탑 -
금산사[金山寺]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개설]
금산사(金山寺)는 전라북도의 최대 사찰로 여러 가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으며 그 창건에 관해서도 많은 설화가 전해지고 있지만 『금산사지』를 근거로 백제 법왕 때 창건한 사찰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오랜 세월을 지내온 동안 수많은 고승을 배출하면서 불교계의 지도적 역할을 담당해 온 유서 깊은 사찰이다.
[건립경위 및 변천]
금산사는 진표율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데, 그것은 진표율사가 신라 오교(五敎) 가운데 하나인 법상종의 근본 도량으로 이룩해 놓았고 미륵전 등 수많은 불전을 세운 승려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1884년(고종 21) 나기익(羅基翊)이 편찬한 『김제읍지』 등에는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창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진표 이전부터 금산사가 존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1943년 김영수(金暎遂)가 펴낸 『금산사지』에 의하면 599년(법왕 1) 왕실의 자복사(資福寺)로 개대(開垈)되었다고 초창 연대를 밝히고 있다. 또 “초창 당시의 사양(寺樣)은 소규모로 대가람의 면모를 형성하지 못하였다가 762년(경덕왕 21) 진표율사가 개창에 착수하여 766년(혜공왕 2) 대사찰로서 면모를 갖추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상의 설명을 종합하면 금산사는 진표율사 이전에 초창되었으며 진표율사에 의해서 그 면모가 일신되었고, 견훤의 후백제 왕실과 밀착되어 크게 번창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중창은 혜덕왕사가 여러 건물을 신축함과 동시에 이전의 당우를 크게 중수하였고, 선조 때 정유재란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자 1601년(선조 34)부터 1635년(인조 13)까지 약 35년에 걸쳐 수문대사 등이 재건하였다. 그리고 고종 연간에 용명화상이 미륵전 등 다수의 건물을 중수하였고, 1934년 황성열 주지가 주요 건물에 대한 보수를 했다. 이처럼 여러 차례 중수와 신축을 거듭하여 왔지만 지금의 금산사는 선조 이전의 모습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이는 정유재란 이전 금산사의 규모를 말해 주는 1635년 편찬된 『금산사사적』을 통하여 알 수 있는데, 이 글에 의하면 금산사 경내는 크게 대사구·봉천원구·광교원구 등 3개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총 80여 채가 넘는 건물이 있었다. 그리고 산내 암자만도 40여 개가 넘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유재란 후 경내의 건물 가운데 수문대사에 의해 재건된 건물은 3구역 중 대사구의 일부만 건립되었으며 나머지는 지금까지 복구되지 못하고 있다.
금산사가 웅장한 사찰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진표율사의 힘이 컸다. 그런 이유로 진표율사를 금산사의 개산조(開山祖)라 부른다. 진표율사는 12세 때 금산사의 순제법사에게 입문하여 수도하던 중 스승으로부터 미륵(彌勒)과 지장(地藏) 두 성인 앞에 나아가 참회하며 계법을 구하라는 명을 받았다. 27세가 되던 해 보안현(保安縣)의 변산(邊山) 불사의방(不思議房)에 들어가 신명을 바쳐 수도에 정진하면서 계법을 구하였다.
이에 감동한 지장과 미륵 두 보살은 진표에게 각각 계본(戒本)과 목간자(木簡子)를 내려 주었다. 두 보살로부터 교법을 전해 받은 진표율사는 산을 내려와 금산사를 중창하고 미륵장륙상(彌勒丈六像)을 주상하여 미륵전 내에 주존(主尊)으로 봉안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머물러 중생을 교화하면서 하나의 교단을 형성해 나갔다. 이 종파를 법상종(法相宗)이라고 하는데 유가종·유식종·자은종으로도 부른다.
진표율사 이후 금산사의 대표적인 승려 중 첫째로는 고려 문종 때의 혜덕왕사[1038~1095]이다. 혜덕의 속성은 이(李)씨이고, 이름은 소현(韶顯)이다. 11세 때 입산하여 해안사의 고승 해인국사의 제자가 되었다. 1061년(문종 15) 왕윤사에 실시된 오교대선(五敎大選)에 합격하여 대덕의 법계를 받았다. 그 후 1069년(문종 23)에 중대사, 1071년에 삼중대사가 되었으며 1083년에는 수좌(首座)와 승통(僧統)의 자리에 올랐다.
혜덕왕사는 여러 사찰의 주지도 역임했는데 1079년(문종 33)에는 금산사의 주지로 취임하였다. 주지로 있으면서 절 남쪽에 광교원을 창건하여 규기(窺基)가 선술(選述)한 『법화현찬(法華玄贊)』, 『유식술기(唯識述記)』 등 장소(章疏) 32부 353권을 교정 개간(開刊)하였다. 1095년(숙종 즉위년) 금산사의 봉천원에서 귀적하니 왕이 그에게 시호를 내려주었다. 혜덕왕사가 입적한 후 금산사의 주지가 된 사람은 도생승통(道生僧統)이었다. 도생승통은 문종의 여섯 번째 아들이자, 대각국사 의천(義天)의 동생이다.
금산사에서 배출된 고려시대의 고승으로는 원명대사[1262~1330]를 꼽을 수 있다. 속성은 조(趙)씨이고 이름은 해원인데, 12세에 출가하여 금산사 석광법사의 제자가 되었다. 원명대사의 승명이 널리 알려지자 원나라에서 그를 초청하여 숭은복원사의 제1세 주지로 삼았다. 1328년 충숙왕은 그를 금산사의 주지로 임명하기 위하여 원나라 황제에게 원명대사를 본국으로 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귀국하게 된 원명대사는 한동안 금산사 주지로 머물면서 당우를 중창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긴 후 다시 원나라 숭은복원사에 돌아가 그곳에서 귀적하였다.
조선시대의 고승으로는 먼저 뇌묵대사를 들 수 있다. 그는 20여 세에 금산사에 입문하였고, 후에 서산대사에게 조계(曹溪)의 선지(禪旨)를 전수받았다. 임진왜란 때는 금산사에서 승병 1,000여 명을 모집하여 거의부전(擧義赴戰)하니 조정에서 총섭(總攝)으로 임명하였다. 후에 조정에서 공로를 보상하여 국일도대선사부종수교보광현랑뇌묵(國一都大禪師扶宗樹敎葆光玄郞雷默)이라는 법호를 내려주었다.
다른 고승으로는 남악선사가 있다. 서산대사의 6세 법손으로 법명은 태우(泰宇), 호는 남악당(南岳堂)이다. 처음 지산(智山)의 용문사에서 득도하였으며 쌍봉사 쟁원선사, 월담사 운제선사, 직지사 모운대사 등에게 법을 전수받았다. 1725년(영조 1) 남악선사가 금산사에서 화엄대법회를 개강하였을 때 수업을 듣는 학생이 1,400여 명에 달할 만큼 성회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고려 충렬왕 때의 효정승통(孝禎僧統), 조선 선조 때의 소요선사, 숙종 때의 환성선사 같은 고승들이 금산사와 관련을 맺고 있다.
[현황]
금산사의 말사로 김제시의 귀신사·망해사·문수사·청룡사·학선암·흥복사, 무주군에 관음사·백련사·북고사·안국사·원통사, 완주군에 단암사·대원사·송광사·안수사·안심사·옥련암·원각사·원등사·위봉사·정수사·학림사·화암사, 진안군에 고림사·금당사·옥천암·천황사가 있다. 군산시에 불지사·상주사·은적사, 전주시에 극락암·금선암·남고사·법우사·서고사·자하원 포교당·진북사·천고사·칠성사·학소암, 남원시에 귀정사·대복사·덕음사·선국사·선원사·실상사, 익산시에 관음사·남원사·문수사·백운사·법성사·사자암·숭림사·심곡사·연국사·자명사, 장수군에 신광사·영월암·팔성사, 대전광역시에 죽림정사 등이 있다.
[관련 문화재]
금산사에는 국보 1점과 보물 10점 등 총 11점의 지정 문화재가 있다. 국보로는 제62호 금산사 미륵전(金山寺彌勒殿)이 있다. 보물로는 제22호 금산사 노주(金山寺露柱), 제23호 금산사 석련대(金山寺石蓮臺), 제24호 금산사 혜덕왕사진응탑비(金山寺慧德王師眞應塔碑), 제25호 금산사 오층석탑(金山寺五層石塔), 제26호 금산사 석종(金山寺石鐘), 제27호 금산사 육각다층석탑(金山寺六角多層石塔), 제28호 금산사 당간지주(金山寺幢竿支柱), 제29호 금산사 심원암 북강삼층석탑(金山寺深源庵北崗三層石塔), 제828호 금산사 석등(金山寺石燈), 제827호 금산사 대장전(金山寺大藏殿) 등이다.
[참고문헌]
• 『내고장 전북의 뿌리』(전라북도, 1984)
• 『문화재지』(전라북도, 1990)
• 『사찰지』(전라북도, 1990)
• 『김제군사』(김제군사편찬위원회, 1994)
• 『우리고장 역사문화의 전통』(김제문화원, 2004)
• 『문화유적분포지도』-김제시(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2007)
출처: http://gimje.grandculture.net/Contents/Index?contents_id=GC02600642
- 새롭게 치장한 방등계단의 적멸보궁 -
- 제일 먼저 적멸보궁을 참배하기로 하고 법당에 올랐다 -
- 방등계단은 왼쪽 오층석탑과 오른쪽 부처님진신사리탑으로 조성된 구조다 -
- 금산사 중심 경내 -
- 사리탑을 둘러싼 석축의 문양도 신비로웠다 -
- 덩그러니 방석 위에 어떤 헛것이 그대의 눈에는 보이나뇨? (적멸보궁에서 바라본 진신사리탑) -
- 비단 삶도 환영일진대, 더해 무슨 할 말이 있으랴? -
- 오직 날선 칼날 위에서 위태롭게 춤을 추고 있는 헛것의 살아있음이여! -
- 여기 부처들의 헛설법을 들으시라 -
- 헛되고 헛되니 해 아래서 모든 것이 헛되고, 머리 속에서 수고롭게 배회하는 너! 또한 헛되도다 -
- 잠시 멍 때리며 헛것의 환영을 사유해 본다 -
- 대저 자유의지를 부러워 하던 자, 그 누구던가 -
- 그분은 왜 실존을 헛되다 하셨을까 -
- 여기 대답이 있다 -
-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 : 모두 다 마음의 거짓 지음이 있기 때문이다 -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내는 것임을 뜻하는 불교용어.
一 : 한 일
切 : 모두 체
唯 : 오직 유
心 : 마음 심
造 : 지을 조
《화엄경(華嚴經)》의 중심 사상으로, 일체의 제법(諸法)은 그것을 인식하는 마음의 나타남이고, 존재의 본체는 오직 마음이 지어내는 것일 뿐이라는 뜻이다. 곧 일체의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에 있다는 것을 일컫는다. 실차난타(實叉難陀)가 번역한 《80화엄경》 보살설게품(菩薩設偈品)에 다음과 같은 4구의 게송이 나온다.
"만일 어떤 사람이 삼세 일체의 부처를 알고자 한다면(若人欲了知三世一切佛), 마땅히 법계의 본성을 관하라(應觀法界性).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다(一切唯心造)."
《화엄경》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게송으로, 삼세불은 과거불·현재불·미래불을 가리킨다. 이 일체유심조의 경계는 모든 것이 마음으로 통찰해 보이는 경계로, 마음을 통해 생명이 충만함을 깨닫는 경계이다. 곧 유심은 절대 진리인 참 마음[眞如]과 중생의 마음[妄心]을 포괄하는 것으로, 일심(一心)과 같은 뜻이다.
일체유심조와 관련해 자주 인용되는 것이 신라의 고승 원효(元曉)와 관련된 얘기다. 원효는 661년(문무왕 1) 의상(義湘)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라, 당항성(唐項城:南陽)에 이르러 어느 무덤 앞에서 잠을 잤다. 잠결에 목이 말라 물을 마셨는데, 날이 새어서 깨어 보니 잠결에 마신 물이 해골에 괸 물이었음을 알고, 사물 자체에는 정(淨)도 부정(不淨)도 없고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에 달렸음을 깨달아 대오(大悟)했다는 이야기이다. 원효는 그 길로 유학을 포기하고 돌아왔다.
참조항목: 연기, 일심, 화엄경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 (두산백과)
- 점심 무렵이라 팥빙수의 유혹에 넘어간다 -
- 잠시 다실 한 켠에 머무르고 -
- 땀을 많이 흘린 몸은 당분의 대량 공급으로 인하여 기력을 많이 회복하였다 -
- 그렇게 산문을 나선다 -
- 금산사지구 공인야영장 -
- 용화종찰 미륵성지 -
- 견훤석성도 일부 복원되었다 -
- 이틀간의 순례길에 많이 살찐 내면이 되었기를 바래 본다 -
- 민속신앙의 전형으로 영험하시기로 유명하다는 할머니당에 이르렀다 -
금산사 입구에 있는 할머니당과 안에 모셔진 돌미륵입상
‘예전에는 이곳이 바다였지’
마을에 사시는 분들에게 미륵당에 대해 물어보아도 잘 모르시겠다는 이야기다. 하기에 이곳이 상업지역이 되다보니 외지인들이 많이 들어와 살기 때문인가 보다. 올해 연세가 79세가 되셨다는 토착민 한 분을 만날 수 있었다.
“이 미륵당을 마을에서는 무엇이라고 부르세요?”
“그냥 돌할머니라고 불러”
“언제부터 있었는지 아세요?”
“잘 모르지 내가 어릴 적에도 있었고, 그 이전 할아버지 때도 보았다고 하니 상당히 오래 묵은 것은 알지”
“그런데 왜 할머니라고 하세요?”
“그러니까 저 할머니가 뱃사공이라는 거야. 내가 보기엔 할아버지 같은데. 뱃사공이 바다에 나가서 죽었는데, 그 넋이 저 돌이라는 거지”
“할머니가 뱃사공 노릇을 했나요?”
“나도 그것이 이상해. 남자도 아닌 여자가 뱃사공을 했다는 것이. 그래도 어른들이 그렇게 불렀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치성을 드린다고 한다.
마을에서는 그냥 흘러 온 이야기로 할머니이고, 예전에 뱃사공이었다는 것이다. 금산리 금산마을은 얼마 전까지도 땅을 파면 땅속에서 배가 썩은 나무 조각들이 발견이 되었다고 한다. 이곳이 바다였기 때문이란다.
출처: http://rja49.tistory.com/486
- 한참을 기달려 시내버스를 타고 전주로 나가, 풍남문 부근에서 다시 시내버스로 전북도립미술관 주차장으로 차를 회수하러 갔다 -
- 그들은 이곳을 순레길이라 명명하였다 -
- 금산사의 무궁화여, 말 그대로 영원무궁하시거라 -
모악산 등정길은 순례길이라는 포장 위에서 더욱 알차게 꾸려지고 있었다. 어머니산 모악산은 지리산의 노고할미와 마고할미가 그렇듯이 이곳에 미륵할미를 태동케 하였다. 그리고 미륵불의 도래를 빙자하며 많은 신흥종교들을 발전하게 하였다. 그러니 그 자양분은 오로지 모악산의 산기운 덕이라 싶다. 그렇게 강증산 선생은 모악산 대원사에서 확철대오하였으리라. 그렇게 수많은 수도자들 또한 견성하면서 모두 다 자기가 미륵불이라 자칭하니, 어느 것은 맞겠고 어느 것은 틀리겠다. 미륵불이라 자칭하던 후백제왕 견훤이 스스로 몰락했던 것처럼, 혹세무민하는 단편적인 종교는 언젠가 역사가 정화시켜 주리라 싶다. 그것이 바로 역사가 갖는 정화의 순기능인 것이다.
새롭게 그리고 방대하게 변모한 금산사를 둘러 보면서 이것이 바로 원형질의 금산사 모태였을 것이라고 짐작해 본다. 아니면 후백제부터 고려에 이르기 까지, 그리고 조선의 임진병화를 당하기 전까지의 금산사는 이보다 더 당당했으리라 미루어 짐작을 해 본다. 높은 곳에 있던 금산사 심원암북강삼층석탑 주변에 무수히 널린 분청사기와 기와 파편들을 보면서 그곳에 기도하러 오던 이들을 위한 여러채의 민간숙박시설을 그려보면서 느꼈던 사격寺格의 방대함 때문에 충분히 그러한 상상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만큼 어머니산인 모악산의 넓고 넉넉한 품세를 또한 미루어 짐작케 해 준다.
그러니 이곳에서 하룻밤 진솔한 내면을 참구해 보고, 이 땅 위의 미륵염원을 되살펴보게 해주신 어머니! 모악산에 대해서 어찌 감사의 치성을 드리지 않을 수 있으랴.
어머니산
미륵할미 찾아와
이 산에
많은 乳泉 남기셨다
목마른 이
아픈 이
참구하는 이들
모두모두 이곳에 들어
마음껏 축이시라
수자타로 분장하시고서
맑은 샘에
살찌울 자양분만
풀어 놓으신
어머니시다
그러니,
삶이 아프거든
마음마저 아프거든
모악산에 오시라
미륵의 용화수 드시러
미련없이 오시라!
- 小 鄕
- 2013년 6월 26, 27일 다녀와서, 7월 9일 완성하다 -
小鄕 權大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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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daum.net/valeri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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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 돋움체-필자 글(녹색), 궁서체-인용 글(검은 회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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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짐노페디 No.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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