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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마가복음 2장13~28절
제목 :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예수님은 소외된 죄인들과 함께 식탁의 교제를 나누십니다. 이를 비난하는 서기관들을 향해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시고,
죄인들과 함께 어울려 식사를 나누십니다.
죄인들과의 교제, 금식과 안식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하나님의 나라가 전혀 새로운 질서에 입각하여 다스려지는 나라임을 알려줍니다.
1. 세리와 죄인의 친구(13~17절)
1)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한 식탁(13~15절)
(1) 예수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그들을 가르치십니다(13절)
“[1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본문 이하는 예수님께서 다섯 번에 걸친 종교 지도자들과의 충동 사건 중 두 번째로 해당합니다.
특히 본 사건은 종교적으로 버림받은 자였던 세리 레위(마태)를 부르시는 내용입니다.
본사건의 장소는 갈리리 해변, 곧 가버나움에서 남쪽으로 약간 떨어진 해변 지역으로 추정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치는 사역이 지속적(持續的)으로 이뤄졌음을 보여 줍니다.
한편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는 장면은 4:1에서도 반복됩니다.
예수님께서 교육의 장(場)으로 바닷가 주변의 지방을 상당히 애용하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교육은 교실이나 주간 계획표에 따른 정확한 교육 시간에, 한정되기보다는 어떠한 장소, 어느 시간에도 항상 이뤄져야 하는 전인적이고 전(全) 공간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2)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부르십니다(14절)
“[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예수님의 활발하고도 능동적인 모습을 연상시켜 줍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해변 지역에서의 가르치심을 마치고 세관이 있는 큰 도로 쪽으로 그 행보를 옮기고 계셨습니다.
그 곳에서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서의 레위는 마태와 동일인물입니다(마9:9).
'레위'는 그의 본명(本名)이고,
'마태'('하나님의 선물'이란 뜻)는 그의 사도명(使徒名)입니다.
그는 갈릴리 분봉왕이던 헤롯 안디바에 의해 세리로 고용되었습니다.
한편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문자적으로 '세를 징수하는 곳에 있었다'는 뜻으로 그의 신분이 세리였음을 단정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당시 세리는 두 계층의 세무 관리로 구별되었습니다.
즉 수입세와 인두세를 걷어 들이는 관리와
교량이나 운하나 국도에서 통과세를 걷어 들이는 관리인데,
후자가 더 증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후자의 경우 세금 부과를 임의로 정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는 아마도 다메섹에서 가버나움을 거쳐 지중해 해변 쪽으로 가는 노상에 위치한 통행료를 징수하던 곳에서 일하였던 듯합니다.
실로 그는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철저한 경멸과 증오를 받는 죄인의 그룹에 속했던 자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를 따르라(아코루데이 모이) - 이 명령은 레위가 현재까지 수행하고 있던 직업을 완전히 포기하고 질적으로 새로운 직업(사람 낚는 어부)를 선택하라는 생(生)의 변화에의 요구이기도 합니다(1:16, 17).
한편 경제. 사회적으로 상당한 기득권을 가진 레위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순응하는 데는 주저할 요소가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컨대 어부는 쉽게 고기잡이로 다시 돌아갈 수 있지만(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후 몇몇 제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레위로서는 그의 직업으로 다시 복귀할 수 있는 가능성이란 거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당시 세리라는 직업은 비록 인격적, 도덕적으로는 비난을 받던 직업이지만 빨리 돈을 벌 수 있는 유망(有望)한 직종으로서, 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고 합니다(W. W. Wessel).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대한 위대한 결단을 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에의 유업과 더불어 예수님의 위대한 복음 선교의 동역자로 일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이때 마태는 일반적으로 12제자 중 가장 나중에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Lenski).
3) 예수님은 세리 레위 집에서 음식을 먹습니다(15절)
“[15]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 레위의 집에서 가졌던 식사는 레위가 예수의 한 제자가 되기 위해서 이제 집을 떠나고자 하기 때문에 그를 위해서 베풀어진 송별회였을 수도 있고, 혹은 단순히 레위가 자기 친구들에게도 예수님을 만나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키 위해 베푼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 이 공동 식사는 인습적인 장벽을 허무시고 죄인들과 교제하기 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월적인 사랑이 담긴 뜻 깊은 자리였던 것입니다.
세리-세리들은 특히 지배자로부터 세금 징수를 청부받아 이미 백성들의 고혈을 짜고 온갖 수탈(收奪)을 일삼던 자를 가리킵니다.
레위와 같은 경우 국경을 통과하는 상품들에 부과되었던 변칙적인 세금을 징수하고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로마 제국의 모든 지방은 각기 로마 정부의 비호 아래 고유한 관세 구역을 이루었습니다.
조세(tax)와는 달리 관세(customs)의 수입은 황제의 국고가 아니라, 지방 군주의 금고로, 즉 갈릴리에서는 헤롯 안디바의 금고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관세의 징수는 국가 관리가 아니라 세금 청부업자(pubicani)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이들은 일 년 동안의 일정한 세금액을 정해서 일정한 지역의 관세를 청부 맡았습니다.
그리하여 여분은 그들이 가질 수 있었고, 대신 모자라는 부분은 보충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당연히 부하들의 징세를 독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일반 백성에게 부과 될 세금액이 거의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남용하거나 문란하게 될 소지가 매우 컸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탐욕스런 세리들은 세액이 규정되어 있지 않은 점을 멋대로 이용하여 백성들의 고혈을 마구 짜내어 갔던 것입니다(Gnilka).
예수께서 자신의 핵심적인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처럼 평판이 좋지 않던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포함시킨 것과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신 것(고대 사회에서는 친분을 나타내는 표시)은 '서기관들'이 입을 다물고 있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것이었습니다(16절).
세리와 죄인들은 그의 동료 레위가 초대한 식사에 기꺼이 응했을 뿐 아니라 레위의 앞선 바대로 그들도 예수의 가르침과 친화력에 쉽게 동조되었습니다.
실로 그들은 가난한 마음으로써 영혼의 의사요, 친구요, 진리 되신 예수를 쉽게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2) 바리새인의 도전과 예수님의 대답(16~17절)
(1)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문제를 삽는다(16절)
“[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좀 더 구체적으로 해석하면 '바리새파에 속하는 서기관들'이 됩니다.
이 바리새파 사람들은 평민 계층의 종교 집단으로서, 율법과 유전에 있어서 철저한 보수주의자(保守主義者)들이며, 특히 그들은 의식법에 강조점을 두었습니다(Donald W. Burdick).
따라서 그들은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려 들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는 극히 배타적이었고 정죄하기 일쑤였습니다(요 7:49).
'바리새인들 이란 율법을 정확하게 해석하여 종교적 항목들을 준수함에 있어 자신의 나라의 다른 사람들에 비해 탁월하다는 평판을 듣고 있는 한 무리들의 유대인들'이라고 했습니다(Jos., Wars I. 110V. 2).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사역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와 예수님의 메시아적 권위에 대해서 눈먼 자들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오히려 그들의 외식을 정죄하셨습니다.
(2) 예수님께서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대답하십니다(17절)
“[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 이는 당시 팔레스틴 지역에서 유행하던 격언으로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성육신(Incarnation) 목적을 이 격언을 통해 단정적으로 선언하셨습니다.
한편 여기 '건강한 자'란 타인에게 그 어떤 종교적 도움도 필요치 않다고 느끼는 일종의 종교적 교만 자를 빗댄 말입니다.
특히 치료 자되신 예수님의 치유 은혜를(출15:26) 거부하는 자, 그는 자칭 건강한 자인 것입니다.
실로 예수님께서는 자기 의(義)를 추구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타인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특히 영혼의 의사되신 예수(말 4:2)의 치유사역에 자신의 온 인격을 내놓을 수 있는 병든 자, 곧 '죄인들'을 부르러 오신 것입니다.
진정 예수님의 부르심은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분의 초청은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부르심이요(요 5:24),
절망에서 소망에로의 부르심이며,
죄인에서 의인에로의 부르심입니다(사 1:18).
그런데 이 일에 가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병자 의식(病者意識),
곧 자신이 결함이 있는 자로서 반드시 치료 받아야만 할 존재라는 자기 존재의 정확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눅 18:13).
실로 예수님의 이 말씀은 복음의 본질을 나타 낸 것이라 해도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구하신다는 교리는 기독교에서 새로이 형성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유대인도 이것을 부인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그들이 생각하던 것보다 새로운 것이 있다면,
"하나님은 자신의 죄인 됨을 진솔히 고백하는 자를 기쁘게 받으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이 죄인임에도 사랑하시고 구원 하신다"는 주장입니다.
이는 어느 시대에 있어서도 참된 기독교의 진정하고 영광된 교리입니다.
2. 금식 논쟁(18~22절)
1) 금식에 대한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18~20절)
(1)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느냐 묻습니다(18절)
“[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먼저 본 금식 논쟁이 발생하게 된 동기를 살펴보면 앞 절에 베풀어진 세리 레위의 잔치가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지켜오던, 금식 일에 베풀어짐으로써 일어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여기 언급된 '요한의 제자들'은 율법의 준수와 전통의 고수라는 점에서 바래시인들과 그 정신을 같이 한 것을 보게 됩니다.
즉 그들은 유대 전통에 따라 일주일에 두 번씩(둘째 날과 다섯째 날)
금식을 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이때 세례 요한은 헤롯의 궁이 있던 '마케루스'(Machaerus)에서 감금 생활을 하는 상태였습니다.
그의 제자들이 선생의 부재중에도 금식을 계속 실천해 온 것은 결국 세례 요한의 평소 가르침의 결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세례 요한의 금식은 그야말로 참 경건과 금욕과 절제 생활에 근거한 것이지만 바리새인들은 오직 형식주의적인 입장에서 금식을 한 것입니다.
한편 구약성경에 보면 속죄일에만 금식하는 규정이 나타납니다.
(레 16:29, 31;23:27-32;민 29:7).
*레16:29,31 "[29]너희는 영원히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 일곱째 달 곧 그 달 십일에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되 본토인이든지 너희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이든지 그리하라[31]이는 너희에게 안식일 중의 안식일인즉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할지니 영원히 지킬 규례라"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 생활이 끝난 뒤에 부림절(Purim), 예루살렘 함락일 같은 날 등 매년 네 번의 금식을 지키는 전통(傳統)을 세웠음을 볼 수 있습니다(슥 7:5;8:19).
*슥8:19“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넷째 달의 금식과 다섯째 달의 금식과 일곱째 달의 금식과 열째 달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들이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리와 화평을 사랑할지니라”
그런데 신약시대에 와서 엄격한 바래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월요일과 목요일:눅 18:12) 금식을 행했습니다.
*눅18: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바리세인과 세리의 비유)
본문이 전하는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에 관한 기사는 추측컨대 앞서 이야기한 자기 경건과 자기 헌신의 외적인 표시로서 행한 것인 듯합니다.
금식하는데 - 왜 이 두 무리들이 금식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저자 마가는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요한으로부터 철저한 경건(敬虔) 생활을 교육받았던 요한의 제자들의 경우는 그 당시 요한이 감옥에 있었기 때문에 금식을 했거나, 또는 메시아시대를 기다리는 의미에서(Lane) 금식했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그날이 그들이 일주일에 두 번 지키는 금식일에 해당되었기 때문에 금식했을 것입니다.
여하튼 두 경우 다 그들은 금식을 해야 참된 경건을 보여 준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어찌하여' 예수님께서 와서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통하여 참된 종교적 경건을 보여 주지 않느냐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2)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답변하십니다(19절)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본 비유의 강조점은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누릴 수 있는 기쁨에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 절제와 슬픔의 표시인 금식은(삼상 31:13;삼하12:11-23;눅 5:35),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는 부적절한 것입니다.
유대인의 혼인식은 특히 경사스런 행사였습니다.
손님들은 때로는 한주간이나 계속되는 축하연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그처럼 즐거운 잔치 중에 금식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오직 그날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 최고조에 이르는 극락(極樂)의 시간들로서 심지어 율법에서 조차 혼인식 전후에는 여러 의무에서 제외시키는 등의 배려를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신 20:7).
*신20:7 “여자와 약혼하고 그와 결혼하지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전사하면 타인이 그를 데려갈까 하노라 하고”
한편 본문의 '혼인집 손님들'이란 문자적으로 '혼인집 아들들'로서 신랑의 친구들 및 신랑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을 통칭한다 하겠습니다.
본절에서는 특히 그들을 예수님의 제자들 및 예수님과 함께 천국 잔치의 기쁨을 앞당겨 맛보고 있는 구속받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스스로 그 잔치의 주역인 신랑으로 자처하십니다(호2:19, 20).
실로 그 잔치의 주역인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그들이 기뻐하며 금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빼앗길 때에는 금식이 어울릴 것입니다.
(3) 어려움이 있을 때는 금식하라(20절)
“[20]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이 말씀의 근본 의도는 미구(未久)에 닥쳐올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처형을 암시하려는 데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고난의 잔을 마시고 제자들을 떠나가신 이후부터 제자들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며, 또 금식을 하기도 했습니다.
빼앗길 이 단어는 원형 '아파이로'에서온 것으로, 신약성경에서는 이 구절과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평행 구절에서만(마9:15;눅 5:35) 나타납니다.
그 의미는 (매우 격렬하게) '빼앗다', '제거하다'로서 어떤 고통스럽고 미어지는 듯 한 이별의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2) 새 시대를 가져오신 예수님(21~22절)
(1) 새로운 교훈과 은혜의 복음 및 생명의 진리는 바리새주의적인 옛 율법주의와는 절대로 합할 수가 없음을 비유로 말씀합니다(21절)
“[21]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예수님께서 도래하심으로써 시작된 새로운 진리, 새로운 교훈, 새로운 삶의 자세는 결코 옛 형식들 안에 국한될 수 없음을 보여 주는 비유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새로운 복음을 상징하는 '생베 조각'은 헬라어로 '라쿠스 아그나푸'라 하여 '표백 처리하지 않고, 재단하지 않은 천',
즉 새로 짠 천, 사람의 손을 거치기 전의 올을 촘촘히 한 천을 뜻합니다.
이에 비해 옛 율법주의 구조와 낡은 형식 위주의 유대주의를 상징하는 '낡은 옷'은 거의 헤어져 조그마한 자극에도 찢어져 버릴 참으로 생명력이 결여된 천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생명력이 결여된 것들에 생베 조각처럼 그 활동력과 생명력이 왕성(旺盛)한 예수님의 새로운 교훈과 복음을 붙이려고 하면 그 헤어짐이 더하게 되는 것입니다(마9:16).
*마9:16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따라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바 새로운 교훈과 은혜의 복음 및 생명의 진리는 아무리 작은 부분이라 하지만 형식적이고, 바리새주의적인 옛 율법주의와는 절대로 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Lenski).
오직 새로운 진리에는 새로운 가치관과 새로운 형식이요구될 뿐입니다.
(2)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습니다(22절)
“[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고대, 특히 유목 생활을 하던 팔레스틴에서는 물이나 포도주를 염소 가죽 부대에 보관하여 이동 중에 취식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새 가죽은 부드럽고 유연해서 비록 발효가 덜 된 포도주를 담더라도 신축성 있게 그 변화에 대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신축성을 잃고 늘어난 낡은 가죽 부대는 유연성이 없기 때문에 터뜨려지기 쉬웠습니다.
즉 포도주가 발효하면서 생긴 가스가 낡은 가죽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다 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며, 어리석은 경우입니다.
마찬가지로 옛 유대주의에 물든 사고와 생활양식에다가 무한한 생명력과 폭발적 운동력이 깃든 예수님의 복음을 결합시킨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 본문에 두 번 언급된 '새'라는 말 중
첫 번째 '새'(네오스)는 시간적으로 새로운 것을,
두 번째 '새'(카이노스)는 본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가리킵니다.
이는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포도주는 전혀 이상이 없이 탄탄하고 실한 '최상의' 가죽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우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안식일 논쟁(23~28절)
1) 바리새인들의 문제 제기(23~24절)
(1) 안식일에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잘랐습니다(23절)
“[23]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새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먼저 '밀'(스타퀴스)이란 밀 이외에 보리, 옥수수 등을 통틀어 일컫는 '곡식'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 사건은 유월절(4월에 해당)과 밀 추수를 기념하는 칠칠절(5-6월에 해당) 사이에 발생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한편 본 기사를 기록한 마가는 예수님과 그 일행의 모습을 더욱 박진감 있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본문의 '지나가실 새'(파라포류에스다이)는 마치 밀밭 가장자리에 있던 예수 일행이 밀밭 중심으로 들어가서 계속 지나가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시 - 여기서 '길을 열며'(호돈 포이에인)란
⓵ 단순히 '길을 가다'는 관용적 표현이기도 하고,
⓶ 마치 귀빈의 행차를 위해 도로를 정비하던 고대 세계의 풍습처럼 예수가 지나가시기 편리하도록 제자들이 길을 여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만약 ⓶ 의 견해를 취한다면 제자들은 먹기 위해 이삭을 자른 것이기 보다 오히려 길을 만들기 위해 이삭을 잘랐다고 하는, 마태의 보고와는(마 12:1) 다른 가능성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전체 문맥을 살펴보면 분명 제자들은 먹기 위해 이삭을 잘랐음을 알게 됩니다.
한편 예수님의 제자들이 행한 일은 율법에는 분명히 허용되고 있습니다.
"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에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가하니라"(신 23:25). 굶주린 이웃이 타인의 곡식밭에 들어가서 그 주린 배를 채운다 할지라도 관용과 긍휼의 정신으로 그것을 용납하라는 은혜로운 규정입니다.
그러나 아울러 율법은 땀 흘려 농사 지운 타인의 소유가 지나치게 침해 당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굶주림을 채우는 것 이상의 반출(搬出)이나 절취는 엄격히 금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로 보건데 하나님의 율법은 사랑과 공의가 충만한 그야말로 조화롭고 온전한 생활 규범입니다.
즉 하나님을 더불어 사는 삶을 살도록 배려하셨고 모두의 권리를 인정하고 공익을 보호하시려고 하셨습니다.
여하튼 이러한 은혜로운 규범에 따라 마침 시장했던 제자들이 타인의 밭에서 이삭을 자르는 것 자체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제자들이 이삭을 자르고 손으로 비비어 먹은(눅 6:1) 그때가 바로 안식일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유대 율법주의자들에 의하면 이는 두 가지 죄를 범한 것이 됩니다.
첫째, 이삭을 잘랐으니 이는 안식일에 추수한 결과가 되므로 죄악이 됩니다. 둘째, 자른 이삭을 손으로 비볐으니 이는 안식일에 타작한 결과가 되므로 죄악이 되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 힐델 학파와 샴마이 학파간에는 다소 의견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대교내에서는 안식일에 지켜야 할 조항을 39개로 규정해 놓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이날 보여준 이러한 행위는 의식적 율법 준수를 가장 중요시하는 바리새인들이 보기에는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2)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고 항의 합니다 (24절)
“[24]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시비에 걸려든 까닭은 곡식의 이삭을 자르는 행동 때문이 아니라, 그 행동이 안식일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로 그들은 이삭을 자르는 동작을 일종의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추수 작업이라고, 또 누가의 보고에서 보듯이(눅 6:1) 손으로 이삭을 비비는 것을 타작하는 행위로 해석하였으며, 제자들의 단순한 그 행위를 안식일의 규례를 깨는 불경건한 노동 행위라고 본 것입니다(출 20:10).
사실 율법은 안식일에 곡식 거두는 일을 공적으로 금지하고 있습니다(출 34:21).
그리고 '미쉬나'에 보면(M. Sabbath 7:2) 안식일의 금지 사항 39개 항목 중에 세 번째로 금하고 있는 것이 곡식의 수확 행위입니다.
한편 서기관들의 견해에 따르면 제자들의 불미스러운 행위에 대한 책임은 선생에게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직접 항의하였습니다.
그들은 법적으로 무엇이 허용되고 무엇이 금지되고 있는가의 할라카(Halakha)의 문제를 들고 나왔습니다.
짐작하건대 그들이 이처럼 예수님께 분한 모습을 보인 것은 안식일을 범한 사실에 대한 처벌에 앞서서 법적으로 반드시 경고해야 한다고 하는 조항을 충족시키기 위해서일 것입니다(Lane).
2) 다윗의 예로 본 안식일의 원리(25~26절)
(1) 예수님께서 다윗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고 반문합니다(25절)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예수님께서는 반대로 질문하심으로 바리새인들의 비난에 대처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질문은 그들로 하여금 긍정적인 답변을 유도하시려 한 것입니다.
그가 언급하신 사건은 삼상 21:1-6에 기록된 것입니다.
다윗이...핍절(乏絶)되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 다윗과 그 무리들은 사울왕의 살해 위협에 쫓기며 핍절하고 시장할 때에 진설병, 곧 고운 가루로 구원 성결한 상 위에 두 줄로 진설한 12덩이의 떡을 먹었었습니다.
본래 율법에는 매 안식일에 새로운 떡을 성소에 들임으로써 이전 것과 교체하였으며 교체된 떡은 제사장들이 먹도록 되어 있었다.
(출25:30;35:13;39:36;레 24:5-9;Jos., Antiq. III. 255-56. X. 7).
따라서 다윗의 행동은 엄연히 율법에 반(反)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일로 인해 구약 어느 곳에서도 정죄 받지 않았습니다.
실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는 안식 법에 위반 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아니고 하나님 시각에서는 그러한 위반도 용납되고 정당화 될 수 있는 좀 더 고차원적이고 궁극적인 법률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본문에서 강조하는 바는 '인간의 핍절과 배고픔은 종교의 의식주의보다 상위(上位)의 법에 해당 한다'(Earle)는 사실입니다.
진정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생명과 직결된 원초적인 필요가 단순한 모든 의식 규범과 형식적 종교 행위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선언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질문은 구약에 기록 된 바 다윗의 일을 읽고 그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느냐, 올바로 이해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2) 제사장이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신 예를 말합니다(26절)
“[26]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 내용은 삼상 21:1-6에 기록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곳에 기록된 내용에는 대제사장의 이름이 아비아달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아히멜렉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아비아달의 부친인 아히멜렉(아비멜렉)이 대제사장이었고 다윗이 진설병(陳設餠, 거룩한 떡)을 얻었던 것도 아히멜렉에게서 였습니다.
본문에서 마가는 아비아달을 대제사장으로 자연스럽게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듯합니다.
하나님의 전 - 직역하면 '하나님의 집'으로서 예루살렘 근처 놉에 있던 성막, 곧 회막을 가리킵니다.
진설병을 먹고 - 다윗과 그와 함께 한 자들은 사울을 피하여 놉에 갔을 때 매우 굶주려 진설병을 먹었었습니다.
진설병은 문자적으로 '그 얼굴(앞에 놓여진)의 떡'(레헴 판님)이라는 뜻으로 그 의미가 전하는 대로 하나님의 현존하시는 처소인 성소에 진설되는 떡 곧 제단의 떡을 말합니다(출 25:30;35:13).
그 이상의 이유로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자르는 것은 불법이 아니라 합법적인 일이며, 그들이 손으로 비비어 먹은 그 곡식 낟알은 그들의 배고픔을 충족시켜 생명을 보호해 주는데 참으로 필요했던 것입니다.
3) 안식일 제정의 원리(27절)
“[27]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 -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그 자체를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임을 밝히셨습니다.
안식일의 목적은 사람을 가두어 두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즉 노동으로부터의 안식과 예배드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키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그 당시로서 그렇게 과격한 표현은 아니었습니다.
예컨대 랍비 시므온 벤 메나샤(Simeon ben Menasya)도 '안식일이 너희에게 맡겨진 것이지 너희가 안식일에 구속되는 것이 아니다'고 했습니다(Melkita Shabbata I;출 31:14).
한편 이 교훈에서 크게 중요한 것은 안식일이란 부차적(副次的)인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안식일의 완전한 휴식이 사람에게 오히려 피해와 상처를 입힌다면 새로운 변화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간의 노동이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도움이 되고 생명과 구원에 크나큰 촉매제가 된다면 차라리 휴식을 포기하고 소매를 걷어붙여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안식일 휴식 규정을 어기면서까지 그들의 배고픔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이삭을 비비어 거두어들이는 일종의 작은 노동을 용인하시고 묵허하셨던 것입니다.
실로 사람이 안식일만을 위하다 멸망하는 것보다는 생명 보존과 새 생명 탄생을 위해 안식일 굴레를 벗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의 멍에는 인간을 법조문에 찌들게 하지만 예수님의 멍에는 쉽고 가벼우며, 또 궁극적으로 생명과 환희를 맛보게 합니다(마 11:30).
4)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28절)
“[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먼저 '이러므로'란 안식일 논쟁의 비약적 결론 구를 제시하기 위한 접속어라 할 수 있습니다.
실로 예수님은 당신이 가르치시는 진리에 대해 단정적이고 선언적으로 선포하심으로써 당신의 초월적인 권위를 나타내 보이십니다.
유대교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려는 노력에 인간의 전 생활 영역을 안식일 규정으로 얽매어 놓았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편협한 율법주의에 빠져들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선언하심으로써 안식일 관행은 이제 당신의 뜻과 목적에 따라 새롭게 규명(糾明)되어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특히 이 같은 선언은 예수님께서 안식일 규정을 마음대로 뜯어 고치시겠다는 자기 고집에서가 아니라 그 규정을 새롭고도 온전하게 주석하시고 설명하실 수 있는 당신의 자격과 신분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한편 본문의 '인자' 선언은 마가가 관심을 가진 바 '인자 기독론'에 조화를 이룹니다.
즉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를 통해(10절 주석 참조) 드러난바 영광스런 하늘의 인자는 지금 바로 이곳에 나타나셔서 죄 사함의 권세를 행사하실 뿐 아니라 특히 안식일 논쟁의 결론을 내리시는 권위를 가지고 계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Grant, Taylor).
묵상 pOINT
1) 죄인 레위를 부르시다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신다.
세리와 죄인들의 식탁에 참여하신다.
자신의 부름에 응답한 자들이면 누구든 제자가 된다.
자기 의를 주장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는 자가 제자다.
주님은 죄인을 부르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죄인 됨과 병든 것을 알고 고침과 용서를 받은 자기 치유자 예수님, 구원하시는 예수짐의 증인이 될 수 있다
자신이 얼마나 가망 없는 사람이었는지를 모르는 자는 은혜를 알 수 없고, 예수님에 때해 할 말이 없을 것이다.
2) 새 시대를 가져오시다.
예수님은 새 시대를 가져오셨다.
음란한 신부를 용서하여 다시 결혼의 언약을 회복하신 신랑으로 오셨다.
죄인을 환대하고 회복하러 오셨다.
그러나 이날은 기쁨의 날이요 축제의 날이다.
새 시대에 걸맞게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누려야 한다.
율법의 문자에서 떠나 율법의 정신을 따라 제유법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새로운 환경, 새로운 시간에 어울리도록 깊어진고 확장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누려야 한다.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로 복음이 춤추게 해야 한다.
3) 안식을 성취하시다.
하나님 나라는 안식일, 안식년, 희년을 성취하신 사건이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안에서 안식의 나라가 도래하였다.
다윗과 함께한 자들이 율법의 정신을 따라 제사장의 떡을 먹었듯이, 메시아 예수님 안에서 안식일의 문자적 의미 너머로 그 정신을 따라 제자들이 안식을 누릴 수 있게 하신다.
더는 옛 시대의 기준으로 정죄할 수 없다.
이미 안식의 나라가 왔기 때문이다.
알을 깨고 나와야 온전한 세상을 볼 수 있다.
율법의 틀을 깨고 그 율법이 궁극적으로 의도하고 가리키는 바에 주목하라.
거기에 자유와 사랑과 평화가 넘실거리는 안식의 나라가 있다.
말씀 가이드
예수님은 사죄와 기쁨과 안식의 시대를 열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작정하신 것 같다.
모든 걸 다르게 하시기로 말씀마다 놀랍고 기이하다.
어떤 이들에게는 불편하고 낯설다.
하시는 행동마다 감동이다.
받아주고 참아주고 용서해 주고 바꿔주신다.
하지만 역시 너무 헤프다, 설친다, 방종한다, 진지하지 못하다는 인상도 준다,
왜 그렇게 사셨는가?
죄인을 제자로.- 세리를 제자로 부르셨다.
세리가 부른 죄인들과 식탁을 같이하셨다.
하는 말은 선지자 같은데 하는 행동은 죄인들의 친구 같다.
종잡을 수 없다.
그가 영혼의 의사이기 때문이다.
의사는 아픈 사람 곁에 있어야지 건강한 사람에게는 필요 없다.
아프다고 인정하면 찾아가신다.
금식을 잔치로.- 금식도 안 하는 사람, 경견의 요건을 갖추지 못한 날라리 선지자, 무자격 선생 같이 보인다.
못해서 안 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은 금식보다 진수성찬을 차려 걸게 먹어야 할 때다.
예수는 음란한 신부를 용서하고 그와 다시 결혼하러 오셨기 때문이다.
배고픔에서 안식으로.- 제자들이 안식일에 안식일 법을 어기는데도 놔두신다.
어긴 게 아니기 때문이다.
안식일은 그러하라고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위해 정해놓았지 굶어가며 지키라고 주신 날은 아니다.
그날을 성취하러 예수님이 여기 오셨으니 그분이 허락하시면 뭐든 해도 좋다.
예수님의 행동과 행위는 왜 그렇게 파격적일까?
새 시대가 왔기 때문이다.
새 시대에 어울리도록 새 시대의 사고와 행동을 먼저 하고 계신다.
과분한 은혜, 자유와 사랑과 평화가 넘실거리는 안식의 나라를 누리게 하신다.
죄인과 친구하는 참 좋은 나라를 가져오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4,15절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로 오셨습니다.
경건한 유대인이라면 도무지 있어서는 안 될 자리, 곧 유대 사회에서 부적격자로 낙인찍힌 이들과 함께 친밀한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주님이 오신 목적은 죄인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위해 십자가를 지심으로 그들을 회복하시기 위함입니다.
지금 교회가 주님의 모습을 본받아 교제의 자리로 초대해야 할 이들도 사회에서 배제되고 소외된 죄인들, 부적격자로 취급받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우리 사회의 어떤 자들을 찾아가실 것 같습니까?
16,17절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가 심판자가 아니라 구원자로 오셨다는 의미입니다.
또 의인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구원은 자기 의를 자랑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외식적인 이들보다, 자기 죄를 슬퍼하는 세리와 죄인들에게 훨씬 가까울 것입니다.
나(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8-22절 바리새인들은 율법이 정한 속죄일 외에도 매주 두 번이나 금식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맛보고 있는 제자들은 금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곧 금식할 날이 올 것입니다.
그것은 유대교의 격식을 따르지 않는 전혀 새로운 금식이 될 것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 예수님이 가져오신 새 삶도 유대교의 낡은 틀이 아닌, 새로운 형식으로 구현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다시 새겨야 할 금식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떤 부대(형식)에 담아야 하겠습니까?
23-28절 율법을 위해 사람을 지으신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율법을 제정하셨습니다.
이런 이유로 다윗은 굶주렸을 때 율법이 금한 진설병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의 정신은 단순히 일을 그치는 데 있지 않고, 사람으로 안식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만약 과도한 노동으로 지친 자가 있다면, 노동의 중단이 안식이지만, 먹을 것이 없어 주린 자가 있다면, 그에게는 먹는 것이 안식입니다.
안식일 규정으로 사람을 굴레 씌우고 고통받는 자를 외면하는 것은 안식일의 정신을 위배하는 것입니다.
[기도]
공동체-우리 사회에서 부적격자로 취급받는 이웃의 친구로 살게 하소서.
열방-인도 정부의 일방적인 카시미르 지역 통제로 이 지역 주민들에게 생필품 유통이 차단되면서 주민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인도 정부가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생필품 유통을 허용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