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속으로
방에 숱한 사물이 있듯이 우리 안에도 각양각색의 마음이 산다. 어떤 마음은 손톱을 깎듯이 자주 잘라주어야 하고, 어떤 마음은 잊지 않도록 소중히 돌보아야 한다. 이를 악물고 끊어 내야만 하는 마음도 있다. 마음이 없는 사물들이 알려준 마음의 일이다.
-P. 9, 「들어가며」에서
우리가 함께 찍은 사진은 이제 없다. 당신을 기억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불쑥불쑥 솟아나는 그리움은 여전하다. 사진으로 남기는 것이 기억하고 싶은 순간이라면, 그리움으로 남는 것은 기억할 수 없게 된 미래였다. 과거도 될 수 없는 미래였다.
-P. 25, 「반가운 죽음」에서
지루한 일이지만, 우리 삶을 지탱하는 중요한 일들이 대부분 그렇다. 설거지하지 않으면 밥을 놓을 데가 없고, 빨래하지 않으면 입을 옷이 없다. 집안일은 며칠만 미뤄도 금방 티가 나고, 일상에 지장이 생긴다. 하루가 여느 때와 같이 흘러간다는 것, 집 안이 늘 한결같다는 것은 누군가 저 지루한 반복을 묵묵히 견디고 있다는 뜻이다. 지구를 공전하는 달처럼 말없이 곁에 머물며 보살펴주는 이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혼자인 사람은 자전하며 스스로 돌봐야 한다.
-P. 28, 「원래 그래」에서
나는 눈을 감고 그 일들을 생각했다. 싫고, 서운하고, 끔찍했던 기억 위에 싫고, 서운하고, 끔찍했다고 썼다. 아름답지만, 당신의 빈자리를 느끼고 싶지 않아서 돌아보지 않았던 기억에는 밑줄을 쳤다. 그렇게 새로 쓴 기억 앞에 간단한 인사말을 적고, 그 아래 시원시원하게 사인도 흘려 썼다. 따끈따끈한 이 추억을 당신의 우편함에 꽂고 돌아오는 상상을 했다. 이제야 오롯이 내 것이 되었지만, 당신에게 주고 돌아서는 마음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P. 41, 「내 것인 줄 알았으나 내 것이 아니었던」에서
한 권의 책을 만나는 일은 확률적으로 사람 간의 인연보다 귀하다. 이 가볍지 않은 인연을 생각하며, 비좁은 책장에 빼곡히 모여 사는 책들을 다시 본다. 대부분 상태가 양호하지만, 어떤 것들은 유난히 표지가 해지고, 손때를 많이 탔다. 그만큼 자주 들추어 보아서다. 곁에 두고 그 이야기를 듣는 데 마음을 다했기 때문이다.
-P. 57, 「우리가 어떻게 만나서」에서
아까운 시간을 그냥 버리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기란 쉽지 않다. 한없이 늘어지고, 평화롭고, 적요한 시간. 이때 침대는 나를 싣고 한가로이 시간의 강물을 떠도는 뗏목이다. 밤사이에는 잠든 내 머릿속을 날아다니는 꿈들의 활주로다. 침대는 내가 숱한 공상을 부리는 하역장이자 그리운 얼굴들이 오가는 대합실이기도 하다.
-P. 69, 「겨울 아침」에서
두 손을 모아 물을 떠서 세수할 때 그것은 손바닥 그릇이며, 당신을 향한 그리움을 품고 있는 마음도 깨지지 않는 그릇이다. 80억 명 가까이 되는 인간을 담고 있는 지구는 세상에서 가장 큰 그릇일 테다. 밥그릇에 올망졸망 담긴 밥알처럼 우리는 그렇게 한 그릇에 모여 산다.
-P. 82, 「그릇과 그릇」에서
손끝으로 툭툭 자판을 치듯이 자꾸 마음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다. 다행한 점은 손이 닿을수록 자판에 새겨진 문자는 흐릿해지고, 스프링의 탄력도 점점 약해지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내가 희미할수록 우리는 서로에게 더 잘 스며들 수 있다. 누군가의 앞에서 약해진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희미해지고 약해지는 것은 깊어지는 일과 같다.
-P. 105-106, 「희미해진다는 것」에서
사물에 닿은 손길은 거기에 흔적을 남긴다. 우리가 사물을 떠나도, 사물은 그 흔적으로써 여전히 우리를 기억한다. 그리고 흔적이 깃든 사물은 또다시 그것을 바라보는 마음에 흔적을 새긴다. 당신이 지금 여기에 없어도, 흔적들이 당신을 이곳으로 불러온다.
-P. 119, 「당신이 바꾸어놓은 세계」에서
우리는 인생의 아름다운 순간을 꽃으로 기념한다. 이는 그 순간이 활짝 핀 꽃과 같음을 알아서가 아닐까. 곧 시들어버릴 아름다움이라서 오히려 더욱 소중하다고, 그러니 지금을 만끽하라고, 넌지시 알려주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마음을 전할 때 가장 먼저 꽃을 찾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꽃이 쓸데없어서가 아닐까. 쓸모나 효용 따위가 없으므로, 그 빈자리에 내 마음을 실컷 담을 수 있으니까.
-P. 155-156, 「모쪼록 쓸모없기를」에서
집 안에 있는 우산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산은 집 밖에서 비를 만나야만 제 존재 가치를 드러낼 수 있다. 어떤 마음도 그렇다. 꼭꼭 숨기고 감추어서는 소용없는 마음이 있다. 가슴속에서 꺼내어 활짝 폈을 때, 누군가의 우중충한 마음 위에 씌워줬을 때라야 숨 쉬는 마음이 있다. 우산이 없어서 옴짝달싹 못 하는 이에게 돌려받을 생각 없이 선뜻 건네는 우산 같은 마음이 있다. 백 개의 우산도 마다하고, 오직 당신과 함께 쓰고 걸어갈 하나의 우산만 있으면 되는 마음도 있다.
-P. 173-174, 「들고 다니는 작은 집」에서
출판사 서평
『점, 선, 면 다음은 마음』은 시집 『라이터 좀 빌립시다』, 『아름다웠던 사람의 이름은 혼자』 등을 펴낸 이현호 시인의 산문집이다. 저자 특유의 섬세한 언어 감각과 삶을 관통하는 문장이 빛나는 마흔여섯 편의 산문이 실려있다.
이 책에는 “사물에 깃든 당신에 관하여”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한 편의 글마다 하나의 사물을 이야기하며, 그 사물에 얽힌 사연과 생각을 풀어놓는다. 사물에 남겨진 흔적에서 이제는 만날 수 없는 당신을 향한 그리움을 발견하기도 한다. 저자가 이야깃거리로 삼은 사물들은 여느 집에나 있는 흔하디흔한 것이어서 누구나 쉽게 그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다.
저자는 흔하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없어서는 안 될 만큼 꼭 필요하고, 또 중요하다는 뜻이라고 말한다. 이는 사물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우리가 자주 겪는 감정과 가족처럼 가까이 있는 사람도 다르지 않다. 저자는 평소 무심코 대했던 집 안 물건들을 새삼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그 속에서 우리가 잊고 지냈던 소중한 가치를 발견한다. 사물에 깃든 ‘당신’과 ‘마음’을 돌아본다.
점과 점이 모이면 선이 되고, 선과 선이 모이면 면이 된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모든 사물과 사람은 하나의 점처럼 외따로 존재하지만, 끝내 혼자는 아니다. 인연과 기억과 그리움이라는 선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 선이 모여 만드는 면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저자는 이러한 점, 선, 면이 모이고 모여서 만들어지는 입체가 바로 우리의 마음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무정물을 유정물로, 무심을 유심으로, 망각을 기억으로, 그리움을 기다림으로, 좌절을 희망으로 다시 읽는다. 그러다 보면, 그간 집 안을 오고 가며 무심히 지나쳤던 사물들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어떤 사물은 잊고 있던 기억을 다시 불러오기도 하고, 또 어떤 사물은 생각의 길잡이가 되어주기도 한다. 사물들이 어떻게 내게 왔는지, 내 생활을 어떻게 달라지게 했는지를 되돌아보는 것은 삶을 진정 삶답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되묻는 일이다.
저자의 말을 가슴에 새긴다면, 한 권의 책은 하나의 ‘점’이다. 이 책이 당신에게 닿는 인연의 끈이 ‘선’이라면, ‘면’은 당신의 손길이 펼친 페이지이자 그것을 읽으며 스스로 돌아보는 내면일 테다. 그다음은 물론 마음이다. “사물에 의지하지 않고는 생활할 수 없듯이 삶도 어떤 마음에 기대지 않고는 꾸려 나가기 힘들다.”라는 구절이 말하는, 바로 그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