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는 룸비니에 서려 있는 옛 순례자들의 상징 같은, 당나라의 현장법사의 체취를 맡아 보았지만, 사실 현장보다 무려 2백여 년 전에 이곳에 발길을 돌린 한 순례승이 있었으니 바로 진나라 때 #법현율사(法顯律師,334~420)이었다. 그는 무려 64세에 고향을 떠나 천축순례를 마치고 13년 만에 율장을 가득 품고 살아서 중국 땅으로 돌아간 매우 선구적인 인물이다.
우선 그간 남긴 불휴의 여행기 <#佛國記>의 ‘룸비니 조’를 읽어보도록 하자.
<법현 불국기> 권1
#까삘라바스뚜(Kapilavāstu:가유라위성(迦維羅衛城)
이곳으로부터 동쪽으로 1유연을 가면 가유라위성에 이른다. 성 안에는 국왕도, 백성도 없고 황폐한 언덕만이 있고 다만, 대중 승려들과 민가 10여 채 있을 뿐이다. #정반왕(淨飯王:Suddhodāna)의 옛 궁전 터에는 태자모[마야왕비;Mahā Mayā]의 형상이 만들어져 있는데, 태자가 흰 코끼리를 타고 어머니의 태내에 들어갈 때의 형상이다.
또한 태자가 동문을 나와 병든 사람을 보고 수레를 돌렸던 곳에도 탑이 세워져있다. 또한 #아이(阿夷:Asithā)선인이 태자의 상을 보던 곳, 태자가 난타(難陀)와 더불어 코끼리를 치고 활을 쏘던 곳도 있다. 이 때 그 화살이 30리 밖에 떨어진 곳에 떨어져서 샘물[箭泉]이 솟아나게 하였는데, 후세 사람들이 이를 손질하여 지나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물을 마실 수 있게 하였다.
다시 세존께서 성도 후에 이곳에 돌아와서 부왕을 만났던 곳, 5백 명의 석가족이 출가하여 #우빠리(優波離:Upali)
를 향해 예를 올리고 땅이 6종으로 진동했던 곳, 세존이 모든 천신들을 향해 설법하였을 때 사천왕이 네 문을 지켜 부왕인 정반왕도 들어올 수 없었던 곳, 세존이 #니구율수(尼拘律樹)밑에 앉아 [이모인] 마하 #프라자빳지(Maha Prajapātji:大愛道)가 세존께 승가리(僧伽梨).
를 보시하던 곳 등이 있는데, 이 나무도 지금까지 남아 있다. #비두다바(毘流離, Viḍūḍabha, 瑠璃王)이 사캬종족을 몰살 시켰지만, 석가족이 그에 앞서서 모두 수타원(須陀洹) 경지를 얻었던 곳에도 탑이 세워져 지금까지 남아있다. 성의 동쪽 근처에 왕의 밭이 있는데, 이곳에서 태자가 나무 아래에서 밭을 가는 농부를 보던 곳도 있다.
성의 동쪽 50여리에 왕의 정원이 있는데, 그 이름을 #룸비니(Rumbini:論民)이라고 한다. 부인이 연못에 들어가 목욕을 하고 나와 북쪽으로 연못가를 20여보 걷다가 손을 들어 나무를 잡고 동쪽으로 태자를 낳았다고 한다. 태자는 땅에 떨어지자 7보를 걸었으며 두 용왕이 태자를 목욕시켜준 곳이 있다. 이 욕지는 뒤에 우물을 만들었고 부인이 목욕한 곳은 지금도 대중들이 항상 그 물을 퍼 마신다.
또 석가세존이 항상 선정에 들었던 장소가 4곳이
있는데, 그 첫째는 깨달음을 얻는 곳이며, 둘째는 처음 법륜을 굴린 곳이며, 셋째는 설법하고 논쟁하고 외도를 굴복시킨 곳이며, 넷째는 어머니를 위하여 도리천에 올라가 설법을 하고 내려온 곳이다. 그밖에도 수시로 계셨던 곳이 있다. 가유라위국은 큰 흉년이 들어 백성은 흩어져 인적이 드물어 길 가기가 무서워 흰 코끼리나 사자도 함부로 다니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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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존이 성장한 곳으로 사캬(Sakyā:釋迦)족의 도읍지로 최근의 연구된 바로는, 석존 제세시에 인구가 약 1백만명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여러 부족으로 나누어 10개 성(城)으로 분분되어 평야지대에서 주로 쌀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사캬족은 싯다르타 붓다 생존 시에 인근의 강국 코살라국의 유리왕(바루다카왕)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사캬족의 도읍지인 까삘라바스뚜에 대한 위치비정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그 하나는 네팔 중남부, 룸비니 동산 서쪽 20km에 있는 띨라우라꼬트(Tilaurakot)설과 북인도의 네팔국경 근처 우피(U.P)주의 피플라와(Fiprawa)설로 나누여져 있다. 최근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후자에서 아소카석주를 비롯하여 사리용기 명문 등이 발굴되어 그 유지로 유력시되고 있다고는 하나 전자에서도 많은 고대 건축물과 주거지의 흔적 및 성벽 4면의 거대한 문, 수문실, 수레바퀴 등이 발견되었는데, 특히 중앙에는 왕궁터로 추정되는 곳이 이목을 끌고 있다.
우빠리는 본래 석가족의 이발사였는데, 석가족의 왕자들이 출가할 때 그들의 머리를 깎기 위해 함께 나섰다가 출가한 사람이다. 신분이 낮은 만큼 행동거지에 더욱 세밀하게 신경을 써 조금이라도 규율에 어긋나지 않도록 노력한 결과 부처님 열반 직후 거행된 결집에서 율을 암송하는 큰 역할을 맡았다.
승려들의 법복인 가사(袈裟)를 말한다. 산스크리트 kaṣāya의 음역으로, 가사(加沙)·가사(迦沙)·가사야(袈裟野)·가라사예(迦邏沙曳)로도 음역된다. 가사의 종류에는 승가리(僧伽梨), 울다라승(鬱多羅僧), 안타회(安陀會)의 세 가지가 있다. 승가리는 산스크리트 saṃghāṭi의 음역으로 대의(大衣), 잡쇄의(雜碎衣), 고승의(高勝衣)라고도 하며, 탁발이나 왕궁에 출입할 때 입는 정장이다. 9~25개의 천 조각을 붙여 만들기 때문에 구조의(九條衣)라고도 한다.
이른바 4대 성지를 말하는데, 현재 일반적으로는 출생지인 룸비니, 성도지인 보드가야, 초전법륜지인 사르나트, 열반지인 쿠시나가르를 꼽는 것에 반해서 법현은 출생지인 룸비니와 열반지인 쿠시나가르 대신 삼도보계의 샨카샤와 세존이 가장 오래 머무셨던, 기원정사를 꼽고 있는 점이 좀 이색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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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불국기(佛國記)』 해제문
1. 프롤로그
요새는 환갑, 진갑이 다 넘은 64세이면, 노인네 축에도 못 드는 어정쩡한 나이이다. 직장에서 쫓겨난 지는 오래지만, 그렇다고 경로당으로 가면 심부름만 할 군번이고, 그렇다고 딱히 새로이 뭘 벌이기도 그러한, 그야말로 어정쩡한 상태의 나이가, 바로 우리나라에서 이 나이 때의 애늙은이들의 현실이다.
지금도 그러한데, 천 년 전 아니 자그마치 1천 6백 년 전이라면 이야기는 방향 자체가 달라진다. 왜냐하면 이미 너무 오래 살았다하여 주위에서 이른바 ‘고려장’을 지낼 준비를 할 준비를 해두고 있을 나이였기에 ‘그런 나이’에 뭘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었기 때문이었을 테니까….
오늘의 주인공 법현(法顯,334~420)사문은 그런 나이에, 그러니까 딱 64세에 머나 먼 길을 떠났다. 그것도, 당시는 우리에게도 너무 친숙한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장(玄奘,602-664)
의 성공담으로 인해 서역으로의 구법 순례길이 승려들에게 일대 '로망'이었던 시대가 오기도 전, 무려 2백여 년 전 일이었다.
그러니까 수백 년 전의 한나라의 장건(張騫,?~BC114)
같은 여행가 정도 만 서역까지 다녀왔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만 전해오던 때였고 삼국시대 들어와서는 위(魏)의 주사행(朱士行)
이라는 사람이 서역으로 떠났지만, 그 뒤 소식이 끊기고 다만 그가 인편에 보낸 불경만이 중원에 전해져온 일이 풍문에 들리던 시절이었다.
그러니까 그 때까지 서역 말고, 정작 ‘부처님의 나라’ 라는 천축은 그 누구도 가보지 못한 완전한 미지의 백지였고 당연히 천축으로의 여행정보도 전혀 없었던 시대였다.
법현은 그럼에도 불고하고 길을 떠난 것이다. 남십자성이 빛나는 천축의 하늘아래 ‘영원한 진리의 말씀’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만을 가지고 해와 달과 별에 의지하여 수만리 길을 떠난 것이다. 그것도 칠순에 가까운 노인네가 무거운 바랑을 메고 말이다.
그 길은 누구도 가보지 못한 수만리 길이었기에, 그의 주위에서는 ”고려장 지낼 상늙은이가 망령이든 것도 아닌데,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라고 비아냥거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13년 뒤, 그와 같이 떠났던 11명의 젊은 동료들이 모두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지만, 법현은 보란 듯이 중원 땅으로 돌아왔다. 그 때 법현의 나이 77세였지만, 그의 눈빛만은 보랏빛 꿈을 성취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그런 신념으로 마치 별처럼 빛났을 것이다.
그건 한 마디로 ‘한 사건’이라고 부를만한 일대 사건이었다. 아마도 당시에 ‘기네스북’ 같은 것이 있었더라면 그렇게 기록했을 것이다. 혹시 신불(神佛)의 가피력이 있었다 치더라도 그건 확률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법현은 미지의 나라 30여 개국을 거쳐서 불경을 하나 가득 가슴에 안고서 살아 돌아온 것이다.
법현은 동진시대의 인물로, 속성은 공씨(龔氏)로, 현재의 산서성 옹단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법현은 삼형제인데, 위는 차례로 병사하였다. 이에 요절이란 화가 막내까지 미칠까 두려워한 부친에 의해 겨우 3살 때 사원에 보내져 사미가 되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총명했던 그는 성인이 되어 비구계를 받자 계율을 지키는 데 누구보다도 철저했다고 한다.
그렇게 40수년 간 수행을 계속하면서 환갑 진갑을 넘겨 64세에 들어섰지만, 가슴 한 구석에는 늘 비어있는 것 같았다. 바로 천축의 꿈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동진(東晋) 홍시원년(399년) 기해년에 혜경(慧景)사문을 비롯하여 도정, 혜응, 혜외 등과 의기투합하여 천축국에 가서 율장(律藏)
을 가져오기로 뜻을 모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처음 장안을 출발하여 도중 장예[張液]에서 지엄, 혜간, 승소, 보운, 승경의 5인, 그 위에 호탄[和闐]에서 혜달이 합세하여 모두 총 11인이 되었다.
이렇게 급조된 법현 일행의 테마여행팀은 실크로드의 본격적인 베이스 켐프였던, 둔황[敦煌]의 옥문관을 나가 흐르는 모래 강[沙河]을 건너 죽음의 대설산과 소설산을 넘어 스와트계곡에 있던 우디아나, 간다라, 탁실라, 페샤와르, 카슈미르 등을 차례로 방문하여 신비한 전설이 가득한 붓다의 본생담인 ‘자타카(Jataka)’의 고향을 두루 섭렵하고 다시 중천축으로 가서 붓다의 탄생지를 비롯한 ‘8대 성지’를 순례하고 중천축의 수도 파트나에서 3년간 경전의 필사와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리고는 갠지스하를 따라 동부의 해안도시인 땀룩에 이르러 다시 2년 동안 경전을 필사한 후 배를 타고 스리랑카에 들려서, 다시 2년간을 율장의 필사와 연구를 하다가 무역선을 얻어 타고 수마트라, 자바를 경유하여 귀국하였다.
때는 진(晉) 의희(義熙)8년(412년) 7월 14일이었다고 한다.
해양실크로드를 통한 그의 귀로는, 뒤의 마르코 폴로보다 9백년 그리고 같은 해로를 택한 8세기의 의정(義淨)이나 혜초(慧超)보다도 근 3백년 가까이 앞서는 선구적인 일대장도였다. 당초 법현과 같이 인도로 출발한 일행 11명 중에서 도중에서 얼어 죽고 병들어 죽은 이가 두 명이고 도중에 뒤돌아온 이가 여섯 명이고 인도에 눌러 앉은 이가 두 명이어서 제일 연장자인 법현 단 한 사람만 목적을 이루고 살아 돌아온 것이다.
2012년 맹춘지절에 서역만리 석류(石榴)의 꿈을 꾸며 수리재 설역서고(雪域書庫)에서 다정거사 두 손 모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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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서역여행기전집>에서 가장 비중이 무거운 주인공에 해당된다. 중국 당나라(618~907) 초기의 역경승으로 흔히 삼장법사로, 서유기의 실제 주인공으로 우리 모두에게 친근한 인물이다. ‘삼장(三藏)이란 경(經), 율(律) , 논(論)에 삼장에 두루 통달하여 붙여진 별칭으로 낙양(洛陽) 정토사에서 출가하여 당시의 한문불교경전의 내용과 계율에 대한 의문점을 원전에 의거하여 연구하려고 인도에 들어갔다. 중인도 나란다대학에서 학문적 성취를 이룬 뒤 귀국하여서는 자신이 가지고 돌아온 범어경전을 번역하는데, 평생을 바쳤다.
현장의 번역은 특히 원문의 음역(音譯, 音寫)에 충실하며 당시까지의 번역법어에 커다란 개혁을 가져왔다. 이 때문에 불교사에서는 종래의 번역을 구역(舊譯)이라 부르고, 현장 이후의 번역을 신역(新譯)이라고 부른다.
한나라 때 중국 사상 최초로 서역을 개척한 사람으로서 한 무제의 명을 받고 흉노를 협공하기 위해 대월지(大月氏)와 동맹하고자 장안을 출발하였다가 도중에 흉노에게 붙잡혔으나 탈출하여 대완(大宛),·강거(康居)를 거쳐 대월지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대월지는 흉노를 공격할 의사가 없었기에 동맹에 실패하고는 귀국하던 중 다시 흉노의 포로가 되었다가 BC 126년 빈손으로 귀국하였지만, 서역제국에 정보를 처음으로 중원에 전해준 선구자 노릇을 하였다는 평을 받고 있다. 박망후(博望侯)는 그의 시호이다.
사실 인도로 불경을 구하러 간 첫 번째 인물은 하남성 우현(禹縣) 영천(潁川) 출신인 삼국시대 위(魏)의 주사행(朱士行)으로 260년 서역의 호탄에 도착하여 범어로 된 90장(章)을 구했는데, 그러나 호탄왕의 방해로 자신은 현지에 남고 불경만 중국으로 보냈다고 한다. 그가 보낸 불경은 하남성 개봉시의 서북쪽에 있는 수남사(水南寺)에 보관되었다가 나중에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으로 번역되었다.
불경은 3부분으로 나누어 삼장(三藏)이라 하는데, 석가모니의 말씀을 기록한 경장(經藏), 계율을 정한 율장(律藏), 경을 풀이하여 해석을 부친 논장(論藏)이 있다. 여기서 율장은 출가승단이 지켜야할 온갖 규범을 세목세목 정한 것으로 초기 승단이 존속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기에, 법현은 그 필요에 의해 인도로 향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