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고향을 다녀왔습니다.
나의 고향 웅치면은 고려 때에는
장동면, 장평면과 함께 장택현이라 하였고
조선조에서는 장흥부 웅치방으로 불렸습니다.
1895년에 목(牧), 부(府), 군(郡), 현(縣)이
전면 폐지되면서 장흥군 웅치면으로 불리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개편으로
회령방과 천포방이 통합되어 새로 명칭된
회천면과 함께 보성군으로 편입되었습니다.
제가 나고 자란 곳은 숲으로 둘러 싸여
숲 속 안에 들어 있는 마을이라 하여
순 한글 이름인 “숲안”마을입니다.
옛날에는 "숲안"을 그대로 직역한
한자 이름인 "林內"라 불렀다는 기록이 1747년에
편찬된 장흥읍지 정묘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소리 나는 데로 숲안이
수반으로 불리고 한자로 水盤으로 표기하여 숲안의
원래의 뜻과는 다르게 기록된 것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현재에도 한글 이름인 "숲안"과
행정적으로 한자 이름인 큰 숲이라는 뜻의
"德林"으로 개칭되어 두 개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선영을 찾아뵙고 조상님의 음덕으로 무탈하게
살아가는 감사함을 담아 성묘를 드리고 떠나옵니다.
떠나가는 것들 중에 다시 돌아오마
기약을 남기는 것은 얼마나 될까요.
해마다 꽃이 피고 져도 봄은 또 오지만
지나간 세월 다시 돌아온 적은 없었습니다.
복숭아꽃 살구꽃 연분홍으로 피어오르던 고향마을
마음만 먹으면 찾아갈 수 있는 고향은 있어도
그곳에서 유년시절 너무도 아득하고
찾아가도 찾아가도 그리운 얼굴들은
도시로 하늘로 떠나가고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의 순수했던 마음은
얼마만큼 멀리 떠나온 걸까요.
그리운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음은 세상의 이치
바쁘게 살았던 젊은 시절에는
가야 할 넓은 세상만 보았습니다.
작고 만만하였던 고향마을
사무치게 그리운 날 올 줄은
미쳐 알지 못했습니다.
세상이 빠르게 변해오던 중에도
예전 모습 오롯이 간직한 고향집에서
찾아올 이 아들 항상 기다려주셨었는데
요양병원에서 이생의 막바지 모습 뵐 때마다
이 불효자식 가슴은 미어집니다.
그리움 달래려 찾아갔던 고향집
주인 잃은 세간살이들은 먼지만 쌓여있고
아무도 없는 빈집에도 봄이 왔다 갔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