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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생
이홍사
- 좌판에 날개가 부딪히지 않게 조심해.
도래솔 그늘에 앉아, 끊었다던 담배를 나에게 한 개비 요구하여 피던 형이, 예초기를 메고 좌판 옆의 잡초를 깎는 사촌 동생에게 또 고함을 쳤다.
-종세야! 좌판 옆에는 그냥 두라니까.
소나무 그늘에 앉아서 형은 다시 고함을 질렀지만 형의 목소리는 예초기 돌아가는 소리에 묻혀 동생에게 들렸는지 모르겠다.
작년에 교대를 졸업하고 올해 초등학교 교사로 임용 받은 사촌 동생이 난생처음예초기를 메고 풀을 치는 솜씨가 어딘가 모르게 어설프고 불안하다. 사촌은 서툰 솜씨로 섬세하게 깎겠다는 듯이 좌판 옆에 기계 날을 들이대고 있었다. 형은 못미더운 눈으로 고함을 치고는 보고만 있었다. 조마조마하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추석이 임박했다.
일요일인 내일 벌초를 하기로 예정되었고 사촌과 육촌 동생은 물론 나까지 어제까지만 해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제주도 부근으로 올라오는 16호 태풍 산바 때문에 내일은 비가 많이 올 거라는 일기예보를 접한 형이 새벽에 전화를 했다. 급하게 오늘 벌초를 해야겠다고, 새벽에 나에게 전화를 걸어 긴급 호출하고 사촌과 육촌에게도 새벽 전화를 때린 모양이다.
우리 집안에서는 종손인 형의 한마디가 바로 법이다. 최소한 산소나 제사에 관한한 형은 마흔이 안 되어 축문 쓰는 법과 지방 쓰는 일을 배워 익히고 일찌감치 제왕의 권좌에 앉아있다. 숙부님께서 살아계신다고 하나 당뇨와 그 합병증으로 숙모의 부축이 있어야만 거동할 수 있는 형편이라 형은 서른을 넘기고 선산을 상속받고 제왕의 권좌를 물려받았다.
대구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사촌동생은 토요일, 쉬겠다는 생각을 접고 새벽에 전화를 받고 바로 왔고, 제 외삼촌이 경영하는 중소기업에서 통근버스와 화물차를 운전하고 있는 육촌은 화물차에 납품할 짐을 싣고 있는 중어서 납품처에서 하차하는 대로 오겠노라고 기별을 해 왔다고 했다.
나도 새벽 전화를 받고 현장에 들러 모든 일을 반장에게 미루고, 소장님에게 일요일인 내일 근무하겠다고 양해를 구하고 집에 들러 아내를 태워 형수가 있는 큰집에 내려주고 바로 산으로 왔다. 아무리 급하게 결정되었더라도 벌초하는 날 얼굴을 내밀지 않으면 제왕에게 두고두고 몇 년 씹히는 걸 알기 때문이다.
현장을 둘러보고 오느라 내가 좀 늦게 도착한 모양이다. 도착하니 예초기 돌아가는 소리가 산 아래까지 들리고 있었다. 그 때 형으로부터 휴대폰이 왔다.
-너 어디냐?
그 물음에 늦게 온다고 힐책의 화살이 날아오는 줄 알았다. 그 화살을 피하기 위해 바로 산 아래라고 하자 형은 목소리가 낮아졌다.
-차를 돌려서 시장통 철물점에 가서 괭이를 한 자루를 좀 사오너라.
힐책이 아니라 아카시아 뿌리를 캐야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군소리 없이 차를 돌려 형 말대로 다리를 건너가서 괭이 한 자루를 사서 다시 산으로 왔다. 내가 도착하니 형과 유치원에 다니는 쌍둥이 조카 둘까지 대동한 채 여름내 웃자란 잔디와 잡풀을 치고 있었다.
오 대 종손인 형의 지휘 하에 벌초를 하고 묘사를 지낼 산소는 엄청 많다. 거기다 종조부모와 일찍 교통사고로 현장에서 함께 요절하신 당숙과 당숙모의 산소까지 종산에 모셨으니 오늘 벌초를 해야 할 산소는 손꼽아 헤어보면 정확히 열다섯 기다.
낫 한 자루 들고 소풍 오듯이 와서 산소 한 기를 벌초하고 가는 지손들이 하는 벌초와는 사뭇 다른 게, 형 지휘 하에 이루어지는 우리 집안의 벌초라는 연중행사다. 유치원에 다니는 조카까지 갈고리를 쥘 정도로 온 자손들이 모여서 해가 기웃할 때까지 해야 하는 대대적인 공사다. 점심 무렵이 되면 형수가 아직 산소가 있는 산의 지리에 익숙하지 않고, 결혼 오 년이 넘어 간신히 임신하여 배가 부른 아내를 대동하고 점심을 푸짐하게 해서 이고 들고 올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점심을 먹고 나면 형수님과 아내까지 갈고리를 쥐고 쳐놓은 잔디를 긁고 잡풀을 나를 것이다. 단 한 살, 정확하게 열한 달 차이가 나는 형이지만 형이 제왕으로서 누리는 권좌는 실로 대단하다. 명확하게 종손이 누리는 권리고 의무다. 결국 형의 지휘 하에 행해지는 벌초는 집안의 여자까지 출동해야하는 집안의 연중행사다.
나는 직접 꼴망태를 멘 적은 없지만, 소가 먹을 꼴을 배고 아무 산이나 가서 나무를 해서 군불을 때서 쇠죽을 끓이고 소가 풀을 뜯던 내 어릴 적과는 달리 산업화 사회가 되어가며 산은 점점 우거져서 일은 점점 불어나고 그 동안 고인이 되신 조상이 많으니 당연히 벌초를 해야 할 산소의 수도 불어났다.
농협에서 산소 벌초를 대행해준다는 소리를 들었다. 돈을 계좌로 입금시키고 산소의 위치만 일러주면 예초기를 잘 다루는 전문가들이 벌초를 대행해준다. 어떻게 따져보면 그게 더 싸게 먹힐 수도 있다.
재작년엔가 벌초하는 날, 산소 앞에서 점심을 먹다가 눈치 없는 육촌동생이 그렇게 하자고 제의를 했다가 제왕의 진노를 샀다.
-뭐라고? 돈으로 한다고?
하마터면 육촌 동생의 면상으로 성질이 예리한 칼날 같은 형이 쥐고 있던 숟가락이 날아갈 뻔 했다. 형의 진노한 얼굴을 보고 잽싸게 내가 중재를 섰다.
-벌초는 후손들의 정성으로 해야 돼. 아무리 바쁘지만 돈으로 해결하려고 들지 말어. 돈으로 해결해야 할 게 있고 돈으로 하지 말아야할 게 있는 법이야. 벌초와 명절 제사 때 얼굴 안보면 언제 얼굴 보냐? 벌초 안한다고 누가 잡아가는 세상이냐? 그저 후손의 도리고 정성이지.
중재를 하느라 서로 듣기 좋게 말했다.
내 말에 제왕은 분노를 삼키고 겨우 숟가락을 들었고 누구라도, 어떤 일이 있어도 벌초에 빠지면 안 된다고 형은 거듭 다짐을 받았다.
오늘 처음으로 예초기를 멘 사촌은 기계를 다루는 솜씨가 어딘가 모르게 어설퍼다. 때로는 칼날이 땅바닥에 꽂혀 돌과 흙을 튀기고 예초기가 지나간 자리가 보기에도 반듯하지 않다. 옆에 앉아서 잠시 땀을 닦으며 쉬던 내가 하겠다고 나서니 형이 만류했다.
-쟤는 당나라 군대를 갔다 왔나? 군에서 제초작업을 한 번도 안 해본 것 같네.
-나둬라. 쟤도 언젠가는 배워야 한다.
형도 보기에 위태로운지 자꾸 동생을 보고 이래라 저래라 소리를 질렀다. 나도 이미 힘이 빠졌다. 몇 기를 예초기를 메고 깎았더니 팔이 덜덜 떨리는 게 힘이 빠질 대로 빠졌다. 말만 내가 예초기를 메겠다고 했지 또 다시 예초기를 멜 자신이 없었다.
육촌 동생 종태가 도착했으니 이제는 육촌이 예초기를 멜 차례다. 그 동안 종태는 늦게 도착한 게 미안스러운지 예초기를 메지 않고 봉분이나 좌판 부근의 웃자란 잔디를 낫으로 깎거나 예초기로 쳐 놓은 풀을 갈고리로 긁어모아 적당한 장소에 버리고 있었다. 종태가 하는 걸 보고 덩달아 유치원에 다니는 쌍둥이 조카까지 긁어모은 풀을 갖다 나를 정도로 손이 부족하다. 물론 조카들은 소풍 나온 애들 마냥 신이 났다. 예초기를 처음 멘 사촌은 요령으로 하는 게 아니라 그저 물리적으로 하고 있으니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손으로 깎아도 될 좌판 가까이까지 예초기 날을 들이대고 있었다. 그런 데는 손으로 깎자고 할 하려는 순간 할아버지 산소의 좌판에 예초기 날이 부딪쳐 불꽃이 번쩍 일었다.
그러고는 사촌도 힘이 빠졌는지 시동을 끄고 메고 있던 예초기를 벗었다.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갈고리를 쥐고 있던 육촌 동생, 종태가 예초기 날을 살펴보았다.
-예초기 날 끝이 뭉텅 날아갔는데요.
종태는 우리가 앉은 쪽을 올려다보며 보고를 하고 지시를 기다리듯이 소리쳤다.
-그러면 안 된다. 잠깐만.
그렇게 동생에게 소리 지르고는 예초기 날이 있으니 날을 갈아야지, 하며 형이 담배를 끄며 일어섰다. 나도 덩달아 일어섰다. 예초기는 날이 균형이 맞아야 떨리지 않는 기계다. 한 쪽 날 끝이 조금이라도 떨어지거나 부러지면 균형이 맞지 않아 심하게 떨린다. 그러면 예초기를 다루기에 힘이 들고 깎는 풀도 깨끗하게 깎이지 않는다. 예초기를 다루는 동안 가장 조심해야 할 게 날이 돌이나 나무에 부딪쳐 부러지는 것이다. 부러진 파편이 원심력에 의해 어디로 날아갈지 모른다. 하여 보안경을 쓰고 기계를 메지 않은 사람들은 가급적이면 멀리 떨어져 다른 작업을 해야 한다. 형이 공구를 챙기는 동안 나는 할아버지 산소의 좌판을 살폈다.
예초기 날이 부딪힌 부분은 좌판의 측면 생년월일을 새겨놓은 부분이다. 생년원일 중에서 태어난 년도, 한문으로 1928년 이라고 새겨놓은 부분에 부딪쳐, 여덟팔자 중의 팔자에 조금 흠집이 생겼다. 나는 그 흠집이 난 부분을 손으로 문지르며 1928년생이라고 속으로 할아버지의 출생 년도를 되새겼다. 다행히 글씨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패이지는 않았다.
1928년생!
일제 강점기인, 그 즈음 출생년도를 지닌 세대는 특별한 세대다. 1928년생이라고 음각된 글씨에 의미를 두고 다시 한 번 손으로 그 숫자를 쓰다듬었다. 1928년생! 속으로 중얼거리며 시대를 잘못타고 난 세대라는 할아버지께서 들려주시던 말씀이 떠올라 가슴이 아렸다. 살아계셨다면 할아버지 연세가 여든 다섯이 된다.
마흔에 췌장암으로 요절한 아버지, 그러니까 당신의 아들을 앞세우고 사 년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전쟁을 두 번이나 치른 세대다. 그 세대에 태어난 사람들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할아버지는 두 번의 전쟁에 직접 참전하셨다. 말씀은 두 번이라고 하셨지만 아들인 아버지를 앞세우셨으니 그것도 가슴 속으로 치른 당신과의 전쟁의 하나라고 할 수도 있겠다.
종손인 형을 재치고, 하는 짓이 기특하다며 유독 나를 총애하시던 할아버지께선 내가 철이 들기 전에 늘 말씀하셨다. 너희는 시대를 잘 타고 났다고, 이 좋은 시대에 남보다 앞서가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하시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며 할아버지의 자신의 생애를 가끔 들려주셨다. 사실이지 그때는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 ‘잘 타고난 시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말씀을 하실 적에는 내가 너무 어려서인지 학도병으로 전쟁터에 내몰린 열일곱의 나이가 많은 것으로 생각했다. 내가 직접 군에 가기 전까지는 그랬다.
군복무를 하며 훈련이 힘 들 때마다 할아버지 말씀을 떠올리며 열일곱에 전쟁터에서 총알받이까지 하신 분도 있는데 스물이 넘어서 받는 이까짓 훈련이야 전쟁놀이에 불과하다고 스스로를 달래며 남이 힘들다는 군 생활을 가뿐하게 마셨다. 군에 있을 때야 비로소 할아버지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전쟁이 얼마나 참혹하고 힘들다는 것에 대해 상상이 가능했다. 늘 무서웠고 배가 고팠다는 그 말씀도 이해할 수가 있었고 열일곱! 전쟁터로 내몰리기엔 실로 어린 나이라는 것도 그때서야 깨달았다.
일제 강점기! 할아버지께선 넉넉지 않은 살림이었으나 청운의 꿈을 품고 동경으로 유학을 가셨다. 그게 전장으로 가는 길인 걸 몰랐다는 것이다. 현해탄을 건너간 지 넉 달 만에 의용이라는 이름으로 가장된 학도병으로 전쟁터에 강제로 끌려가셨다. 그 때 무작위로 공격하던 일본군은 베트남을 거쳐 태국 정글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을 때였다. 할아버지께서 어린 나이에 그렇게 전쟁터에 끌려가도 집에 계신 증조부님은 모르고 계셨다고 한다. 거의 일 년이 넘게 동경으로 공부하러 간 아들이 연락이 없어 수소문 끝에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되었다는 사실을 아시고 증조모께서 새벽마다 정한수 한 사발에 아들의 목숨을 걸어놓고, 공부는 뒷전이고 어느 전쟁터에 있는지 모를 어린 아들이 부디 살아서 돌아오기만을 빌고 빌었다고 했다.
1928년생. 할아버지께서 열일곱에 동경으로 건너가 넉 달 만에 학도병으로 참전하고 간단한 훈련을 받은 곳이 베트남이라고 했다. 팔십여 명이 동경에서 함께 출발했는데 일본 학생이 반이고 조선 유학생이 거의 반이었는데, 배로 거기까지 가는데 거의 한 달이 걸렸다고 했다. 이동하는 동안은 허기와 뱃멀미,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추워서 떨고 풍랑과 싸우고 전쟁이라는 접하지 않은 행위를 상상하고 공포에 떨었으며, 월남이라고 불리는 베트남 훈련장에 도착하여 훈련 중엔 더위 때문에 쓰러져서 죽은 학생들이 있었다고 했다.
거기서 늘 허기에 시달리며 한 달 동안 훈련을 받고 다시 이동한 곳이 한참 정글전이 벌어지고 있는 미얀마, 그 당시의 국명은 버어마였다. 할아버지는 그 지명을 두고 항상 ‘비르마’라고 하셨다.
비르마에서 소대단위로 편성되고 치열한 정글전에서 전쟁을 치르는데 누구를 위한 전쟁인지 시대를 잘못타고 났다는 사실을 거기서 깨우치셨다고 하셨다.
맹목적인 전쟁에서, 단지 이름도 없는 정글의 전장,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총에 맞아 죽지 않기 위해 총을 쏘고, 아무리 생각해도 끝없는 전쟁이고 조국으로 돌아가기는 힘들겠다는 생각이 압도적이었지만 단 하루라도 더 살기 위해서 주는 대로 먹었으며 병기를 다루는 전술을 익혔다는 것이다.
다행히도 그 해에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지며 전쟁이 끝났다. 정글에서 소대단위로 게릴라 전쟁을 하던 어린 학도병들은 그 사실을 몰랐다.
철수 명령도 없이 지휘관들이 어느 날 갑자기 어디론지 모두 사라지자 조선의 학도병들은 전쟁터에서 도망치는 기분으로 고향을 향해 뿔뿔이 내달았다는 것이다. 마침 조선 학도병 하나가 할아버지의 뒤를 따랐고, 돌아갈 길이 막막한 어린 학도병 둘이서 상의하며 방향만 가늠하고 발길이 닿는 대로 정글을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말도 통하지 않고 지도나 나침반도 없는 실정이라 손짓발짓을 동원해서 길을 묻고 열대 음식을 구걸해서 먹고 잠은 더운 지방에서는 그냥 초원에서 잤고 추운 지방으로 들어와서는 남의 집 헛간이나 같은데서 숨어서 잤다고 했다. 배는 고파도 공포스런 총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살 것 같았다고 했다.
어릴 적에 할아버지의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정말 실감이 나지 않았다.
-우리가 살아서 돌아온 건 먹을 게 있었거나 언어가 통해서가 아니었어. 순전히 눈치로 살아서 돌아온 것이지.
흠집이 생긴 좌판을 쓰다듬으니 할아버지가 늘 하시던 그 말씀이 귓전으로 흘러갔다. 눈치로 말을 알아듣고 민가에서는 눈치로 얻어먹고 다시 눈치로 방향을 가늠하며 아직 전쟁 중인 줄 알고 다음 동네로 숨어서 이동하고 길을 짚어보는 걷고 또 걸었던 두 학도병의 모습이 예초기 날을 갈고 있는 형의 모습과 겹쳐져 눈앞에 펼쳐졌다.
산소 앞에 서면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이 보인다. 강 건너 보이는 도시가 바로 유서 깊은 선산읍이다. 옛날에는 군청소재지였지만 지금은 시로 편입되어 지명을 빼앗기고 읍으로 전락했다. 나는 펼쳐진 들을 가로 질러 유유히 흐르는 강을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할아버지의 인생이라는 강은 지금 저 강처럼 순탄하게 흐르지 않았다.
1928년생! 말하자면 강물이 폭우와 태풍으로 소용돌이치는 시대였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태어나신 할아버지는 당신의 말마따나 ‘비르마’에서 다섯 달이 걸려 중국 본토에 들어와서야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져 전쟁이 끝난 줄을 알았다는 것이다. 조국이 해방되었다는 소식도 그 곳에서 접했고 할아버지와 동행한 그 어린 학도병은 이름 모르는 남중국 어느 땅에서 뒤늦게 만세를 불렀다고 했다.
자신들이 탈영한 것이 아니라 패잔병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살아남은 것에 대해 안도의 골 깊은 한숨을 쉬고 해방국가의 자유인으로 돌변해서 낮에도 마음대로 걸어서 남의 집에 들어가서 헌옷도 얻어 입고 일도 해주고 먹을거리를 얻어가며 귀향길에 올랐다고 하셨다. ‘비르마’에서 벗어나니 신고 있던 헝겊으로 된 전투화가 바닥이 떨어져서 버리고 그 때부터 맨발로 대륙을 걸었다는 것이다. 그해가 45년이었는데 할아버지의 지명 ‘비르마’에서 탈영하는 기분으로 나와 중국 대륙을 거쳐 두만강을 건너 조선의 고향, 선산까지 맨발로 도착하니 47년이 되었다. 전선과 돌아오는 그 이 년간의 과정을 할아버지께 들은 그대로 낱낱이 서술하자면 책 한 권이 넘을 게다.
전쟁이 종료된 미얀마의 이름 모를 정글에서 고향인 경북 선산까지 이 년간에 걸쳐 어린 학도병 둘이서 서로 의지하며 얻어먹고 눈치껏 남의 헛간이나 처마 밑에서 자며 맨발로 걸어오셨다는 말씀을 들으면서도 내 어릴 적에는 그 상황이 상상이 되지 않았다. 상상은커녕, 뭐, 재미있었겠네! 나도 그렇게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충동으로 침을 꿀꺽 삼키며 그 말씀을 들었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 나이에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있었으리라는 짐작과 말씀하시는 허기와 추위, 더위가 상상이 가능했고 그 때의 할아버지라는 누추한 몰골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진다.
할아버지는 학도병에서 돌아와 면단위의 새로 생긴 초등학교에 임시 교사로 이 년간 근무하셨다고 했다. 그때 증조부께서 정해놓은 규수, 할머니와 결혼을 하시고 50년생인 아버지를 잉태하여 할머니 배가 부를 적에 다시 국군으로 입대하셨다. 이미 45년도에 조선경비대라는 이름으로 국군이 창설되어 있었다. 할아버지는 결혼을 하시고 나서야 입대할 나이가 되신 것이다. 그렇게 어렵게 고향에 돌아왔지만 격동의 시기, 소용돌이치는 시대의 강은 할아버지를 그냥두지 않았다.
학도병으로 전쟁을 치른 경력이 인정되고 또 고등 보통학교를 마치고 유학파의 지식인으로 분류되어 군관학교에서 육 개월의 장교 교육을 거쳐 장교로 임관한 것이다. 그 해가 49년이었다. 그러니까 한국전 발발 팔 개월 전이었단다.
군관학교 훈련을 마치고 소위로 임관하여 포천에서 팔 개월 정도 근무했을 때 한국전이 터졌다. 새벽에 불시에 당한 남침이라 전세가 밀릴 수밖에 없었다. 국군의 장비와 전투태세는 열악했다. 밀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하셨다.
전쟁을 하면 가장 힘든 자리가 소대장이라는 직위다. 현 전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위의 명령을 받고 소대원을 챙기며 전투를 하다가 후퇴하고, 눈치껏 보급품을 수령 받는 심신이 피곤한 직위다. 할아버지는 대한민국 소위로서 한국전을 혹독하게 치르셨다. 그래도 학도병 때 보다는 조국을 지킨다는 명분이 있어 소대장으로서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밀리고 밀려 왜관 철교를 잘라놓고 고향부근인 낙동강변의 다부동 전투, 그러니까 한국전에 중에서 가장 격렬하게 치러지던 전투에서 한 쪽 허벅지에 총알의 관통상을 입고 부산 국군통합병원으로 이송되었다고 했다.
공교롭게 그날이 바로 당신의 아들, 그러니까 아버지께서 태어나신 날이라는 걸 몰랐다는 것이다. 그 사실은 전쟁이 끝나고 병원에서 퇴원하여 고향으로 돌아와서 아셨다고 했다. 고향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전사하신 줄 아셨다고 했다. 당시의 시스템으로는 생사를 알 길이 없었다. 할아버지 평생 절룩거리는 세월을 지고 사셨다. 총을 맞은 날은 단순 허벅지 관통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허벅지 아랫부분 무릎을 관통하는 바람에 왼쪽 무릎을 평생 쓰실 수가 없는 상이군인이 되셨고 한쪽 다리를 절룩거리는 여생을 사셨다.
할아버지께서 입원 후송되시고, 인천상륙작전이 펼쳐지고 서울수복이 지나고 51년에 관절이 말을 듣지 않는 뻣뻣한 다리를 절룩이며 고향으로 돌아와 두 살이 된 당신의 아들을 처음 보셨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다친 무릎보다 다부동 전투에서 부하 세 명을 잃은 것을 더 애통해 하시며 평생을 사셨다. 집안 대대로 지어오던 농사를 그만 두고 입대하시기 전에 근무하시던 초등학교 교사로 다시 부임을 하시어 정년을 채우고 세월의 뒤안길로 물러앉으셨다.
정년을 채우고는 전쟁이 끝난 40년이 지나고 나서 지역예비사단에서 다부동 전투의 전사자 유해 발굴 작전에서 할아버지는 절뚝이는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직접 증인으로 참석하셔서 할아버지께서 당시 전쟁 중에 손수 묻은 부하들의 유해 두 구를 기억하시고 발굴하셨다. 두 번째 전쟁이 끝난 지 40년이 지나도 할아버지의 가슴에 상흔은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한 쪽 다리를 쓰지 못하시는 할아버지께선 평생을 전쟁에 시달리며 사신 것이다.
-너희들은 시대를 잘 만났다. 조국이 이렇게 발전할 수가 있으니....... 배가 고프지 않고 전기가 이렇게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으니 공부하기가 얼마나 좋으냐?
배가 고프지 않고 전등 아래서 공부하는 게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우리 세대에게 던지기에는 난해한 감사와 다행으로 점철된 뉘앙스를 풍기는 말씀이었다. 지금 갈고리를 쥐고 장난삼아 할아버지 산소에 잔디를 긁고 있는 유치원생 쌍둥이 조카에게 이 말씀을 그대로 전해주면 왜 배가 고플까? 라면 끓여먹으면 되지. 라고 똑 같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의아해 할 것이다.
할아버지와 쌍분으로 묻힌 할머니의 생은 어떠셨을까?
보통학교 선생님이라는 작자에게 시집을 와서 일 년이 채 못 되어 남편을 나라에 빼앗겼다. 그리고 남편의 생사도 모르는 채 전쟁 중에 시부모님을 따라 지금의 경북 청도로 피난길에 올랐고 그곳 남의 집 문간방에서 아들을 낳은 것이다. 그 아들이 단명하신 아버지다.
일 년간의 피난살이 끝에 다시 시댁으로 돌아와도 남편에게는 소식조차 없었다고 들었다. 시절이 어수선하고 당시의 통신수단으로는 할아버지의 생사를 확인할 길이 없어 초조해하고 있을 때, 어느 날 해거름에 절룩거리는 할아버지가 골목으로 들어서는 걸 보고 끝내 울음을 참지 못하고 달려가 할아버지의 가슴팍을 두드리며 통곡했다는 말을 할머니에게 들었다.
어릴 적에는 그 말도 이해를 못했는데 지금 돌이키니 가슴이 뭉클한 재회의 장면이다. 얼마나 가슴을 졸이며 기다렸을까? 할머니는 할아버지보다 한 살이 많았고 일 년 늦게 돌아가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바로 형의 의견대로 모든 산소에 상석을 하고 묘지를 재정비했다.
나는 내가 태어나기 거의 삼십 년 전인 그 시절을 상상하며 고개를 돌려 낙동강을 보았다. 강은 옛날 그대로 흐르는데 사람은 옛사람이 아니고 시절도 그 시절이 아니다. 갈고리를 서로 잡겠다고 다투는 쌍둥이 조카를 보며 저 세대들이 할아버지의 전쟁담을 나중에 듣더라도 상상이 가능할까?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배가 왜 고픈데 라면 끓여 먹으면 되지? 그렇게 되물을지 모른다.
그나저나, 저 녀석들이 커면 벌초나 할 지 모르겠다. 지금도 장례문화가 급속도로 변해서 있는데, 화장을 해서 그냥 뿌리거나 수목장을 하는 판인데 쟤들이 사촌끼리 모여 조상들 산소에 벌초라니 언감생심 바라지 말아야 할 일이다. 벌초라는 연중행사는 우리 세대에서 끝일 것만 같다.
형은 작년 벌초 때 육촌과 사촌, 나를 나무 그늘로 불러놓고 얘기했다.
-산소를 이렇게 해두니 벌초하고 관리하기가 너무 힘이 든다. 숙부님께서 돌아가시면 온 산에 흩어진 모든 산소를 한곳으로 옮겨서 조그만 묘지석을 세우고, 가족 묘지를 만들자. 앞으로 관리가 문제야.
형의 말에 모두가 공감했다.
-앞으로 쟤들이 관리하려면 그렇게 해야 되겠죠.
육촌이 맞장구를 치며 쌍둥이 조카를 들먹이고 나섰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게 언제 실현될지 의문스러웠다. 숙부님 돌아가시면 하자고 했지만 그 때 가면 형의 마음이 또 어떻게 바뀔지 몰라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게 작년의 일이다.
나는 풀을 치우다가 자꾸 산 아래를 살폈다. 형수님과 아내가 점심을 가져 올 때가 되었을 설 싶은데 종무소식이다. 해는 중천에 올라와 시장기가 느껴졌다. 아내의 뱃속에 든 놈은 아들이라고 산부인과 의사가 말했다. 저 놈이 나와서 장성해서도 이 산의 벌초를 이렇게 힘들여해야한다는 건 그리 마음 편한 일이 아니다.
형의 말대로 숙부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숙모 산소를 옮기면서 모든 산에 흩어진 산소를 다시 재정비해서 가족 묘지를 만들어 관리하기 좋도록 만드는 게 자손으로서의 도리고 훗날 조상으로서 자손들의 일손을 들어주어야할 의무다.
아침에 서둘렀더니 시장기가 느껴지는데 형수님과 아내는 종무소식이다. 나는 배가 고프면 짜증이 인다. 현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점심 먹기 전에 하는 회의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자꾸 산 아래로 눈길이 갔다. 그 때 내 휴대폰이 울렸다. 현장에서 온 전화거니 짐작하고 받아보니 의외로 아내였다.
-웬 전화야? 점심 안 가져오는 건가?
-여기 산에 다 왔는데 차 앞 타이어가 펑크 났어요. 산에서 내려와서 모퉁이 하나 돌면 있어요. 내려와서 어떻게 좀 해봐요.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그런 일이라면 내가 직접 나서기보다는 차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종태를 보내는 게 낫다. 돌아보니 종태는 사촌이 벗어놓은 예초기를 막 둘러메는 참이었다.
-종태야! 잠깐만.
종태를 불러놓고 상황을 얘기했다. 그 얘기를 형이 듣고 있던 형이 종태가 가는 게 좋을 거라고 동의했다.
-스페어타이어는 있는지 모르겠네?
그 한마디만 뱉어놓고 메던 예초기를 내려놓고 빠른 걸음으로 산길을 내려갔다. 종태를 보냈으니 어떻게 하겠지. 이번에는 종태가 벗어놓은 예초기를 형이 직접 메고 시동을 걸었다. 예초기 돌아가는 소리가 골짜기를 울렸다. 종세가 서툴게 깎은 곳을 다시 형이 예초기 날을 들이대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형은 예초기를 다룰 줄 안다. 종세는 형이 예초기 다루는 모습을 꼼꼼히 지켜보고 섰다. 점심 전에 할아버지 산소를 마치려면 시간이 없다. 나는 종세를 불러 점심이 오기 전에 이 산소는 마치자고 갈고리를 쥐어주었다. 종세는 형이 쳐놓은 풀을 갈고리고 긁기 시작했다. 나는 종세가 긁어서 모아놓은 풀을 안아다가 소나무 밑으로 내다버렸다. 땀이 등골을 타고 흐른다. 이마에서 흐르는 땀이 눈으로 들어가 손등으로 눈을 훔치며 보니 종태가 빠른 걸음으로 저 멀리 산모퉁이를 돌아가고 있다. 아무리 빨라도, 점심이 오려면 삼십 분은 족히 걸리겠다. 그 동안 할아버지 산소 벌초는 깨끗이 마쳐야 한다는 생각에 종세가 긁어서 좌판 옆에 모아놓은 풀을 한 아름 안다가 좀 전에 예초기 날에 부딪힌 1928년으로 음각된 글씨를 보았다. 조금 흠집이 나있다.
1928년생! 이라고 웅얼거리며 풀을 안고 일어나다가 멀리 강을 보았다. 어라! 저게 뭐야? 그 강 위에 한 소년이 걸어가는 모습이 실루엣으로 보였다. 가만히 보니 소년은 낡은 전투복에 다 떨어진 헝겊 전투화를 신고 힘겹게 걷고 있었다. 지친 듯이 힘겹게 걷는 열일곱 정도의 소년! 가만히 보니 그곳은 강이 아니라 어느 정글이었다. 야자수 잎이 사이로 강열한 햇빛이 소년을 태울 듯이 쏘아대고 있다. 지친 소년은 사방을 둘러보더니 야자수 그늘로 몸을 숨긴다. 그리고 손가락 두 개를 입에 넣어 휘파람으로 어디론가 신호를 보낸다. 그 휘파람 소리가 내 귀에까지 삑 들렸다. 그 소리가 밀림을 울리자 또 한 소년이 나타난다. 앞의 소년과 또래로 보이지만 키가 좀 더 큰 소년이다. 역시 낡은 군복에 지친 모습이다. 그 소년은 그렇게 신호를 받고 앞에 간 소년이 앉은자리까지 와서 그 야자수 그늘에 같이 앉지 않고 지나쳐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첨병이 되어 밀림을 빠져나가는 것이다. 교대로 첨병이 되는 두 소년은 한눈에 보아도 학도병들이다. 야자수 그늘에 앉은 소년은 사랑을 두리번거리더니 키가 작은 열대 식물에서 붉은 열매를 발견하고 그것을 따서 허겁지겁 먹기 시작한다. 심한 갈증과 허기를 느끼는 모양이다.
-야! 넌 뭐하고 섰냐?
풀을 한 아름 안고 서서 강을 보는 나에게 형이 던진 말이다. 잠시 착시현상에 빠져 이상한 광경을 보던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현실을 직시한다. 어느 틈인지 형이 메고 있던 예초기는 시동이 꺼져 있었고 형의 목덜미에서 흐르는 땀이 티셔츠를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형! 할아버지께서 열일곱에 미얀마 정글에서 어떻게 살아서 돌아오셨을까?
-너 지금 그 생각하고 있었냐?
-응.
-나도 봉분을 깎으며 그런 생각을 했었다. 할아버지께서 그 곳에서 살아남지 못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
-할아버지 살아생전 말씀에 의하면 눈치 하나로 살아오셨다고 했어.
-나도 그 말씀은 몇 번이고 들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열일곱 나이가 참 어린 것 같지?
-지금 애들이야 철이 있냐? 가난은 아이들을 일찍 철들게 만든다고 했어. 그 시대에 열일곱이면 철이 다 든 나이지.
형은 메고 있던 예초기를 벗으며 놓고 잔디밭에 그대로 앉으며 대답했다. 그늘로 들어갈 기운조차도 없는 모양이다.
-태어나신 연도가 1928년이라는 게 참 가슴 쓰리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생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을 때 쌍둥이 조카중의 작은 녀석이 수건을 가지고 와서 제 아빠의 목덜미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봐라. 이 어린 녀석도 집에서 안하던 짓을 하고 있어.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잖아.
-그런가? 하지만 얘가 전쟁에 두 번이나 참전한다고 생각해봐.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 거 같아?
-할아버지는 불후한 시대에 태어나셨지만 천운을 타고 나신 거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러나 저러나 밥이 언제 오려나? 형 허기지지 않아?
-난 별로 모르겠는데, 너? 아침 안 먹은 거 아냐?
-현장 들렀다가 오느라고 아침에 서둘렀더니 못 먹었어.
-그래! 배가 고플 적에 1928년생을 생각하면 참고 견딜 수가 있어.
-종태에게 전화를 해볼까?
-그냥 둬라! 바퀴만 바꾸면 금세 오겠지. 배가 고플 적에 1928년생의 허기를 생각하며 1928년생의 벌초를 깔끔하게 마치자.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형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형이 일어서자 제 아빠의 목덜미를 닦아주던 작은 조카 녀석이 말했다.
-아빠? 1928년생이 뭐야?
-응....... 그건 인생이고 살아가는 방법이야. 너 한문 알지? 여기에 한문으로 일. 구. 이. 팔이라고 쓰였잖아. 이 할아버지 얘기야. 나중에 네가 크면 아빠가 말해줄게.
조카 녀석의 물음에 그렇게 응대하고 형은 갈고리를 잡았다. 조카 녀석은 고개를 갸웃하며 좌판 앞에 쪼그리고 앉아 음각된 1928이라는 글자를 손가락으로 따라 쓰며 일. 구. 이. 팔. 이라고 쫑알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외면하며 멀리 강을 보았다.
어라? 강이 왜 저렇게 흰색으로 변했지?
뿌연 세월과 아픈 역사를 품은 강을 보면서 혼자서 웅얼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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