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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문학 60호 권두비평
시원(詩園)의 존재와 시학
-윤은성 시인의 <공원의 전개> 집중평설
전문수 본지주간, 문학평론가, 창원대명예교수
1 공원의 수리공
강의를 위한 자료 시작을 찾다가 윤 은성 시인의 <문학과 사회>지, 2017 신인상 수상작을 접하게 되었다. 시제가 <공원의 전개>이었다. 저간에 시인이나 문인들은 시원이란 공간을 문학적 서정의 미각(美覺)이 전개되는 지역으로 흔히들 그리 여겨들 왔다. 어떤 자연적 영감이나 영지로 이심전심으로 공감되었던 공간이다. 일상적인 지식으로 사전에서 밝히고 있는 공원(公園)의 개념과는 구별했다. 일반적 공원은 보건 휴양 및 정서 생활의 향상에 기여할 목적으로 경영하고 관리하는 자연지(自然地), 후생적(厚生的) 또는 조경지(造景地)를 공원으로 생각해 왔다.
이런 공원은 저간의 문학공간인 시원(詩園)과 다른데도 유수한 한 문예지의 신인 당선시의 대상이 <공원의 전개>란 점에서 새삼스럽거니와 또 <공원의 전개>란 전개의 말이 일상의 말법도 깨고 있다는 점에서 이 시가 무엇인가? 매우 낯선 과제로 되었다. 한편 요즘 시단(詩壇)의 한 작시의 경향도 변하고 있구나하는 예감과 호기로도 생각되어 가볍게 일별하게 되었다. 그런데 기존의 시원에 대한 심상을 재고해야 하는 중요한 과제를 주는 무게 있는 시이었다. 흔히들 논하는 시공의 경계지대가 새롭게 진상되고 있고 기존 시각(詩覺)이 오히려 매우 낯설었다.
모든 사물의 생명체들은 언제나 저 이데아계와 이 현상계란 경계지대에서 불안과 안정이란 상대성 사이의 불확실성에 늘 삶이 존재한다는 이원적 생사방식이 상식화 되어 왔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이마저 바람 앞의 등불이나 촛불처럼 살아가고 있는 생명체 존재의 실상이 한층 가물거렸고, 그 위태로움이 먼저 절감되는 시어 다룸이 심상치 않았다. 누구나 익히 잘 아는 바처럼, 최고의 형이상학이라 할 수 있는 철학적 이원론에서는 그런대로 가장 완전성과 안정성의 이상계만은 있다고 믿어 온 이데아 계 실현이 전혀 불가능하다는 허탈감을 먼저 주었다. 현상계를 해석하고 이해할 가장 쉬운 방편은 아마도 인과관계를 신뢰하는 것일 것이고, 논증할 수 없는 우주 천리(천문) 법계의 경계지대를 형이상학의 관념으로라도 기댈 수 있었는데, 이 시는 이 문제에 의문을 강력하게 제기하고 있었다. 시는 피할 수 없이 미적관념 놀이를 즐길 수 있는 철학영역이라는 것을 새삼 숙고할 수 있는 기회를 이 시가 주고 있다고 보았다.
일반적인 관습으로는, 사물들의 생명은 삶과 죽음의 너무나 확실한 존재의 한계 지대에서 누려지고 있는 닫힌 큰 구조 안의 복합적 존재여서, 대개 체험의 무늬들에서 자잘한 감정적 정념 소들이 심상의 시적 요소가 되고 있다. 물론 현대는 이런 소박한 문학적 인식은 이미 구시대 유물로 되고 있지만, 그래도 이 미련의 관습은 저변에 서정이란 이름으로 짙게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매우 미시적 시각으로 명암의 현실 삶들을 조명하면, 소위 경계지대란 모든 사물과 사물사이의 시공간 경계는 물론이고 기능들 사이 경계, 가치들 사이 경계, 미학들 사이 경계 등등 모든 사고방식들 사이의 차이란 지대는 무한 지대이다.
실존적으로 이 경계 사이의 변별과 융합, 생성과 소멸의 생성법칙에 대한 천리들이 운행되는 모든 존재들은 어떤 것도 피할 수 없는 시공이다. 따라서 모든 생각의 차이를 다 경계지대로 보는 언어는 다 경계지역 언표가 되고 만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래서 이 문제를 우리 시단은 좀 더 구체적으로 직시하고 실체로 접근하려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시 세계인 한 일차 대상은 표현수단인 언어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다시 되새겨야 한다는 뜻이다. 언어 존재자체가 가진 의미를 다시 묻는 방법만이 시단이 새로 열림이 되는 방편이라 본다.
이런 구체적 문제를 이 <공원의 전개> 시가 과감하게 문제 삼고 있다. 의미 변별력 하나로 모든 집을 짓는 재료가 되는 언어는, 시의 전부란 것은 상식이 되고 있지만 정작 이 언어가 어떠한 주요 경계지대의 범주로 시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지는 오히려 너무 무지가 많다. 사물 시를 다루는 이유가 바로 이 언어 문제라는 것을 눈치 채거나 깨닫는 것이 늦었다는 것을 이 시가 예증하고 있다. 아직 시어에 대한 무지가 잘 점검되지 않은 것이 시단의 남은 현실이다.
이 시에서 공원의 전개는 수리공(修理工)이 해결사로 중심 위치에 서 있다. 이는 분명히 언어수리공 즉 언어의 집을 짓는 목수와 같은 기능공들이 상징되고 있다. 언어들이 바로 수리공들이다.
나라고 하는 존재는 너란 존재와의 변별력이면서 그 너란 존재가 나를 일순간 존재로 만드는 상대성의 절대적 힘에 기댄다. 언어는 시라는 언어 집의 모든 총체적 재료들이고 그 관계 양상이 시인 것인데 이 언어를 다루는 수리력, 즉 그 수리 기술이 없이는 좋은 집을 절대 지을 수가 없다.
이 세상 존재란 언어로 수리된 집 안에서 단 한 순간으로 연기하고 연생하는 것을 말한다. 실체는 언어의 뒤에 상징적 심상으로 짚어질 뿐이다. 그래서 언어는 인간만이 가진 소유의 천혜이다. 어떤 존재도 언어가 만들어 내지 않고는 존재는 없다. 오감에 들어오는 현상의 실체는 아무도 모른다. 인간의 정신이 소유하는 이용 방식들을 빼면 아무도 모르는 암흑이고 침묵일 뿐이다. 고목이란 나무의 인식은 신목이란 나무와 관계된 인간의식의 한 순간의 존재의 집이다. 따라서 존재는 언어 없이는 의식작용도 못 하고 전달도 못한다.
시라는 미학적 언어놀이는 이런 형이상학적 사유 없이는 이루어질 수가 없다. 쉽게 말해서 시란 미학영역은, 그것 참 재미있다 라고 하면서 잠겨 들었다가 거기서 벌어지는 진리의 천문 철학에 정신을 다시 세탁하는 곳이다. 지금까지 아무도 보지 못한 것을 보아내는 것인데 이는 이미 천문이 써놓은 것을 발견해 내는 고된 탐구뿐이다.
미학이란 지식과 같은 인식론이 아니고 무한의 가능성, 저 아리스토텔레스가 발명한 개연성이란 언어의 새길 트는 쾌락이다. 낯선 시각을 처음 보는 바로 그 쾌락인데 인간이 실용으로 쓰는 고도의 지식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것이다. 시가 예술성을 얻으면 바로 새로운 철학으로나 새로운 지식으로 변화한다는 중의적 확장성은 절로 얻는 공짜일 수는 있디. 지식보다 시의 힘이 더 크다.
경계지대에 대한 이상과 같은 이해들은, 어떤 선택과 판단으로 사물을 처리해야 시가 되는가를 가장 기본으로 깨닫게 한다. 천재성의 언어 한마디 수리공은 바로 격물치지(格物致知) 하는 능력에 이르는 거라고 말해도 좋다고 할 수 있다. 천리를 깨닫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매우 시의 본질 미달의 시 쓰기가 지금 이 시 세상이 판을 치고 있다.
이 정도로 우선 윤 은성의 <공원의 전개>를 감상하고 평가하는 예비지식을 갖추는 것으로 보고 이해의 편의를 위해 좀 무리가 있을 수 있지만, 축자적 해석법으로 행과 연을 세심하게 고찰해 보기로 한다. 저간에 시작 평론들이 전체 시를 일목으로 제시하고 총체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독자에게 완독할 수 있게 하는 그리 좋은 방편일 수가 없다는 지적도 생각해서 시의 연과 행을 순차적으로 해석하여 이해를 돕고자 한다. 시 창작 교실에서 하는 설강(說講) 형태를 취했다고 보면 된다.
<공원의 전개>는 우선 일상적 시각을 바꾸면, 모든 사물은 다 자신의 형상적 전개, 자기 세계의 묵시적 전개를 하고 있다는 새로운 시적 언어형식임을 총괄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작은 풀 한 포기도 독립 생명체의 역할을 어느 한 시공간에서 지금 전개해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시적인식은, 시는 언어로써 전개해야 하는 또 다른 사물존재의 하나라는 것을 알게 한다. 물론 이게 시가 하나의 생명체가 되는 난제일 수 있다. 그림이나 사진은 어떻게 형상을 보여주고 느끼게 하느냐 에서 비교적 여유가 있다. 그야말로 불립문자(不立文字)로 형상 기호들만 보여주기를 하면 그만인 미학이 될 것인데, 시는 문자언어나 말로써 형상적 이미지가 심상으로 표현된다는데 매우 그 고뇌가 크다. 부연하면 언어를 미학적 이치에 맞게 잘 수리하고 가공하는 고도의 사유능력과 기술발휘가 시의 난제다.
이런 관점의 대전제에서 <공원의 전개>를 이 시 첫 연의 행과 연의 언어처리 능력에 대해 우리는 아래와 같이 고찰해 볼 수가 있다
(1)/영원이라는 말을 쓴다 겨울의 도끼라는 말처럼 우연히 여기라고 쓴다 공원이라고 쓴다 누군가를 지나친 기분이 들었으므로//
& 단문들 뒤에 마침표를 찍지 않고 시적 시각(視覺. 詩覺)의 흐름을 마치 그림의 색채나 형상물들 연결처럼 언어적 형상화를 노리고 있다. 일단 이것도 관습적 쓰기를 벗고자 하는 기본적인 시적문장 표현 수리기술을 부린 것인가도 따져야 한다. 그러자면 핵심심상인 영원, 겨울 도끼. 공원과 기분이 하나의 형상화로 기존 관습문법을 수리공처럼 수리하는 기술을 언어가 발휘하는가가 되물어져야 한다. 보편적 관습수준에서 보면 세 문장이 다 한순간의 우연처럼 각기 의미 변별을 잃지 않고 병렬되는 것 같이 보일 것이다. 만일 이런 판단이면 이 시는 첫 연부터 실패이다. 그러나 거시적으로 하나의 어떤 의미에 봉사하는 통섭이라 판단되면 이는 탁월하다가 된다.
영원이란 언어를 쓴다고 전제하고, 겨울의 도끼란 언어를 접속시키고 있다. 지식 전달에서는 이런 말법이 없다. 영원이란 개념적 문자의미를 지우고 시적으로 이 말을 다른 의미 연관성 때문에 한 감정 숨결 안에 실행할 때는 그저 기존의 관습적 말일 뿐이란 태도이다. 왜냐하면
연의 종결부 ‘순간의 지나친 기분 전달’에 대한 시적 감정 숨결이 지배하는 일시의 한 통섭 현장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일시적으로는 다 영원이란 말을 쓸 수가가 있다. 더구나 공원이라면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첫 행과 연이 기존 관습의 언어를 흔들어 놓는 황당한 언어수리를 시작하고 있다고 보자. 이러면 공원도 고정된 어떤 공간의 기존관습의 공원은 아니라는 암시가 된다. 이 거창한 말법을 우리는 아무 거리낌 없이 함부로 쓰지 않는다. 숨겨진 시적심상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기존 말법을 시적으로 패러디하는 한 숨결 순간을 형상화하는 언어수리법이다.
이런 투의 시 문법이 이 시 전체에 전개되고 있음을 알게 되면 이 시는 어떤 평가를 얻을 수가 있을 것이다. 그 증거는 바로 이어지는 겨울의 도끼란 언어형상화법으로 드러난다. 겨울의 도끼란 언어는 매우 추운 어느 날 찰나의 감정 표현이다. 그야말로 우연한 순간의 심리생성 문법이다. 그런데 실체하는 겨울에 대한 인간인식으로는 순간의 진실이 영원의 심상과 마주 닿아 있다. 도끼로 찍는 듯한 모진 온도차가 겨울이란 영원을 실현한다고 할 수 없다. 어떤 말도 말이 되려면 천문(리)의 존재법칙 저변에 바쳐져야 한다. 발견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사물들의 실체란 다른 사물과의 관계 속에서 찰나에 생기고 찰나에 사라지는 것이 존재기본이다.
그래서 이 첫 연에서 공원이라 쓴다는 말은 이 시 전체의 시공간이기에 매우 신중한 언어복선이다. 즉 순간의 공원은 겨울의 도끼처럼 심오한 인식공간의 어떤 무엇을 상징적으로 보이는 시적 대상언어이고, 기존언어를 수리하는 것이고 그리하여 매우 중요한 실존적 감성의 기분인 시적 우연성 또는 개연성의 찰나 생 찰나 멸의 존재본질을 복선화하고 있다.
우리는 한순간도 실은 변하지 않는 어떤 의미를 밟고 있는 것이 아니고 매 순간 끝없이 전개되고 있는 불안과 불확실성의 세계에 떨고 있는 것을 늘 절감한다. 이런 깨달음은 기술 중에 최고의 기술획득이다.
이 시는 모든 존재를 언어의 수리공들이 찰나로 만든 것이라는 무서운 기존 사고관습 파괴의 시적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전제해 본다. 시인은 어떤 공간의 사물들에 대한 한 수리공이고 문자로 된 책들은 다 잘 수리된 수리공들이란 언어들로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언어수리공들은 다 오랜 연구로 숙련된 그 분야의 저자 일 수 있고 역시 언어 그 자체의 좋은 능력의 수리를 발휘하는 암시로 볼 수 있다.
그야말로 우리가 그간 살아온 그 무거운 삶의 모든 시공이 다 텅 빈 공원(空園)의 전개에 불과하다는 지적일 수 있다. 이 시 속의 외적자아 화라는 형상기법은 언어수리공을 집어넣어 놓고 시적화자는 시 전제를 조율해가고 있다.
얼핏 보면 언어수리 기준은 단지 누군가를 스치는 기분정도의 우연 같은 현실에 대한 기분의 미학 같다. 그러나 우리는 필연의 인과관계의 필연으로 사는 것 같은 착각을 직시함으로써 소위 그릇된 합리의 무지에서 중대한 삶의 진실을 상실한 현실에 산다는 것을 시적으로 패러디하는 강타를 칠 수 있다.
미학은 마치 우연 같은 개연성에 의한 존재 본질접근의 방식이다. 이상하게 들리도록 말하는 방식의 권리가 어쩌면 언어를 다루는 시인의 특권일 것이다. 그래서 미적순수와 보다 높은 장치라는 의미의 아포리즘과 가장 고민하는 영역이 문학이다. 누가 이 세상은 다 말들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면 이런 허망한 말의 잠언이나 모럴이 더 어디 있겠는가. 인간은 정신과 육체가 말문을 닫는 순간 모두 끝이다. 누구나 말을 잃어서 더 이상, 자기 바벨탑을 쌓을 수 없다.
(2) /모자를 벗어두고 기타를 치고 있는가
물구나무를 서고 있는 아이의 다리 위로 그대는 날아가려 하는가 발을 버둥거릴 때
옷깃을 쥐려 하는 손들이 생기고//
& 모자와 기타의 관계는 기타 치는데 어떤 의미 연관의 개연성이 없다는 것 같다. 이 문장 적 언어전개는 굳이 괘념할 필요 없는 우연의 한 행위로 보자는 것인가가 문제이다. 그런데 무의식의 작동으로 발생시키는 이런 행위를 마치 인과관계가 있는 것처럼 우리는 전개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행위전개는 물구나무서 있는 아이들 다리로 날아가려는 마음은 무엇인가를 묻는다. 모자 벗고 기타 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어떤 사물의 전개는 마치 옷깃을 쥐려고 할 때 손이 생기는 것의 무의식적 행위와 비유되면서, 우연과 필연의 문제를 제기한다. 일시적 기분의 감정 숨결의 미학은 유기적 연관이 있는 전개방식이다. 소위 지식이 가지는 난도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시의 세계를 암시하기도 한다. 필연을 우연처럼 주장할 수 있고, 우연을 필연처럼 말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미학이란 것이라 하는 것 같다. 삶은 논리적 정합성의 지식에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기분, 즉 어떤 미묘한 미적 느낌의 어떤 영적 힘의 전개일 뿐이라는 주장으로 고정관념의 실체를 허문다. 지식은 변하는 실체를 묶어두는 문제점이 있다. 모든 존재는 단 1초간으로도 변화되고 있기에 우리는 우성과 필연성을 혼동한다.
여기서 과연 이 시가 시제로 내세운 공원이라는 언어가 공원(公園)인가 아니면 공원(空園)의 인생 패러디를 생각하게 하는가이다. 공원의 나무들을 물구나무서 있는 것으로 본 것 같다는 상상력은 바로 우리들 삶의 역설 문제를 시비할 수 있다. 인생도 물구나무선 그냥 전개된 공원일 뿐이라고 할 수 있다. 둥근 지구의 자전은 어디가 바로 서기고 어디가 물구나무서긴가?
(3) / 손목을 내리찍으려고 돌아다니는 도끼//
& 발을 버둥거릴 때 손이 절로 달라붙어서 옷을 잡듯이 도끼도 그리 달라붙은 것이라 보면 이상하다 생각할 것이 전혀 없다. 무엇을 찍으려고 할 때 절로 도끼에 달라붙은 것이 손이다. 언제나 잡혔던 어느 손의 도끼가 속박될 수 없다. 도끼는 찍을 능력을 가지고 있는 독립적 주체이다. 다른 손에 잡혀도 찍는 힘은 어디까지나 도끼가 발휘하는 것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누구의 손목을 찍으려 돌아다닐 수 있다. 모든 존재는 이런 연기적 상호능력소생이지 일방적인 것은 불가능하다. 필연이라는 논리는 모든 존재전개의 입증이 불가능하다는 철학적 혜안으로 생긴 수 있다. 이 시의 언어백미는 이런 탁월한 역설적 언어문법이다.
(4) /물이 어는 속도로 얼음이 갈라지는 속도로 겨울의 공원이 생기지,
해가 저물도록 벤치에 앉아서 책을 읽던 사나이여
그대의 곁에서 넘어지고 일어서는 어린 수리공들
우리는 우리의 작업을 언제든 완료할 수 있지,//
& 겨울이 생기는 것은 온도의 정도로 천리법칙이 전개한 공원과 같은 이치이다. 따로 고정된 공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모두도 전개된 한 공원이라는 시각(詩覺)이다. 그러니 해가 저물도록 읽는 책 속의 온갖 언어들이 전개되는 양상들도 언어전개공원이고, 천리고, 아직 다 미진한 어린 수리공들이 넘어지고 일어서는 노력의 전개도 천리라는 지적이다. 책은 누가 써도 아직 어린 수리공인 언어들 공원일 뿐이다. 어쨌든 다른 이런 언어들로는 어떤 책 공원이 전개돼도 언제나 미진한 완료이다. 이런 시각도 특출하다. 우리들 삶의 존재는 다 말들로 삶이 찰나에 완료되는 반복이 아닌가 한다. 책의 전개란 여러 종류의 공원들 전개처럼 우리들 행위도 이 언어 같은 관념놀이라는 것이 이 시의 패러디 성토로 보인다.
(5) /그저 꽃잎을 떨구면 그저 붉은색 페인트 통을 엎지르면//
& 그저 란 말에 유의해야 한다. 그냥 무심코 일상의 우연한 것 같은 것들, 즉 모든 존재의 천리가 자연성인 발생 또는 법칙들의 전개일 뿐이라는 것이다. 꽃이 잎을 떨구는 자연과 인위로 페인트칠 엎지르는 것을 의도 없는 하나의 자연성으로 보는 것이다. 이 두 문장을 아무 문법적 고려 없이 자연성으로 전개하는 치밀성이 돋보인다. 쓸모 있는 것을 의도적으로 엎지르는 짓은 없다. 이 시 문장들은 다음 종결부를 위해 전제적 복선을 놓고 있다.
(6) /상점은 짜부라지면서 물건을 토해내지, 상점의 주인처럼 주인의 집주인처럼 이빨들이 썩어가지, 그림자에서는 머리카락이 점점 길어지고 그대의 책장이 넘어가고
또 해가 저물지, 테이블 위의 물 컵은 놓아둔 그대로 있는데 무엇이 여기서 더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
& 짜부라 지다는 상점에 대한 의인성은 즉 인생이다. 상점이 물건들의 집이고 주인이면 물건들도 상점은 제집이고 주인이다. 모든 주인은 언제가 다 짜부라져 썩는다. 이 또한 천리다. 우리들 몸이 상점처럼 전개되는 짜부라짐이면, 마치 역설적이 게도 집의 주인이 인간이 아니라 집이 주인이 된다는 놀라운 사유이다. 집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집의 주인으로 사람을 상품처럼 들여놓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삶은 잠시 전개된 상점에 상품 물건을 쌓아 놓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인간의 모든 종말은 상점이 허물어지듯 썩어나갈 뿐이다.
해지면 머리카락 그림자는 길어지고, 우리들 수리공 언어들인 삶의 한 책은 한 페이지를 넘긴다. 이같이 태연하게 놓아둔 물 컵도 그대로인 세상, 자연법칙이다. 해지는 법칙이 너무 평화롭고 자연스럽듯, 이 세상 천리는 너무 안정된 아름다움이 본질이다. 자연은 무엇 하나 불안한 것이 없다. 이런 무명의 깨달음이 종말 부에서 비로소 자성을 찾는다. 인생의 무상이 자각되는 전개이다. 현상계의 잘 못 된 것들은 아무리 수리해 봐도 결국은 다 일종의 일시적 공원 전개일 뿐이다.
( 7) / 우리는 우리의 불씨를 사방에 퍼뜨리고 말았다네, 우는 말들을 내버려두고 그대의 오랜 신부들이 먼 도망을 준비한다//
& 그간 우리는 어리석은 희망의 언어들을 어디에도 가리지 않고 퍼뜨려 살고 있다는 뜻이다. 이들은 실제로 모두 방향을 못 찾고 버려진 토막 난 수리될 말들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대의 오랜 신부들이 이제 인생에서 먼 도망을 준비한다는 것이다. 신부란 시어의 상징이 중의적이다. 좀 당황스럽긴 하다. 가장 천리를 잘 해결할 어떤 성자 적 존재의 전개 어로 보인다. 인생의 희망 고문을 깨닫는 것 같다. 욕심대로 희망의 불씨를 퍼뜨려 봐도 다 울고 있는 언어들로 사는 현실의 허상들이다. 이런 희망 고문을 다 알고 있는 오랜 우리들의 목회자인 신부들이 다 도망을 준비한다는 것은, 결국 시는 어쩌면 언어가 전개되는 말의 빈 공원이라는 역설 같기도 하다. 구원을 위한 누군가 음조를 기원하는 것이다. 구원자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의 불씨를 퍼뜨린 것, 언젠가 활활 탈 불씨, 그래서 말들의 목자인 수리공인 전지전능의 절대 신부는 이런 간절한 말들을 감당 못해서 도망친다. 언어로서의 구원의 말들은 마무리 길러도 완성이 불가능함을 아는 신부들은 말들을 감당할 할 수 없다는 아이러니를 지적한다. 무의 생성만 원환으로 매 순간 굴러간다.
(8) / 수리공이 모두 모이자
그대에게 주려던 꽃이 굳고
페인트가 빠르게 갈라지기 시작한다//
& 언어란 인간 삶을 수리하는 말들이 다 모이자, 희망의 어리석은 환상의 꽃들은 다 굳어버리고 온갖 치장을 한 헛된 페인트칠은 그간 한 꾸민 삶을 갈라놓는다. 결국 이 시의 공원의 전개는 빈 인생의 언어 공원(空園)의 전개가 되는 언어들 망상임을 보여 주어 시적시각에 대해 큰 개안을 준다.
이 시는 공원(公園)의 전개를 기대한 것에 공원(空園)의 전개를 다룬 재미있는 말놀이 희화(戲畫) 같은 패러디 시로 보이지만, 모든 존재에 대한 진지한 물음에 답하고 싶었다고 하겠다. 시적 인식의 수준에 대한 이 시대의 우리들 시적 천착이 어느 단계까지 인가를 되묻게도 한다.
이 시대의 시 세계는 기존의 모든 존재 의식들에 대해 다시 다 물어야 하는 시대 의식을 찾아야 한다.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시대로 차원이 다른 변화하는데 시만이 아직 편하게 앉아서 자기 신세타령이나 하는 묵은 언어는 수리돼야 한다. 계속 아날로그 시대에 머물면 시는 아마 영상 매체들의 디지털에 질식될 것이다. 어쩌면 이 시대는 패러디 시가 시적 미학철학이 돼야 한다는 한 길 트기로 이 시를 평가해야 한다.
아래에 다시 축자적 해석으로 전편의 유기성을 살려 통독이 되도록 돕고자 해서 전편의 시를 제시하였다.
그리고 이 시를 계기로 인생과 시학의 관계에 대한 이해문제가 좀 더 필요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비록 앞 제1부 장의 한 넋두리들로 느껴지더라도 문인들은 한 번은 참고해도 될 것 같아서 사족임을 알면서도 새로 2부의 장을 달리해서 계속 펼쳐 두었다. 그저 각주 정도로 가볍게 일별하기를 바란다.
<<공원의 전개/ 윤은성
영원이라는 말을 쓴다 겨울의 도끼라는 말처럼 우연히 여기라고 쓴다 공원이라고 쓴다 누군가를 지나친 기분이 들었으므로
*
모자를 벗어두고 기타를 치고 있는가 물구나무를 서고 있는 아이의 다리 위로 그대는 날아가려 하는가 발을 버둥거릴 때 옷깃을 쥐려 하는 손들이 생기고
손목을 내리찍으려고 돌아다니는 도끼
물이 어는 속도로
얼음이 갈라지는 속도로
겨울의 공원이 생기지, 해가 저물도록 벤치에 앉아서 책을 읽던 사나이여
그대의 곁에서 넘어지고 일어서는 어린 수리공들
우리는 우리의 작업을
언제든 완료할 수 있지,
그저 꽃잎을 떨구면
그저 붉은색 페인트 통을 엎지르면
상점은 짜부라지면서 물건을 토해내지, 상점의 주인처럼 주인의 집주인처럼 이빨들이 썩어가지, 그림자에서는 머리카락이 점점 길어지고 그대의 책장이 넘어가고
또 해가 저물지, 테이블 위의 물 컵은 놓아둔 그대로 있는데 무엇이 여기서 더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
우리는 우리의 불씨를 사방에 퍼뜨리고 말았다네, 우는 말들을 내버려두고 그대의 오랜 신부들이 먼 도망을 준비 한다
수리공이 모두 모이자
그대에게 주려던 꽃이 굳고
페인트가 빠르게 갈라지기 시작한다 >>
-<주소를 쥐고>, 문학과지성사
2. 인생과 시학의 문제
앞에서 고찰한 시가 결국 종말 부에서는 우리들 인생의 무거운 번성에 이르는 종착점을 확인하면서 시학이 가지는 피할 수 없는 인생 문제를 좀 성글더라도 한번은 생각해 두고 보고 싶다.
우리는 지금 인간이란 사회와 만물의 자연이란 두 세계 속에 살고 있다. 둘 다 경중을 가릴 수 없는 거대한 공원이라고 이름 하거나, 우주란 말처럼 집이라고 하거나, 어느 쪽도 빠져나갈 수 없는 삶 살이를 하고 있다. 그러니 절로 자아라는 나의 존재에 대한 소유자는 누구인가를 수시로 묻고 답하면서, 한 치 앞도 모르는 불확실성을 더듬고 산다. 정말 ‘진아(眞我)’란 존재는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면 이런 무명으로 사는 어리석은 삶은 그야말로 허망한 착각 투성이다.
누구도 이런 삶을 살고 싶지 않을 것인데 이런 지경을 감히 누구도 벗어날 수는 없다. 비록 내가 그리는 이상적인 이데아는 있을 수도 있지만, 누구도 확신으로 잡히지 않기에 늘 유보되는 세계의 미끄럼 타기다. 확신 안 되기에 환상의 희망 따르기가 실은 삶이라니 이런 이율배반이 어디 있는가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하다. 마치 어느 진짜의 이상적 낙원 같은 공원이 어디 있는데, 무지에 가려 비켜서서 낯선 삶이 되고 있다면 이런 진상이 어쩌면 참으로 현실이 이상한 신비한 세계 자체가 아닌가 싶다. 무지로 해서 스쳐가는 이 현실의 생명공원이 지금 바로 환희로 코앞에서 변한다면, 누구도 자기 무지를 그냥 덮고 살자가 없을 것이다. 만일 지금을 무명으로 착각한 기현상 세계라면 이상적 낙원설정을 하고자 하는 언어나 언어수리공들은 망상이고 오히려 이 현실 실제를 뒤엎어 버리는 꼴이 될 것이다.
앞의 시 <공원의 전개>에서 기존 언어문법들을 흔들어 놓았다고 본다면, 지금 서 있는 것은 다 세상을 전도시킨 물구나무선 현실공원이 된다. 하늘이 땅을 보고 자라고 있다면, 뿌리는 하늘에 있는가 아니면 무엇을 뿌리라고 언어화해야 하는 가를 우리는 답해야 한다. 인간의 역사는 인간이 만든 시공의 문화사이다. 그러니 언어는 한쪽은 늘 다른 어느 한쪽에 종속된다. 그 중간은 허공이란 아무것도 세워 둘 수가 없다. 위와 아래로 인위적 구분을 해 놓아야 기반이 생긴다. 과연 천리는 이런 불평등이 진실이라고 할까 되물어 보면 답이 나온다. 애초에 현상과 이데아를 이원론으로 만들어 하늘을 우위의 주인으로 일방 통행한 생명질서 세우기는 말로 고칠 수 없는 진실인가를 새삼 물어야 한다. 어디를 기준으로 해야 참 세계와 내 진아를 정복할 수 있는 가를 숙고해 봐야 한다.
최소한 동등한 쌍방향인 중도 세계를 한순간이라도 실현시킬 수 있다면, 어느 한 방향의 희생이 없어야 한다. 모든 존재를 연생연멸(緣生緣滅)의 인과관계인 필연으로 묶는다면 현상계와 이상 세계의 차별이 어떤 필연일지를 정합해 내야한다. 왜 지금은 다 고쳐야 하고 누구도 증명 못 하는 불확실한 이상은 그대로 둘 수가 없다. 일회뿐인 이 생명 세계를 이상세계를 인위적으로 설정해서 왜 현실을 생지옥으로 만드는가를 우리는 물어봐야 한다. <공원의 전개>는 어디에 전개 시켜야 하는가는 존재의 필연이나 우연이나 숙명 이전에 확실한 지금 생명존재의 진실한 존재가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 한번 생명체를 받은 존재는 절대로 삶을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것이 정도이다. 죽음은 삶의 반대 대립 축으로서 선택할 수 없는 것으로 생명의 존재와 한 축이다. 생명이란 말은 죽음이 아니라는 말의 별칭이다. 모든 사물의 존재가 중도의 도리로서 이루어지기에 단독개체는 존재가 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암흑이라 어떤 언어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목숨을 잃는 경우는 어떤 형태든 무엇에 의한 타살이지 죽음이 한 짓이 아니다. 그래서 삶의 천리가 타살한 것이다.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환경조건이 바로 사회나 자연의 천적이니 천리의 생로병사는 바로 중도의 그 자체이다.
세계의 어떤 지상의 저변이나 그리고 저 높은 우주는 신비스러운 천리의 지배자는 모든 존재들을 다 연기된 인과의 연생연멸에 지배한다. 이런 천리를 미쳐 잘 못 깨달아서 아니라 오히려 무명의 기준을 만들 수 있는 인간이 재고해야 한다. 생명체는 어느 것도 무명한 무지가 아니다. 그 자체로 다 이심전심으로 영감 되는 전신영혼을 내면에 잘 깨닫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문제는 이 천명을 저해하는 환경조건들의 무명은 왜 안 묻나이다.
지구가 둥글고 회전하는 행성의 천리를 두고 누가 어디는 위이고 아래라고 판단한다는 것은 증도의 도리를 어기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언어 경계지대의 노예가 되고 있다는 것을 이 <공원의 전개>에서 시사하는 수준까지 가야 한다고 지적하는 점을 통섭해야 한다. 더 높은 수준의 인생론으로 제고시킬 필요가 있다. 너무 견강부회라 할지 모르지만 한 문구의 잠언이나 격언이 인생론의 요약이듯 한 편의 시는 시학 그 너머 넓은 인생론이 있다.
참으로 시란 무엇이고 그 힘은 무엇인가를 대답할 때, 시학 차원을 건너 넘는 자유의지를 시에게 부여해 줄 수 있다. .
어떤 기준으로 저간의 인생경전들은 만들어졌는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그 한 예로 역경 은 공자가 최초로 정리했다고 하나 공자는 자기가 이론을 궁구해서 수립했다고 하지 않았다.기존의 신화나 전설들의 수집을 통해서 잘 정리해 보았다고 하였다. 이련 태도는 정직한 학자의 최소한 윤리로 생각되어 학자적 기질을 정의하는 기초가 되었다. 본래 논어의 술이부작(述而不作)이란 경구는 이런 공자의 학자적 윤리철학의 기초에서 수립된 것이라 보아야 옳다. 공자의 시경도 중국 고대시대부터 전해온 저간의 시들을 수집해서 술이부작으로 오직 공자는 여러 시들 중에서 선택만 해서 집성한 것이다. 역시 술이부작의 모범을 보인 것이다 이와 같이 거의 저자가 없는 경전들은 어느 한 사람의 저서가 아니고, 그 시대의 필요에서 집성 수립된 문화적 종합 모럴들이라 봄이 옳다. 천지의 진리는 누구도 불립문자의 세계로 함부로 지을 수가 없다. 그래서 도는 다 불립문자의 묘유세계(妙有世界)이다. 부득이한 방편으로 수리한 언어집들의 대도들을 일종의 권화단계로 우리들 사유를 사로잡아 왔다. 인간은 삶의 제 길을 간절하게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깨달음들이 드러내는 최고의 문명은 과학의 큰 힘이지만, 문학의 인문적인 시적기능은 다 신적 힘을 가진다고 보는 것이 시학영력이 돼야 한다는 점이다. 인생을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의 언어 수리는 기계 수리공과 매우 다른 삶의 철학분야이다. 사람은 사람이란 속성 때문에 그에 적응한 삶을 위한 여러 제도를 의도적으로 만든 특수한 종류의 생명체이다. 사람이란, 집단의 구성원이란 뜻으로서 자연물들과 구별되는 별칭이라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지구 위 여타생명체들과 다른 종류의 탁월한 종자이다. 신도 인간이 만든 일종의 우상이다.
내가 태어난 것은 나에게는 우연이 아니고 천리에 의한 인과의 필연이고, 내가 나를 생성하지 않았지만 다 천리의 자연법칙이 나를 존재하게 하는 무한 우주 법칙들의 산물이다. 나라는 인간으로 던져 준 존재는 누구인지 정의할 수는 없지만, 필연의 자연법칙치고는 신격존재의 창조물이다.
그래서 우리의 실제 삶은 우주만물들의 법칙대로 살 수가 없다. 사람들이 만든 사화란 집단성, 즉 문화성은 다른 생명존재와 다르다. 우리는 이처럼 별종의 한 사회란 우주 집단의 법칙이 따로 적용되는 삶이다. 천리가 적용되는 합리적 법칙을 따로 만들어 살아야 한다. 그것의 하나가 무서운 영적 감지력을 신령스럽게 가진 언어제도다. 이를 만든 언어우주들이 사물들의 자연우주를 열지 않으면 우주존재는 없다. 언어는 이 세상 생명들을 실천하는 무소불이의 인생도구이고 자연의 도구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이 언어의 천재적 사용이 천재적 사유의 창조자인 점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된다. 새로운 삶의 사유를 창조하지 못하면 이에 따른 언어수단을 수리할 수가 없다. 이런 새 언어 창조 없이는 새 삶을 공유할 수 없고, 인류를 지킬 수도 없다, 문학의 작시들이 인간 삶의 잠언이나 인격의 모럴을 수정하는 격언수준을 넘어서는 이유다.
인간이 가진 감각들은 각자가 다 다르기에 누구나 다 그 감각들을 부려서 발휘해야 하는 힘들인데, 작시는 참 대단한 영역의 능력들이고 또 무궁 무한의 세계이다. 역시 이 또한 천혜의 인간만의 특혜이다. 이러고도 인생이 불행해야 하는 이유는 어떤 변명으로도 납득이 안 된다. 천지로 열린 공간에 지구란 행성의 울타리 안에 집을 짓고 사는 우리는 다 주인이다. 지구가 주인이라면 나도 주인이다. 상점이 주인이 아니라 그간의 좋은 물건이 주인이 되어 상점을 수단으로 경영하는 방편일 수 있다. 사는 것은 누구나 익히 아는 생성소멸 양변의 중도 작용의 법칙을 이행하는 것이다. 죽어야 산다는 상대적 존재인 기본 틀을 확실하게 이해해야 한다.
오늘 먹은 것을 쓰레기로 버려야 내일 먹을 새것이 들어와서 사는 것이 생명이다. 이것이 우주 생성의 존재법칙이다. 시공 적 연속성이 본성인 생명체이다. 어제의 세포가 힘을 잃어 죽어야 새로운 세포가 살아나는 상대성 원리가 삶과 죽음의 기본역학이다. 더 이상 기존세포가 새로운 세포를 만들 수 없는 일이 정직하게 도래한 경우가 죽음이고 생명이다. 당연한 자연의 성스러운 분리 법칙이다.
하루와 하루는 늘 생성소멸이 반복되는 임시지대지속이다. 인생의 수리공은 누구인가? 말이라는 신비한 환유(幻有)들인 심상이 다시 언어들을 지배한다. 그러나 이 언어란 수리공들은 수 없는 책과 이론 속에 동원되어도 항상 빈 공간의 집일뿐인 삶의 전개가 인생이다. 우리들은 흔히 왜 도시 속 공원 같은 데 가는가를 생각해 보면, 우리 집보다는 새로운 사물 집들이 전개돼 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거기는 가두어 있던 시원한 진아(眞我)의 내 마음을 볼 수가 있고 달랠 무엇이 있을 것 같은 감정의 정서 때문이다.
이 기분 달래는 멋진 정서의 언어장치가 무슨 장치냐는 생각에 이르면 바로 거기에 신비한 삶이 있고 시가 있다. 이것이 시학미학이다. 그 중심이 언어사유세계인 문학이고 작시 장르이다. 그림이고 음악이고 무용이고 다 예술의 그 수단의 표현들은 다 불립문자인데도 그래도 기호로 언어화 되어 전달된다. 언어화가 안 되는 것은 이 세상에 생명으로 없다. 그래서 문학 능력은 곧 사유를 선도하는 능력의 원천이 되는 미학이다.
문학으로 아름다운 삶의 필연의 지대가 온다면 그것은 죽음의 지역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모순이 중도의 진실이고 참된 미학이다, 죽음이 생명의 이율배반 지역이나 아이러니한 세계가 아니라 생명의 가치를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세계이다. 이런 사유들 체계에 대한 시학적 시각 정립 없이는 시를 자신으로 승화 시키기란 참으로 어렵다. 남의 시를 보고 비슷하게 흉내 내는 헛된 짓밖에 안 된다면 인생도 바로 헛일일 수밖에는 없다. 저 니체의 초인 사상은 누구나 시적 성렬적 사유가 있다는 확신의 그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고 생각된다.
참으로 냉정한 사물들, 나를 비껴가는 것들, 나를 버리고 가는 것들, 차가운 것들, 늘 결핍 의식을 낳는 것들이 함께 우리와 같이 있지 않다면 지옥이다. 모든 존재는 다 있어야 할 것들과 같이 존재할 가치가 있는 것들이다. 다 같은 나그네들이 배고픔의 헝가리의식으로 삶의 생명소를 지킨다. 아마 이곳이 시가 사는 곳이고 그래서 큰 힘이 되는 존재라 생각 한다, 완전함과 불완전함이라는 매우 가치 있는 경계지역에서 우리는 웃고 있는 실체들이다. 그것이 고된 공원전개 작시의 실체이다.
모든 사물이 다 이렇게 웃고 있는 환희경지에 있는데도 모르고 사는 것들을 무명이라거나 무식하다거나 이르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실은 선험적으로 다 알고 있다. 다양한 사물들을, 특히 작시는 다양한 찰나의 경우 수를 찾아낼 수 있고 또 알고도 넌지시 숨기는 것들을 훔쳐볼 수 있는 것이 그 자체 비결일 것이다. 이런 것들을 귀신같이 세속에서 알아내어 폭로하는 자가 시인이 아닌가 한다. 늘 경계지대에 들어가서 의도적으로 샅샅이 뒤지는 무서운 용감한 자가 시인이다.
그러나 이런 근원적 존재 형식들도 필경에는 역시 다 허물어지고 만다. 왜냐하면 죽음처럼 확실한 필연존재 속에서 무엇이든 변화하고 있는 생명의 보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필연이 우연적 관계인 것처럼 오판하기 때문이다. 즉 오판의 우연한 죽음은 없기에 생명의 필연은 성립이 확실하게 되는 도리다. 착각과 오판이 필연의 상대성이다. 우연이란 예외를 더듬어 살아야 죽음의 피픈 함정에 오히려 빠져들지 않는다. 착각도 정가의 상대적 힘이 되기 때문이다. . 정확히 버릴 것을 못 버리는 습관도 다 이런 연유이다. 삶이 죽음과 상대성을 깨닫지 못하는 소위 독립성이란 그릇된 허상의 존재감으로 해서 오는 증오의 착각은 버려야 한다. 알면서도 억지 부리는 어린 우리들 수리공들이 있다. 그래서 죽음도 실은 그 말일 뿐이 변별일 뿐이다. 없는 생명체에서 죽음이 없듯이 인간에게만 유용한 도구이다.
그래서 이 세상 생명체에는 절대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상대적 시간 내에 있는 존재는 죽지 않는 것이 없다. 따라서 죽음은 변하는 것이란 인간 별칭이 된다. 변하지 않는 현상계 세계 내의 생명체는 없다는 것이 진리라면, 이데아의 형이상학 세계도 한 희망 적 수식어 그 자체일 뿐이다.
따라서 우연이란 말의 개념은, 현상 세계 내의 일시 존재이고 허상이라는 말과 같다. 아무렇게 의미 없이 만나는 사물들 관계는 없다 그저 마주 만나서 같이 살아내야 하는 것은 없다. 이 산다는 말은 매우 무서운 말이다. 사는 데는 반드시 믿음이 되는 무엇이 요행한 현상계는 없다. 반드시 관계로 전개 돼야 하는 행운이기도 한 것이 산다는 뜻이다. 우연히 삶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법칙이다. 생명체의 실존적 만남이 타고난 운명일 뿐이다. 그래서 차원이 다른 영원과 우연은 다 실체 없는 말의 함정이고 범주 자체가 다른 세계인데 실속은 동일 범주의 다른 착각이다. 영원이란 실제로 없기 때문이다. 우연이란 일시적 의미와 같아지고 만다. 언어의 정체가 다 이런 것이 실체다. 단선적으로 보면 어떤 결정적 의미로는 이미 존재법칙을 위반하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의 실제 삶은 다 비논리가 지배한다고 할 수 있다.
제1부에서 고찰해 본 시 <공원의 전개 >가 새 길 찾기를 제시했다면 이제 우리는 구체적으로 이 시의 만남을 새로운 저간의 시원의 문제로 이제 쉽게 풀 수 있다고 희망한다. 그래서 이 시는 지금의 모든 경계 제대를 흔들어 놓고 있어도 실은 새로 길 찾기인 것은 맞다. 이 시의 종말부가 이를 입증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피할 수 없는 시적 현장이고 그 구경적(究竟的) 경지 실제이다. 이런 것이 생명이란 늘 한 순간의 경계 지대에서만이 실존하는 존재 형식이라는 것을 일깨워 준다. 그러기 위해서 시는 발생한다고 재삼 생각해 두고자 한다. 이글 초두 시원의 과제를 제시한 복선도 이런 연유에서다.
우리는 오랜 시원(詩園) 문제를 현대적으로 새롭게 푸는데 이 <<공원의 전개>가 크게 일조하고 있다고 느끼길 기대한다.
우리는 저간에 고도의 디지털 세계를 맞으면서 아바타라는 개념을 실감해 왔다. 아바타란 다른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 가짜 허수아비로 알지만, 깊이 생각하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다 한순간의 귀중한 아바타들일 뿐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 모든 존재는 다 우주 법칙 실행자의 타자인 아바타이다. 타 존재는 의미를 부여하는 대로 하는 기능과 역할을 하는 관계적 존재이다. 아바타가 없이는 메타버스는 새로운 세계를 창출할 수가 없다. 꽃을 보면 꽃을 사가게 되는 이유는, 나라는 진정한 존재는 다른 아바타의 뒷자리에 느긋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시의 아바타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나도 상대가 하라는 대로 하는 힘이 있는 아바타로 알지만 나도 상대적으로 누구의 어떤 아바타 되는 기능이다. 시란 주인은 메타버스란 새로운 세계의 주인이다. 시의 명령으로 아바타들은 배우가 돼야 한다.
왜 이 용어를 굳이 사용하느냐 하면, 우리는 내가 모든 것을 생각해야 글이 된다는 너무 허망한 의식에서 벗어나서 아바타끼리의 사이에서 사유는 일어난다는 것을 주문하고 싶어서다. 모든 의미는 상대 아바타가 어는 쪽이든 있어야 비로소 의미가 발생하는 것이지 어느 일방의 생각은 사유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바로 윤은성의 < 공원의 전개>란 이 시는 우리들의 기존 관습적 의식이 너무 두껍고 무거워서, 이를 용감하게 벗겨내는 알몸으로의 환원을 보여 준데 장점이 있다. 이것이 안 되면 사물을 최첨단 지대에서 적합한 생명체가 되는 실제세계를 못 본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기존 언어가 얼마나 무의미한 사유인가를 지적하고 있다. 그 예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 시를 제시했다고도 보자.
언어는 개념이라서 실재가 없다. 언어는 실재를 옮기는 도구일 뿐이다. 그림의 그리기는 실재의 무늬이다. 실재를 대신 전달하는 수단이다. 형상은 다 본질의 무늬이다. 시적 제재의 무늬를 그린 것이 형상화이다. 형상은 그래서 실체가 아닌 징검다리이다. 외형은 어떤 형식의 형상이든 다 어떤 무늬들이라는 것, 개체만의 형상이 존재로 보이나 그것이 삶에서 행동하는 것과 타 존재와의 관계에서만이 개체가 인정되는 것이다. 특히 사람이 가장 이 존재의 순수한 현존재라면 아마 영특한 사물에게서 정신기능을 획득해 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모든 개체는 내가 발견해서 의미를 순간마다 만들어 쓸 수밖에 없다. 기존의 의미를 필요에 따라 저장해두고 빼 쓸 수 없는 것이 존재본질이다. 그 예로 어머니라는 실체는 없다. 개념이 있을 뿐이다. 어떤 순간의 한 어머니는 자식과의 관계 한에서 존재가 있을 뿐이다. 그런 개념에서 구체적 어머니 존재를 빼 쓸 수가 없다. 그야말로 언어는 그 자체일 뿐이다.
그런 측면에서 제시된 자료 시는, 소위 실존적으로 사물 자체의 의지에 중점을 둔 존재론을 보이는 시라도 볼 수가 있다. 공원에서의 한순간의 존재들을 객관적으로 본대로 나열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시에서 첫 발성이 영원이라는 말을 쓴다(실재로 영원은 없는데) 는 언표는, 겨울의 도끼라는 말처럼 우연히 여기라고 쓰는 것의 말과도 같다고 보는 시각이다, 공원이라고 쓴 말도 내 집도 공원이 될 수 있어서 실체가 아니다. 누군가를 지나친 기분이 들었으므로 이 공원에 우리는 일촌광음처럼 그저 지나가는 나그네로 이름 하는 말(언어) 안과 밖에 갇혀서 산다. 진짜 의미는 실제 현상 이상으로 구성된 언어의 집안에 갇혀서 존재로 된다.
존재의 경계지대 이론은 모든 시각의 시발점이다. 어떤 일이나 말이 실은 경계지대를 풀면 끝이 없이 이어지는 하나 의미의 연속 세계를 잇는 새로운 존재 문법이 생긴다. 매 순간에 쓰여 지고 있는 사물 자체에 대한 사유나 사고를 필요에서 끊어 쓰고 있는 것이 어쩌면 이 현상계의 모습이라는 점도 다시 깨닫게 된다,
그야말로 문장들이 연결하는 세계가 마치 빈틈없는 의미차이로 불연속 되는 개별 개념처럼 여겨지는 혼돈을 차제에 깨달아야 한다. 사물들의 던져짐을 그대로 글 씀이 실은 계속되는 한 대형문장이 주어진 천문을 읽어내는 기발한 수단이 된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도 있다. 이야기 는 끝없이 잇기가 가능한 것이 현상의 실제이다. 존재의 변별적 차이는 하나의 편리한 순간 이 요구한 것이 된다. 우주 법칙으로 보면 다 한 세계 안의 다른 형상들의 집합이 될 수 있다. 언어의 개념이 갖는 우리들 관념의 한계를 경고하자는 것이 어쩌면 앞의 시 정신이라 할 수도 있다. 그렇게 언표들이 형성되어 실제와 실체의 괴리가 사라져서, 다시 세계가 무엇이고 인생이 무엇인가를 되묻게 한다. 이런 것이 문학적 사유의 힘이라 본다
결국 문제는 이 쓰고 있는 세상의 문장이 마치 유기적 의미체계로 어떤 의미실체를 지칭하고 있는 것 같지만, 잘 보면 언어와 언어의 사이처럼 사물들의 병렬로 나란한 놓아서 의미 간극을 비틀고 있을 뿐이다. 그저 만남만 이루고 있는 그 현상경계의 진짜 함정을 챙겨 본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사이에는 함정을 건너뛰고 있음이 실체 존재 실상인 것을 모른다는 지적을 저간의 시들이 실상으로 실천해 보이는 작업이었다. 이렇게 우리 삶은 반복되는 단절이 존재하는 것이 실상의 착각할 일수 있다. 개체의 사물들이 우연히 만나기만 하는 실재의 실존으로 보는 오류를 이 앞의 시는 깨우친다고도 할 수도 있다. 착각한 삶에 잡혀 본질을 잃게 되는 무서운 함정이 존재하고 있는 것을 보아야 한다. 이는 기존에 익힌 배움이나 독서의 관습적 의식에 막혀 있는 것을 지금이라는 현재와 구별 못하고 산다는 우리들 일상과도 맞닿아 있다.
눈이 멀어야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사랑이란 학습된 것에 빠져서 착각의 그 함정을 덮어버리고 있다. 하나의 동체라고 생각하는 것, 엄연한 타 존재들의 병렬일 뿐인데 실제 진짜는 실을 있는 그대로인데 이 보고 싶은 대로의 파악이 진실을 가린다. 이것이 지금도 만들어진 기존 관념 속에 지배당하는 무명이 된다.
그래서 앞의 지적처럼 우연의 교묘한 핑계 메커니즘도 이래서 생긴다. 실수의 함정을 우연에서 당하고도 우연이란 불가피성으로 변명한다. 익숙한 우리의 낡은 사고방식들이 우연으로 둔갑해서 덮고 있다. 모든 경계지대에서 생명현상이란 생명을 치열하게 유지하고자 전투를 하고 있는데도 실은 모르고 있다. 알고도 용서하고 있기도 하고. 예각을 스스로 막아버리기도 한다. 대충 건너뛰며 산다.
시인은 이 삶의 생명현상의 치열성에 눈감을 수가 없는 자이다. 이 함정을 파헤쳐서 깨우쳐주어야 한다. 진정한 생명을 위해서 늘 깨어 있는 자이다. 너 어디서 살고 있느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할 수 있는가? 이 답은 바로 그의 삶을 보는 시각과 수준이라고 해야 한다. 우리는 하늘이 점지한 초인간적 어떤 존재의 제작물이 아니다. 치열함, 비정함을 보아내는 눈이 사고하는 시력이다, 이런 현상은 어떤 우주의 자유의지에 의한 세계의 근원 의식이 선험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강조하고 싶다. 우리들은 이 근원에 따른 개인 의지에서 제 나름대로 살지만 거의 누구나 비슷하게 살고 있다. 근원에 대한 인식이 누구에게나 잠재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실은 어떤 기분, 우연 같은 순간이 감싸 안아 삶을 쓰고 있는 무의식적 자각을 위대한 능력으로 보아 낙관적이기도 하다. 아마 이게 문학적 시학의 낙관일 것이다
아무래도 우리들 시는 지구의 자전처럼 연속 회전을 한다는 주장을 가진 것 같다. 지구가 도는 것은 과학적 자연법칙이라 하지만 이것은 실은 우리가 보편 생활에서 모르고 변화의 법칙이라는 목소리를 못 듣고 있는 데에 문제가 있다. 이것을 문학이 개연성이란 존재 본성을 알아차리고 감당하고 있다.
이런 단순한 연속적 반복, 영원한 반복의 회전, 마치 하루의 반복 자전과 같은 것의 세계 인식에서 변화의 진수를 이해해야 한다. 허무의식의 잘 못은 이런 인식의 부족에서 온다. 기대 없음의 의식은 부정적인 이성이다. 부정할 때는 대상의 핵심을 찾아 판단해야 한다. 단순한 만남의 단절적 세계 반복은 없음을 삶이 알아야 한다. 지나쳐 가는 것이 아니라 가로막고 있는 것을 치우고 길을 찾아가는 것이 시적 삶이다. 의미가 가는 길을 방해하는 사고를 고쳐야 한다.
선택이란 삶의 난제가 곧 삶인 것처럼 복권 뽑기 같은 운명론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초인간적 힘이 결정한 것을 따르는 것은 순종 론이다. 견물생심이란 말은 천리존재의 길잡이 노릇을 한다. 견물이란 사람이 먼저 있었다는 것이지만 실은 사물이 먼저 있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사물의 지배력을 알면 내 운명의 지배자는 늘 가까이 있다. “모자를 벗어 두고 기타를 치고 있는가 물구나무를 서고 있는 아이의 다리 위로 그대는 날아가려 하는가, 발을 버둥거릴 때 옷깃을 쥐려 하는 손들이 생기고” 이는 합리론 부정, 우연적 사물 발생. 사물들의 어떤 자유 의지의 존재들이 무엇인지 모르는 불가피한 우리들 한계를 일깨운다. 모자는 기타를 치는데 힘이 되지 못하는가를 물어보자. 우연히 손이 작동하는 일이 있는가?
“손목을 내리찍으려고 돌아다니는 도끼”란 추위로 인해서 생긴 겨울 도끼처럼 무엇을 찍으려는 할 때 생기는 것이 도끼기에 이미 도끼는 어디에도 찍는 능력의 도끼이고 제 생명이기에 제자신이 주인이고 손목은 어는 순간의 도끼 작용에 종속된다. 자유의지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일방적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도끼도 주체적 자유의지의 주인이다. 사물의 존재본질을 직설하고 있다. 탁원한 인생론에 대한 충고이다. 인간중심에서 사물을 중심으로 시각을 전화하는 탁월한 언어수리공이다. 나라는 존재를 스스로 만들어 놓고 거기에 지배당하는 아이러니한 삶이 인생들이라는 작시 행위가 일어난 것이다.
”물이 어는 속도로 얼음이 갈라지는 속도로“ 어디도 속도란 말을 붙여 쓸 수 있는 생성의 시간성 이해를 보여준다. 봄은 어떻게 오는 가라고 물었을 때 대답은 다양할 수 있다. 그런데 만일 새싹이 솟아나는 속도로 봄은 오고 꽃이 지는 속도로 사라진다. 라고 한다면 단순한 시간 개념이 되지만, 인생의 삶에 이 시간문제를 옮기면 다른 심상으로 삶을 감지할 수 있다. 언어의 수리(修理) 작업은 이처럼 존재의 실체를 순간적으로 달리 소유한다. 요즘 내 인생을 다급한 속도로 수리하고 있다고 하면 좀 낯설지만 참신한 전달 언표가 되고 인생도 달리 보게 된다. 작시 행위는 이런 언어 수리로 인생도 수리 작업을 한다.
겨울의 공원이 생겼다 지고, 해가 저물도록 벤치에 앉아서 책을 읽던 사나이도 그대 곁에서 넘어지고 일어서는 어린 수리공들, 즉 언어들의 집들인 책을 덮는다. 언어들은 다 인생이란 우리들 전개의 공원의 수리공들이다. 유식한 수리공과 무식한 수리공의 개념은 타인의 수리공과 자기 수리공 이 두 존재의 개선을 위해 쓰여 진 책은 수리 기술자로 통한다.
상점의 주인처럼 주인의 집주인처럼 이빨들이 썩어 가지, 그림자에서는 머리카락이 점점 길어지고 그대의 책장이 넘어가고- 또 해가 저물지, 테이블 위의 물 컵은 놓아 둔 그대로 있는데 무엇이 여기서 더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란 사유체계 안에는 다 천리는 있는 대로, 즉 제대로 다 잘 있다는 우주의 기본 안정성과 평화를 보고 있다. 인생의 바른 제 자리를 깨닫는 것이다. 상점의 주인이 상점이 짜부러지며 상품들을 쏟아내어 주인을 잃는 언표인데, 이런 경우 주인은 사람인 상점주인가, 상품들인가를 제대로 묻고 있고. 주인은 집인가 거기 들어가 사는 인간인가를 그대로 물어 어리석은 인식을 받아치고 있다. 머리카락이 길어지는 것은 그림자가 길어지는 것인데, 시간적으로는 그림자가 길어지는 것은 자연이고 해가 지는 어둠과 죽음이 상징되는 이런 상호관계는 너무 평화로는 안정 구조이다. 테이블 위의 물 컵은 놓인 대로 그대로이다 는 이 진술은 만사가 다 시간의 질서에 따른 순리라서 평화롭다는 것이다. 이게 자연의 전개를 통해 인생을 보는 제 자리 보기다.
사물들에서 자기 의지를 보고, 인간에게서는 자기 의지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다 동등하다고 볼 때가 우주 법칙인 천문을 읽어내는 비법이다. 내 것으로 완료된 것들, 나만의 자유의지라는 편견이 깨지는 조건이 진실한 공원의 전개 법칙이라는 것이다.
그간 인생에 대한 우리들 욕망의 불씨를 사방에 퍼뜨리고 말았다고 한탄한다. 그래서 우는 말들을 내버려 두고 그대의 늙은 신부들이 먼 도망을 준비한다고 하는 시 문장은 역시 다시 우리들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불씨란 진실을 태워 없애는 씨앗이다. 불이 나서 태울 것이 너무 많아 마치 목회자인 성당의 신부가 우는 중생들로부터 도망을 치는 형국에 비유하는 현실 비판이다. 여기서 말들을 버린다는 것은, 우리들이 함부로 부풀린 희망의 언표들이라고 보는 게 좋다. 즉 어린 희망 고문을 만든 경전들의 부풀린 언어들이다. 좋은 말들은 온갖 경전에 다 집성돼 있어서 인생의 현실을 현혹시켰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실체가 누군가를 묻고, 누가 이 퍼뜨려 놓은 불씨를 제거할 수 있겠는가 이다, 언젠가 활활 탈 불씨, 그래서 말 목장의 목자인 신부는 이런 간절한 말들을 감당을 못해 도망친다. 언어로서의 구원의 말들은 아무리 길러도 완성은 불가능함을 아는 신부들은 기대가 큰 말들을 감당할 할 수 없다는 아이러니를 지적한다. 무의 생성만 원환으로 매 순간 굴러간다. 여기서 벗어나는 의지의 초인이 돼야 한다. 결국 “수리공이 모두 모이자”의 이 시구는 새로운 시각의 사상을 가진 자들이 인간들의 헛된 모험을 수리하고자 모임으로써 기존의식을 수리하는 수리공(의지의 화신들이 모이자), 이 공원에 전개된 화려한 말들의 꽃들은 자동으로 굳어버린다. 목자들이 주려던(누구에게 얻으려던 수동성) 보상의 꽃들은 역시 굳어버린다는 것이다. 허상의 꽃들이 굳고 겉치장의 가짜 페인트들이 갈라져 사라진다. 실로 우리들이 얻으려던 꽃은 다 조화였다. 페인트가 치장한 가짜이었다는 것으로 인생을 반성하게 하는 시학이 되었다. 이것이 시의 힘이고 피할 수 없는 언어의 아포리즘이다.
치장할 페인트, 모든 인위적으로 가짜 장식들로 꾸며주려던 것이 없어진다면 우연의 지배 세계들, 허무주의. 운명주의(모든 것이 어떤 초인간적 존재에 의해서 결정됐다고 보는 사상)에 대한 자유의지 문제는 다 시적이다. 모든 것이 초인간적인 절대자의 힘에 의해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결정론의 운명 주의를 거부하는 그야말로 아모르 파티 세계 같다. 새로운 시학이 바로 지금의 새로운 씨앗이 돼야 한다. 실존적이고 현상학적인 장자의 만물제동(萬物齊同)이 포기된 것들에 대한 시어 수리공들을 불러내는 길이 시학에 있고 인생론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