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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소수 임고 문헌 남계 사액
명종실록 10권, 명종 5년1550 2월 11일 병오 2번째기사 1550년 명 가정(嘉靖) 29년
이기 등이 풍기의 백운동 서원에 편액과 책을 내려 보낼 것을 아뢰다
영의정 이기, 좌의정 심연원, 우의정 상진, 예조 판서 윤개, 예조 참의 서고(徐固)가 의논드렸다.
"풍기(豊基)의 백운동 서원(白雲洞書院)은 황해도 관찰사 주세붕(周世鵬)이 창립한 것인데, 【주세붕이 풍기 군수(豊基郡守)로 있을 때 이 서원을 창립하였다.】 그 터는 바로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가 【본래 이름은 향(珦)이었는데, 어휘(御諱)를 피하여 유라 하였다.】 살던 곳이고, 그 제도와 규모는 대개 주 문공(朱文公)이 세운 백록동(白鹿洞)을 모방한 것입니다. 무릇 학령(學令)을 세우고 서적(書籍)을 비치하며, 전량(田糧)과 공급의 도구를 다 갖추어서 인재를 성취시킬 만합니다. 이황(李滉)이 【이황이 풍기 군수로 있을 때 주세붕의 뜻을 훌륭히 여기고, 오래 전승되지 못할까 염려하여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가려고 할 때에 사연을 갖추어 계문하였기 때문에 삼공과 해조에게 명하여 의논하도록 한 것이다.】 편액(扁額)과 서적·토지·노비를 하사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다 따라줄 수는 없으나 편액과 서적 등 2∼3건만이라도 특명으로 내려보낸다면, 먼 곳의 유생들이 반드시 고무 감격하여 흥기할 것입니다. 토지의 경우는 주세붕이 마련해준 것이 부족하지 않으니, 그대로 놓아두고 고치지 않는다면 비록 장획(臧獲)을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환(使喚)할 사람을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유생이 글읽기로는 고요한 곳이 가장 좋습니다. 만일 감사와 수령이 학업을 권장하려고 교령(敎令)을 번거롭게 내려 단속한다면 오히려 사람들이 자유스럽지 못하여 장수 유식(藏修游息)011) 의 도(道)에 어긋날까 염려되니, 동요시키지 않는 것보다 나은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註 011]
장수 유식(藏修游息) : 장수는 학문을 정과(正課)로서 수학하는 것. 유식은 정과 이외의 휴식 시간에도 학문에 마음을 두는 것. 학문을 배우는 데 있어서 항상 학문에서 떠나지 않는다는 뜻. 《예기(禮記)》 학기.
○領議政李芑、左議政沈連源、右議政尙震、禮曹判書尹漑、禮曹參議徐固議: "豐基 白雲洞書院, 黃海道觀察使周世鵬所創立, 【世鵬, 豐基郡守時, 創此書院。】 其基乃文成公 安裕 【名珦, 避諱稱裕。】 所居之洞, 其制度規模, 蓋倣朱文公 白鹿洞之規也。 凡所以立學令置書籍, 田糧供給之具, 無不該盡, 可以成就人才也。 李滉 【作宰豐基, 嘉世鵬之志, 恐傳守難久, (移) 〔稱〕病將歸, 具辭啓聞, 故命議三公、該曹。】 之請賜扁額, 書籍、土田、臧獲, 不可盡從, 而扁額及書籍二三件, 特命下送, 則遠方儒生, 必皷舞欣感而興起也。 土田則周世鵬措置, 不爲不足, 仍而不改, 雖不給臧獲, 使喚之人, 出於其中。 且儒生讀書, 貴寂寞之境。 若監司、守令欲爲勸課, 煩其敎令而檢束之, 則人不自由, 恐乖藏修游藝之道, 莫若勿撓之而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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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실록 17권, 명종 9년1554 11월 2일 己亥 2번째기사 1554년 명 가정(嘉靖) 33년
정몽주를 기리는 임고 서원에 서책과 편액을 내릴 것을 예조가 아뢰다
예조가 아뢰기를,
"정몽주(鄭夢周)의 도덕과 절행은 안유(安裕)에게 뒤질 것이 없습니다. 그가 생장한 곳에 서원을 세워 학도들이 학문을 닦게 하고 풍화가 도타와지게 장려하는 것은 대단히 아름다운 일이므로, 편액을 하사하고 서책·노비·전결(田結)을 하사하는 일들을 할결같이 소수서원(紹修書院)의 예에 의해 시행하라는 일로 전교하셨습니다. 노비와 전결은 본도 감사의 계본에 따라 이미 해사에 이문(移文)하여 처리하도록 했습니다. 서책은 소수서원의 예대로 사서 오경 1질을 문무루(文武樓)에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내려보내고, 《강목(綱目)》 및 《사문유취(事文類聚)》는 남아 있는 것이 1질 뿐이어서 내려주기가 곤란하니 이 밖의 교서관이 사온 책 중에서 《소미통감(少微通鑑)》·《통감속편(通鑑續編)》을 1질씩 내려보내되 책마다 첫째 권에 연월일과 ‘내사임고서원(內賜臨皐書院)’이라고 써서 내려 도타이 장려하는 뜻을 보이고 편액은 ‘임고서원(臨皐書院)’ 4글자를 큰 글자로 쓰되 아래쪽에 연월일과 ‘선사(宣賜)’ 등의 글자를 함께 새겨서, 공사(公事)를 보는 사람 편에 부쳐 그 도의 감사에게 교할(交割)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사신은 논한다. 정몽주의 충절은 완악한 사람을 감격시키고 야박한 사람을 도타와지게 할 수 있으므로 뒷사람들의 사표(師表)가 될 것이다. 서책을 하사하고 편액을 큰 글자로 써서 내린 것은 충절을 장려하여 후학들을 흥기시키는 훌륭한 뜻이다.
○禮曹啓曰: "鄭夢周道德節行, 無讓於安裕。 其於生長之地, 建立書院, 藏修學徒, 敦勵風化, 大是美事。 宣賜扁額, 頒降書冊、奴婢、田結等事, 一依紹修書院例施行事, 傳敎。 奴婢、田結, 則因本道監司啓本, 已移文該司處置矣。 書冊, 依紹修書院例, 四書五經各一件, 以文武樓所藏帙賜送, 而《綱目》及《事文類聚》, 則餘在只一件, 賜給爲難。 以外, 校書館貿易冊內, 《少微通鑑》、《通鑑續編》各一件賜送, 每書初卷, 題其年月日, 內賜(林皐書院)〔臨皐書院〕 , 以示敦奬之意。 扁額則 ‘(林皐書院)〔臨皐書院〕 ’ 四字, 大字書寫, 下端具刻年月日、宣賜等字, 順付公幹人, 同道監司處交割何如?" 上從之。
【史臣曰: "夢周之忠節, 可以激頑敦薄, 而作後人之師表也。 其所以宣賜書冊, 大書扁額者, 褒奬忠節, 興起後學之盛心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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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실록 18권, 명종 10년1555 2월 25일 경인 3번째기사 1555년 명 가정(嘉靖) 34년
수양 서원에 편액과 서적을 임고서원의 예대로 내리라고 전교하다
생원(生員) 김택(金澤) 등의 상소를 예조에 내리고, 이어 전교하기를,
"편액(扁額)과 서적(書籍) 등의 일을 한결같이 임고서원(臨皐書院)의 예대로 하라."
하였다. 그 상소의 대략에,
"최충(崔沖)은 서쪽 지방에서 분발하여 일어나 개연히 후진들을 지도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습니다. 《고려사》에도 ‘해동 공자(海東孔子)’라고 했는데, 우리 동방(東方)에 학교를 세움이 최충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시호를 문헌(文憲)이라고 하였고 보면 후학들의 모범이 될 수 있는 사람인데, 수양산(首陽山) 등성이에 있는 황량한 사당이 잡초에 덮혀 있어 아직까지 후진들이 귀의하여 앙모할 곳이 없으니, 우리 동방 사람이 옛것을 좋아하지 않음이 심합니다.
기유년012) 가을에 감사 주세붕(周世鵬)이 명을 받고 와서 다스릴 적에, 문서(文書)를 처리하는 여가에 고적(古蹟)을 탐방하다가 덤불 속에서 사당을 발견하자 잡초를 헤치고 참배하고서 좁고 누추함을 한탄했었습니다.
이듬해인 경술년에 향교 서쪽에 터를 닦고 사당을 옮기어 혼령(魂靈)을 안치(安置)하고 그 아래에 서원(書院)을 세워 제생(諸生)이 학업을 익히는 곳으로 하고 자기집에 소장하였던 서책을 내어 채우고, 전민(田民)도 마련하고 주방과 창고도 세웠습니다. 그리고는 그 고을에 근신(謹愼)한 사람 2명을 가리어 맡아 보며 와서 글 배우는 사람들을 도와 주게 한 다음 이름을 ‘수양서원(首陽書院)’이라 하고 ‘서책은 가지고 나가지 못하고 여자는 들어오지 못한다. [書不得出色不得入]’는 여덟 글자를 문미(門楣)에 게시(揭示)하였으니 그 조치하는 방도가 세밀하게 갖추어졌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학생들이 여기에서 육예(六藝)를 배우게 되었으니, 이는 반드시 하늘이 그 사람을 명하여 우리 성명(聖明)의 시대에 문운(文運)이 일어날 길을 열어 놓게 한 것입니다. 다만 한탄스러운 점은, 왕명을 받아 한 일이 아니므로 이름이 국사(國史)에 기록되지 않은 것이어서 무너진 데를 복구하고 헤어진 데를 보수(補修)하는 자는 몇이 되지 않고 기와를 부수고 벽을 그어버리는 자들은 곳곳에 있어서 한다는 소리가 ‘이는 조정에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니 폐치해버린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서원의 장서도 사사로이 두고 보는 것으로 만들려고 노리고, 더러는 관가(官家)의 위세로 위협하여 출납의 계기를 열어 놓아 서원의 규칙을 떨어뜨리려고 하는 자가 있기도 합니다. 선비들의 아름답지 못한 풍습이 한결같이 이에 이르렀으니, 신들은 분하고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성상께서 송(宋)나라의 고사(故事)대로 편액과 서책을 내리어 권장하신다면, 이는 사문(斯文)이 흥성할 시기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註 012]
기유년 : 1549 명종 4년.
○下生員金澤等疏于禮曹, 仍傳曰: "扁額、書籍等事, 一依臨皋書院例。" 其疏略曰:
崔冲, 奮自西服, 慨然以誘掖後進, 爲己任。 麗史稱海東孔子, 而東方學校之設, 由冲始。 謚曰文憲, 則可爲後學之模範者, 而荒祠蕪沒於首陽之麓, 尙無後進依歸景仰之所, 則吾東人之不好古也甚矣。 歲在己酉秋, 監司臣周世鵬, 受命來宣, 簿書之暇, 咨訪古蹟, 得其祠於榛莽中, 披草萊而禮拜, 歎其阨陋。 越明年庚戌, 移而闢之于州庠之西, 以安其靈, 下建書院, 以爲諸生肄業之所, 乃出家藏書帙以實之, 置田民立廚庫, 又擇鄕之謹愼者二人幹之, 以資來學, 名之曰首陽書院, 以 ‘書不得出, 色不得入。’ 八字, 揭于門楣。 其措置之方, 纖悉備具。 由是蒙學之輩, 游藝於斯。 此必天誘其人, 以啓我 聖明文運之興也。 所可恨者, 事不經稟旨, 名不載國乘, 興墜補弊者無幾, 而毁瓦畫墁者, 比比有之曰: "此非朝廷之所知, 廢置何關?" 至如院藏書帙, 窺爲私見, 或脅以官威, 啓其出納之端, 而謀墜其院憲者, 間或有之。 士風之不美, 一至於此, 臣等不勝憤悶。 自上依宋朝故事, 賜扁額書史以奬之, 此斯文亨泰之期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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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실록 33권, 명종 21년1566 6월 15일 갑술 1번째기사 1566년 명 가정(嘉靖) 45년
정여창의 서원에 사액을 청하는 경상도 함양 진사 강익 등의 장고
경상도 관찰사 강사상(姜士尙) 【산업을 경영치 않았으니 청렴 결백은 취할 만하나 국사에 있어서는 특별히 칭할 만하게 수립해 놓은 일이 없다.】 이 함양(咸陽) 사는 진사(進士) 강익(姜翼) 등 30여 인이 장고(狀告)하였다고 치계(馳啓)하였는데, 장고에 아뢰기를,
"삼가 살피건대 유선(儒先) 정여창(鄭汝昌) 【성묘조(成廟朝)의 명유(名儒)이다.】 은 바로 우리 고을 사람인데 어릴 적부터 총명이 출중하였습니다. 그 아버지 정육을(鄭六乙)이 의주 통판(義州通判)으로 있을 때 중국 사신 장영(張寧)이 정여창을 보고 기특히 여겨 지금의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정여창은 장성하자 학문 연마에 힘쓰되 읽고 기억이나 하는 학습은 비루하게 여기고 성리(性理)에 관한 학문을 지극히 좋아하여 침착하게 연구한 나머지 깊이 터득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는 평상시 덕용(德容)이 순후하여 자연 남들로 하여금 심복하고 우러르게 하였습니다.
친상을 당해서는 장례나 제사지내는 일을 꼭 예법대로 거행하는가 하면 하루도 최복(衰服)을 벗지 않고 3년을 여막(廬幕)에서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또한 일찍이 은거할 뜻을 품고 처자를 이끌고 두류산(頭流山) 밑에 가서 집을 짓고는 자연을 즐기며 일생을 마칠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때 성종께서 추천자의 말을 들어 소격서 참봉(昭格署參奉)을 특별히 제수하였으나 그가 상소를 올려 완강히 사양하자 비답을 내려 윤허하지 않으며 ‘나는 너의 품행을 듣고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품행을 숨길 수 없음이 지금 이와 같으니 이것이 바로 너의 착함이다.’ 하였습니다. 정여창은 이에 과거에 응시, 급제하여 곧 검열(檢閱)이 되고 이어 설서(說書)로 옮겨서 열심히 보도(輔導)하니, 동궁(東宮) 【곧 연산군(燕山君)이다.】 은 그를 꺼려하였습니다.
정여창은 안음 현감(安陰縣監)을 자청해 나가서 정사를 베푸는데 인서(仁恕)를 앞세웠고 교화시키기를 마치 신명처럼 하였습니다. 또 사무에 밝았으므로 감히 그를 속이는 자가 없었습니다. 법령을 마련하여 민생을 이롭게 하는 일에 정성을 다하였으므로 백성들이 지금까지 그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그는 더욱이 학문을 권장하고 풍속을 교화시키는 일을 힘써 봄·가을로 양로례(養老禮)를 행하고 또 재능에 따라 사람을 가르쳤으므로 성취된 인재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끝내는 무오년144) 의 화에 좌죄되어 종성(鍾城)에 귀양가서 죽었습니다.
중종께서 즉위하여 무죄를 설원하고 승지(承旨)를 추증하였으며, 또 대신의 헌의에 따라, 선생과 김굉필(金宏弼) 선생 【성종조의 명유(名儒)로 형조 좌랑에 뽑혔으며 연산군 때 사사(賜死)되고 중종조에서 특별히 우의정에 추증하였다.】 은 학술이 순정하고 실천이 독실하며 서로 더불어 학문을 연마하던 일이 마치 고정(考亭)과 남헌(南軒)145) 과의 사이와 같았으므로 도(道)에 뜻을 가진 선비들이 많이 그를 흠모한다 하여, 명을 내려 송조(宋朝)에서 염락 제현(濂洛諸賢)146) 을 포숭(褒崇)하던 고사를 모방하여 그가 평일 강도(講道)한 장소에 사우(祠宇)를 세워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게 하고 해마다 그 집에 연봉을 주는 것을 영원한 규식으로 삼게 하였습니다. 당시 강도한 장소가 없었기 때문에 사우를 세우지 못하였는데, 그렇다고 공제(公祭)를 사묘(私廟)에 베풀자니 예(禮)에 근거할 바가 없을 뿐더러 형편 역시 행하기 어려웠습니다. 전에 군수(郡守) 서구연(徐九淵)이 비로소 사우를 세우고 곁에 당재(堂齋)를 설립하여 장차 예로써 신위를 봉안하고 선비를 모아 학업을 닦게 하려 하였으나 그 일을 성취하지 못하였는데 10여 년 후에 와서야 성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오늘날의 사우 건립은 실로 선조(先朝)의 유명(遺命)을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조정에 품달하지 않고 변조한다면 전일의 가묘(家廟)와 다를 게 없어 제사지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저 임고(臨皐) 【임고는 영천군(永川郡)의 별호이고 임고 서원(臨皐書院)은 곧 정 문충공 몽주(鄭文忠公夢周)의 사당이다.】 와 소수(紹修) 【곧 풍기군(豊基郡)의 백운동 서원(白雲洞書院)이니, 안 문성공 향(安文成公珦)의 사당이다. 우리 나라에 옛날에는 서원이 없었는데 주세붕(周世鵬)이 풍기 군수(豊基郡守)로 있으면서 비로소 이 서원을 건립하였다. 사당을 세워 문성공을 제사지내고 재실을 두어 학자들을 거처시켰으며 서적(書籍)과 전민(田民)을 모두 갖추었다. 그는 또 황해도 감사로 있을 때 최 문헌공(崔文憲公) 충(沖)을 위하여 해주(海州)에 서원을 세우고 이름을 문헌당(文獻堂)이라 하였는데, 규모가 한결같이 백운동 서원과 같았으므로 원근의 학자들이 많이 취학하였으니 혜택을 준 공로가 여간 많지 않다. 이후로 성주(星州)·강릉(江陵) 같은 고을에서 이를 본받아 서원을 세운 곳이 퍽 많았다고 한다.】 두 서원은 모두가 한때 옛 어진이를 추모하는 자의 마음에서 세워진 것입니다. 조정의 명이 있거나 또는 사전(祀典)에 실린 것도 아닌데 역시 모두 사액(賜額)하고 반경(頒經)하였으며 겸하여 장획(臧獲)과 토전(土田)을 하사하였으니 은전(恩典)이 지극하였습니다. 더구나 이 사우는 선조의 유지(遺旨)에 의해 세워진 것인데 총명(寵命)의 하사가 어찌 저 두 서원의 밑에 놓일 수 있겠습니까.
신은 삼가 생각하건대, 정여창의 학행은 한 고을의 의표(儀表)가 될 뿐만 아니라 학사(學士)의 모범이 될 만합니다. 그런 때문에 포증(褒贈)의 은전은 선조에서 특별히 높았고 사자(士子)의 추모는 오늘날에 성하게 일어났으니 실은 인심이 다 함께 좋아해서 하는 일로 말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위로 조정에 주달하여 사액 숭장(賜額崇奬)케 아니한다면 끝내는 한 고을 선비들이 사사로 설립한 서원이 될 것이니, 사리로 볼 때 도리어 미안하고 영구히 유지되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지금 계술의 효도를 극진히 하시는 날에 혹 정액(旌額)을 하사하여 널리 은전을 펴신다면 위로는 선왕의 아름다운 뜻을 이루고 아래로는 풍화의 고무를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그 건의를 예조에 내리니, 예조가 편액(扁額)과 서책을 하사하여 권장하는 뜻을 보이기를 청하였다. 상이 그에 따라 이름을 남계 서원(濫溪書院)이라고 하사하였으니, 예(禮)이다. 【남계는 서원 곁의 시내 이름이다.】
사신은 논한다. 서원 설립은 예부터 있어 온 일이 아니다. 남쪽 지방에서 특히 많이 설립하고 있는데 학자들이 거기에 기거하면서 공부할 수 있도록 제공하는 장소이니, 사회의 교육을 위하는 면에서 어찌 적게 보탬이 되겠는가. 정여창과 김굉필은 한때의 사우(師友)였다. 학문은 비록 전한 것이 없으나 중종이 추증한 일로 보아 역시 근대의 큰 선비였을 것이니, 서원을 세워 제사지내는 것이 뭐 불가할게 있겠는가. 다만 문제는 이때 소위 선비라는 자들이 양심은 돌보지 않고 분분하게 설립하여 새로운 뜻을 창출하기에 급급하니, 오래갈 수 없을 것 같다.
[註 144]
무오년 : 1498 연산군 4년.
[註 145]
고정(考亭)과 남헌(南軒) : 고정은 주희(朱熹)의 호이고 남헌은 장식(張栻)의 호. 이들은 친구간으로서 학문에 서로 도움을 주었다. 《송원학안(宋元學案)》.
[註 146]
염락 제현(濂洛諸賢) : 주돈이(周敦頤)·정이(程頤) 등 여러 현인(賢人)을 가리킨다.
○甲戌/慶尙道觀察使姜士尙 【不營産業, 廉素可取。 然於國事, 無特拔建明之稱。】 馳啓曰: "咸陽居進士姜翼等三十餘人狀告曰: ‘謹按, 儒先鄭汝昌 【成廟朝名儒也。】 乃吾鄕人也。 自髫齔, 聰警不群, 父六乙通判義州時, 華使張寧見汝昌而奇之, 作說以名之。 及長, 務自砥礪, 鄙夷口耳之習, 篤好性理之學, 沈潛探討, 深有所得。 其平居, 德宇醇粹, 自然使人厭服而尊仰之。 執親之(衰)〔喪〕 , 葬祭以禮, 一日不脫衰, 三年不出廬。 夙有晦養之志, 挈妻子, 結屋頭流山下, 嘯詠雲泉, 以爲終焉之計。 成廟用薦者言, 特授昭格署參奉, 陳疏力辭, 則御批不允曰: 「聞爾之行, 予不覺出涕。 行不可掩, 今猶如此, 是汝之善也。」 仍就試登科, 卽爲檢閱。 乃遷說書, 輔導勤切, 東宮 【卽燕山】 有憚色, 遂乞補安陰縣, 政先仁恕, 化若神明。 又精吏事, 無敢欺蔽, 設爲科條, 曲盡利柄。 民到于今, 受其賜。 尤以敦學善俗爲務, 春秋行養老禮。 又隨材敎人, 多所成就。 終坐戊午之禍, 配死鍾城。 中廟受命, 普雪無罪, 例贈承旨。 後又因大臣獻議, 以先生與金先生宏弼, 【成廟朝名儒, 擢刑曹佐郞。 燕山時賜死, 中廟朝特贈右議政。】 學術醇正, 踐履篤實, 相與講劘, 猶考亭之於南軒, 志道之士, 尙多慕之。 命倣宋朝褒崇濂洛諸賢故事, 就平日講道之所, 置立祠宇, 春秋致祭, 歲廩其家, 以爲永式。 而以當時無講道之所, 故不立祠宇, 設公祭於私廟, 禮無所據, 而勢亦難行。 前者郡守徐九淵, 始立祠宇, 傍設堂齋。 且將奉安以禮, 儲士以修, 而未獲卒功。 迄至十餘年, 乃克就緖。 第以今之建祠, 實因先朝遺命, 然若不稟朝命, 而徑自變置, 則無異於前日之家廟, 而同於無祀矣。 被臨皋 【永川郡別號也。 臨皋書院, 卽鄭文忠公 夢周祠也。】 紹修 【卽豊基郡 白雲洞書院 安文成公 珦之祠也。 我國古無書院, 周世鵬爲豊基郡守, 始起此院, 立廟以祠文成, 置齋以居學者, 書籍田民, 無不具焉。 又爲黃海監司爲崔文憲公 冲立書院於海州, 名曰文獻堂而規模一如白雲故事, 遠近學者, 多就之。 嘉惠之功, 有足多者。 自後若星州、江陵效此, 立院之處頗多云。】 二院, 皆出於一時慕古者之作, 非有朝廷之命, 祀典之載, 而亦皆賜額頒經, 兼之臧獲土田, 恩典極矣。 況此有祠, 出於先朝之遺旨, 則寵命之賜, 豈在於二院之下乎?’ 臣因竊思惟, 汝昌學行, 不獨爲一鄕之儀表, 足爲學士之矜式, 故褒贈之典, 特隆於先朝, 而士子之景慕, 蔚起於今日, 實出於人心之同好, 而不能已也。 若不上達朝廷, 賜額崇奬, 則終爲一邑靑衿之私設, 揆諸事理, 反爲未安, 而難於永久。 今方追孝繼述之日, 倘賜旌額, 廣布恩典, 則庶幾上以成先王之美意, 下以助風化之鼓舞矣。" 上下其議于禮曹, 禮曹請賜額賜書, 以示奬勉。 上從之。 賜號曰蘫溪書院(禮)。 【蘫溪院傍水名。】
【史臣曰: "書院之設非古, 南方多有之, 爲學者藏修之所, 爲其世敎, 豈少補哉? 汝昌與金宏弼, 一時師友, 學問雖無傳者, 觀中廟追贈之擧, 亦近代大儒, 院以祀之, 有何不可? 第此時粉袍之輩, 不求諸心, 紛紛制作, 務出新意, 恐不能久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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蘫溪書院誌卷之一
[誌]
○褒贈祀典附
武宗毅皇帝正德二年丁卯 中宗大王二年 復官爵贈通政大夫承政 院都承旨兼經筵參贊官尙瑞院正○十二年丁丑贈大匡 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監春秋館事
神宗顯皇帝萬曆三年乙亥 宣祖大下八年 賜謚文獻 道德博文曰文聰明睿哲曰獻○是 年九月九日吏曹佐郞趙瑗來領文獻公謚號是日會鄕儒使生員盧欽改題位牌 ○三十八年庚 戌 光海二年 八月二十日命遣禮曹正郞琴愷致祭先告家廟從祀
:: 0052 ::
文廟事由九月四日命列從祀干文廟西廡頒敎中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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蘫溪書院誌卷之一
[誌]
書院事蹟
廟宇 在蓮花山蘫溪水上向西正寢三間先生正中主璧介菴姜翼桐溪鄭蘊分配東西壁下寢門三隅石砌兩階 望瘞 位 在西階之北 神廚 在廟宇之左二間一間祭器封藏之所一間稻梁炊蒸之所 祠門 三間周垣屬門 院 字 四間正堂前後二間北楣左右分揭濫溪書院四大字前楣揭明誠東西夾室各一間半東曰居敬西曰集義四周石砌 前有東西階自階下及東西齋在中階亦石築 藏板閣 二間在院宇之東隅藏先生實紀遺集及介菴松灘集極本 省牲壇 在院宇之西隅二層石築 東齋室 一堂一室曰養正堂之軒曰愛蓮下有小池 西齋室 一堂一室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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輔仁堂之軒曰詠梅下有小池 廟庭碑閣 一間在詠梅軒前金鍾厚撰黃運祚書洪樂命篆 風詠樓 上下 前後十二間乃院之正門門揭遵道樓揭風詠自廟宇及齋樓皆丹䑾左右繚垣而屬樓樓外有紅門門右有下馬碑○自院 宇之西階下歷省牲壇前西有小夾門門外有典祀廳四間庫三間直舍三間
世宗皇帝嘉靖三十一年 明宗大王七年 壬子介菴姜翼與朴君承任盧 徒菴裸鄭梅村復顯林君希茂相議曰吾鄕乃一蠧先生之鄕 而先生之歿已至五十年尙無建院立祠之擧實吾鄕之羞咸 曰然乃創立書院是時也我東方書院惟周茂陵設竹溪之外 無有焉見聞未熟不無異議介菴毅然不動決意擧役鄕之儒 士爭致米穀隣邑之來助者亦衆郡守徐候九淵盡心以助旣 立講堂而徐侯遞去時又不稔故堂未瓦而遂停其役殖餘財 以待贍而期訖功 介菴年譜下同
三十八年己未介菴與尹侯確始克院役光大其堂繚繞以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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而庫庾庖湢無不就成又度廟宇於堂之東丘
四十年辛酉廟字之役就完仲春十六日大會儒林奉安先生 位版 奉安文逸
四十三年甲子介菴與金侯宇弘建東西齋齋下鑿小池池邊 種梅竹池中植紅白蓮○扁其堂曰明誠左右夾室曰居敬集 義東西齋曰養正輔仁軒曰愛蓮詠梅門曰遵道皆曺湜筆也
四十五年丙寅秋七月宣額蘫溪
神宗皇帝萬曆二十五年 宣祖大王三十年 丁酉八月爲兵燹所焚鄭慶 雲陳慶胤懼禍將及院移安位牌于潔處以免禍及寇退卽構 廟而權奉 經任案
二十八年庚子以舊院基卑湫不合於士子棲息之所廬士▼(亻+戍) 與鄭慶雲及同志姜渭老等十餘人謀議將移建于羅村壬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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冬遂決策 經任案 越明年癸卯趙候宗道以贖公沓十八斗落地 相換移院基址田 衰寶錄
三十三年乙巳移建祠宇于羅村而奉安 經任案下同
四十年壬子還建書院于灆溪舊址 羅村移安文濫溪還安文一未有傳而且經任案自 壬子至壬戌七十一年其經任名錄及還建事蹟全沒無傳
毅宗皇帝崇禎四十八年 肅宗大王元年 乙卯士林同聲叫閽請以姜翼 鄭蘊竝爲陞配而越三年丁巳兪音獨下於鄭蘊陞配西序 桐溪年譜
我朝肅宗己巳多士再疏請姜翼蒙允陞配東序 介菴年譜
正宗己亥廟庭碑成
憲宗辛丑風詠樓成後七年丁未燬越三年己酉重建
隆熙庚戌後壬戌藏板閣重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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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亥本院誌創刊丁丑而祠及風詠樓修理
庚寅土地改革時土地多入分配故春秋享儀漠然時任有司 鄭鄘鉉節儉蓄積而田沓二十斗只買增
己亥內祠門及倉庫庫舍修理壬寅尊衛錄創刊及院誌重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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蘫溪書院誌卷之二
[誌]
○別廟事蹟 附
仁祖十二年甲戌士林會議以爲蘫溪乃介菴先生所創而平生 尊慕之地稟定于桐溪先生建別祠于院之東隅以享 介菴集下司 二十年壬午以㵢溪兪好仁桐溪鄭蘊竝享
肅宗三年丁巳桐溪陞配
十五年己巳介菴陞配
英宗二十年甲子春重修 經任案
純祖二十年庚辰松灘鄭弘緖享焉 松灘集
高宗五年戊辰以邦禁毁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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蘫溪書院誌卷之一 [誌] 享禮儀節
時日
每歲仲春仲秋仲丁
祭官分定
初獻
亞獻
終獻
大祝
執禮
贊引
判陳
掌牲
掌饌
司罇
奉香
奉爐
奉爵
奠爵
學生
齊戒
前祭三日祭員俱曾散齊二日不縱酒不茹葷不與穢惡事前 祭二日沐浴更衣致齊一日
省牲
前祭一日香牲至門謁者引初獻以下祗迎于門外香及祭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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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入奉香掌饌隨之以奉受初獻以下點閱饌物奉置于典祀 廳牲則置于壇上贊者引初獻巡牲三匝祝隨之初獻立於牲 南北向祝立於牲東西向祝注水三滴進初獻之左白充初獻 答曰腯掌牲領牲詣庖所
陳設
前祭一日有司掃除祠之內外洗滌祭器牽牲詣祠門外祭官 俱以禮服 今深衣道服 省割牲詣廚視牲滌漑各還齊所習儀祭日 丑前五刻執事者陳幣篚各一於神位之左坫上祝板於神位 之右坫上次設祭器掌饌實之判陳設籩豆簠簋于每位前如 儀設一蠧先生尊所於兩楹之間北向西上加勺覆幕又設配 位尊所於楹之東加勺覆羃有同設燭於神位前設洗二於東 階之東 盥洗在東爵洗在西 罍在洗東加勺篚在洗西實以巾 若爵洗之篚則又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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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爵加坫 設楫位於門外設獻官位於庭中設飮福位於東序
行事
掌饌實饌具畢贊者引初獻陞自東階點視陳設祝隨之祝開 櫝訖俱詣門外位亞獻以不俱就門外位立定贊者引初獻以 下人就庭中位北面西上諸生次之重行贊者引祝及諸執事 俱詣盥洗位盥洗各就位贊引進初獻之左白有司謹具請行 事退復位初獻以下皆再拜
初獻禮
贊者引初獻詣盥洗位北向立盥手帨手引詣文獻公一蠧先 生神位前北向跪奉香奉香盒跪進初獻之左奉爐奉香爐跪 進初獻之右初獻三上香奉爐奠爐于神位前香卓上奉香置 盒于卓上俱復位祝以幣篚授初獻初獻執幣獻幣授祝祝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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幣奠于神位前籩豆之間初獻俛伏興再拜次詣配位前如前 儀贊引引初獻詣爵洗位北向立洗爵拭爵以授執事者贊引 引詣文獻公一蠧先生尊所西向立奉爵以爵授初獻司尊擧 羃酌酒初獻以爵授奉爵引詣文獻公一蠧先生神位前北向 跪奉爵以爵授初獻退復位初獻三祭酒獻爵奠爵受爵奠于 神位前退復位初獻俛伏興少退北向跪祝進詣初獻之左東 向跪讀祝訖復位初獻俛伏興再拜次詣配位前如前儀
亞獻終獻禮
如初獻儀但不奠幣讀祝
飮福受胙禮
贊引引初獻詣飮福位西向立執事者一人以爵酌各位初獻 之酒詣初獻之左北向立初獻再拜跪受爵祭酒啐酒奠爵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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席前執事者一人以俎進減各位前胙肉詣初獻之左北向跪 以胙授初獻初獻受胙授執事初獻取爵飮卒爵執事者受虛 爵復於坫執事以胙降自東階出初獻俛伏興再拜引降復位 在位者皆再拜初獻不拜
撤籩豆
祝升詣神位前奉籩豆各一少移故處降復位初獻以下皆再 拜祝取幣祝板就望瘞位四向焚瘞于坎復位贊引進初獻之 左白禮畢祝闔櫝贊引引初獻以下出掌饌率其屬撤禮饌闔 戶以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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院規
一諸生讀書以四書五經爲本源小學家禮爲門戶遵國家 作養之方守聖賢親切之訓知萬善本具於我信古道可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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於今皆務爲窮行心得明體適用之學其諸史子集文章科 擧之業亦不可不爲之旁務博通然當知內外本末輕重緩 急之序常自激昻莫令墜墮自餘邪誕妖異淫僻之書不得 入焉近眼以亂道惑志
一諸生立志堅固趨向正直業以遠大自期行以道義爲歸者 爲善學其處心卑下取舍眩惑知識未脫於俗陋意望全在 於利欲者爲非學如有性行乖常非笑禮法侮慢聖賢詭經 反道醜言辱親敗群不率者院中共擯之
一諸生常宜靜處各齋專精讀書非因講究疑難不宜浪過他 齋虛談度日以致彼我忘思廢業無故無告無頻數出入凡 衣冠作止言行之間各務切偲相勸以善
一泮宮明倫堂揭伊川先生四勿箴晦菴先生白鹿洞規十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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陳茂卿夙興夜寐箴此意甚好院中以此揭諸壁上以相規 警
一書不得出門色不得入門酒不得釀刑不得用書出易失色 入易汙釀非學舍宜刑非儒冠事凡爲諸生或有司以私怒 推打於外人之類此最不可開端若院屬人有罪則不可舍 小則有司大則與上有司同議論罰
一院有司以近居廉幹品官一人爲差定又擇儒士之識事理 有行義衆所推服者一人爲上有司皆二年相遞
一諸生與有司務爲禮貌而相接敬信相待
一院屬人完恤有司及諸生常須愛護下人院事齋事外毋得 人人私使喚使怒罰
一立院養士所以奉國家右文興學作新人才之意人宜盡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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繼今莅者必於院事有增其制無損其約其於斯文豈不幸 甚
一童蒙非因受業與招致不得入門內
一寓生不拘冠未冠無定額成才迺升院
一院之經始期傳永久若不以時修葺易至墮廢如有雨漏敗 毁處有司卽申于官及時修理
一凡院生及尋院士子謁廟時以程子冠黑團領行禮黑團 領若無則以紅團領無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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退溪先生文集卷之四十一 / 雜著 / 伊山院規
一。諸生讀書。以四書五經爲本原。小學,家禮爲門戶。遵國家作養之方。守聖賢親切之訓。知萬善本具於我。信古道可踐於今。皆務爲躬行心得明體適用之學。其諸史子集。文章科擧之業。亦不可不爲之旁務博通。然當知內外本末輕重緩急之序。常自激昂。莫令墜墮。自餘邪誕妖異淫僻之書。竝不得入院近眼。以亂道惑志。
一。諸生立志堅苦。趨向正直。業以遠大自期。行以道義爲歸者爲善學。其處心卑下。取舍眩惑。知識未脫於俗陋。意望專在於利欲者爲非學。如有性行乖常。非笑禮法。侮慢聖賢。詭經反道。醜言辱親。敗羣不率者。院中共議擯之。
一。諸生常宜靜處各齋。專精讀書。非因講究疑難。不宜浪過他齋。虛談度日。以致彼我荒思廢業。
一。無故無告。切無頻數出入。凡衣冠作止言行之間。各務切偲。相觀而善。
一。泮宮明倫堂。書揭伊川先生四勿箴。晦菴先生白鹿洞規十訓。陳茂卿夙興夜寐箴。此意甚好。院中亦宜以此揭諸壁上。以相規警。
一。書不得出門。色不得入門。酒不得釀。刑不得用。
書出易失。色入易汚。釀非學舍宜。刑非儒冠事。刑謂諸生或有司以私怒捶打外人之類。此最不可開端。若院屬人有罪。則不可全赦。小則有司。大則與上有司同議論罰。
一。院有司。以近居廉幹品官二人差定。又擇儒士之識事理有行義衆所推服者一人。爲上有司。皆二年相遞。
一。諸生與有司。務以禮貌相接。敬信相待。
一。院屬人完恤。
有司與諸生。常須愛護下人。院事齋事外。毋得人人私使喚。毋得私怒罰。
一。立院養士。所以奉國家右文興學。作新人才之意。人誰不盡心。繼今莅縣者。必於院事。有增其制。無損其約。其於斯文。豈不幸甚。
一。童蒙。非因受業與招致。不得入入德門內。
一。寓生。不拘冠未冠。無定額。成才乃升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