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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1권 / 경도 상(京都上) / 경도 상
문묘(文廟) 성균관 명륜당의 남쪽에 있다. 대성전(大成殿)은 북에서 남을 향해 앉았는데, 모두 다섯 칸이다. 앞에는 두 계단이 있으며, 동서에는 각각 무(廡)가 있다. 신주(神廚)는 서무(西廡)의 서북에 있고, 전사청(典祀廳)은 또 그 서쪽에 있다. ○ 신좌는,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은 중앙에 있어 남으로 향하였고, 그 배향(配享)으로는 곤국복성공(袞國復聖公) 안자(顔子)와 기국술성공(沂國述聖公) 자사(子思)는 정위(正位)의 동남에 있어 서로 향하였으며, 성국종성공(郕國宗聖公) 증자(曾子)와 추국아성공(鄒國亞聖公) 맹자(孟子)는 정위(正位)의 서남에 있어 동으로 향하였는데, 모두 북으로 상(上)을 삼았다. 전(殿) 안의 종향(從享)으로는 비공(費公) 민손(閔損)ㆍ설공(薛公) 염옹(冉雍)ㆍ여공(黎公) 단목사(端木賜)ㆍ위공(衛公) 중유(仲由)ㆍ위공(魏公) 복상(卜商)은 동쪽 벽에서 모두 서쪽으로 향하였고, 운공(鄆公) 염경(冉耕)ㆍ제공(齊公) 재여(宰予)ㆍ서공(徐公) 염구(冉求)ㆍ오공(吳公) 언언(言偃)ㆍ영천후(穎川侯)ㆍ전손사(顓孫師)는 서쪽 벽에 있어 나란히 동으로 향하였는데, 모두 북을 상으로 하였다. 동무(東廡)의 종향으로는 금향후(金鄕侯) 담대멸명(澹臺滅明)ㆍ임성후(任城侯) 원헌(原憲)ㆍ여양후(汝陽侯) 남궁괄(南宮适)ㆍ내무후(萊蕪侯) 증점(曾點)ㆍ수창후(須昌侯) 상구(商瞿)ㆍ평여후(平輿侯) 칠조개(漆雕開)ㆍ수양후(睢陽侯) 사마경(司馬耕)ㆍ평음후(平陰侯) 유약(有若)ㆍ동아후(東阿侯) 무마시(巫馬施)ㆍ양곡후(陽穀侯) 안신(顔辛)ㆍ상채후(上蔡侯) 조휼(曹卹)ㆍ지강후(枝江侯) 공손룡(公孫龍)ㆍ풍익후(馮翊侯) 진상(秦商)ㆍ뇌택후(雷澤侯) 안고(顔高)ㆍ상규후(上邽侯) 양사적(壤駟赤)ㆍ성기후(成紀侯) 석작촉(石作蜀)ㆍ거평후(鉅平侯) 공하수(公夏首)ㆍ교동후(膠東侯) 후처(后處)ㆍ제양후(濟陽侯) 해용잠(奚容箴)ㆍ부평후(富平侯) 안조(顔祖)ㆍ전양후(全陽侯) 구정강(句井彊)ㆍ견성후(甄城侯) 진조(秦祖)ㆍ즉묵후(卽墨侯) 공조구자(公祖句茲)ㆍ무성후(武城侯) 현성(縣城)ㆍ연원후(汧源侯) 연급(燕伋)ㆍ완구후(宛句侯) 안지복(顔之僕)ㆍ건성후(建城侯) 악해(樂欬)ㆍ당읍후(堂邑侯) 안하(顔何)ㆍ임려후(林慮侯) 적묵(狄墨)ㆍ운성후(鄆城侯) 공충(孔忠)ㆍ서성후(徐城侯) 공서잠(公西箴)ㆍ임복후(臨僕侯) 시지장(施之掌)ㆍ화정후(華亭侯) 진천(秦川)ㆍ문등후(文登侯) 신정(申棖)ㆍ제음후(濟陰侯) 안쾌(顔噲)ㆍ사수후(泗水侯) 공리(孔鯉)ㆍ난릉백(蘭陵伯) 순황(荀況)ㆍ수양백(睢陽伯) 곡량적(穀梁赤)ㆍ내무백(萊蕪伯) 고당생(高堂生)ㆍ약수백(藥壽伯) 모장(毛萇)ㆍ팽성백(彭城伯) 유향(劉向)ㆍ중모백(中牟伯) 영중(䣐衆)ㆍ후지백(緱氏伯) 두자춘(杜子春)ㆍ양향후(良鄕侯) 노식(盧植)ㆍ영양백(榮陽伯) 복건(服虔)ㆍ사공(司空) 왕숙(王肅)ㆍ사도(司徒) 두예(杜預)ㆍ창려후(昌黎侯) 한유(韓愈)ㆍ예국공(豫國公) 정호(程顥)ㆍ신안백(新安伯) 소옹(邵雍)ㆍ온국공(溫國公) 사마광(司馬光)ㆍ화양백(華陽伯) 장식(張栻)ㆍ위국공(魏國公) 허형(許衡)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향하였다. 서무(西廡)의 종향에는 선보후(單父侯) 복부제(宓不齊)ㆍ고밀후(高密侯) 공야장(公冶長)ㆍ북해후(北海侯) 공석애(公晳哀)ㆍ풍부후(豊阜侯) 안무요(顔無繇)ㆍ공성후(共城侯) 고시(高柴)ㆍ수장후(壽長侯) 공백료(公伯寮)ㆍ익도후(益都侯) 번수(樊須)ㆍ거야후(鉅野侯) 공서적(公西赤)ㆍ천승후(千乘侯) 양전(梁鱣)ㆍ임기후(臨沂侯) 염유(冉孺)ㆍ목양후(沐陽侯) 백건(伯虔)ㆍ제성후(諸城侯) 염계(冉季)ㆍ복양후(濮陽侯) 칠조차(漆雕哆)ㆍ고원후(高苑侯) 칠조도보(漆雕徒父)ㆍ추평후(鄒平侯) 상택(商澤)ㆍ당양후(當陽侯) 임부제(任不齊)ㆍ모평후(牟平侯) 공량유(公良孺)ㆍ신식후(新息侯) 진염(秦冉)ㆍ양문후(梁文侯) 공견정(公肩定)ㆍ요성후(聊城侯)ㆍ효단(鄡單)ㆍ기향후(祈鄕侯) 한문묵(罕文墨)ㆍ유천후(溜川侯) 신당(申黨)ㆍ염차후(厭次侯) 영기(榮旂)ㆍ남화후(南華侯) 좌인영(左人郢)ㆍ구산후(昫山侯) 정국(鄭國)ㆍ낙평후(樂平侯) 원항(元亢)ㆍ조성후(胙城侯) 염결(廉潔)ㆍ박평후(博平侯) 숙중회(叔中會)ㆍ고당후(高堂侯) 규손(邽巽)ㆍ임구후(臨朐侯) 공서여(公西輿)ㆍ여내황후(如內黃侯) 거백옥(蘧伯玉)ㆍ장산후(長山侯) 임방(林放)ㆍ남중후(南中侯) 진항(陳亢)ㆍ양평후(陽平侯) 금장(琴張)ㆍ박창후(博昌侯) 보숙승(步叔乘)ㆍ중도백(中都伯) 좌구명(左丘明)ㆍ임치백(臨淄伯) 공양고(公羊高)ㆍ승지백(乘氏伯) 복승(伏勝)ㆍ고성백(考城伯) 대성(戴聖)ㆍ강도백(江都伯) 동중서(蕫仲舒)ㆍ곡부백(曲阜伯) 공안국(公安國)ㆍ기양백(岐陽伯) 가규(賈逵)ㆍ부풍백(扶風伯) 마융(馬融)ㆍ고밀백(高密伯) 정강성(鄭康成)ㆍ임성백(任城伯) 하휴(何休)ㆍ언사백(偃師伯) 왕필(王弼)ㆍ신야백(新野伯) 범녕(范寗)ㆍ도국공(道國公) 주돈이(周敦頤)ㆍ낙국공(洛國公) 정이(程頤)ㆍ미백(郿伯) 장재(張載)ㆍ휘국공(徽國公) 주희(朱熹)ㆍ개봉백(開封伯) 여조겸(呂祖謙)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향하였는데, 모두 북쪽을 상으로 삼았다. 본국(本國)의 홍유후(弘儒侯) 설총(薛聰)ㆍ문창공(文昌公) 최치원(崔致遠)ㆍ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는 서무의 남쪽에서 북쪽으로 향하였는데, 서쪽으로 상을 삼았다. 중사에 실려 있다.○ 변계량(卞季良)의 비명(碑銘)에, “영락(永樂) 7년 기축년 가을 9월에 국왕 전하께서 신 계량에게 명하여 이렇게 이르기를, “우리 선고(先考) 태조께서 하늘의 밝은 명을 받아 비로소 나라를 이룩하여 도읍을 한양에 정하고, 서둘러 묘학(廟學)을 세웠으니, 선성(先聖)을 높이고 문교(文敎)를 소중히 여긴 까닭이다. 나는 그 큰 업을 이어 받들어 이루어 놓으신 법도를 따라 다시 묘궁(廟宮)을 중수하여 이미 이루었다. 학관(學官) 최함(崔諴) 등이 글을 돌에 새겨 후세에 전하기를 청하니, 그대는 붓을 들어 지으라.” 하셨다. 신 계량은 그 명을 받고 황송하여 물러나와 그 전말을 기록한다. 갑술년에 태조가 이미 도읍을 정하매, 종사(宗社)와 조시(朝市)ㆍ성곽(城廓)ㆍ궁실(宮室)이 모두 알맞게 갖추어졌다. 그리하여 다시 묘학(廟學)을 지으려고 도읍의 동북 모퉁이에 땅을 가리니, 산은 그치고 땅은 펀펀하며, 물은 돌아 흐르는데, 그 위치는 남쪽을 향하였다.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신 민제(閔霽)에게 명하여 경영하게 하매, 그는 목수들을 모으고 재목을 갖추어 정축년 3월에 시작하여 무인년 7월에 성철(聖哲)의 높은 집과 종사(從祀)하는 방서(旁序)의 일을 마쳤다. 태학은 종묘 뒤에 있는데, 가운데는 명륜당(明倫堂)이며, 좌우에는 협인(夾引)이 있고, 양협(兩夾)의 남쪽에는 길다란 집을 세웠다. 왼쪽 협 동쪽에 청랑(廳廊)을 두니 사생(師生)의 위치와 학정(學正)ㆍ학록(學錄)의 거처가 하나도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 규모는 크고 넓으며, 그 얽고 쌓은 것이 튼튼하고 크고 작은 칸의 수는 96이다. 전토(田土)를 두어 제사에 쓸 쌀을 제공하며, 생도들을 먹이고 복호(復戶)하여 응대(應對)와 쇄소(洒掃)로 심부름 시키기에 넉넉하니 묘학(廟學)의 일이 구비되었다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경진년 2월에 화재를 만났다. 그해 11월에 전하께서 송경(松京)에서 즉위하고 태학에 나아가 선성(先聖)을 뵙고, 맏아들을 태학에 들어가게 하였다. 기유년에 환도(還都)하여 친히 선성(先聖)과 선사(先師)의 제사를 지내고, 3년을 지나 정해년 1월에 묘(廟)의 옛터에 새로 짓도록 명하였다. 성산군(星山君) 신 이직(李稷)과 중군동지총제(中軍同知摠制) 신 박자청(朴子靑)이 역사의 감독을 맡아 밤낮으로 감독하고 살펴서 마음에 계획하여 지휘하니, 목수들도 힘을 다하여 4개월 만에 묘(廟)가 이루어지니, 높고 깊고 단정하고 크기가 옛것에 비해 더욱 훌륭하였다. 신주(神廚)는 묘(廟)의 서쪽에, 동서의 문은 양서(兩序)의 아래에 세우고, 전토(田土)와 노비를 더 주니, 전토는 만여 묘이고 인구(人口)는 3백 명이나 되었다. 의정부 좌의정 신 하륜(河崙)의 의견을 받아들여 성국종성공 중자와 기국술성공 자사를 배위(配位)에 올리고, 자장(子張)을 십철(十哲)의 묘궁(廟宮)에 올리니, 더욱 유감이 없었다.신이 가만히 생각건대, 성인의 도는 크기 때문에 칭찬할 수가 없으니, 비록 억지로 무어라 말하더라도 그것은 천지와 일월을 그리는 것과 거의 다를 것이 없다. 우리 부자(夫子)께서 주 나라 말기에 태어나서 여러 성인들을 집대성하고 절충하여 모든 왕의 큰 법을 만들어 교훈을 펴시니, 그 공은 천지의 처음 생긴 조화(造化)보다도 지극하고, 그 은택은 무궁토록 흐르니, 인류가 생긴 뒤로 그처럼 훌륭한 이가 없었다. 재여(宰予)의 이른바 요순(堯舜)보다도 훌륭하다 한 것이 까닭이 있는 것이다. 당 나라로부터 이후로 하늘에까지 닿고 땅에 두루하여 사당이 곳곳에 세워져 높여 제사함이 변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우리 동방은 옛날부터 그 풍속이 예의를 숭상하여 기자(箕子)의 8조의 교훈과 떳떳한 윤리의 질서를 받들어 법도와 문물의 갖추어짐이 중국과 짝하였다. 우리 부자께서 일찍이 와서 살고자 하신 뜻이 있었으니, 묘학을 경영해 세우고 문교를 일으켜 숭상한 것은 원래 다른 나라에 견줄 바가 아니다. 삼가 생각건대, 태조 강헌대왕이 천명에 순응하고 인심을 따라서 처음으로 큰 업을 이룩하여 동방을 차지하여 도읍을 정하던 초기에 곧 먼저 성인의 제사를 높이고 유학을 일으켰으니, 이는 그 덕을 높이고 도를 즐기는 정성이 천성(天性)에서 나와 우뚝히 정치를 하는 근본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급선무로 여기는 데에 드러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자손에게 규모를 끼쳐 주어 사람의 마음을 착하게 하고 나라의 명맥을 길게 한 것이 아, 지극하기도 하도다. 전하는 인자하고 효도하며, 겸손하고 공손하며, 강건하고 슬기로워서 선대의 업을 빛나게 이어받았다. 정사하는 여가에 경사(經史)를 즐겨 보아 매양 밤중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격물(格物)ㆍ치지(致知)ㆍ성의(誠意)ㆍ정심(正心)의 학문을 다하였고, 지영수성(持盈守成)의 도를 다하였으니, 그것은 옛날에 찾아 보아도 전혀 없었던 일이다. 세도(世道)가 한창 형통하고 인문(人文)이 밝아지매, 당시의 훈친(勳親) 대신들과 백관(百官)들로부터 숙위(宿衛)하는 신하에 이르기까지도 학문에 뜻을 두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이것은 어찌 우리 태조가 문(文)을 숭상하여 교화를 일으켜 인재를 길렀고, 우리 전하가 선대의 공업을 넓히고 크게 하여 위에서 몸소 행함으로써 많은 선비들을 격려하고 이 백성들을 진작시켰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학업을 연마하는 데에는 학(學)이 있고, 제사를 받드는 데에는 묘(廟)가 있으니, 주선하고 오르내릴 때에 삼가 성현을 대하듯이 하여, 보고 느껴서 떨쳐 일어나 부지런히 힘써서 순서있게 문에서 당(堂)에 오르고, 당에서 방에 들어가기를 구한다면 덕을 이루고 재목을 성취하여 임금께 충성하고 백성에게 은택을 베풀 자가 잇따라 나올 것이니, 점차로 삼대(三代) 때에 인재를 만들어 내던 것을 징험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 그것이 오직 보는 것을 고치고 듣는 것을 바꾸어 한 때를 빛낼 뿐이겠는가? 진실로 우리 조선 종사(宗社)의 만세(萬世)의 복이다. 신 계량은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명(銘)을 드리나이다.” 하였다. 그 명에, “아, 선성(宣聖)이 때맞추어 태어나서 포희(包羲)부터 주공(周公)까지를 집대성하였도다. 인류가 생긴 이후로 누가 그 거룩함을 견주랴. 크게 빛나도다. 높여 제사지냄이 온 천하에 두루 하였네. 하물며 기자(箕子)가 봉함을 받은 우리나라는 예의(禮義)를 먼저 하였음에랴? 제사지내고 읍양(揖讓)하는 것은 옛날의 법칙을 따라 그러하였네. 하늘이 태조를 내려 주시니 신(神)하고 성(聖)하고 무(武)하고 문(文)하셨네. 황제의 명을 밝게 받들어 능히 큰 공을 이루었네. 거룩한 신도(神都)는 한강의 언덕이라네. 이에 학궁(學宮)을 경영해 지으니 성묘(聖廟)가 중앙에 있도다. 제사드리고 강습(講習)하매, 많은 선비들이 그림자처럼 따르네. 밝고 밝도다. 우리 왕이여! 왕업을 이어받아 공을 더 쌓았네. 성인의 학문을 밝게 계승하매 고금에 짝할 이 드무네. 우뚝하도다. 새 학궁(學宮)이여! 새로 종사한 두 분을 제사에 올렸도다. 세자가 입학하니 나라의 근본이 중해졌도다. 내가 짓고 내가 기술하매 성인을 높이도다. 인재는 거기서 길러지고 풍속과 교화는 거기서 아름다워진다. 누군들 착한 본성이 없어 자포자기(自暴自棄)할 것인가? 사람들은 날로 학문에 나아가고 세상은 날로 태평 시대가 되어 가네. 삼왕(三王)ㆍ오제(五帝)와 같이 되기를 날짜를 정하고 기대하네. 화산(華山)은 높고 한수(漢水)는 쉴 새 없이 흘러가네. 나라와 함께 끝이 없기는 성인의 제사로다. 돌에다 글을 새기어 영원히 후세에 보이노라.” 하였다.○ 권근(權近)이 지은 신간 〈석전의식발문(釋奠儀式跋文)〉에, 옛날에 태학에서 석전(釋奠)하는 예는 지극히 간단하고 자세한 것은 전해지지 않는다. 당 나라의 개원례(開元禮)와 송 나라의 정화신의(政和新儀)가 있었으나, 그 또한 폐해져서 대부분 행해지지 않았다. 자양(紫陽) 주문공(朱文公)이 늘 이것을 탄식하면서 여러 번 거행하기를 청하였고, 또 그 절차를 고치는 데에 뜻을 두었지만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영국부학(寧國府學)에서 간행한 의식(儀式)은 선유(先儒) 맹군(孟君) 지진(之縉)이 자양의 〈석전의(釋奠儀)〉와 〈호학면복도(湖學冕服圖)〉를 취해서 한 편을 만들면서 〈석전수지(釋奠須知)〉와 〈창주사채의(滄洲舍菜儀)〉도 아울러 그 뒤에 실었다. 신위(神位)의 향배(向背)와 제기(祭器)와 제복(祭服)의 제도와 저 오르내리며 잔을 드리는 의식이 모두 갖추어져 실리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이른바 자양의(紫陽儀)라는 것도 개원 시대의 옛 제도를 따른 것으로 문공(文公)이 일찍이 개정하려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건문(建文) 경진년에 전라도 관찰사 함공(咸公)이 주현(州縣)의 석전 의식의 잘못됨을 애석히 여겨 나라에 아뢰어 그 의식에 관한 글을 성균관에서 찾아서 장차 판목(板木)에 새기려고 전주부윤(全州府尹) 유공(柳公)에게 부탁하였더니, 그도 기꺼이 승낙하였다. 얼마 안 되어 염찰사(廉察使) 조공(趙公)이 함공을 대신해 가서 그것을 이어받아 공사를 감독하는 데에 더욱 힘썼다. 이때에 판관 허군(許君)은 일찍이 성균관에 있으면서 이 예를 강구하여 매우 밝은 사람으로 그가 구한 의식에 관한 글이 완전치 못함을 보고, 마침내 조공에게 아뢰어 다시 나라에 아뢰어 비로소 영국(寧國)의 전문(全文)을 얻어 발간하였다. 또 원 나라 때의 지원의식(至元儀式)까지 거기에 덧붙였다. 이것은 그 절차의 선후가 문공이 개정하려던 것과 거의 가까웠다. 그러므로 지금 성균관에서 그것을 그대로 쓰고, 이것을 영국의 글에 덧붙였으니, 석전의 예문이 찬란히 모두 구비되어 완전한 책을 이루어 후세에 전할 만하게 된 것이다. 여러 군자들이 여기에 정성을 다한 것은 반드시 예를 다하여 선성의 제사를 지내려 해서이니, 묘학(廟學)에 공이 있고 또 풍화에 도움이 있음이 참으로 가상하다.○ 이숙감(李淑瑊)의 전사청(典祀廳) 기문에, “문묘가 있음으로부터 곧 이 제사지내는 법이 있게 되었다. 한 달에는 삭망에 제사지내고, 한 해에는 춘추(春秋)로 제사지내는데, 반드시 서무(西廡)의 빈방을 빌어 제물을 만드는 장소로 삼았다. 또 악기를 신문(神門) 옆의 노천(露天)에 두매, 바람과 비가 들이쳐 썩어 망가지기 쉬웠다. 사생(師生)으로서 묘정(廟庭)에 종사하는 자들은 오랫동안 이것을 근심하였다. 임진년 가을에 대사성 이극기(李克基)가 지관사(知館事) 서거정(徐居正)과 영의정 신숙주(申叔舟)와 의논하고 이 일을 자세히 아뢰었더니, 임금께서는 재목과 기와와 목수를 내려 주시고, 이어 본관(本館)으로 하여금 종들을 부려 짓게 하였다. 드디어 서무(西廡)의 서쪽 빈땅을 가려 동쪽에는 세 칸을 지어 악기를 보관하고, 남쪽에는 네 칸을 지어 제물을 만드는 곳으로 쓰게 하였다. 그리고 그 동서 양쪽에 담을 쌓아 튼튼하게 하였다. 이윽고 제사를 올려 그 사유를 고하고, 그 서쪽 벽에 문을 내어 출입을 편리하게 하니, 다섯 달이 걸려서 완성되었다.나는 생각건대, 인류가 생긴 이후로 공자 같은 이가 없었으니, 그의 훌륭함은 요순(堯舜)보다도 나으니, 우뚝히 남면(南面)으로 모시어 영원토록 떳떳한 제사를 지냄이 당연하다. 노애공(魯哀公) 때부터 송원(宋元)에 이르기까지 각각 제사지내는 예와 높이는 법이 있었던 것은 역사에 갖추어져 있으므로 상고할 수 있다. 우리 태조 강헌대왕이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는 맨 먼저 문묘(文廟)를 세우매 묘(廟)가 빛났는데, 여러 임금께서 서로 이어 그 아름답게 꾸밈을 더하였다. 지금까지 70여 년 동안 선성(先聖)을 높이고 제사를 소중히 여겨 그 예문과 정성과 공경이 지극하면서도 청사(廳舍)가 없었던 것은 어찌 오늘을 기다림이 있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겠는가? 삼가 생각건대, 주상 전하는 하늘이 내신 위대한 성인으로 태평의 운수를 누리어 몸소 묘(廟)에 알현하는 예를 행하여 문교(文敎)가 성하게 일어나고, 또 태뢰(太牢)의 제사를 거행하여 그 제사가 지극히 풍성하니, 그 근본을 복돋우고 선비들을 격려하심은 바로 주왕(周王)의 〈한록(旱麓)〉시와 그 기틀을 같이하는 것으로 여러 대에 미처 하지 못했던 전례(典禮)가 하루 아침에 거행되어 묘정(廟庭)의 일이 마쳐졌으니, 이것은 바로 우리 유도(孺道)의 하나의 큰 다행이라 하겠다. 아, 한 나라 고조(高祖)가 선비에게 거만하여 관(冠)에 오줌을 싸고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으니, 시서(詩書)를 어찌 일삼으랴?’ 하였지만, 노 나라에서의 한 번 제사가 오히려 한 나라의 4백 년의 운수를 터 닦았는데, 하물며 임금님이 도를 소중히 여기고 선비를 높여 제사지내는 법을 엄하게 하고 묘(廟)의 제도를 새롭게 하는 아름다운 뜻이 이와 같으니, 우리 조선의 억만년의 무궁한 명맥과 정신이 어찌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하였다.『신증』 지금 임금 12년에 고려 시중 정몽주(鄭夢周)를 서무에 종향(從享)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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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2권 / 비고편 - 동국여지비고 제1권 / 경도(京都)
문묘(文廟) 성균관(成均館) 명륜당(明倫堂) 남쪽에 있다. 대성전(大成殿)은 북쪽에 있어 남향인데 모두 5칸이며, 앞에 두 층계가 있고 뜰 동ㆍ서쪽에 각각 무(廡)가 있다. 전 남쪽과 전 동쪽에 각각 정문이 있으며, 동무와 서무 남쪽에 각각 작은 문이 있다. 신주(神廚)는 서무(西廡) 서북쪽에 있고, 전사청(典祀廳)은 또 그 서쪽에 있다. 하련대(下輦臺)가 전 동문 밖에 있는데, 열성조가 알성(謁聖)할 때는 반드시 여기서 연(輦)에서 내린다. 향관청(享官廳)은 명륜당 동북쪽에 있다. ○ 신좌(神座)는 문선왕(文宣王)이 중앙에 있어 남향하며, 배향(配享)은 안자(顔子)ㆍ자사(子思)가 정위(正位) 동남쪽에 있어서 서향하고, 증자(曾子)ㆍ맹자(孟子)가 정위 서남쪽에 있어서 동향하는데 모두 북쪽이 위이다. 전 안의 종향(從享)은 민손(閔損)ㆍ염옹(冉雍)ㆍ단목사(端木賜)ㆍ중유(仲由)ㆍ복상(卜商)ㆍ주돈이(周惇頤)ㆍ정이(程頤)ㆍ장재(張載)가 동벽(東壁)에 있어 모두 서향하며, 염경(冉耕)ㆍ재여(宰予)ㆍ염구(冉求)ㆍ언언(言偃)ㆍ전손사(顓孫師)ㆍ정호(程顥)ㆍ소옹(邵雍)ㆍ주희(朱熹)가 서벽(西壁)에 있어 모두 동향인데 모두 북쪽이 위이다. 동무의 종향은 담대멸명(澹臺滅明)ㆍ원헌(原憲)ㆍ남궁괄(南宮适)ㆍ상구(商瞿)ㆍ칠조개(漆雕開)ㆍ번수(樊須)ㆍ공서적(公西赤)ㆍ양전(梁鱣)ㆍ염유(冉孺)ㆍ백건(伯虔)ㆍ염계(冉季)ㆍ칠조치(漆雕哆)ㆍ칠조도보(漆雕徒父)ㆍ상택(商澤)ㆍ임부제(任不齊)ㆍ공량유(公良孺)ㆍ진염(秦冉)ㆍ공견정(公肩定)ㆍ교단(鄡單)ㆍ한문묵(罕文墨)ㆍ공조구자(公祖句玆)ㆍ현성(縣成)ㆍ연급(燕伋)ㆍ안지복(顔之僕)ㆍ낙흔(樂欣)ㆍ안하(顔何)ㆍ적묵(狄墨)ㆍ공충(孔忠)ㆍ공서장(公西藏)ㆍ시지상(施之商)ㆍ진비(秦非)ㆍ신장(申棖)ㆍ안쾌(顔噲)ㆍ좌구명(左邱明)ㆍ곡량적(穀梁赤)ㆍ고당생(高堂生)ㆍ모장(毛萇)ㆍ유향(劉向)ㆍ정중(鄭衆)ㆍ노식(盧植)ㆍ복건(服虔)ㆍ한유(韓愈)ㆍ양시(楊時)ㆍ호안국(胡安國)ㆍ장식(張栻)ㆍ황간(黃榦)ㆍ진덕수(眞德秀)ㆍ설총(薛聰)ㆍ안유(安裕)ㆍ김굉필(金宏弼)ㆍ조광조(趙光祖)ㆍ이언적(李彦迪)ㆍ김인후(金麟厚)ㆍ성혼(成渾)ㆍ송시열(宋時烈)ㆍ박세채(朴世采)는 모두 동쪽에 있어서 서향인데 모두 북쪽이 위이다. 서무의 종향은 복불제(宓不齊)ㆍ공야장(公冶長)ㆍ공절애(公晢哀)ㆍ고시(高柴)ㆍ사마려(司馬黎)ㆍ유약(有若)ㆍ무마시(巫馬施)ㆍ안신(顔辛)ㆍ조휼(曹卹)ㆍ공손룡(公孫龍)ㆍ진상(秦商)ㆍ안고(顔高)ㆍ양사적(壤駟赤)ㆍ석작촉(石作蜀)ㆍ공하수(公夏首)ㆍ후처(后處)ㆍ해용장(奚用藏)ㆍ안조(顔祖)ㆍ구정강(句井疆)ㆍ진조(秦祖)ㆍ영기(榮旂)ㆍ좌인영(左人郢)ㆍ설방(薛邦)ㆍ원항(原亢)ㆍ염결(廉潔)ㆍ숙중회(叔仲會)ㆍ규손(邽巽)ㆍ공서여여(公西輿如)ㆍ거원(蘧瑗)ㆍ임방(林放)ㆍ진항(陳亢)ㆍ금장(琴張)ㆍ보숙승(步叔乘)ㆍ공양고(公羊高)ㆍ복승(伏勝)ㆍ대성(戴聖)ㆍ동중서(董仲舒)ㆍ공안국(孔安國)ㆍ두자춘(杜子春)ㆍ정현(鄭玄)ㆍ범영(范甯)ㆍ사마광(司馬光)ㆍ옹언(雍彦)ㆍ이동(李侗)ㆍ여조겸(呂祖謙)ㆍ채침(蔡沈)ㆍ허형(許衡)ㆍ최치원(崔致遠)ㆍ정몽주(鄭夢周)ㆍ정여창(鄭汝昌)ㆍ이황(李滉)ㆍ이이(李珥)ㆍ김장생(金長生)ㆍ송준길(宋浚吉)은 모두 서쪽에 있어서 동향인데 모두 북쪽이 위이다. ○ 중사(中祀)에 실려 있는데, 매해 중춘과 중추의 상정일(上丁日)에 태뢰(太牢)로 석채례(釋菜禮)를 행한다. 삭망일 제사는 임진란 후로 폐지하고 분향(焚香)을 행한다. ○ 태조 7년(1398)에 세웠는데 정종(定宗) 2년(1400)에 불타고, 태종 7년(1407)에 중건하였다. 변계량(卞季良)의 묘정비명(廟庭碑銘)이 있다. 성종 3년(1472)에 전사청(典祀廳)을 세워서 향사 때, 음식 만드는 곳을 삼았다. 이숙감(李淑瑊)의 기문이 있다. ○ 향관청(享官廳)에는 홍귀달(洪貴達)의 기문과 영종의 어제 소지(小識)가 있다. ○ 연산군 때 문묘의 위판을 철거하여 고암리(高巖裏)에 두었다가 또 대평관(大平館)으로 옮기고 또 장악원(掌樂院)으로 옮겨서 차서(次序)에 질서가 없었으며 향화(香火)가 오래도록 끊기고, 성균관으로 흥청(興淸)들의 놀이하는 곳을 삼았는데, 중종 원년에 문묘를 중수하고 위판을 도로 모셨다. 선조 25년(1592)에 병화(兵火)에 헐리고, 이듬해 환도하여 단을 설치하고서 제사드리고, 문선왕(文宣王)의 위판을 받들어 전사청에 임시로 모셨다가 34년에 중건하였다. 인조조에 변계량이 지은 비문을 다시 새겨 묘정(廟庭)에 세웠는데, 이정귀(李廷龜)가 음기(陰記 비갈 뒤에 새기는 글)를 지었다. 15년(1637) 봄에 남한산성에서 돌아와 위판을 대성전에 모셨으며, 효종 4년(1653)에 향실(香室)을 지었다. ○ 대성전 현판은 한호(韓濩)의 글씨다. 계성사(啓聖祠) 문묘 서북쪽에 있는데, 숙종 25년(1699)에 세웠다. 제국공(齊國公) 공씨(孔氏)가 주향(主享)이며, 동쪽 배향(配享)은 곡부후(曲阜侯) 안씨(顔氏)와 사수후(泗水侯) 공씨요, 서쪽 배향은 채무후(菜蕪侯) 증씨(曾氏)와 주국공(邾國公) 맹씨(孟氏)이다. 매번 석채일(釋菜日) 자정마다 소뢰(小牢)를 사용하여 고제(告祭)를 드린다. 영종 35년(1759)에 어필로 현판을 써서 걸도록 명하였다. 숭절사(崇節祠) 문묘 동쪽에 있다. ○ 숙종 9년(1683)에 세웠다. 숙종조에 명하여 세우게 하고 영종 원년(1724)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고도 한다. 진(晉) 나라 태학생(太學生) 동양(董養)과 당 나라 태학생 하번(何蕃), 송 나라 태학생 진동(陳東)ㆍ구양철(歐陽徹)을 제사드린다. 영종이 지나다 들러서 어필로 유방아동(流芳我東) 네 글자를 써서 걸었으며, 36년에는 어필로 사현사(四賢祠) 세 글자를 써서 내려 현판을 걸도록 명하였다. 순조조에 진사 윤지술(尹志述)을 추사(追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