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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4월 4일 일요일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영이 계속 시기하며 열망합니다.—야고보 4:5. 우리는 시기심과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의 예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들은 요셉에게 큰 해를 입히고 여러 해 후에 그를 이집트에서 만났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기 전에 그들이 변화했는지 알아보려고 시험을 했습니다. 요셉은 형제들과 식사를 할 때 다른 형제들보다 막내 베냐민에게 훨씬 더 큰 관심을 나타냈습니다. (창세 43:33, 34) 하지만 형제들이 베냐민을 시기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동생인 베냐민과 아버지 야곱을 진심으로 걱정했습니다. (창세 44:30-34) 요셉의 형제들은 시기심을 이겨 냈기 때문에 가정의 평화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창세 45:4, 15) 우리도 시기심을 완전히 뿌리 뽑는다면 가정과 회중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가 시기심을 물리치고 평화를 추구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겸손과 만족하는 태도와 감사하는 마음을 기른다면, 시기심이 들어설 자리가 없을 것입니다. |
Do ye think that the scripture saith in vain, The spirit that dwelleth in us lusteth to envy?(KJV) 너희는 성경이 "우리 안에 거하는 영이 시기할 만큼 갈망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헛되다고 생각하느냐?(한킹역) Barnes' Notes on the Bible Do ye think that the Scripture saith in vain - Few passages of the New Testament have given expositors more perplexity than this. The difficulty has arisen from the fact that no such passage as that which seems here to be quoted is found in the Old Testament; and to meet this difficulty, expositors have resorted to various conjectures and solutions. Some have supposed that the passage is spurious, and that it was at first a gloss in the margin, placed there by some transcriber, and was then introduced into the text; some that the apostle quotes from an apocryphal book; some, that he quotes the general spirit of the Old Testament rather than any particular place; some regard it not as a quotation, but read the two members separately, supplying what is necessary to complete the sense, thus: "Do you think that the Scripture speaks in vain, or without a good reason, when it condemns such a worldly temper? No; that you cannot suppose. Do you imagine that the Spirit of God, which dwelleth in us Christians, leads to covetousness, pride, envy? No. On the contrary, to such as follow his guidance and direction, he gives more abundant grace and favor." This is the solution proposed by Benson, and adopted by Bloomfield. But this solution is by no means satisfactory. Two things are clear in regard to the passage: 반스의 성경 노트 "성경 말씀이 헛되다고 생각하느냐?"ㅡ 신약성서의 구절의 해설이 이보다 더 당혹감을 안겨 주는 곳은 없다. 어려운 점은 구약성서에서 인용될 것 같은 관련된 구절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난해한 구절을 설명하기 위해, 해설자들은 다양한 추측과 해설을 시도해왔다. 어떤 사람들은 그 구절이 가짜라고 생각하거나, 처음에는 필사자가 그 구절이 여백에 단 주석이었는데, 본문에 소개되었다고 생각했으며; 또 어떤 사람은 야고보가 출처가 불분명한 어떤 서적에서 인용한 것이라 생각하며; 어떤 사람은 그가 어떤 특정한 곳이 아니라 구약의 일반적인 정신을 인용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어떤 사람은 그것은 하나의 인용문이 아니라 온전한 의미를 가지기 위해 두 사람이 따로 읽혀진 것이 합쳐진 것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그러므로 너희는 성경이 그런 속된 경향을 정죄할 때, 정당한 이유 없이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하느냐 ? 아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 우리 그리스도인 안에 거하는 하나님의 영이 탐욕과 자존심과 시기심으로 미혹한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안내와 지시를 따르도록 하는 것이며, 그는 더욱 풍성한 자비와 은혜를 베푼다.' 이것은 벤슨이 제안하고 블룸필드가 채택한 해설이다. 그러나 이 해설은 결코 만족스럽지 않다. 이 구절과 관련하여 두 가지 분명한 점이 있다: (1) that James meant to adduce something that was said somewhere, or which could be regarded as a quotation, or as authority in the case, for he uses the formula by which such quotations are made; and, (2) that he meant to refer, not to an apocryphal book, but to the inspired and canonical Scriptures, for he uses a term ἡ γραφὴ hē graphē - the Scripture) which is everywhere employed to denote the Old Testament, and which is nowhere applied to an apocryphal book, Matthew 21:42; Matthew 22:29; Matthew 26:54, Matthew 26:56; John 2:22; John 5:39; John 7:38, John 7:42; John 10:35, et al. The word is used more than fifty times in the New Testament, and is never applied to any books but those which were regarded by the Jews as inspired, and which constitute now the Old Testament, except in 2 Peter 3:16, where it refers to the writings of Paul. The difficulty in the case arises from the fact that no such passage as the one here quoted is found in so many words in the Old Testament, nor any of which it can fairly be regarded as a quotation. The only solution of the difficulty which seems to me to be at all satisfactory, is to suppose that the apostle, in the remark made here in the form of a quotation, refers to the Old Testament, but that he had not his eye on any particular passage, and did not mean to quote the words literally, but meant to refer to what was the current teaching or general spirit of the Old Testament; or that he meant to say that this sentiment was found there, and designed himself to embody the sentiment in words, and to put it into a condensed form. (1) 야고보는 인용문을 다루는 형식을 사용해서 표현했기 때문에, 어딘가에서 언급되었거나 또는 인용문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경우의 말을 권위로 제시하려고 의도한 것이다. (2) 출처가 불분명한 책은 아니고 영감받고 정경으로 인정된 성서를 인용하려는 것으로 의도되었다, 왜냐하면 그가 사용한 용어인 성경(말씀, 개정) ἡ γραφὴ hē graphē - the Scripture)은 구약성서를 지적할 때 채택하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그가 말한 것은 출처가 불분명한 책이 아니다, 마태 21:42; 22:29; 26:54, 56; 요한 7: 38, 요한 7: 42; 요한 10:35 등. 이 단어(성경)는 신약성서에서 50번 이상 쓰이며, 바울의 글을 가리키는 벧후 3장 16절을 제외하고는유대인들이 영감을 받은 것으로 여겼던 책 이외에는 결코 적용되지 않으므로 현재 구약성서에 해당되는 책이다. 이 구절의 난점은 구약성서에서 인용한 구절이라면 사용된 단어들이구약성서에서 발견되어야 함에도, 그 어느 구절에도 인용문으로 간주될 수 있는 말씀이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내가 생각하기에 난관의 유일한 해결책은, 여기서 인용의 형태로 한 말에서, 야고보가 구약성경을 언급하고 있지만, 그는 어떤 특정한 구절에도 눈을 돌리지 않았으며, 문자 그대로 인용하려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가르침의 흐름이 무엇인지 또는 구약 성서의 일반적인 흐름을 언급하려 했다는 것이다. 또는 그는 거기에서 발견한 자신의 느낌을 말하려고 했고, 그 느낌을 말로 축약된 형태로 구체화하여 표현한 것이다. His eye was on envy as at the bottom of many of the contentions and strifes existing on earth, James 3:16, and of the spirit of the world which prevailed everywhere, James 4:4; and he refers to the general teaching of the Old Testament that the soul is by nature inclined to envy; or that this has a deep lodgement in the heart of man. That truth which was uttered every where in the Scriptures, was not taught "in vain." The abundant facts which existed showing its developement and operation in contentions, and wars, and a worldly spirit, proved that it was deeply imbedded in the human soul. This general truth, that man is prone to envy, or that there is much in our nature which inclines us to it, is abundantly taught in the Old Testament. Ecclesiastes 4:4, "I considered all travail, and every right work, that for this a man is envied of his neighbor." Job 5:2, "wrath killeth, and envy slayeth the silly one." Proverbs 14:30, "envy is the rottenness of the bones." Proverbs 27:4, "who is able to stand before envy?" For particular instances of this, and the effects, see Genesis 26:14; Genesis 30:1; Genesis 37:11; Psalm 106:16; Psalm 73:3. These passages prove that there is a strong propensity in human nature to envy, and it was in accordance with the design of the apostle to show this. The effects of envy to which be himself referred evinced the same thing, and demonstrated that the utterance given to this sentiment in the Old Testament was not "in vain," or was not false, for the records in the Old Testament on the subject found a strong confirmation in the wars and strifes and worldliness of which he was speaking. 그의 생각은 이 세상의 많은 논쟁과 싸움의 밑바닥에 존재하는 것이 시기심이라는 데 있었다.(약 3: 16), 그리고 약 4장 4절에서와 같이 어디에서나 널리 퍼져 있는 세상의 정신인 부러움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고, 그는 영혼이 본래 시기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구약성서의 일반적인 가르침을 언급하고 있다. 또는 이것이 인간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진리는 "헛되이"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다툼이 일어나고 진행되어, 심지어 전쟁을 일으키는 세속적인 정신을 보여주는 풍부한 사실들은 시기심이 인간의 영혼에 깊이 내재되어 있음을 증명해 주었다. 이 일반적인 진리, 즉 인간의 시기하는 경향이나, 우리 본성이 그렇게 기울어 진다는 것을 구약성서에서 충분히 가르쳐지고 있다. 전도서 4장 4절,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모든 재주로 말미암아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 욥 5장 2절,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 " 잠언 14장 30절 "평온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 " 잠언 27:4 "분노는 잔인하고 진노는 범람하는 물과 같다고 하지만, 사람의 질투를 누가 당하여 낼 수 있으랴? "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와 그 미치는 결과에 대해서 창세기 26장 14절, 창세기 30장 1절, 창세기 37장 11절, 시편 106장 16절, 시편 73장 3절을 참조하라. 이 구절들은 인간의 본성에 시기의 성향이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것이 야고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가 말할려는 시기심의 결과는 구약성서에서 이 정서에 주어지는 언급이 "헛되"거나 "거짓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데, 시기심에 대한 구약성서의 기록들은 그가 말하고 있는 다툼과 싸움이라는 세속적 경향에서 강한 원인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Saith in vain - Says falsely;" that is, the testimony thus borne is true. The apostle means that what was said in the Old Testament on the subject found abundant confirmation in the facts which were continually occurring, and especially in those to which he was adverting. The spirit that dwelleth in us - Many have supposed that the word "spirit" here refers to the Holy Spirit, or the Christian spirit; but in adopting this interpretation they are obliged to render the passage, "the spirit that dwells in us lusteth against envy," or tends to check and suppress it. But this interpretation is forced and unnatural, and one which the Greek will not well bear. The more obvious interpretation is to refer it to our spirit or disposition as we are by nature, and it is equivalent to saying that we are naturally prone to envy. 헛되이 말한다고ㅡ 즉, 이와 같은 증언은 진실이다. 야고보는 구약성서에서 그 주제에 대해 말한 것이 널리 일어나고 있는 사실들을 구약성서에서 풍부하게 발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안에 거하는 영ㅡ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영'이라는 단어가 성령이나 그리스도인의 정신을 가리킨다고 생각하지만; 이 해석을 채택하는 사람들은 '우리 안에 거하는 영은 시기심에 맞서는 욕망'이라고 구절을 번역하거나, 그것을 확인하고 누르려는 경향으로 번역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억지적이고 부자연스러우며 그리스어들이 이 의미를 잘 나타내지 못한다. 더 분명한 해석은 선천적으로 존재하는 우리의 정신이나 기질에 빗대어 말하는 것이며, 그 의미는 우리가 선천적으로 시기의 대상이 되기 쉽다는 말에 해당된다. Lusteth to envy - Strongly tends to envy. The margin is "enviously," but the sense is the same. The idea is, that there is in man a strong inclination to look with dissatisfaction on the superior happiness and prosperity of others; to desire to make what they possess our own; or at any rate to deprive them of it by detraction, by fraud, or by robbery. It is this feeling which leads to calumny, to contentions, to wars, and to that strong worldly ambition which makes us anxious to surpass all others, and which is so hostile to the humble and contented spirit of religion. He who could trace all wars and contentions and worldly plans to their source - all the schemes and purposes of even professed Christians, that do so much to mar their religion and to make them worldly-minded, to their real origin - would be surprised to find how much is to be attributed to envy. We are pained that others are more prosperous than we are; we desire to possess what others have, though we have no right to it; and this leads to the various guilty methods which are pursued to lessen their enjoyment of it, or to obtain it ourselves, or to show that they do not possess as much as they are commonly supposed to. This purpose will be accomplished if we can obtain more than they have; or if we can diminish what they actually possess; or if by any statements to which we can give currency in society, the general impression shall be that they do not possess as much wealth, domestic peace, happiness, or honor, as is commonly supposed - for thus the spirit of envy in our bosoms will be gratified. 시기하려는 갈망ㅡ 시기하는 경향이 강하다. "시기하여"라고 난하에 되어 있지만, 의미는 같다. 그 의미는, 인간에게는 다른 사람들의 우월한 행복과 번영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바라보는 강한 성향이 있다는 뜻이다. 즉, 그들이 가진 것을 우리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이나, 어떤 식으로든 그들을 속이거나, 사기나, 강도 등으로 빼앗으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비방, 논쟁, 전쟁, 그리고 다른 모든 것을 뛰어넘고 싶어 안달하게 만드는 강한 세속적 야망으로 이어지는 것이 바로 이 감정이며, 겸손하고 만족해야 하는 믿음의 정신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다. 모든 싸움과 분쟁과 세속적 계획을 근원까지 추적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ㅡ 심지어 그리스도인이라 공언하는 사람들의 모든 계획과 목적이 그들의 신앙을 해치고, 그들을 속속들이 세속 정신으로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ㅡ 얼마나 많은 것이 시기심 때문이라고 생각하는지 알게 되어 놀랄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번영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시기하고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가진 것을 소유하기를 원한다. 비록 우리가 그것을 누릴 권리가 없지만, 시기심은 그들의 즐거움을 줄이거나, 우리 스스로 얻거나, 그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할 만큼 소유하고 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다양한 잘못된 방법들을 추구하도록 만든다. 만약 우리가 그들이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면, 우리가 그들이 실제로 가지고 있는 것을 줄일 수 있다면, 또는 우리가 사회에서 통용될 수 있는 어떤 말에 의해서, 그들이 많은 부나, 가정의 평화, 행복, 또는 명예를 소유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마음 안에 거하는 시기하려는 영을 만족시키려 한다.() |
주석의 요점을 정리해 보면 야고보는 성경을 인용한 것이지만 같거나 비슷한 문구가 없는 것으로 보아서 구약성서의 어떤 흐름에 대해 자신의 느낌을 표현한 것이다. 인간의 시기적인 영에 대해서 그 영을 우리안에 거하는 영으로 표현한 것이지 성령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시기하는 마음을 물리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질 때 시기심을 북돋우는 마귀를 대적할 수 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더 큰 은혜를 받을 수 있다라는 것이 요점이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 영을 성령(개정)으로 번역하기도 하는데 이 번역에 의하면 성령이 질투한다는 뜻이 되는데 구약성서에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라는 구절을 떠올린다. 하나님이 질투하는 경우는 그의 백성들이 하나님 자신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경우이다. 야고보는 앞에서 세상과 간음하지 말라는 경고를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라 칭하는 자가 세상의 신과 간음하는 상태라면 충분히 이런 표현을 쓸 수 있고 구약성서에서 인용한 셈이 된다. 만일 이 두 가지 사실 즉 인간 시기하는 경향과 하나님의 질투의 속성을 오버랩시켜 표현하였다고 생각하면 훨씬 더 의미가 생동감 있게 살아난다. 즉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의 신과 간음하며 그를 섬기고 그의 영인 시기심을 반영할 때 시기의 하나님께서 그의 시기심이 일어날 정도로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그리스도인이 겸손한 마음으로 이 세상 신인 마귀를 대적한다면 하나님께서 그가 나타내신 시기심보다 더 큰 은혜를 주지 않겠느냐? 라는 흐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어떻게 이해하든 결과는 세상에 속하는 시기심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며 세상에 속하지 말라는 뜻이다. 우리 말에는 시기심과 부러움은 의미가 다르게 쓰인다. 시기심은 상대방에 대하여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그 입장에 해당되지 않는 위치나 상황에 있다고 비하시키는 마음이지만 부러움은 상대방의 입장이 자신도 원하는 그런 위치에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시기심은 없애야 할 나쁜 기질일 수 있으나 부러움은 어떤 희망의 대상으로 누구나 보편적으로 달하고자 하는 상태인 것이다. 그러나 시기심이나 부러움보다 차원이 높은 위치에 있는 영이 있다. 그것은 포용심이다. 이 세개의 용어의 차이점을 이해하기 위해서 하나의 예를 들어 설명하면, 매일 끼니를 동냥하여 얻어 먹고 사는 거지 갑과 을이 있다. 갑이 말 솜씨가 을보다 더 좋고 코도 더 크다. ^^ 그래서 갑은 언제나 밥을 충분히 얻어오고 때로는 맛있는 부식도 잘 얻어온다. 그런데 하루는 을이 흰 쌀밥과 고기국을 얻어와서 잘 먹고 있는게 아닌가. 이것을 본 갑의 마음 상태는 세 가지일 수 있다. 1 시기심이 일어난다. 2 부러운 마음이 일어난다. 3 포용한다. 1의 경우는 을이 자신보다 못난 놈이 그런 동냥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비하시키는 것이고 2의 경우는 을이 어디가서 그런 동냥질을 했는지 나도 그런 집이 걸렸으면 좋겠다는 희망이며 3의 경우는 "아 잘됐다 매일 같이 짬밥으로 배만 채우더니 오늘 포식하는구먼" 하고 자신은 그가 그렇게 되길 바라는 마음을 가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혹 시기심이 일어날 때면 상대를 비하하기 보다는 자신도 그렇게 될려고 노력하는 마음이 보다 나은 것이며 가장 높은 단계는 그를 포용하며 축복하는 것이다. 사실 3의 단계에 이를 정도면 그는 현 상태를 만족하는 것이며 상대가 어떤 높은 입지를 가지더라도 자신이 이미 그런 정도를 점하고 있거나 충분히 점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내재된 상태이다. 성서에 그런 예가 나오는데 모세의 경우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 거의 절대적인 권위를 갖고 있었다 하루는 장로 두 사람 엘닷과 메닷이 영을 받고 예언자처럼 행동하자 이를 젊은이가 모세에게 고자질 했을 때 모세는 그들에게 시기심을 나타냈는가? 아니면 자신도 그렇게 되고 싶다고 부러워 했는가? 아니다. 그는 그렇게 되는 것이 좋겠다고 대답하였다. 즉 그들을 포용한 것이다. 이처럼 포용한다는 자체가 그가 매우 영적인 성숙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며 시기한다는 자체가 매우 비성숙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인간이 가진 시기심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반즈의 주석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
첫댓글 그런데 질투(시기심)가 일어나는 원인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갑이 을을 미워하고 있는 상태에서 을이 기쁨을 나타내게 될 때 갑이 슬퍼지는 상태로 되며 을을 사랑하는 상태에서 을이 기쁨을 나타내게 되면 갑이 기쁨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기한다는 것은 이미 상대를 미워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시기심이 유발되지 않으려면 미움의 대상을 미리 제거하고 사랑의 대상으로 승화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모세가 예언자처럼 행세하는 장로들을 포용한 것은 이미 그들을 사랑하며 아끼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파수대나 반즈 주석에서 시기심을 물리치기 위해서 겸손해져야 한다고 하는데 겸손이 무엇인지를 파수대에서는 제대로 정의를 내리지 않고 있다. 파수대에서 겸손의 정의를 자신을 낮추는 것이라고만 기술한다. 이게 맞는가? 가령 어떤 사람이 자신에 대해 좋은 평가를 내릴 때 어떤 태도나 마음가짐이 겸손 또는 교만일까? 그 좋은 평가에 대해서 정당하다고 생각하며 기쁨을 가지는 것이 교만이고 부당하다고 생각하는데서 기쁨을 가지는 마음 상태가 겸손이다. 만일 정당하다고 생각하여 그 평가에 대해 기뻐하면서 겉으로 나타내는 표현만 자신을 낮춘다면 그것은 위선이다. 왜냐하면 정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이 기쁜 상태이므로 다른 상황에서 그 기쁨이 표출되기 때문에 여전히 자신은 그 평가를 정당하다고 나타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겸손하게 되기 위해서는 그 평가가 부당하다고 느낄 뿐만 아니라 그 부당하다고 느끼는 데서 기쁨이 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