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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죽장(竹杖)에 넣은 밀서(密書)
왕(목종)을 주살하려다가 실패를 보고,
대량원군을 암살하려다가 역시 뜻을 이루지 못한 김치양은 조바심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루 하루 끌다가
왕이 대량원군에게 선위한다면 만사가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이었다.
목종 12년 정월,
김치양은 자기 집에 심복들을 불러모았다.
"이제는 별 수 없게 됐네. 비상수단을 쓸 수밖에 없어."
심복들은 숨을 죽이고 상전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자 김치양은 한층 목소리를 낮추어 밀계를 내렸다.
그 날은 바로 16일,
마침 동편에서 떠오르는 밝은 달빛을 받으며
치양의 심복 무사들은 어디론지 흩어져 갔다.
☆☆☆
이때 궁중에선 왕이
상정전(祥政殿)에 나와 관등(觀燈)을 하고 있었다.
"이해 들어 처음 보는 만월이라 곱기도 하구먼.
금년도 나라 일이 저 만월처럼 둥글고, 밝고, 부족한 데 없기를 바랄 뿐이요."
왕이 곁에 시립한 한 신하를 보고 이렇게 말했을 때였다.
갑자기 대부유고(大府油庫) 쪽에서 불길이 솟아오르더니
궁녀들이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린다.
"이 어찌된 일인고?"
왕은 크게 놀라서 시신에게 물어보았으나 누구하나 진상을 알려 주는 자는 없었다.
기름 창고에서 일어난 불길은 삽시간에 퍼져서 태후가 거처하는 천주전까지 연소되었다.
"아니, 모후가 계신 천주전까지.."
효성이 지극한 왕은
김치양에게 농락되어 자기를 해치려는 모친을 그래도 누구보다 염려했던 것이다.
"태후께서는 급히 피신하시었다고 하옵니다."
한 궁녀가 알려 준다.
그제서야 겨우 마음을 놓은 왕은
곧 호부시랑 최사위(崔士威)를 부르도록 했다.
"아무래도 이번 화재의 원인이 심상치 않으니 군사를 통독하여 수상한 자가 있으면 잡도록 하라."
왕의 명령을 받은 최사위는 즉시 군사를 거느리고 왕의 신변을 호위하는 한편 궁중을 수색했다.
이번 불은 김치양이 심복을 시켜 지르게 한 것이었다.
그러나 최사위의 재빠른 조처로 왕의 신변이 철통같이 호위되는 것을 보니 더 일을 벌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일단 단념하고
궁성밖에 숨겨 두었던 무사들을 급히 철수시켰다.
이렇게 해서 왕은 위기를 모면했으나 이번 일로 말미암아 받은 마음의 충격은 여간 큰 것이 아니었다.
"궁성에 불을 지르고 짐의 목숨까지 엿보는 역도가 있으니 내 무엇을 믿고 살아가겠는고."
왕은 매사에 전전긍긍하게 되었다.
큰소리만 나도 역도들이 쳐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하고 시신들을 불렀다.
잠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헛소리를 하기가 일쑤였고,
정사는 돌보지 않고 자기 신변의 안전만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국사 이승(國師二僧)과
대의 기정업(大醫奇貞業), 대복 진사조(大卜晋舍祚),
대사 반희악(大史潘希渥), 참지정사 유진(參知政事劉瑨),
중추원사 최항(中樞院使崔抗), 부사 채충순(副使蔡忠順) 등을
은대(銀臺)에서 숙직시켰으니 은대는 곳 승정원(承政院)의 별칭이다.
그리고 지은대사 이주정(知銀臺事李周禎), 우승선 이작인(右承宣李作仁),
좌사낭중 유충정(左司郎中劉忠正), 합문사인 유행간(閤門舍人庾行簡)등은 안에서 숙직하게 하고
친종장군 유방(親從將軍庾方), 중랑장 유종(中郞將柳琮), 탁사정(卓思政), 하공진(河拱辰)은
근전문(近殿門)을 지키게 하고,
호부시랑 최사위를 대정문별감(大定門別監)을 삼아
모든 궁문을 닫고 엄중히 경계하게 하였다.
말하자면 문무의 중요한 신하들과 중과 의사와 점쟁이까지 곁에 두어 신변을 보호하였으니
목종이 얼마나 겁을 집어먹게 되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항상 삼엄한 경비 속에 거처하면서도 왕의 마음은 놓이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의 불안은 신병을 만들어 항상 병석에 눕게 되었다.
☆☆☆
왕이 병석에 눕게 되니
대신들이 염려하여 문병하려 할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왕은 그런 것조차 한사코 마다했다.
"뭐라고? 문병을 하겠다?
아마 그놈이 문병을 빙자해서 짐을 해치고자 하는 것일 게다. 절대로 들여보내면 안 된다."
이렇게 펄펄 뛰는 형편이었다.
다만 좌사랑중 유충정과 합문사인 유행간 두 사람만 곁에 두고 모든 일을 대행시키게 했다.
유충정은 원래 발해 사람으로 별 재주는 없었으나 성품이 착실한 탓으로 왕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이와 반대로 유행간은 풍채가 미려하여
마치 어여쁜 여인과 같았고, 구변과 재치 또한 남달리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의 부친 품렴(稟廉)은 위위소경(衛尉小卿)이었으나
행간은 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아 마침내 벼슬이 합문사인에 이르렀다.
왕은 또 선지(宣旨)를 내릴 때엔 반드시 먼저 행간에게 묻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었다.
이렇게 되자 행간은
점점 교만 방자해져서 백관을 수족처럼 부려먹었으며
근시들은 행간을 대할 때 마치 왕을 대하듯 했다.
그러므로 왕을 해치려면
먼저 이 두 폐신(嬖臣)을 자기 패에 끌어들이는 것이 무엇보다도 긴요한 일이라고 김치양은 생각했다.
어느 날,
치양은 행간과 충정을 따로 따로 불러서 그 마음을 떠보았다.
"우복야께서 분부하신다면 어찌 물불을 가리겠습니까?"
약삭빠른 유행간은
김치양의 소생이 등극했을 때의 일을 계산에 넣고 그 자리에서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유충정은 달랐다.
"글쎄올시다. 아시는 바와 같이 아는 것도 없고 별 재주도 없으니 아무런 도움도 될 것 같지 않습니다."
이렇게 완곡히 거절했다.
뿐만 아니라 한 통의 밀서를 써서 행간이 없는 사이에 임금께 바쳤다.
김치양이 야망을 품고 심복을 모으며 거사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충정이 올린 글을 읽자 가뜩이나 불안에 떨고 있던 왕은 대경실색했다.
급히 대책을 강구해야 할 텐데
가장 좋아하던 유행간마저 치양 일당에 가담했다 하니 믿을 만한 자가 없었다.
☆☆☆
그래서 여러 가지로 궁리한 끝에
은대에서 숙직하고 있는 중추원부사 채충순을 침전으로 불러들였다.
채충순은 왕이 즉위한 후 특별한 총애를 받아
급사중(給事中)을 거쳐 중추원부사까지 된 인물이니
중추원부사는 곧 정삼품(正三品)의 고관이다.
이렇게 특별한 총애를 받았으면서도 언동이 겸허하고 심지가 강직하여 가히 믿을 만한 인물이었다.
채충순이 침전에 들어왔을 때 마침 유행간이 시립하고 있었다.
왕은 행간에게 물러가라는 뜻으로 눈짓을 했다.
그러나 방자한 행간은 모른척했다.
왕이 어째서 채충순을 불러들였나 알고 싶기 때문이었다.
다른 때 같으면 마음이 약한 왕은 그 이상 뭐라고 하지 않고 눌러 두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이 중대할 뿐만 아니라
유행간이 이미 김치양의 일당이 되었다는 정보를 들은 이상 그냥 둘 수가 없었다.
"너는 잠깐 이 자리를 피하도록 해."
그래도 유행간이 멈칫멈칫 하니까 왕은 마침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는 짐의 명을 어기러 드느냐?"
그제서야 행간은 깜짝 놀라 허둥지둥 밖으로 나갔다.
유행간의 발소리가 멀어진 것을 확인한 후
왕은 채충순에게 손짓을 하며 말했다.
"가까이 오오. 채부사."
채충순은 왕의 침상 두어자까지 가까이 가서 부복했다.
그러나 왕은 다시 손짓을 하며
"더 가까이 오오."
충순은 침상 곁에 바싹 다가가서 엎드렸다.
"고개를 드오."
고개를 드니 충순의 얼굴과 왕의 얼굴은 거의 마주 닿을 지경이었다.
그제서야 왕은 소리를 죽여 말했다.
"짐의 병이 심한 것을 기화로 왕위를 엿보는 자가 있다고 하는데 경은 알고 있소?"
충순은 잠시 망설이다가 왕의 귀에 입을 갖다 대고 속삭였다.
"신도 그런 풍문을 듣기는 했사오나 확실한 증거는 잡지 못하고 있사옵니다."
"그래? 그렇다면 내 이제 증거를 보이지."
왕은 이렇게 말하고 베개 밑에서 두 통의 봉서를 꺼내 보였다.
한 통은 대량원군이 보낸 것이며, 한 통은 유충정이 올린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김치양의 역모를 폭로한 글이다.
두 통의 글을 다 읽고 나자 충순은 안색이 변하며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일이 심히 급하옵니다. 속히 대책을 강구하셔야 할 줄로 아뢰오."
"짐의 병이 날로 우중하여 언제 무슨 일이 있을는지 알 수 없은 즉
무엇보다도 급한 일은 후사를 정하고 대통을 물려주는 일이오."
이 말에 충순은 눈물을 뿌리며
"슬픈 일이오나 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사옵니다.
하온데 어느 분을 후사로 삼으시겠습니까?"
"대량원군 순이 가장 마땅할까 하오.
혈통이로 보아 태조대왕의 손자가 될 뿐 아니라 그 인품이 족히 왕자의 풍모를 갖추고 있으니 말이요."
"그 점도 신이 생각하던 바와 같사옵니다."
"짐이 보기에 궁중에 사람은 많지만 믿을 만한 신하는 경과 최항 뿐이요.
최항과 의논해서 태조께서 창업하신 사직이 다른 성 가진 자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힘써 주오."
이렇게 말하는 왕의 눈에서도 눈물이 비오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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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충순은 즉시 최항을 만나 왕의 뜻을 전했다.
최항은 평장사 언휘(平章事彦 )의 손(孫)이니, 성종 때, 나이 이십으로 갑과(甲科)에 급제한 수재이다.
성종은 그 재주를 아끼어 우습유지제고(右拾遺知制 )란 벼슬을 주었으며,
후에 내사사인(內史舍人)을 시켰다.
그리고 목종 또한 그 인품과 재주를 사랑하여, 나라 일의 대소사를 일일이 의논하였으며,
이부시랑(吏部侍郞)을 거쳐 중추원사를 명하였으니
중추원사는 종이품의 고관일 뿐만 아니라, 중추원의 최고 책임자였다.
즉 채충순의 상관이 되는 셈이다.
최항은 총명이 과인하고, 말이 적고, 과단성이 있고, 청렴결백한 인물이었다.
그가 요직에 참여하게 되자 간혹 뇌물을 바치는 자가 있었으나
꾸짖어 물리치고 정당히 입수된 물건이더라도 사치스런 물건이라면 손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또 전하는바에 의하면 자기 집안 부녀자들에게는 화장과 옷치장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나라의 녹(祿)도 일년치를 한꺼번에 받는 것이 아니라 다달이 최저 한도로 필요한 것만 청했으므로
집에는 쌀 한 섬 남아 돌아가는 것이 없었다고 하니 그의 인품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
최항은 채충순의 말을 듣자 한참 동안 묵묵히 생각에 잠기더니
"그렇다면 신혈사에 사람을 보내어 대량원군을 모셔오는 수밖에 없구료." 했다.
그러자 채충순이 물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누구를 보내야 할는지요?
워낙 치양의 무리가 도처에 침투해서 섣부른 자를 보냈다간 오히려 큰 화를 당할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려."
"그럴 염려도 없지는 않소만 선휘판관 황보유의(宣徽判官皇甫兪義)를 보내면 어떨는지?"
"황보유의 말씀입니까? 그 사람 좋겠습니다.
원래 성품이 강직할 뿐 아니라 그의 선친이 창업에 공훈을 세운 바도 있으니
가문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뜻에서도 정성을 다할 것입니다."
"그러나 황보유의는 문관이니 만일 치양이 자객이라도 보내어 일을 방해하면 어찌 하겠소?"
"그렇다면 무반랑장 문연(武班郞將 文演)에게 군교 십여 명을 주어 따르도록 합시다.
문연도 또한 충직한 사람이니까요."
이렇게 해서 대량원군을 모셔올 준비는 갖추어졌다.
그러나 비록 대량원군을 모셔다가 선위를 한다 하더라도
무력을 장악하고 있는 김치양이 최후의 발악을 한다면 어떤 변이 일어날는지 저으기 염려되었다.
"김치양 일당을 누를 만한 힘이 없을까?"
최항은 채충순을 돌아보며 묻는다.
"글쎄올시다. 서울 안의 무변은 어느새 그놈이 구슬러서 심복을 만들어 놓았으니까요."
"그렇다면 강조(康兆)를 불러오는 것이 어떨까?"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로 있는 강조 말씀입니까?"
"그렇소. 그 사람이 좀 사나운 데는 있지만, 잘 달래서 쓰면 못 쓸 바도 아닐뿐더러,
무엇보다도 김치양을 누를 만한 무력을 장악하고 있는 인물은 그 사람뿐이니 말이요."
"그렇다면 폐하께 아뢰어 강조를 불러오도록 합시다."
채충순도 최항의 말에 찬동하고 즉시 그 뜻을 왕에게 아뢰었다.
강조는 미미한 무변의 출신이었으나 용력이 과인하여
차츰 관직이 올라 중추사우상시를 거쳐 서북면도순검사로 북녘 땅에 가 있으니,
그가 거느리는 장졸은 국경을 지키는 장병이다.
만일 입경한다면 김치양의 오합지졸들을 일소할 힘은 넉넉했다.
☆☆☆
왕은 곧 밀서를 써서 강조에게로 보냈다.
강조가 펴 보더니 < 즉시 군사를 대동하고 입경하도록 하라. >라는 간단한 사연이었다.
(조정에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입경하라는 것일까?)
의심은 되었지만
왕의 명이니 어길 수 없어 곧 휘하 장졸을 거느리고 서울로 향했다.
강조가 대군을 거느리고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자 누구보다도 당황한 것은 김치양이었다.
그래서 그를 막을 대책을 강구하느라고 마음을 조리고 있는데 자청해서 그 일을 맡겠다고 나선자가 있었다.
내사주서위종정(內史主書魏從正)과 안북도호장서기 최창회(安北都護掌書記崔昌會)였다.
이 두 사람은 원래 부정한 짓을 하다가 탄로되어 좌천된 탓으로 왕을 몹시 원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기회에 왕에 대한 앙심도 풀고
일이 성사된 후엔 김치양에게서 상도 받을 생각으로 이렇게 나선 것이었다.
두 사람은 즉시 서울을 떠나
북행하다가 동주 용천역(洞州龍川驛)에서 강조의 일행과 만났다.
"장군께 여쭐 말씀 있소이다."
위, 최 두 사람이 비장에게 청하니 강조는 곧 두 사람을 만나보았다.
"장군, 서울로 올라가시는 것은 중지 하심이 가할 줄 압니다."
위종정이 이렇게 말하자 강조는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왜 그런 소리를 하지?"
"장군의 신변이 심히 위태하실 것 같아서 알려 드리는 것이외다."
"내 신변이 위태하다고?"
고지식한 강조는 두 사람의 혀끝에 이내 농락이 되고 말았다.
"좀 더 자세히 말해 보오."
"상감께서 병환이 위중하시단 것은 알고 계시겠죠?"
"그건 알고 있소."
"그런데 상감이 마침내 승하하시고
그 틈을 타서 김치양이 자기의 소생을 왕위에 올려 앉히려고 획책하고 있소이다."
"그게 정말이오?"
강조는 눈이 휘둥그래진다.
"그러니 장군의 신변이 위험하단 말이올시다."
"그건 또 어째서?"
우둔한 강조는 입을 딱 벌리고서 고개 짓만 한다.
"야심만만한 김치양에게 가장 두려운 분이 누구겠습니까?
바로 정병을 거느리고 계신 장군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만일 거사를 했다가 장군이 복종하지 않으면
큰일이기에 상감의 밀지를 위조해서 장군을 불러 올린 것이외다."
그제야 강조는 눈을 끔벅끔벅하며
"이제 알겠군.
내가 무심코 입경하는 도중에 자객을 매복시켰다가 나를 없애버리려는 계책이로군."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간교한 위종정은 손을 휘두르면서
"자객 정도가 아니옵니다.
서울로 들어가는 요소 요소에 수만대군이 집결해 장군을 기다리고 있으니
장군께서 아무리 용력이 과인하시더라도 일천여 명 장졸로는 도저히 당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무서운 계교였다.
단순한 강조는 감쪽같이 속아넘어갔다.
"거 참 잘 알려 주었소. 그렇지 않으면 큰일날 뻔했구려.
자, 그러면 어떻게 해야 좋을 가?"
그러니까 위종정은 다시
"장군, 이렇게 하시지요.
일단 본영으로 돌아가셔서 생명이나 보존하시고 때를 기다리시는 게 상책일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군."
▶이리하여 강조는 즉시 군사를 거두어 되돌아갔다.
☆☆☆
강조가 되돌아갔다는 기별을 듣자 치양은 크게 기뻐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앞일이 걱정되었다.
"만일 그놈이 군사를 더 모아 가지고 쳐들어온다면 어떻게 하지?"
"그때엔 실력으로 대항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강조는 세상이 아주 바뀐 줄 알고 주춤하고 있으니
서울로 들어오는 관문을 굳게 경비해서 사람의 내왕을 끊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놈에게 서울 소식이 못 들어가는 것 아닙니까."
한 심복이 이렇게 진언하자 치양은 곧 그렇게 조처를 했다.
조정이 한참 어지럽게 되자 서울의 민심은 흉흉해졌다.
이 틈을 타서 김치양은 유언비어(流言蜚語)를 유포시켰다.
"상감이 승하하셨다."
"다음 임금은 김치양 어른의 아드님이 되신다나?"
"그렇다면 김씨 세상이 되는 셈이군."
"그렇고 말고. 왕씨는 이제 다 망해 버렸으니 김씨에게 곱게 보여야지."
이러한 유언비어에 현혹된 사람 중에 강조의 부친이 있었다.
그러나 강노인은 충직한 인사였다.
김씨 세상이 되었다고 김치양에게 아첨할 의사는 추호도 없었다.
"태조께서 창업하신 사직을 추잡한 정을 통해서 낳은 김가 놈에게 뺏기다니..."
☆☆☆
강노인은 주먹을 휘두르며 비분강개(悲憤慷慨)하다가 밀서 한 통을 썼다.
아들 강조에게 보내는 밀서로 그 내용은
<상감이 승하하신 틈을 타서 간신 김치양이 왕권을 노리니
급히 군사를 거느리고 입경하여 간신들을 소탕하고 사직을 공고히 하도록 하라.> 이런 밀서였다.
그러나 그것을 아들에게 보내는 것이 큰 문제였다.
서울에 들어오는 관문을 굳게 지키고 사람들의 왕래를 금하고 있으니
무슨 방법으로 서울을 빠져나가 밀서를 아들에게 전할 것인가?
곰곰 생각한 끝에
자기가 항상 집고 다니는 죽장(竹杖)속에 밀서를 돌돌 말아 넣고 진흙으로 봉했다.
그리고는 가장 신임하는 하인 하나를 불렀다.
"이것 보아라. 너, 나를 위해서, 아니 나라를 위해서, 어려운 일을 해야겠어."
"무슨 일인지 모릅니다마는, 나으리 댁에서 잔뼈가 굵고 극진한 은총을 입은 몸이오니
나으리의 분부시라면 못할 일이 무엇이겠사옵니까?"
강 노인은 하인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조금도 꾸밈없이 지성이 가득해 보였다.
"그렇다면 이리 가까이 오너라"
하인은 앞으로 다가갔다.
"거기 앉아라." 무릎을 꿇고 앉았다.
강노인은 갑자기 품에서 비수 한 자루를 꺼내들었다.
새로 갈아 날이 시퍼렇게 선 비수였다.
강노인은 그 비수를 하인의 목 줄기에 갖다 대었다.
그러나 하인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무섭지 않으냐?"
"나으리께서 하시는 일이 어찌 두렵겠사옵니까?"
"그만하면 됐다!" 강노인의 입가에는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면 네 머리를 깎겠다. 괜찮으냐?"
"처분대로 하십시오."
그 당시의 사람에겐 머리털은 남녀를 막론하고 목숨 다음으로 소중한 것이었다.
그러나 하인은 선선히 고개를 내밀었다.
"고맙다."
한 마디하고 강노인은 하인의 머리를 그 비수로 빡빡 깎아 주었다.
그리고 나서 비로소 하인의 사명을 일러주었다.
"너는 이제부터 중의 행색을 하고 서울을 빠져나가 이 밀서를 내 아들에게 전해 다오.
그리고 누가 묻거든 묘향산 중이라고 말해라."
"분부대로 하겠사옵니다."
하인은 즉시 중의 행색을 하고 곧 집을 나섰다.
☆☆☆
서울을 빠져나가는 관문에 이르러, 과연 듣던 바와 같이 행인의 감시가 심했다.
관문을 지키던 한 병졸이 강씨네 하인을 보더니 "어디로 가는 길이요?" 하고 막아선다.
"소승은 묘향산 중인데 잠시 서울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외다.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하인은 제법 중의 태를 내며 태연히 말했다.
"어떠한 사람을 막론하고 서울을 빠져나가려면
몸수색을 단단히 하라는 명을 받았으니 스님 언짢아 마시오."
병졸은 하인을 진짜 중으로 알았던지 말만은 공손했지만 그 태도는 조금도 녹록치 않았다.
"나라에서 하시는 일인데 어찌 마다 하겠소이까? 자 법대로 하시오."
병졸은 하인의 몸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바랑이나 옷 속은 말할 것도 없고, 신까지 벗겨서 뒤져볼 판이었다.
(만일에 죽장 속에 넣은 밀서가 탄로된다면?)
자기 목숨은 말할 것도 없고 상전인 강씨 부자에게도 어떤 화가 미칠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 뒤지고 난 병졸은 이번에는 죽장을 잡아 보았다.
하인은 가슴이 철렁했다.
병졸은 죽장을 손에 들고 무게를 달아본다.
그 속에 이상한 것이 들어 있으면 무게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겠지만
종이 한 장쯤으로는 무게가 다를 리 없었다.
마침내 병졸은 하인에게 죽장을 도로 내주었다.
"좋소이다. 어서 가시오."
그제야 하인이 마음을 놓고 보니 어느새 등골이 흥건히 젖어 있었다.
이러한 고비를 몇 차례 넘기고는 겨우 강조가 있는 진영에 당도했다.
☆☆☆
강조는 낯익은 하인을 보고 깜짝 놀랐다.
"너, 어쩐 일이냐?"
하인은 잠자코 밀서를 내보였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쓰러져 피를 토했다.
먼길을 쉬지 않고 달려온 때문에 기진맥진한 모양이었다.
밀서를 읽고 나자 강조의 두 눈은 무섭게 빛났다.
"간신을 소탕하고 사직을 공고히 한다? 상감이 이미 승하하셨으니 치양 일파만 소탕한다면?"
그렇게 되면 나라의 일은 자기 마음대로 좌우 될 것이라 여겨졌다.
(문무 백관은 모두 내 앞에 꿇어 엎드릴 것이며 임금도 내 마음대로 세울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강조는 서울로 가다가 돌아온 후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오천 대군을 모아두었다.
그러므로 치양 일당과 정면으로 충돌하더라도 이제는 승산이 넉넉했다.
"때는 왔소. 서울로 곧 진격해야겠소."
우선 부사령관격인 도순검부사 이현운(都巡檢副使李鉉雲)에게 자기 뜻을 밝혔다.
이현운은 무인이라기보다 눈치 빠르고 약삭빠른 소인이었다.
그러므로 일의 옳고 그름을 가리기보다
자기에게 이로우냐 해로우냐를 따라 행동하는 인간이었다.
훗날의 이야기가 되지만,
글안주가 사십만 대군을 거느리고 쳐들어 왔을 때 이현운은 강조와 더불어 싸우다가 포로가 되었다.
이때 재삼 항복하라고 권고하는 글안의 말을 강조는 끝내 물리 쳤지만 이현운만이
"두 눈이 이미 새 일월을 우러러보게 되었으니 어찌 옛 산천을 생각만 하겠습니까?
(兩眼己瞻新日月 一心何億舊山川)." 라는 말로 적왕(敵王)에게 아첨하는 말을 한 인간이었다.
이런 인간이었으므로 이 기회를 타서 단단히 한 몫 보겠다는 마음이 굴뚝같았다.
"장군의 말씀, 지당한 줄로 아오. 즉시 입경하여 간신을 몰아내고 공을 세웁시다."
이리하여 강조는
이현운 이하 여러 부장(部長)들과 정병 오천을 거느리고 위풍당당(威風堂堂) 서울로 진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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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조의 군대가 황해도 평주(平州)땅에 이르렀을 때, 뜻하지 않은 정보를 입수했다.
아무래도 서울의 형세가 궁금해서 미리 보낸 척후병이 돌아와 보고를 한 것이다.
"상감께서 승하하셨다는 소문은 헛소문이옵니다.
김치양 일당이 판을 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상감께서도 아직 궁중에 건재하심이 사실이옵니다."
이 보고를 받자 강조는 한편으로는 크게 놀라고, 한편으로는 크게 낙담했다.
우둔하면서도 엉뚱한 야심을 품고 있던 강조는
왕이 살아 있다는 말을 들으니 어찌해야 좋을는지 알 수 없었다.
(상감이 승하하셨단 말을 들었기에 치양 일당을 소탕하고 국권을 잡아볼 생각이었는데,
그 상감이 살아 계시다니 치양 일당을 소탕한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 말야.
상감이 살아 계시니 다른 임금을 세울 수도 없고
그렇게 되면 내 마음대로 국권을 좌우할 수도 없고,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강조는 좀처럼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왕이 신혈사로 황보유의 등을 보내어 대량원군을 맞아들여 선위하려고 한다는 것을 강조는 미처 몰랐다.
또 왕이 자기를 부른 것은 치양의 역모를 물리치기 위한 것이라는 것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왕이 살아 있는 한 자기가 국권을 좌우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승산이 넉넉하게 대군을 거느리고 여기까지 왔는데
치양 일당을 소탕하지 않고 돌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억울한 일이다.
평주서 서울까지는 하룻길도 못되는 곳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대로 진격한다면
마침내는 왕과 맞서게 되어 역적의 누명을 쓸는지도 모른다.
"이대로 진격할 것이냐? 군사를 돌려 물러갈 것이냐?"
강조는 머리를 얼싸안고 같은 말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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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조가 망설이는 것을 보자
야심만만한 이현운은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장군! 무엇을 망설이시오?
대장부가 한 번 뜻을 정했으면 끝까지 관철할 일이지 일을 당할 때마다 뜻을 굽히면 어찌하겠소?"
"그렇지만 상감이 살아 계시다니 치양 일당을 소탕한들 우리 뜻을 펼 수 없지 않겠소?"
"그러니 답답하시단 말씀이요. 상감이 방해가 된다면 폐립(廢立)하면 되지 않소?
원래 조정이 어지럽게 된 것도 상감이 너무 나약한 때문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터이외다."
"상감을 폐립한다?"
강조의 얼굴에 비로소 생기가 돌았다.
"그렇다면 새 임금으로 누구를 모실까?"
이현운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강조의 귀에 입을 대고 속삭인다.
"대량원군이 가장 적합한 분으로 압니다."
"대량원군? ...
음 그분은 태조대왕의 손이 되시는 분이니 대토을 계승하시기에 부족할 게가 없지.
그런데 그분이 지금 어디 계시지?"
"삼각산 신혈사에 계시다는 말을 들었소이다."
"그렇다면 우선 그 분을 모셔들이는 것이 급한 일이요.
누구를 보내서 모셔들이면 될까?"
"서경분사감찰(西京分司監察)로 있는 김응인(金應仁)이 가장 믿을 만하니 그를 보내도록 합시다."
▶이리하여 강조는 김응인에게 군사를 주어 신혈사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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