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216 연중6주간 수 – 133위 062° 안여집 요한 사도
“무엇이 보이느냐?”(마르 8,23).
133위 062° ‘하느님의 종’ 안여집 요한 사도
이름 : 안여집 요한 사도
출생 : 1822년 황해도 재령
순교 : 1866년 12월 17일 백지사, 황해도 해주
안여집(安汝執)[1] 요한 사도는 황해도 재령군 하방면(下坊面) 장미동(薔薇洞)에 살았으며, 슬하에 6남 2녀를 두었다. 그는 성품이 순량하고 정직한 데다가 찬찬하고 의리가 있었으므로 이웃 사람들이 모두 군자라고 칭찬하였다.
안여집 요한 사도가 처음 천주 교리를 듣게 된 것은 평안도에 살면서 등짐장사를 하는 김상영(金尙永)이 장미동에 있는 그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을 때였다. 김상영이 천주교의 참된 교리와 이단의 허망함, 하느님을 섬기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대해 자세히 말하자, 안여집 요한 사도는 이를 진리로 여겨 입교하게 되었고, 이후 아들 형제와 동네 사람 10여 명에게 교리를 전하여 입교시켰다.
이후 안여집 요한 사도는 교우들과 함께 기도 모임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점차 입교하는 이들이 늘어나자 교우들을 모이게 하여 공소 예절을 가졌고, 베르뇌 주교를 초청하여 판공성사를 보기도 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가 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장미동에는 해주 감영의 포교들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안여집 요한 사도는 먼저 공소 교우들을 다른 곳으로 피신시킨 뒤, 자기의 처자식과 함께 묵주 기도를 하면서 포교들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포교들이 들이닥치자, 그들과 함께 점심을 차려 먹고는 해주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았다.
문초와 형벌이 계속되는 가운데서도 안여집 요한 사도는 굳게 신앙을 증언하고, 천주 교리는 패륜(悖倫)의 학문이 아니라 진리의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설명하면서 “나는 하늘을 공경하고, 영혼을 구하는 데 힘썼으며, 나라를 사랑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도리를 실천해 왔는데, 어찌 이것이 죄가 될 수 있느냐?”고 항변하였다. 또 감사가 ‘배교의 증언으로 하늘을 보고 욕을 하라.’고 요구하자, “천주교는 존비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신봉해야 할 도리입니다.”라고 강조하였다.
아울러 안여집 요한 사도는 천주 교리를 알기 전까지 천주의 큰 은혜를 저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알지 못해 사욕과 마귀의 종이 되어 그릇되게 살았던 것을 깊이 뉘우쳤다. 그러자 감사는 참수된 교우의 머리를 내보이면서 ‘배교하지 않으면 이처럼 사형에 처할 것이다.’라고 겁을 주었다. 그럼에도 그는 조금도 굴하지 않았으며, “이미 나의 목숨을 천주를 위하여 바치기로 작정하였소. 천주는 만민의 왕이요, 만민의 아버지이신데, 어찌 백성이요 자식된 자로서 그분을 욕할 수 있겠습니까? 죽기로 결심했으니, 속히 처형해 주시오.”라고 하면서 다시 한번 신앙을 증언하였다.
이에 감사는 안여집 요한 사도에게 여러 차례 혹독한 형벌을 가하게 하였다. 그런 다음 그를 함께 있는 여러 교우들과 함께 백지사(白紙死)[1.1]에 처하도록 하였으니, 그때가 1866년 12월 17일(음력 11월 11일)로, 당시 그의 나이 44세였다. 이후 안여집 요한 사도의 시신은 거두어져 황해도 재령군 하방면 주암동에 매장되었다.[2]
[註]___________
[1] 안 요한 사도의 이름은 여집(汝執) 또는 여즙(汝楫)으로 나온다(『병인치명사적』, 1권, 36면; 『좌포도청등록』, 1868년 9월 12일).
[1.1] 백지사(白紙死) : (‘한국가톨릭대사전’ 5권, p.3233) ¶1866년 병인박해 때 전국에서 체포되는 천주교 신자가 많아지면서 사용되기 시작한 사형의 한 방법. 법전에 수록되지 않은 남형(濫刑)이지만, 비교적 손쉬운 방법이었기 때문에 비밀리에 행해졌다. ¶형벌 방법은 우선 죄인의 손을 뒤로 묶고 상투를 틀어 풀어 그 끝을 결박한 손을 묶은 뒤에 얼굴을 하늘로 향하게 하였으며, 그다음에 얼굴에 물을 붓고 그 위에 한지(창호지)를 물을 부어가며 켜켜로 붙여서 숨이 막혀 죽게 하는 것이었다. 갈매못성지 개발을 시작한 정규량(鄭圭良, 레오, 1883-1952) 레오 신부의 ‘정씨가사(鄭氏家史)’에 의하면, 1866년 12월 8일(양 12월 27)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정은(鄭溵, 바오로, 1804-1866)은 이 형벌로 죽임을 당하였으며, 서울의 절두산(切頭山) 순교자들에게도 이 형벌이 사용된 것으로 전해진다. ¶한편 구한말의 학자 황현(黃玹, 1855-1910)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백지사의 형벌을 설명하면서 “호사가들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뜻의 도모지(都某知)라는 말을 얼굴에 백지에 도배질하여 죽게 하는 도모지(途貌紙)에서 유래된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라고 기록하였다. 또 이를 토대로 하여 현대 표기어인 ‘도무지’(아무리 해도)가 ‘도모지’에서 유래된 것으로 설명하는 경우도 있지만 믿기는 어렵다.
죄인에게 가하던 조선 형벌은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 준용하던 명나라 ‘대명률(大明律)’의 오형(五刑)이 있었다. ① 태형(笞刑, 회초리질), ② 장형(杖刑, 몽둥이질), ③ 도형(徒刑, 강제노역), ④ 유형(流刑, 귀양), ⑤ 사형(死刑, 생명박탈). 사형에는,
정법(正法) 정형(正刑) | 참형(斬刑) | 참대시(斬待時) : 추분~춘분까지 형조에서 집행. 대역죄나 강상죄가 아닌 경우에는 ‘때를 가려서’ 만물이 자라는 시기인 봄에서 가을을 피해 형을 집행 |
참부대시(斬不待時) : 춘분~추분까지 병조에서 군문효수로 집행. 대역죄나 강상죄인의 경우에는 ‘때를 가리지 않고’ 형을 집행. 모반대역죄나 강상죄는 능지처사형(陵遲處死刑)[1.2]에 처하였다. |
교형(絞刑) | 존속에 대한 살상·구타·밀고, 노비의 하극상 및 주인 신주(神主)의 소각, 부녀자의 부족(夫族)에 대한 살상 등의 강상죄(綱常罪)와 화폐위조, 금지물품의 밀수출입, 금은의 사채, 진상품절취 등 경제사범과 월경도주, 외국인과의 비밀접촉, 국가기밀누설 등의 반국가사범 및 기타 공문위조, 분묘발굴, 혹세무민, 군율위반 등 같은 중죄인 처형. 신분이 높거나 고령자, 부녀자일 때 참형을 낮추어 교형으로 대행. |
법외(法外) 비정형(非正刑) (주로 濫刑) | 장사형(杖死刑) | 신문장에서 형틀에 묶어놓거나 옥중에서 목을 매고 집행(교형과 중첩) |
사사형(賜死刑) | 지위가 높은 양반 죄인들에게는 교형을 낮추어 사사형을 적용. |
백지사(白紙死) | 여산성지에서 다수 집행 |
동사형(凍死刑) | 1794년 1월 28일 밤중에 홍주옥뜰에서 냉수를 퍼부어 얼려 죽인 복자 원시장 베드로 |
기사형(饑死刑) | 옥중에서 굶겨 죽이는 아사형(餓死刑) |
수장형(水葬刑) | 해미성지 ‘진둠벙’에서처럼 결박하고 못에 익사시키거나 토사로 매장 |
매장형(埋葬刑) |
자리개질형 (捆繩刑) | 해미읍성 해미읍성에는 3개의 성문(진남문鎭南門·동문岑陽樓·서문枳城樓)과 1개의 암문(暗門, 북문)이 있다. 서문은 ‘정분문(靜氛門)’이라고도 불렸다. 서문 지루성 밖 바로 앞에 서산 운산~해미읍내로 연결되는 지방도 647번 도로가 있다. 예전에 읍성 서문 앞에 어른이 건너기에는 어지간한 도랑이 있었다. 그 도랑에 돌다리가 놓여 있었다. 박해시대, 특히 무진박해(1868) 때 그 돌다리 위에 가벼운 신자는 허리를 묶거나 다리를 잡고 패대기(자리개질)를 쳐 죽이고 무거운 신자는 군졸 2~4명이 사지를 잡고 높이 들었다가 돌다리에 내리쳐 죽였다. 그 시신들을 성내 호야나무에 목매달아 죽인 신자 시신들과 더불어 해미 서산고등학교 운동장 자리(현 해미면 읍내리 426)에 쌓아놓았다가 해미천에 물이 불으면 내다 버리거나 홍수로 생긴 둠벙에 던져버렸다. 그 둠벙에는 죽은 시신뿐 아니라 살아있는 어른 신자들과 품에 안은 어린 아이들(해미성지 유해경당에 현시된 어린아이 치아들을 볼 수 있다)을 끌고 가, 발로 차거나 등을 밀어서 떨어뜨려 익사시키거나 목이 부러지게 하여 죽였다. 교우들이 둠벙에 떨어지며 “예수 마리아!”라고 기도하였다. 그 “예수 마리아!”를 외교인 군졸들이나 구경꾼들이 “여수머리”로 알아듣고 ‘여수머릿골’이라 하다가 줄어서 ‘여숫골’이라 하였다. 그리고 죄인들이 죽은 둠벙이라 하여 ‘진둠벙’이라 불렀다. |
[1.2] 능지처사형(陵遲處死刑) : ‘조선왕조실록’에서 ‘대명률’에 부합하는 능지처사형 사례들은 주로 반역죄, 노비가 주인을 살해한 죄, 妻가 남편을 살해한 죄, 자식이 부모를 살해한 죄 등이었다. 조선시대에 살을 베고 저며서 뼈를 바르거나 사지를 토막 내는 능지처사는 행해지지 않았다. 대신 죄인의 사지(四肢)를 수레에 묶어서 각기 다른 방향으로 잡아당겨서 찢어 죽이는 거열형(車裂刑)으로 대신했다. 그것도 먼저 참형하고 나서 그 시신을 거열(車裂)하듯이 사지를 절단하는 형태가 많았다.
[2] 『치명일기』, 정리 번호 842번; 『병인치명사적』, 1권, 36-44면;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정리 번호 30번. 안여집 요한 사도의 순교 날짜가 양력인지 음력인지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