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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월, 러시아, 우크라이나 영토 크림반도 병합
-2014년 4월,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 내전발발 (친러반군 VS 우크라이나 정부군)
-2019년 2월, 우크라이나, 나토가입추진 (우크라이나-러시아간 갈등 고조),
-그리고 2022.02.24-러시아, 우크라이나 침공
해설: 결국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민간인들에게 까지 무차별적으로 이어진 포격으로 큰 인명 피해를 낳고 있다. 침공 직전 푸틴이 연설에서 밝힌 전쟁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푸틴: 나는 우크라이나가 단지 이웃 국가가 아니라 우리의 역사, 문화에서 뗄 수 없는 일부분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하지만 소련과 레닌이 매우 거친 방식으로 역사적으로 러시아의 땅이었던 우크라이나를 분리해 버렸다.
최원정/KBS 아나운서: 352번째 역사저널 그날 입니다. 지난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죠. (2022.02.24), 지금 우리가 녹화하는 현재 까지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데 방송이 나가는 지금 (3.8)에는 부디 전쟁이 끝났기를 기원해 봅니다.
이시원/배우: 제발 진짜 군인뿐만 아니라 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되고 있잖아요 (민간인 마저 희생되는 전쟁의 비극), 그 영상들을 요즘에는 너무 쉽게 접할 수가 있으니까 너무 참혹하고 전쟁이라는 게 이렇게 무서운 거구나.
최태성/한국사 강사: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전쟁이란 방법을 써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너무나도 많은 민간인들의 사망이 있기 때문에 지양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네요.
최원정: 전쟁으로 인해 항상 정치 경제 맥락이 있는데 (전쟁발발 배경), 오늘 중요한 키워드로 역사적인 맥락도 짚어보겠습니다. (정치+경제+역사), 우리에게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그곳, 약간 그동안 터부시됐던 소련의 역사가 그 중심인데요. 그래서 준비한 기획입니다. –철의 장막 소련 70년-류한수 교수님 나오셨어요. 독소전쟁에 이어서 또 뵙네요.
류한수/상명대학교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사실 역사를 알아야지 사태의 근원적인 뿌리를 알 수 있거든요. 소비에트 연방의 성립, 1922년 아니면 더 19세기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됩니다. 사실은 소비에트 연방 얘기를 해야 될 텐데요. 흔히 소련이라고 하는데 소련이라고 하면 우리나라에서 별로 긍정적인 얘기는 아니죠.
허준/방송인: 저의 입장에서는 무찌르자 공산당~붉은 괴뢰~라고 표현하면서 배웠던 시기고~
이시원: 소련~ 소비에트 연방~이 얘기는 들어봤는데 이게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솔직히 잘 안 와닿거든요
최태성: (이시원씨에게) 소련 시대를 살아 봤어요?
이시원: 아니요~
최원정: 젊은 세대, 제 아들(중3)만 해도 소련을 몰라요.
류한수: 올해가 2022년 아닙니까. 근데 소비에트 연방이 결성된 시기가 1922년 이에요 (100주년),
일동: 딱 100주년 됐네요.
-소련(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1922~1991년, 70년간 존속했던 역사상 최초, 최대의 공산주의 국가,
류한수: 소련은 소비에트 연방의 줄임말이구요. 소비에트 연방도 더 긴말의 준말입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소비에트를 바탕으로 해서 사회주의 이념을 내세우는 공화국이 있는데 이 공화국들이 모여서 하나의 연방을 만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소비에트 연방이라고 하는 것이죠.
-전성기 시절의 소련지도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 총15개 공화국으로 구성 (러시아, 카자흐, 우즈베크, 키르기스, 타지크, 투르크멘,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야, 아르메니아, 우크라이나, 몰도바, 벨라루스,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15개국),
이시원: 그럼, 교수님 질문이 있는데요. 소비에트 연방 CCCP (Soviet Union) 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미국이 지금 United States of America 이잖아요. 그러면 United 와 Union 의 차이가 있나요?
류한수: 차이점을 설명하자면 미국의 주들은 민족별로 이루어 진 게 아니라 지역별로 된 것이고요. 그런데 소비에트 연방공화국들은 민족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러시아 민족, 우크라이나 민족, 그 다음에 벨라루스 민족이 각기 다른 공화국을 만든 것이죠.
최원정: 정말 앞으로 해야 될 얘기가 너무나 많은데 오늘 우크라이나 전쟁분석과 소련의 탄생을 다른 차원에서 얘기해 주실 분을 모셨습니다. 고고학자 강인욱 교수님 반갑습니다.
강인욱/경희대학교 사학과 교수: 보통 제가 나오면 황금을 이야기하고 찬란함을 이야기해야 되는데 가슴 아픈 일에 제가 같이 있게 되었는데요. 사실 저는 전공은 고고학인데 유학을 90년대 중반에 러시아에서 5년 반 동안 살았거든요. 사실 오늘 주제가 푸틴인데 제가 유학시절에 푸틴을 본적이 있었거든요.
최원정: 직접에요?
강인욱: 물론 멀리서 봤죠. 그런데 뭐라할까 너무 사람이 왜소하고 키가 작아요 저보다 작았던 것 같애요. 비쩍 마르고 그래서 그때만 해도 옐친 말기에 계속 총리를 몇번 바꾸어 가면서 했기 때문에 몇 개월 안에 바뀔 줄 알았거든요. (당시 푸틴 총리), 제가 20대에 푸틴이 대통령이 되었는데 제가 지금 50대 거든요. 아직도 24년째 대통령을 하고 있으니까 현재 푸틴의 건강으로 봐서는 제가 환갑 때까지 대통령할 것 같애요.
최원정: 푸틴 자체가 정말 놀라운 인물이 아닐 수 없는데~처음 시작했을 때 푸틴 연설로 방송을 열었잖아요. 연설의 전문을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2022.2.21-푸틴 러시아 대통령 연설 中-레닌은 (…) 러시아 역사적 영토의 일부를 (우크라이나로) 분리, 스탈린은 (…) 폴란드, 루마니아, 헝가리 일부 땅을 우크라이나에 편입-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원래 별개가 아닌데 레닌과 스탈린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 굉장히 불만 섞인 표현이 나오거든요.
이시원: 작심해서 맥락은 분명히 있어요. 푸틴 입장에서 보면 지금 예전부터 이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 속해 있었던 나라였다. 그런데 소련이 탄생하면서 레닌이 우크라이나의 독립성을 인정해 주었고 스탈린이 그걸 이어가게 해 가지고 지금 이 사태가 만들어진 게 아니냐 레닌과 스탈린이 이런 일을 안 했다면 지금의 이런 일은 없는 것이다.
허준: 그러면 러시아 하고 우크라이나는 원래 같은 뿌리예요, 같은 나라인 거에요?
강인욱: 사실은 이게 우크라이나 자체가 슬라브인 민족으로부터 시작이 되었거든요. 약 2700년 전에 있었던 스키타이 라는 유목민족으로부터 슬라브인이 기원했다 라고 얘기하거든요. 근데 스키타이 민족은 우리가 기마민족이라고 해서 (스키타이-기원전 6세기~3세기경 남부 러시아 초원지대에서 활약한 최초의 기마 유목민족), 서쪽은 우크라이나부터 시작해서 동쪽으로는 만리장성 근처까지도 거의 똑 같은 문화가 물론 각각의 인종은 다르겠지만 강력한 화살과 기마로서 무장을 했었던 유목문화 민족이었다.
최태성: 어쨌거나 슬라브족의 연원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스키타이, 이 스키타이가 초원 지대에서 강력한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중요한 건 뭐냐하면 지금 말씀하신대로 하나의 나라를 형성하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882년에 처음으로 국가 라는 형태를 만들어냅니다. 그 이름이 바로 키예프 루스예요 (키이우(키예프) 루스 [882~1240년]-현재 키이우(키예프)를 중심으로 존재했던 국가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의 기원), 키예프 루스라는 나라가 있었던 지역이 어디냐 하면 지금의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러시아 이 일대가 키예프 루스가 세워진 것이죠. 이 싯점이 882년이니까 상당히 늦었다고 봐야되겠죠. 그때면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통일신라 말기쯤 되니까 그때서야 비로소 국가 단위로 만들어진 겁니다.
해설: 11세기 중반 키이우 루스는 볼가 강을 통한 중계무역을 통해 전성기를 만난다. 하지만 무역의 중심이 지중해로 옮겨지고 나라가 분열되면서 점점 쇠퇴의 길을 걷게 시작하는데~ 결국 1240년 몽골의 침공으로 수도 키이우가 함락되면서 키이우 루스는 멸망하고 영토의 대부분이 몽골제국의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된다.
최태성: 몽골 왕조 킵차크 한국이 루스라는 공국들의 연합의 중심지였다. 비옥한 키이우 일대를 직접 지배하고 그때 모스크바는 상당히 열악했거든요. 그때 모스크바는 간접 지배로 내버려둔거예요. 그 과정 속에서 모스크바도 나름대로 성장을 하면서 결국 그쪽으로는 대공국들의 중심지가 되면서 운명이 키이우와 모스크바가 바뀌게 된 것이죠.
허준: (몽골로부터) 독립운동 하기가 좋은 데가 모스크바 였군요
최원정: 키예프가 우리에게 익숙한 우크라이나 수도와 같은 거죠.
강인욱: 요즘에는 키이우 라고 많이들 하셔서~ 안타까운게 바꿀 것 같으면 진작 바꾸지~ 나라 생기고 30년 동안 안바꾸다가 입에 안붙긴 하는데요 이게 크(k)가 우크라이나 말로 우로 바꾸면 됩니다. (우크라이나 발음 규칙: V(브) ->W(우) 그리고 e (에) -> I (ㅣ) 로 하시면 됩니다. 히라코프 ->하리키우, 키예프 -> 키이우 그리고 몇 개 규칙이 있어요.
최원정: 그러면 여기서 역사를 조금 깊게 들여다 볼까요?
-비밀의 방에 새로운 창-안녕하세요, 어디선가 누구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 자리만 골라서 찾아가는 오늘은 이 자리, 골라서 찾아온 아나운서 김선근 입니다. 부탁드립니다~
최원정: 이광용 아나운서 어디 갔어요?
김선근/KBS 아나운서: 광용 선배님 일이 많으셔 가지고 바쁘시잖아요. 오늘은 스케줄이 겹쳤어요. 그 중에서 두 개 중에서 그날을 버리고 저날로 갔어요. 그래서 떠나버렸고 저는 항상 이날 만을 기다리기 때문에 그날은 제가 지키겠습니다. 선배님 오래 잘 되셔 가지고 쭉 바쁘셨으면 좋겠어요. 그럼 왔으니까 일 좀 할게요. 최근에 많은 명소들을 밝히고 있는 많은 조명들 입니다. 전쟁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우크라이나를 응원하는 의미죠. 우크라이나 국가는 아시다시피 파란색 노란색이잖아요. 푸른 하늘 아래 펼쳐져 있는 황금빛 농지를 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이렇게 농작물을 딱 준비를 했습니다. 이게 우크라이나 산이었으면 참 좋았을텐데 마트에서는 안 팔아요. 밀 콩 옥수수 모두 국산입니다. 알아보니까 우리나라는 우크라이나에서 사료용 곡물만 수입이 된다고 하네요. 어쨌던 우크라이나에는 전 세계 곡물 시장의 10%를 차지하는 아주 큰 곡창지대고요. 세계에서 중요한 농업기지입니다. 몽골제국이 탐을 냈고 독소전쟁의 핫플레이스 였으며 오늘날에는 세계인의 식탁을 좌지우지할만큼 중요한 곡창지대이기 때문에 유럽의 빵 바구니인 우크라이나는 항상 격동의 시기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이시원: 빵 바구니 우리 예전에 독소전쟁할 때 배웠어요.
허준: 빵 바구니라고 하니까 슬퍼~ 다들 집어갈 것 같은 느낌이드네요.
김선근: 몽골에서 벗어나 14세기 중반 이후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연합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워낙 폴란드가 괴롭히니까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도움을 요청하게 됩니다. 그래서 1667년 우크라이나를 가로지르는 드니프로 강을 중심으로 왼쪽은 폴란드, 오른쪽은 러시아가 지배를 하게 됩니다. 참고로 오늘날에도 우크라이나의 서쪽은 유럽 영향권, 동쪽은 러시아 영향권입니다.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여기서부터 러시아가 뻗어 나가기 시작합니다. 야금~ 야금~야금~ 우크라이나의 영토를 지배해 가던 러시아가 18세기 말이 되면 서쪽 일부를 제외하고 우크라이나의 영토를 전부 다 차지하게 됩니다. 참고로 이때 러시아가 전 세계 지표면의 6분의 1을 차지하게 돼요. 그만큼 대제국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런 러시아와 달리 우크라이나는 늘 이렇게 강대국 사이에서 고생을 하고 힘든 시기를 보내게 됩니다. 이렇게 지배를 받았던 우크라이나, 1917년에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게 돼죠. 이때 드디어 당당하게 독립을 선언하고 하나의 나라로 우뚝 섰으면 참 좋았을텐데~ 실패했구요. 잘 안됐고 1922년 우역곡절 끝에 소비에트 연방에 편입이 됩니다. 그리고 70년이 지난 다음에 1991년에 소련 역사가 끝나면서 비로소 마침내 독립하게 됩니다.
최원정: 김선근 아나운서 왜 그렇게 똑똑한지 몰라, 오늘 처음 알았네~
이시원: 몇 백년의 역사를 요약한 거예요.
김선근: 꽤 긴 거죠. 17세기 18세기 19세기 20세기 까지 굉장히 긴 거죠. 가장 중요한 게 빠져 있어요. 70년~ 소련 70년사가 빠져 있는데 제가 여기서 다 애기하면 교수님들 모셔놓고 너무 서운해 하실까봐 푸틴의 연설 속에 등장하는 처음에 레닌과 스탈린에 얽힌 중요한 얘기는 여러분이 다 해주시고요. 제가 토크에 문만 열어놓고 가겠습니다. 이 사람을 주목해 주세요. 레닌도 아니고 스탈린도 아니고 바로 라스푸틴입니다. 푸틴이 아닙니다. 하지만 푸틴 만큼이나 어쩌면 훨씬 여러분께 충격을 줄 겁니다. 19세기말~ 20세기초, 때는 바야흐로 제정 러시아 말기 학교는 다녔지만 학업태도가 불량해서 문맹이었구요. 결혼해서 아이를 일곱이나 낳았지만 나 몰라라 하고 나는 수도승이다 하고 각지의 성지를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노라 라고 말하는 행적조차 굉장히 요상한 이 사람의 이야기 한번 나눠보시죠 (러시아 제국 말기 최고의 스캔들 메이커 라스푸틴의 이야기),
해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겐 큰 걱정거리가 있었다. 사랑하는 외아들이 혈우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스스로를 성자라고 소개하며 황제 앞에 나타난 라스푸틴~그가 주문을 외우자 아들의 출혈이 기적처럼 멈추고, 그럼으로 이제 라스푸틴은 황제의 전지전능한 존재로 등극한다.
최원정: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를 쥐락 펴락 했던 비선실세로 아주 유명한 사림이잖아요. 근데 아주 요상해요.
강인욱: 사실 라스푸틴이라면 저와 같은 아재 또래들은요 보니엠 (Boney M) 이라고 하는 7080 디스코 그룹이 부른 노래가 있습니다. 라라 라스푸틴~러시아 황제의 연인~ 이런 노래가 있는데~
허준: 요즘 아이들도 라스푸틴은 모르지만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흑마법사 있잖아요. 검은 수염에~ 그게 전부 다 라스푸틴을 모델로 한 거라구요.
이시원: 진짜 저 사람에 관한 많은 썰이 있잖아요. 진짜 황실을 쥐락펴락 했다고 하는데 그만큼 매력적이었다는 설도 있고 그런데 확실한 건 농락당한 여자가 엄청 많았다고~
류한수: 사실은 라스푸틴이란 인물은 러시아 사람뿐만 아니라 전 세계 차원에서도 워낙 흥미로운 인물인데요. 너무 설이 많아서 정설이 뭔가를 알 수가 없습니다. 대개의 경우는 서방 언론에서 황색언론이라고 하죠. 황색언론에서 라스푸틴에 관한 증언이라든지 회고를 하면서 부풀려진 측면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 약간 나왔듯이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아들, 황태자가 혈우병 환자인데 조금만 피를 흘려도 피가 멈추지 않아서 빈사상태에 빠지는 위험한 상황이었는데요. 대개의 경우는 라스푸틴이 기도를 해서 피를 멈추게 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 부분에 관해서 너무 설이 많아서 정설을 찾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최태성: 어쨌던 그 결과 황태자의 출혈로 니콜라이 2세의 마음을 완전히 바로 통해 버린 거예요. 이렇게 되면서 니콜라이 2세는 라스푸틴에게 완전히 빠져 버렸고 진짜 비선실세가 된 거죠. 예를 하나 들면 1차 세계 대전 때 러시아가 사령관을 정해야 되는데 니콜라이 2세가 라스푸틴한테 당신이 한번 사령관을 정해 봐라. 이건 통수권을 그냥 완전 넘기는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이만큼 라스푸틴의 위력이 강해진 것이죠.
허준: 그런데 이게 방점을 어디에 찍고 문맥의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다른데 자꾸 라스푸틴이 대단히 뭔가를 했기 때문에 제정 러시아를 망하게 했다가 아니라 정말 무능력한 왕이었기 때문에 라스푸틴 같은 사람을 갖다 쓰고 그걸 믿고 나라를 망하게 만든게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어요.
류한수: 라스푸틴 한 사람이 제국을 무너뜨리지는 않았겠죠. 그런 사람의 어떤 말도 안되는 상황이 연출되는데는 그만큼 사회구조에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는데요. 러시아 제국 말기에 있었던 사회상황, 사회구조의 모순을 보여주는 사진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 사진을 같이 보시죠. (러시아 제국의 빈부격차 귀족 부르주아 VS 하층민),
이시원: 사진에서 빈부격차가 너무 심하게 나네요.
류한수: 러시아에서 엘리트 계층인 귀족계층과 부르주아 계층이 왼쪽에 있고 오른쪽에는 하층민들, 그러니까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인데요. 이렇게 큰 격차가 사진 한 장에서 느껴지죠.
최태성: (하층민) 저기 음식이 있긴 있는 거예요?
허준: 다들 싹싹 긁어 먹어가지고 아무 것도 없어요. 그러면 가운데 그릇에 있는 건 소금이에요? 밥하고 소금만 주나봐요.
이시원: 죽 같은데~
강인욱: 설탕일 가능성이 큰데요. 제가 시베리아에 발굴차 가면 저렇게 먹었거든요.
이시원: 죽에 설탕타서요~
강인욱: 일 많이 하기 때문에 열량을 높일려고 오트밀이나 메밀 죽에다~ 저거는 현장에서 길다랗게 통나무로 임시로 식탁 만들어서 갔다 주면 퍼가서 먹고~
류한수: 오른쪽 사진에서 러시아의 빈민들의 모습이 보이는데~턱수염이 없는 사람들은 도시 빈민일 것이고 턱수염을 기른 사람들은 농촌에서 살다가 일자리를 찾아서 도시로 올라온 사람들 입니다. 도시로 돌아와서 거처가 없기 때문에 저렇게 음식을 나눠주는 곳에 가서 하룻밤을 자고 음식을 먹는 그런 상황이었죠. 이런 식으로 사회적인 격차가 심했는데 당시의 러시아 정치 상황을 보면 19세기말 유럽에서는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면서 일반 사람들의 의사를 정치에 반영하는 체제가 차츰 차츰 성립하고 있었는데 러시아에서는 그런 민주주의를 거부하고 황제 한 사람이 모든 권력을 독점하고 정치를 펴는 전제정이 유지가 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전제정을 무너뜨릴려고 하는 목소리가 있었는데 이런 목소리를 황제가 극단적으로 탄압하면서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죠. 사회적인 격차와 정치적인 불만이 겹치면서 러시아 제국은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이시원: 제가 진짜 오른쪽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 차이가 많이 나고 이게 바뀌지도 않을거구~ 불만이 계속 쌓였을 것 같애요.
류한수: 그런 불만이 혁명으로 가게 되는 데는 이념이 필요한데요. 이 당시 유럽에서 마르크스 주의라고 하는 이념이 러시아에 도입되면서 러시아 자체의 불만 세력과 이념이 결합되면서 불꽃이 일어날 가능성이 생겼던 것이죠.
이시원: 부싯돌에서 스파크가 일어나고 있는 거네요.
최태성: 이 당시 제정 러시아가 어떤 상태냐 하면 봉건제, 농업사회를 한번 떠올려 보고요. 당시 제정 러시아는 산업이 굉장히 발달하면서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넘어가게 되는 단계에 있다고 보시면 되는데~ 마르크스 같은 경우는 이걸 어떤 식으로 파악했느냐 하면 소수의 자본가들이 다수의 노동자들을 착취하면서 부를 창출하고 있다. 그래서 심각한 빈부격차를 만들고 있다. 사회주의는 바로 다수의 노동자들이 소수의 자본가들을 타도하고 노동자들이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다 라고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죠.
최원정: 역사적으로 실패한 이론이라는 걸 다 아는데 당시에는 현실 불만이 굉장히 컸기 때문에 혹 했을 것 같애요.
최태성: 저렇게 열악한 상황에서 밥을 먹고 있는 저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 이론이 들어왔다 하면 이 마음에 불을 지필 수 밖에 없는 것 아닙니까. 혁명의 뜨거운 불길이 올라 올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그런 과정 속에서 거기 완벽히 매료되어서 이걸 이끌 정말로 유명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게 누굴까요? 아까 얘기 했던 사람인데~
이시원: 레닌!
최태성: 레닌이 등장하는 거죠.
강인욱: 사실 공산주의를 마르크스-레닌주의 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론적으로는 마르크스가 정립을 했지만 레닌이 완성했기 때문에 사실은 러시아에서는 마르크스보다 레닌이 더 추앙 받고 있습니다. 제정 러시아가 사회 계급간 불균형이 극심했기 때문에 수많은 러시아 국민들도 우리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이거라도 한 번 해보자 라는 것이 촉발되었기 때문에 강력한 힘을 내지 않았나 싶어요.
해설: 1917년 1월, 러시아에서 불셰비키를 지지하는 시민들이 일으킨 혁명이 성공한다. 마르크스 사상에 입각한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 그리고 그 중심에는 평화, 빵, 빵을 외치며 시민을 이끈 혁명가 레닌이 있었다 (레닌이 연설하는 사진),
류한수: 이렇게 1917년 10월 혁명으로 레닌과 볼셰비키당이 집권당이 되었습니다 (1917년 10월 혁명-제정 러시아 붕괴후 레닌의 불셰비키당, 시민이 합세해 일으킨 사회주의 혁명), 러시아는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가 됐죠. 그래서 권력이 레닌에게 넘어간 해가 1917년인데 그 이듬해 1918년에 제정 러시아가 혁명 러시아로 바뀌면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진이 한 장 있습니다 (귀족들이 눈을 치우는 혁명 직후의 모습),
허준: 아까 밥 먹던 사진과는 정반대가 되었네요. 이제 나와서 눈 치워라, 이전 단계의 세월을 경험했던 사람들이 이 장면을 봤을 때는 진짜 세상이 바뀌었구나.
류한수: 러시아에선 눈 치우는 작업은 가장 최하층민이 하는 노동입니다.
허준: 조선시대로 따지자면 사대부 사람들이 돼지를 잡고 있는 거와 같은데요.
최원정: 살다보니 별 날이 다 오네 라는 느낌이 들었을 것 같애요.
최태성: 1917년 10월 혁명으로 신분제가 완전히 없어져요.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갑오개혁 때 신분제가 없어지잖아요. 이러면서 황제 호칭 없어지고 귀족 호칭 없어지고 오로지 호칭은 이것 하나로 통일이 됩니다. 러시아어를 잘 못해서~
강인욱: 따바리쉬=동무
최태성: 한번 더 해 주실래요
강인욱: 따바리쉬 (생생한 러시아 본토발음), 러시아가 모든 신분제를 철폐하지 않습니까, 장교들 눈 치우는 것 저 풍습 아직도 보았어요. 유학시절에 수보트니크 라고 해서 모든 교수님들이 다같이 모여서 눈 치우는 것 같이 했던 적이 있었어요. 수프 끓이고 빵 썰고 눈 치우고 했는데 그걸 일년에 딱 두번 했었던 기억이 나는데 소련의 전통은 참 길었던 것 같애요. 그래서 갑자기 모든 이름을 철폐하고 따바리쉬로 통일하니까 저도 따바리쉬 하면 사회주의식 용어인줄 알았는데 처음 러시아에 가서 친구들한테 아~저~ 따바리쉬 하니까 까레스키 따바리쉬~한국 동무~ 저 북한사람 아니고 남한 사람인데요. 알고 있어 너 그래 너! 한국 동무, 러시아에선 동무=친근한 사이를 나타내는 거고요. 평소에도 가스빠(Mr) 라고 부르다가 친해지면 우리들이 이 양반 저 양반 하듯이 동무가 됐어요.
최태성: 동무라는 용어가 남북한 막론하고 친근한 사이를 의미하는 거예요. 아니~ 친구 따라 강남간다 라고 부르기도 했고요. 노래도 있잖아요. 동무들아 나오너라 달맞이 가자~
류한수: 1967~1987년 발행 어린이 종합잡지 어깨동무 라는 게 있었습니다.
최원정: 동무라는 단어가 낯설어요.
최태성: 6.25 전쟁 후에는 거의 금기시 되어 있어 가지고 제가 최원정 동무 이러면~
이시원: 북한 소재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들어보던 단어~
최원정: 근데 저는 혁명색 이념 이런 거 다 빼고 순수 우리말 동무만 썼으면 좋겠어요. 다시 찾고 싶어요.
강인욱: 어쨌거나 레닌은 그때까지 러시아의 농민들을 농노라고 해가지고 거주이동의 자유가 없었던 반노예 같았던 사람들이었잖아요 그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스탈린 같은 경우는 죽고 난 다음에 모든 동상들 도시명을 다 교체했으나 레닌은 여전히 동네마다 아무리 산골에 가도 그 가운데는 레닌 동상이 아직도 있구요. 어디를 가든지 간에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레닌 거리 갑시다 하면 알아서 도시 중앙 광장까지 데려다 줍니다. 택시기사가 레닌 거리 광장 가시겠습니까 그렇게 물어봐요.
이시원: 그게 하나의 지표처럼 되어 있네요.
강인욱: 레닌은 아직도 러시아에서 존경심을 유지하고 있어요. 제 생각에는 큰 이유 중의 하나가어쨌든간에 질곡을 끊어준 것도 있고 또 하나 큰 원인은 레닌은 혁명하고 나서 2년 만에 죽었어요. 권력 말기의 모습들을 아직 안 보여준 채 죽어서 신비감 같은게 아직도 있어 가지고~
이시원: 박수칠 때 떠났군요.
강인욱: 그래서 죽어서 미라가 되어서 보존 중이에요. 참고로 고고학적으로 러시아가 미라로 아주 유명하거든요. 그게 레닌, 스탈린, 호치민 등 공산정권 지도자 들을 미라로 만드는 기술이 발달했어요. 다른 사람 스탈린은 다시 매장했으나 레닌은 여전히 미라로 보존되어 있어요.
이시원: 우상화가 되었군요.
강인욱: 네, 박수칠 때 잘 떠났습니다.
최원정: 지금까지 얘기를 종합해 보면 모든 러시아 사람들이 대체로 레닌을 좋아하는데 푸틴은 레닌에 불만이 있는 거예요. 그 이유는 뭔지 모르는데 소련의 역사를 좀 더 드려다 보겠습니다. 그러면 답이 나오겠죠. 1917년에 10월 혁명이 있었고 소련의 탄생은 1922년, 그 사이에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는 얘기네요.
류한수: 러시아 제국이 해체되고 각 민족이 독립하는 상황이 됐죠. 그게 1918년의 모습인데요. 1918년에 혁명정부에 대항하는 반혁명 세력이 등장하게 됩니다. 혁명세력과 반혁명 세력 사이에, 1917~1921년, 4년간 피비린내 나는 내전이 벌어지죠. 더군다나 외국 자본주의 열강 제국주의 열강이 예를 들면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 등의 군대가 러시아 땅에 들어오거든요. 자체 내전과 외세의 개입으로 인해서 엄청난 혼란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런데 결국은 내전에서 승리했던 세력이 역시 혁명세력, 볼셰비키당이었습니다. 그래서 1921년, 22년이 되면 혼란을 수습하고 얼마만큼 체제를 정비한 다음에 흩어졌던 각 민족국가들을 소비에트 공화국 형태로 다시 모아서 1922년 12월 30일 소비에트 연방이 탄생됩니다. 소비에트 연방의 중심을 이루는 나라가 역시 러시아였고 러시아를 중심으로 소련 체제에 벨라루스 공화국이 가입을 하고 우크라이나 공화국이 가입하고 중앙 아시아에 있는 공화국들이 가입을 하면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소비에트 연방이 성립되게 돼죠.
최태성: 저 때 소비에트 연방이 여러 민족국가들이 들어올 때 제일 먼저 들어온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아세요?
이시원: 제일 먼저요~ 러시아 다음으로요~
최원정: 지금 우리가 얘기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최태성: 우크라이나가 제일 먼저 들어왔어요.
이시원: 우크라이나가 소련 연방에 들어간 건 레닌 덕인 거잖아요. 그러면 푸틴이 레닌을 싫어할 이유도 없을 법도 한데 왜 레닌을 싫어하는 걸까요?
류한수: 우크라이나는 옛날에 러시아 제국의 일부였습니다. 러시아 제국의 통치자들은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인정한 적도 없고 우크라이나가 독자적인 별개의 민족이란 것도 인정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크라이나에게 역사적으로 처음으로 독자적인 민족 독자적인 국가의 지위를 부여한 사람이 바로 레닌이었구요. 그럼으로써 오늘날 우크라이나가 독립국의 지위 독립된 민족으로서의 위상을 주장할 수 있는 어떤 단초를 제공한 사람이 바로 볼셰비키, 레닌 그리고 민족자결주의이다. 이 측면을 오늘날 푸틴이 집중적으로 비판하면서~
최태성: 지금 교수님이 민족자결주의를 얘기 했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3.1운동은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인데 라고 생각을 하잖아요. 진짜 원조는 레닌입니다.
류한수: 어떤 민족이 있을 때 민족의 정치적 앞날은 그 민족의 의사대로 결정을 해야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것이 민족자결주의가 레닌에게서 왜 나왔느냐면 소비에트 연방 이전의 체제였던 러시아 제국이 제국을 구성하는 소수 민족들을 탄압하는 그런 체제였어요. 그래서 러시아 제국을 부르는 또 다른 별명이 민족들의 감옥입니다. 이러한 러시아 제국의 민족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레닌이었고 볼셰비키였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만든 소비에트 연방은 아들 체제에 입각했던 것이죠. 그게 민족자결주의입니다.
허준: 땅을 갖게 됐고 그 땅이 너무 좋거든요. 전세계에서 가장 농사 짓기 좋은 땅이라고 불리니까 그래서 농사를 짓고 부유해지고 사람들이 풍족해졌으면 참 좋았을텐데~그렇게 진행이 됐다면 지금처럼 전쟁이 안났겠죠.
이시원: 그게 그렇게 된 거예요. 그게 해피 엔딩이 아니었던 거예요.
최원정: 레닌에 이어서 이 사람이 소련의 권력을 잡으면서 상황이 돌변합니다.
해설: 1924년 레닌의 사망 후 소련을 이끌 새로운 지도자로 떠오른 사람은 스탈린이었다. 소련을 이전보다 더 강력한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고자 했던 스탈린,
스탈린/당시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국 서기장: 우리의 공장은 자본가 없이 일합니다. 그것이 실제로 사회주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해설: 그의 부상으로 소련은 또 다른 격변기를 맞게 된다.
--------김선근: 자, 레닌의 관을 가장 앞에서 들고 있는 이 사람, 스스로를 강철의 사나이라고 불렀던 레닌이 유언장에서 절대로 이 사람에게 권력을 주지 말라고 신신 당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레닌의 후계자라고 셀프 포장했던 바로 이 사람,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 현재 법을 바꾸어 가면서 계속 집권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깨지 못한 29년 소련 장기 집권의 대기록을 갖고 있는 이 사람, 수식이 굉장히 길죠. 스탈린~
이시원: 근데 또 언제 저 기록이 깨질지 몰라요. 푸틴이 선거법을 바꾸어 가지고 36년까지 대통령을 할 수 있는데 그때가 되면 푸틴 나이 84세 라고 합니다(37년 집권).
김선근: 스탈린이 철의 사나이라고 하니까 푸틴은 합금 정도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해 봅니다. 스탈린은 한국사와 세계사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친 인물입니다. 우리 강인욱 교수님, 스탈린 본명을 원어로 불러주세요.
강인욱: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주가시빌리, 어렵죠~ 이름이 이오시프, 아버지 이름이 비사리오, 그리고 성이 주가시빌리인데요. 러시아 계통은 성만 알면 그 사람의 민족계통을 짐작할 수 있어요. 조지아 사람들은 ~시빌리 또는 ~제로 끝나요, 그리고 러시아 사람들은 ~프, 아니면 ~ㄴ으로 끝나요. 푸틴, 브레즈네프 다 러시아 사람들이고 그 다음에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코로 끝나요, 체르넨코, ~스키로 끝나면 전체 다 있고~
최태성: 도스토에프스키,
강인욱: 아까 스탈린의 러시아 말이 부정확해요. 이 사람이 러시아 사람이 아니라 조지아 사람이거든요. 그러니까 이 사람이 자기 성만 밝히면 러시아 사람도 아닌데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뭔가 강력한 러시아 다운 이름이 필요했죠. 스탈린인 거죠.
김선근: 말씀하신 것처럼 스탈린은 소수 민족이지만 그런데 이 스탈린이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게 돼죠. 배경은 이렇습니다. 소련이 수립되고 2년 뒤 레닌이 사망합니다. 권력을 잡은 스탈린이 내전으로 무너진 소련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서 경제계획을 단행하게 됩니다. 여기 계신 어르신들은 아마 익숙한 개념일거예요.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이 경제개발 5개년~ 류 교수님, 스탈린이 했던 것 이게 어떤 거죠?
류한수: 러시아가 사실은 혁명을 일으켜서 국가체제를 바꾸었다고 했잖아요. 산업구조는 아직 농업 위주의 국가였거든요. 그런데 혁명가들에게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인간해방, 두번째는 근현대화입니다. 근데 시간이 흘러 가면서 인간해방이라는 가치는 뒷전으로 밀리고 어쨌든 간에 러시아가 다른 국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서는 경제가 개발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 가지고 중앙에서 계획을 세우고 5년 단위로 기간을 끊어서 계획된 경제를 시행합니다. 그러면서 국가에 있는 모든 재원을 집중적으로 모아서 산업에 투자해서 경제 성장률을 끌어올린다는 것이죠.
김선근: 말씀하신 것처럼 농업을 공업으로 바꾸는 겁니다. 농업을 공업으로~ 근데 앞서 말씀 드렸잖아요. 유럽의 빵 바구니, 세계적인 곡창지대가 어디라구요?
최태성: 우크라이나
김선근: 어디죠?
일동: 우크라이나,
김선근: 그러니까 뭔가 바꾸는 과정에서 이 우크라이나와 뗄래야 뗄 수 없는 습하고~ 으슥한 그런 어떤 불길한 느낌이 삭삭 느껴지시죠. 일단 여기까지만 기억해 두시고요. 스탈린이니까 스탈린의 경제개발계획이 발표될 때 스탈린이 요렇게 얘기합니다. 모든 나라가 러시아를 때렸습니다. 러시아의 후진성 때문에 우리는 선진국들에게 50년~100년 가량 뒤떨어져 있죠. 우리는 이 격차를 10년 안에 따라 잡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해 내든지 아니면 그들이 우리를 쳐부수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그야말로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 정신으로~이는 농업에서 공업으로 가야한다고 얘기를 한 거예요. 과연 스탈린은 이 계획이 성공할 수 있을지 또 이 계획인 우크라이나에는 어떤 후폭풍을 남기게 될지~ 중요한 얘기는 역시 여러분들이 해주시면 되겠구요. 저는 여기까지 입니다. 다꾸유~ 우크라이나 말로 고맙다는 뜻이에요.
허준: 50년~100년의 차이를 10면 만에 따라 잡는다. 앞서 있는 나라는 멈춰있는 상태에서 10배는 더 빨리 가야되는 거죠. 이게 가능해요?
최태성: 그렇게요, 그때 유명한 대사가 떠오르지 않습니까. 영화대사: 그 어려운 걸 해내니 말입니다. 해냅니다. 소련 곳곳에 콤비나트 라는 대규모 공업단지 1500개를 만들고 공업단지가 돌아가려면 전기가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초대형 수력발전소를 만들더니 목표를 5년도 안돼서 달성해 버려요. (연 10% 성장), 대단한 거죠.
이시원: 5년 안에 해냈다구요?
최태성: 해내버렸어요.
류한수: 더 놀라운 것은 산업화를 위한 재원을 어디서 마련하냐 였는데요. 1970년대 대한민국이 고도성장을 할 때는 저금리로 외국에서 차관을 가져와서 공업에 투자하면서 공업생산력을 끌어 올렸는데요. 그 당시 1920년대 소련은 자본주의 국가들에게 따돌림을 받는 고립된 처지라 누구에게도 돈을 빌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국내 재원을 끌어 모아서 자체 재원만으로 산업화 공업화를 수행하게 되는 상황에 있었던 거죠.
최원정: 선진국에 50년이나 뒤졌다는데 뭔가 있었나요, 저임금 노동, 땅, 자원?
허준: 러시아에서 다이아몬드 많이 나온다고?
강인욱: 그건 나중 이야기예요. 말 안 들으면 숙청당하고 수용소로 가지 않습니까? 굴라그 라고 악명 높은 곳이 있는데, (굴라그 Gulag (1930~1955젼)-소련의 강제 수용소, 소수민족, 전쟁포로, 정치범 등을 강제노동에 동원), 제가 유학생활을 시베리아에서 했었기 때문에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열차 지나가는 시베리아가 아니라 더 북쪽에 지금 말씀하신 다이아몬드 나오는 곳인데 그 당시에 상상도 못할 정도로 사람들을 그냥 강제로 투입시켜서 길을 내고 노동을 시키고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파악을 못할 정도로 많이 죽었고요. 제가 고고학을 하는데요. 고고학 역사를 보면 강제노동-숙정으로 고고학자 반 정도가 다 죽었어요.
허준: 어~ 강제 노동하다가
강인욱: 얼마나 인지 저는 실감을 못했는데 스탈린 시대에 고고학 책을 봤는데 고고학자들이 갑자기 사라지고없어요.
이시원: 그러니까 한 마디로 교수님 말씀을 들어보면 5년 이라는 기간 동안 짧게 성장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단기간 고속성장 비결은 강압성, 폭력이었다는 거네요.
강인욱: 목숨과 바꾼거라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류한수: 강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숙청 같은 비극은 이게 너무 압축성장이 이루어지면서 나타난 현상이라 할 수 있고요. 그러면 공업화에 필요한 재원은 어디에서 마련했는가 첫번째는 국민들의 소비 수준을 극단적으로 낮추는 겁니다. 저축 저축 저축 하자 하면서 재원을 마련하는 것이고요, 또 하나가 소련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게 농민인데요. 농업 부문에서 당시 표현으로 농민들을 쥐어짜서 농민들이 생산해 놓은 곡물을 국가에서 다 회수해서 외국에 팔고 그 돈으로 재원을 마련하는 것이죠. 그럴려고 하면은 농업부문이 대규모화가 되어야 하거든요. 그 당시 까지도 소련의 농업은 가족 위주의 소규모 농장체제였기 때문에 이 농장들을 한데 모아서 국영기업 또는 국영 농장 집단농장으로 만드는 작업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시원: 그러면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배신감 절망감을 느꼈을 것 같애요. 어떻게 보면 땅을 받고 농장 갖고 좋아서 소련을 지지한 건데~
류한수: 농민들이 왜 사회주의 체제를 지지하게 되느냐 하면 레닌과 볼셰비키는 귀족들의 토지를 뺏어서 농민들에게 배분한 정책을 편 것이거든요. 그래서 농민들에게는 볼셰비키를 지지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고요.
이시원: 줬다 빼앗아 가면 서러운 거잖아요.
최원정: 완전 그냥 빼앗았겠죠 아니면 뭘 주거나 보상을 했나요?
류한수: 스탈린을 위시한 소련 지도부 입장에서는 어떻게든지 재원을 마련해야 되었기 때문에 피도 눈물도 없는 정책을 강행했고요. 이때 가장 큰 피해를 입었고 가장 큰 저항이 있었던 지역이 바로 다름아닌 우크라이나였습니다.
허준: 그럼 집단 농장화되면 이제 우리는 아무 것도 가진 게 없구나 하는 상태에서 반발을 한 것이잖아요.
류한수: 오늘까지만 해도 내일 만일 집단 농장화 된다고 하면 밭과 돼지와 소는 내 것인데 다음 날 되면은 이게 내 소유가 아니라 집단농장의 소유가 되니까 농민들은 돼지와 소를 다 도살해서 먹어 버린 거예요.
이시원: 차라리 먹어 버리는 게 낫죠. 어차피 뺏길건데~
허준: 그 판단 밖에 할 수 없는 거죠.
류한수: 그래서 당시 소련이 가지고 있는 가축의 수가 급격하게 떨어지게됩니다.
이시원: 근데 이거 나비효과 엄청날 것 같은데요. 가축들이 없으면 농사도 못짓게 되고~
류한수: 그래서 농업생산력이 급격히 떨어지게 되죠. 어떤 것이나 체제를 급격하게 바꿀 때는 그만큼 대가가 따르기 마련인데 거기다가 자연재해 까지 겹치면서 1931~32년에 대기근이 닥칩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크라이나어로 홀로도모르 라고 하는데 여기서 정말 숱한 사람이 목숨을 잃게 됩니다. (홀로도모르(1932~1933년)-우크라이나에 발생한 대기근, 홀로도(holod)=굶주림, 모르 (mor)=죽음), 정말 숱한 사람이 오랫동안 먹을 게 없어서 목숨을 잃게 되는데 참상을 보여주는 사진이 있습니다(기근으로 아사한 사람들의 참상-스탈린의 집단화 정책이 초래한 비극)
-1932년에는 약간의 감자와 오이가 있었다. 그러나 1933년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홀로도모르 생존자의 증언-
최원정: 몇 명 정도 죽어요, 사망자수는?
류한수: 의견이 분분한데 수백만 명 단위였던 것은 확실합니다.
이시원: 최근에 인터넷 기사를 봤는데 우크라이나 할머니가 팻말을 들고 서 있더라구요. 우크라이나 역사에 가장 큰 비극이 두번 왔었다. 그 할머니가 내 이름은 이리나고 내 나이가 98세인데 나는 스탈린의 홀로도모르도 이겨냈다. 이번 전쟁도 내가 살아남아서 난 푸틴보다 더 오래 살 것이다. 이런 팻말을 들고 서 계시더라구요.
류한수: 그래서 이 홀로도모르가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게 지금까지도 어떤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데요. 사실은 이때 짐승 잡아 먹고 흙도 파먹고 벌레도 잡아 먹고 나중에 끔찍한 얘긴데 너무 먹을 게 없으니까 사람까지 잡아먹었다고 그래요. 식인행위까지 벌어졌다고 합니다.
강인욱: 제가 아는 고고학자들도 이때 우크라이나에서 대기근 겪으면서 풍족한 지주의 자손이었는데 가족들이 다 굶어죽었데요.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는 쓴 글을 보면서 이것은 대를 이어서도 잊을 수 없는 비극이었다.
허준: 유럽의 빵 바구니라고 할 정도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굶어 죽고 있는 거잖아요.
최원정: 아무튼 지금 사람들이 굶어 죽고 있는데 농작물을 다 수출용으로 돌렸다는 거잖아요.
류한수: 그렇죠,
최원정: 우리도 일제 강점기 때 농작물 수탈이 생각나지 않나요. 사람들이 많이 굶었잖아요.
류한수: 그래서 1932년이 홀로도모르(굶어 죽음)가 가장 심했던 해인데 이때 우크라이나에서 생산된 농업 생산량이 1200만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분량이다 라는 통계가 있습니다. 하지만은 소련을 이끌고 있는 스탈린 지도부는 이런 비극이 일어났다고 해서 정책을 물릴 수는 없다 강행해야 한다 하면서 기근이 닥친 지역에서 계속해서 농산물을 쥐어짜서 외국에 팔아서 생긴 돈으로 기계를 사오고 원료를 사오고 하면서 공업화를 밀어 부친 것이죠.
허준: 우리 국민들이 굶어 죽고 있는데 이 밀을 팔아 그래서 사람들이 굶어 죽어~
이시원: 그건 진짜 말도 안 되죠.
허준: 그리고 사실은 이때 민족주의 라는 것이 더 자리 잡았을 것 같애요. 너희들 연방이라고 얘기했지만 결국은 너의 민족은 안 굶어 죽고 우리 민족만 굶겨 죽이고 있잖아 라는 각 국가들이 어떤 정체성 분노가 분명히 여기에서 생겼을 것 같애요.
강인욱: 스탈린 집권기 때는 당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러시아인도 숙청당하고 우리 고려인도 강제 이주 당하고 이게 우크라이나 사람들만의 이유는 아닙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가 가장 혹독하게 겪었다는 데에 대해서는 우리는 분노할 수 밖에 없고~
최태성: 견디지 못했던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탈출을 합니다. 탈출을 하는데 스탈린이 아예 국경을 봉쇄해 버려요. 탈출 하지 못하도록~
허준: 군인들이 총으로 막아요?
최태성: 막아버리는 거예요.
이시원: 진짜 감옥이네요. 죽음의 감옥,
최태성: 이슈가 뭐냐면 사실 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으니까 봉쇄하는 측면도 있겠지만 더 중요한 건 뭐냐면 당시 스탈린의 선전 정책에 의해서 우리 소련 사회주의 국가는 배부르고 잘 살고 너무 행복하다 이걸 선전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탈출해 버리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잖아요. 이걸 막기 위해서 차단시켜 버리는 거죠.
이시원: 정말 못됐다. 이걸 은폐까지 해요.
최원정: 우크라이나에 있는 저 깊은 반소 감정이 이제야 좀 이해가 되네요. 예전에 우리 독소전쟁할 때 힛틀러가 러시아 침공하는데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오히려 막 환영했잖아요.
일동: 맞아요~ 맞아요~
최원정: 그게 무지 했는데 이런 배경이 있었네요.
강인욱: 내가 얼마 전에 미국 워싱턴 DC를 가니까 거기 홀로도모르를 기념하는 추모비가 세워져 있더라구요. 너무 안타까웠던 게 검은색 현무암인데 그 배경 그림이 파릇파릇한 밀들이었어요. 그 밀 곡창지대에서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의 한(恨)을 이야기하는 걸 보는 것 같아서 너무나 마음이 아팠었거든요.
류한수: 참 그래서 역사가 아시다시피 그 다음에 비극이란 것이 우크라이나라고 하는 한 지역 농민이라고 하는 계층에 놓고 보자면 인간이 견딜 수 없는 끔찍한 비극이 벌어지게 되는데요. 당시 국제질서의 맥락에서 보면은 그전까지 후진국이었던 소련이 이런 경제개발계획을 거치면서 비약석인 성장을 하죠.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1년에 경제성장률이 10%가 넘는 그런 식의 성장이 이루어지는데 이런 식의 비극을 딛고 이루어진 경제성장을 통해서 2차 세계 대전 때 독일을 물리칠 수 있었던 국력이 확보됐고 그 이후 냉전 때도 미국과 대등하게 대치할 수 있었던 경제기반이 만들어진 거죠. 1930년대는 참으로 복잡한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원정: 오늘 우크라이나 전쟁의 배경을 역사에서 찾아보면서 소련의 탄생과 함께 바라 보았는데 굉장히 마음이 무겁게 느껴지고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고 나니까 전쟁에 대한 분노가 더 커지는 것 같애요.
이시원: 분노도 커지고요 우리 항상 하는 얘기가 있잖아요. 역사를 다루다 보면 이것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이것에 대한 제대로 된 사과는 했는가, 보상은 어떻게 했는가, 지금 러시아는 홀로도모르에 대한 책임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러시아는 반성은 하고 있나요?
류한수: 러시아도 소련의 일부로 독립했다 라는 주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소련이 해체가 되면서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상황이 된 거죠.
이시원: 진짜 우크라이나 국민들 너무 억울 할 것 같애요.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는 이런 상황, 이런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허준: 역사를 배우면 사람이 무게감이 생기는 것 같애요.. 사실 제일 처음 우크라이나 사태가 일어나면서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싸워서 이길 거라고 생각했나 왜 저러지 라는 말을 하거나 절렌스키 대통령을 비하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근데 오늘 방송을 보신 분들이 과연 그렇게 입을 여실 수 있을까. 그리고 정말 최근의 한 역사학자가 한 얘기를 듣고 굉장히 감동적이었는데 “약소국에게 결정권은 없다” 대한민국은 정말 항상 이러한 위치에서 잘 살아 왔잖아요. 정말 우리가 우리 힘으로 나라를 지킬 수 있는 힘이 중요하구나 하는 걸 다시 느꼈어요.
최태성: 저는 푸틴이 연설하는 과정에서 역사적인 배경을 이야기 하는 걸 보고 또 한번 놀랐어요. 아~ 역사의 무게란 게 이런 거구나. 우리는 그냥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이야. 쉽게 치부하는 그런 것들이 일부일지 모르겠지만 현실 싯점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역사는 늘 이렇게 소환되어 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역사의 무게가 무엇인지를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
강인욱: 우크라이나인들 지금 이렇게 도시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 당하고 있는데요. 놀랍게도 푸틴이 1952년 생인데 바로 몇 년 전에 2차 대전 중에 가장 혹독하게 주민들이 희생당한 레닌그라드(상트 페테르부르크) 공방전이 바로 그가 태어난 도시에서 일어났거든요 (200만 명의 사망자를 낸 비극의 장소), 그는 지금 똑 같은 일을 우크라이나에서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2차 대전때 2천만 명이나 희생당했고요. 20세기 슬라브인들의 역사는 피로 점철되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빨리 전쟁을 끝내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다시 그전과 같이 슬라브인들로 평화롭게 살기를 바라겠습니다.
류한수: 우리가 달력상으로는 20세기가 2000년에 끝나지만 역사학자들은 1991년에 20세기가 끝났다고 보고든요. 1991년은 바로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된 시기죠. 그리고 20세기의 어떤 이해를 위한 핵심 키워드가 소비에트 연방이었다는 사실을 오늘 확인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최원정: 다음 시간에도 소련에 관한 이야기를 더 이어가게 되는 거죠.
류한수: 맞습니다.
최원정: 다음에 뵙게 될 때는 우크라이나에 평화가 깃들기를 기원합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352회 철의 장막 70년 ① 소련의 탄생, 러시아 우크라이나 갈등의 씨앗을 틔우다에서 정리).
① 2014년 2월, 푸틴 우크라이나 영토인 크림반도를 병합, 동년 4월,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에서 내전 발발 (우크라이나 정부군 VS 친러반군), 2019년 2월, 우크라이나가 나토가입을 추진하자, 2022.02.24, 푸틴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였다. 푸틴의 침공 이유와 목적은 무엇인가? 푸틴은 어떤 사람인지, 그는 현재 24년째 대통령을 하고 있고 현재 건강으로 봐서는 85세까지 대통령할 것 같다 (37년간 집권).
② 우크라이나나 러시아는 같은 스키타이 유목민족 슬라브족이다, 초원 지대에서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882년에 처음으로 국가 라는 형태를 만들었는데 그게 바로 키이우(키예프) 루스다. 거기에 우크라이나-러시아-벨라루스가 1240년까지 존재했다, 우리나라 통일신라 말기쯤, 11세기 중반 키이우 루스는 볼가 강을 통한 중계무역의 전성기였다. 하지만 무역의 중심이 지중해로 옮겨지고 나라가 점점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하여 결국 1240년 몽골의 침공으로 수도 키이우가 함락되면서 키이우 루스는 멸망하고 영토의 대부분이 몽골제국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키이우 일대는 비옥해서 잘 살았고 이때 모스크바는 상당히 열악해서 간접 지배를 당하였다. 그 과정 속에서 모스크바도 나름대로 성장을 하면서 결국 대공국들의 중심지가 되면서 운명이 모스크바로 바뀌게 되었다.
③ 몽골에서 벗어나 14세기 중반 이후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연합의 지배를 받았다. 워낙 폴란드가 괴롭히니까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래서 1667년 우크라이나를 가로지르는 드니프로 강을 중심으로 왼쪽은 폴란드, 오른쪽은 러시아가 지배를 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우크라이나의 서쪽은 유럽 영향권, 동쪽은 러시아 영향권이다. 여기서부터 러시아가 뻗어 나가기 시작해 우크라이나의 영토를 지배해 가던 러시아가 18세기 말이 되면 서쪽 일부를 제외하고 우크라이나의 영토 전부를 다 차지하게 된다. 이때 러시아가 전 세계 지표면의 6분의 1을 차지한다. 그만큼 대제국으로 성장한다. 이런 러시아와 달리 우크라이나는 늘 강대국 사이에서 고생을 하고 힘든 시기를 보냈다.
④ 당시 제정 러시아는 산업이 굉장히 발달하면서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넘어가게 되는 단계에 있었다, 마르크스는 이걸 소수의 자본가들이 다수의 노동자들을 착취하면서 부를 창출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심각한 빈부격차를 만들고 있다. 사회주의는 바로 다수의 노동자들이 소수의 자본가들을 타도하고 노동자들이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다 지금은 역사적으로 실패한 이론이라는 걸 다 알지만 당시에는 현실 불만이 굉장히 컸기 때문에 혹 했었다. 그런 과정 속에서 거기 완전히 매료되어서 이걸 이끌 유명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게 레닌이다. 공산주의를 이론적으로는 마르크스가 정립을 했지만 레닌이 완성했기 때문에 러시아에서는 마르크스보다 레닌이 더 추앙 받고 있다. 1917년 1월, 러시아에서 볼셰비키를 지지하는 시민들이 일으킨 혁명이 성공한다.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 그 중심에는 평화, 빵을 외치며 시민을 이끈 혁명가 레닌이 있었다,
⑤ 1917년 10월 혁명으로 레닌과 볼셰비키당이 집권당이 되었다, 러시아는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가 됐다. 레닌이 권력을 잡은 해가 1917년인데 1918년에 제정 러시아가 혁명 러시아로 바뀌면서 1917년 10월 혁명으로 신분제가 완전히 없어졌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갑오개혁 때, 1917년에 러시아 제국이 무너졌다. 이때 지배를 받았던 우크라이나가 드디어 당당하게 독립을 선언하고 하나의 나라로 우뚝 섰으면 좋았을텐데 실패했다. 1922년 우역곡절 끝에 소비에트 연방에 편입이 된다. 그리고 70년이 지난 1991년에 소련 역사가 끝나면서 마침내 독립하게 된다. 이러면서 황제 호칭도 귀족 호칭 없어지고 호칭은 오로지 동무 하나로 통일이다. 따바리쉬=동무, 그때까지 러시아의 농민들은 농노 반노예 상태로 거주이동의 자유가 없었다. 레닌은 그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레닌은 러시아에서 존경을 받고 있다. 큰 이유 중의 하나가 질곡을 끊어주었고 그러나 혁명하고 나서 2년 만에 죽었다.
⑥ 1917년에 10월 혁명이 있었고 1922년 소련의 탄생, 그 사이에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러시아 제국이 해체되고 각 민족이 독립하는 상황이 됐다. 그게 1918년의 모습인데, 1918년에 혁명정부에 대항하는 반혁명 세력이 등장한다. 혁명세력과 반혁명 세력 사이에, 1917~1921년, 4년간 피비린내 나는 내전이 벌어진다. 자본주의 열강의 개입, 내전과 외세의 개입으로 엄청난 혼란에 시달린다. 결국 볼셰비키당이 내전에서 승리한다. 1921년, 22년이 되면 혼란을 수습하고 체제를 정비하고 흩어졌던 각 민족국가들을 소비에트 공화국 형태로 다시 모아서 1922년 12월 30일 소비에트 연방을 탄생시킨다. 중심을 이루는 나라는 러시아였고 벨라루스 공화국이 가입을 하고 우크라이나 공화국이 가입하고 중앙 아시아에 있는 공화국들이 가입을 하면서 소비에트 연방이 성립된다. 이 때 소비에트 연방에 제일 먼저 들어온 나라가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가 소련 연방에 들어간 건 레닌의 덕이다.
⑦ 옛날에 러시아 제국의 통치자들은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인정한 적도 없고 우크라이나가 독자적인 별개의 민족이란 것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크라이나에게 역사적으로 처음 독자적인 국가의 지위를 부여한 사람이 바로 레닌이었다. 그럼으로써 오늘날 우크라이나가 독립국의 민족으로서 위상을 주장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 사람이 바로 레닌이다. 오늘날 푸틴이 이 측면을 집중적으로 비판한다. 그리고 레닌은 말했다-어떤 민족이 있을 때 민족의 정치적 앞날은 그 민족의 의사대로 결정을 해야 된다. 민족자결주의다,
⑧ 민족자결주의가 왜 레닌에게서 나왔느냐면 소비에트 연방 이전의 러시아 제국은 제국을 구성하는 체제가 소수 민족들을 탄압하는 체제였다.그래서 러시아 제국을 부르는 별명이 민족들의 감옥이었다. 이러한 러시아 제국의 민족정책을 비판한 사람이 레닌이었고 볼셰비키였다. 그게 민족자결주의다. 문제는 레닌에 이어서 스탈린이 소련의 권력을 잡으면서 상황이 돌변한다. 1924년 레닌 사망 후 소련을 이끌 새로운 지도자는 스탈린, 소련을 이전보다 더 강력한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고자 했던 스탈린, 그는 사회주의자였다. 그의 부상으로 소련은 또 다른 격변기를 맞게 된다. 레닌이 유언장에서 스탈린에게 절대로 권력을 주지 말라고 신신 당부했다고 한다. 그러나 레닌의 후계자가 된 스탈린, 소련을 29년 집권한다. 스탈린은 한국사와 세계사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푸틴도 선거법을 바꾸어 36년까지 대통령을 할 수 있는데 그때가 되면 푸틴 나이 84세 (37년 집권).
⑨ 스탈린은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었다. 소련이 수립되고 2년 뒤 레닌이 사망, 권력을 잡은 스탈린이 내전으로 무너진 소련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서 경제계획을 단행, 산업구조는 아직 농업 위주의 국가였다. 그런데 혁명가들에게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인간해방, 두번째는 근현대화, 근데 시간이 흘러 가면서 인간해방이라는 가치는 뒷전으로 밀리고 러시아가 다른 국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서는 경제가 개발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중앙에서 계획을 세우고 5년 단위로 기간을 끊어서 계획된 경제를 시행한다. 그러면서 국가에 있는 모든 재원을 집중적으로 모아서 산업에 투자해서 경제 성장률을 끌어올린다. 농업을 공업으로 바꾼다. 러시아의 후진성 때문에 우리는 선진국들에게 50년~100년 가량 뒤떨어져 있다. 우리는 이 격차를 10년 안에 따라 잡아야 한다. 과연 스탈린은 이 계획이 성공할 수 있을지 또 이 계획이 우크라이나에는 어떤 후폭풍을 남기게 될까.
⑩ 50년~100년의 차이를 10면 만에 따라 잡는다. 소련 곳곳에 콤비나트 라는 대규모 공업단지 1500개를 만들고 공업단지가 돌아가려면 전기가 필요하다. 초대형 수력발전소를 만들더니 목표를 5년도 안돼서 달성해 버린다 (연 10% 성장), 1920년대 소련은 자본주의 국가들에게 돈을 빌릴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국내 재원을 끌어 모아서 자체 재원만으로 공업화를 수행하게 되었다. 말 안 들으면 숙청당하고 수용소로 보냈다. 굴라그 라고 악명 높은 곳이 있는데, 굴라그 Gulag (1930~1955년)는 소련의 강제 수용소, 소수민족, 전쟁포로, 정치범 등을 강제노동에 동원, 북쪽에 있는 시베리아로 사람들을 강제로 투입시켜서 길을 내고 노동을 시키고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파악을 못할 정도로 많이 죽었다. 한 마디로 5년 이라는 기간 동안 짧게 성장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단기간 고속성장 비결은 강압성에 폭력이었다. 목숨과 바꾸었다.
⑪ 그러면 공업화에 필요한 재원은 첫번째는 국민들의 소비 수준을 극단적으로 낮추었다. 저축 하자 하면서 재원을 마련하였고, 또 하나가 소련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게 농민이다. 농업 부문에서 농민들을 쥐어짜서 농민들이 생산해 놓은 곡물을 국가에서 다 회수해서 외국에 팔고 그 돈으로 재원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당시 소련의 농업은 가족 위주의 소규모 농장체제였기 때문에 이 농장들을 한데 모아서 국영기업 또는 집단농장으로 만드는 작업이 이루어지게 된다. 많은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배신감 절망감을 느꼈다. 레닌은 귀족들의 토지를 뺏어서 농민들에게 배분하였는데 그런데 스탈린은 농민들의 농토를 빼앗아갔기 때문이다.. 이때 가장 큰 피해를 입었고 가장 큰 저항이 있었던 지역이 바로 다름아닌 우크라이나였다. 그럼 집단 농장화되면 이제 우리는 아무 것도 가진 게 없구나 하는 상태에서 반발을 한 것이다.
⑫ 어떤 것이나 체제를 급격하게 바꿀 때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인데 거기다가 자연재해 까지 겹치면서 1931~32년에 대기근이 닥친다. 오늘날 우크라이나어로 홀로도모르 라고 하는데 여기서 정말 숱한 사람이 굶어 죽었다. (홀로도모르(1932~1933년)-우크라이나에 발생한 대기근, 홀로도(holod)=굶주림, 모르 (mor)=죽음), 정말 숱한 사람이 오랫동안 먹을 게 없어서 목숨을 잃었다. 이건 스탈린의 집단화 정책이 초래한 비극, 1932년에는 약간의 감자와 오이가 있었다. 그러나 1933년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홀로도모르 생존자의 증언- 의견이 분분한데 아사자는 수백만 명 단위였던 것은 확실하다. 이 홀로도모르가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게 지금까지도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사실은 이때 짐승 잡아 먹고 흙도 파먹고 벌레도 잡아 먹고 나중에 끔찍한 얘긴데 너무 먹을 게 없으니까 사람까지 잡아먹었다. 식인행위까지 벌어졌다. 유럽의 빵 바구니인 우크라이나가 스탈린의 잘못된 정책 때문에 수백만 명이 굶어죽었다. (우리나라도 일제 강점기 때 농작물 수탈로 사람들이 많이 굶었다)
⑬ 1932년이 홀로도모르(굶어 죽음)가 가장 심했던 해인데 이때 우크라이나에서 생산된 농업 생산량이 1200만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분량이다. 하지만 소련을 이끌고 있는 스탈린은 이런 비극이 일어났다고 해서 정책을 물릴 수는 없다 강행해야 한다 하면서 기근이 닥친 지역에서 계속해서 농산물을 쥐어짜서 외국에 팔아서 생긴 돈으로 기계를 사오고 원료를 사오고 하면서 공업화를 밀어 부쳤다. 스탈린 집권기 때는 당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러시아인도 숙청당하고 우리 고려인도 강제 이주 당하고 이게 우크라이나 사람들만의 이유는 아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가 가장 혹독하게 겪었다는 데에 대해서는 우리는 분노할 수 밖에 없다. 견디지 못했던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탈출을 하는데 스탈린이 군인을 동원해 아예 국경을 봉쇄해 버렸다. 진짜 감옥. 죽음의 감옥이 되었다, 이슈가 뭐냐면 당시 스탈린은 선전 정책에 의해서 소련 사회주의 국가는 배부르고 잘 살고 너무 행복하다 라고 선전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탈출해 버리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이걸 막기 위해서 차단시켜 버린 것이다. 이런 게 우크라이나에 깊은 반소 감정이 생긴 이유가 되었다.
⑭ 미국 워싱턴 DC에 홀로도모르를 기념하는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검은색 현무암에 그 배경 그림이 파릇파릇한 밀들이었다. 밀 곡창지대에서 밀이 없어서 일천만 명이 굶어 죽어나갔다.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의 강압 정책 때문이었다. 대를 이어서 한(恨)을 이야기할 수 밖에 없다. 세계적인 비극이다. 너무나 마음이 아프다. 우크라이나 한 지역 농민으로서 보자면 인간이 견딜 수 없는 끔찍한 비극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국제질서의 맥락에서 보면은 그전까지 후진국이었던 소련이 경제개발계획을 거치면서 비약석인 성장을 한다. 이런 식의 비극을 딛고 1년 경제성장률이 10%가 넘는 경제성장을 통해서 2차 세계 대전 때 독일을 물리칠 수 있었던 국력이 확보됐고 냉전 때도 미국과 대등하게 대치할 수 있었던 경제기반이 만들어진 거다. 1930년대는 참으로 복잡한 시대였다. 오늘 우크라이나 전쟁의 배경을 소련의 탄생과 함께 역사에서 찾아보면서 바라 보았는데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고 나니까 전쟁에 대한 분노가 더 치밀어 오른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서 분명히 책임이 있다. 소련을 계승한 현재 러시아는 홀로도모르에 대한 책임도 지고 있다. 그런데도 러시아의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전쟁범죄 행위를 저질렀다. 우크라이나 국민들 너무 억울 하다. 이번 러시아의 침공에 국제사회가 잘 대처하고 있다고 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