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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6.6.25.(8.4부임)~1759.1.15. ▣김산군수 파평인 윤염(尹琰,1709~1771)
■가계
>23 ②윤집(尹集,1606~1637)[생1627][문1631] 字성백(成伯) 號임계(林溪) 諡號충정(忠貞)
*부여군 내산면 온해리 산19-7로 이장
配신안동인 김상복(金尙宓)[進]의 딸
>24 윤이선(尹以宣) 配창녕인 조이량(曹以樑)의 딸
>25 윤홍(尹泓,1655~1731) [음] 字정원(靜源), 號정재(靜齋). *송시열의 문인. 1722년 신임옥사 때 金山에 유배
<碩齋稿> 曾王考靜齋府君墓誌
>26 윤종주(尹宗柱,1676~1714) 용안군(龍安君) 配경주인 김두정(金斗井)의 딸
<碩齋稿> 「王考墓表」 高祖醉仙公。葬于金陵(김포)頓覺之原。其下若干武。王考醉隱公是葬焉
>27 入後 윤염(尹琰,1709~1771) [진1740] 字중옥(仲玉), 號퇴암(退巖). 익찬(翊贊). *김산군수(1756~ )
1配경주인 金致慶의 딸(1서,①) 2配한양인 조종철(趙宗哲)의 딸
<석재고> 先公退巖府君行狀 *아들 윤행임이 임의로 경렴서원에 배향, 김산
>28 1胥 민백권(閔百權) 侍直, 2胥 金載龜 3胥 李行九
>28 ①윤행엄(尹行儼) 配대구인 서종엽(徐宗曄)의 딸
<석재고> 伯氏守默堂先生墓誌
>29 입후 윤상현(尹象鉉)
>30 윤태형(尹泰亨,1802~) [음] 字대경(大卿), 군수
>31 윤병성(尹秉成,1829~ ) [음] *지례현감(1870~ ), 방초정현판운
>28 ②윤행검(尹行儉) >育二女
<석재고> 仲氏菊庵居士墓誌銘
>28 ③윤행임(尹行恁,行任,1762~1801) [문1782] 字성보(聖甫), 號석재(碩齋) 이조판서 諡號문헌(文獻)
配전주인 이명걸(李命杰)의 딸
*1800 신유박해시 시파라는 사유로 신지도에 유배된 후 복직되었으나 서학을 신봉했다는 이유로 참형당함.
■이력
경렴서원중수, 감천변제방보수, 읍취헌을 봉황루로 개칭,
■기록
○승정원일기 영조 32년 6월 25일 신유 15/21 기사 1756년
尹琰爲金山郡守
초명 읍취헌을 김산군수 윤염이 봉황루로 개명.
1771년 김산군수 김항주가 구화산에 있던 정자를 연화지로 옮기면서 봉황대로 개칭한 것으로 전함
<교남지> <김천역사지리서 p289>
景濂書院上樑文
윤염(尹琰,1709~1771)
羣賢并世 允叶文明之祥 一堂揭䖍 必舉列享之禮. 是以漢家之祭十哲 矝式士林, 宋朝之躋六賢 扶植儒道. 凡厥有祭社之行 莫不修薦牲之儀.
여러 어진 이들이 세상을 살면서 진실로 문명의 상서로움에 화합하였기에, 한 사당에 경건히 모시어 반드시 열향 의례를 거행하였습니다. 이것이 한나라에서는 십철을 제사하며, 송나라에서는 육현을 받들어 유도를 붇돋는 것이었습니다. 무릇 제사를 행하면 희생을 드리는 의례를 닦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렴서원 : 1648년 김산군수 한양인 조송년(趙松年)이 김천시 감천면 원동(院洞)에 처음 설립하여 김종직, 조위, 이약동 3인을 제향하였으며, 1673년 김천시 감쳔면 이아리(爾雅里)로 이전. 최선문, 김시창을 추향하였음.
*십철(十哲) : 공자(孔子)의 제자 중 특히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열 사람. 안회(顔回), 민자건(閔子騫), 염백우(冉伯牛), 중궁(仲弓), 재아(宰我), 자공(子貢), 염유(冉有), 자로(子路), 자유(子游), 자하(子夏)를 이른다. *육현(六賢) :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 명도(明道) 정호(程顥), 이천(伊川) 정이(程頤), 안락(安樂) 소옹(邵雍), 횡거(橫渠) 장재(張載), 회암(晦庵) 주희(朱熹)를 이른다.
顧我五先生道學之淵源 實爲千百世儒士之師表. 池塘揭景濂之號 梧月襟懷, 石門留刻鞭之形 氷蘖志操. 御工圖像 盛眷表儒林之宗, 經術致身 殊知荷國器之獎. 至若小學律身之老 竟作元祐完節之人.
우리나라 다섯 선생의 도학의 연원을 살펴보면 참으로 천백세토록 선비의 사표입니다, (김종직은) 연못을 경렴이라 부르며 오동나무에 달이 걸린 듯 가슴에 품었고, (이약동은) 석문에 채칙 모양을 새기게 하여 빙얼 같은 지조를 남겼습니다. (그래서) 나라에서 화공에게 초상을 그리게 하여 유림의 종장임을 드러내게 하였고, 경술로 몸을 이루니 특별히 나라의 큰 그릇이라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조위는) 소학으로 몸을 닦으며 늙어갔기에 원우시대(송나라 철종년간)에 절개를 지킨 사람과 같았습니다.
*원우(元祐) : 송나라 철종(哲宗) 때(1086~1093)의 연호. 이 시기 왕안석의 신법당에 반대하다가 사마광, 정이 소식등이 좆겨났다.
心性理氣之相與講明 蔚然吾道之羽翼, 任之出處之皆合禮儀 允矣王國之蓍龜. 德學幷高 奚但模楷扵一世. 節行難泯實宣爼豆扵千秋. 兹因士論之僉同 廼乃廟貌之創立, 東西序次之克整 五版並躋. 春秋黍稷之惟馨 一體同祀 羹墻之暮僾僾 盖寓一鄕崇奉之誠.
심성과 이기를 서로 강명하여 유학이 성하는데 도움이 되었고, 벼슬에 나아가 임함에는 예의에 합당하여 나라가 번성할 조짐이 되었습니다. 학문과 덕이 함께 높으니 어찌 한 시대의 모범이겠습니까. 뒤어난 행적은 뒤섞이기 어려우니 참으로 오래도록 제사 지냄이 마땅합니다. 이에 사론을 모아서, 사당을 창립하고 동서로 차례를 잘 정돈하여 다섯 분의 위판을 올렸습니다. 봄가을 서직이 향기로울 때 한 몸이 되어 제사 지내니, 어진 이를 사모하는 것이 오래되어 어렴풋하나 한 고을에서 높이 받드는 정성이 있는 것입니다.
*시귀(蓍龜) : 점칠 때 사용하는 시초(蓍草)와 거북. *모해(模楷) : 본받아 배울 만한 본보기 *갱장(羹墻) : 어진이를 사모하는 말이다. 《후한서(後漢書)》 이고전(李固傳)에, “순(舜)이 요(堯)를 사모하여, 앉아 있을 적에는 요 임금을 담에 뵙는 듯하고, 밥 먹을 적에는 요 임금을 국에서 뵙는 듯했다.” 하였다.
絃誦之聲洋洋 寔爲多士藏修之所, 不幸基址之汚僻 未晚祠屋之荒頹. 大川傍迴 每有人病涉之患, 居民甚鮮 實多庭鞠草之歎. 臺礎己傾 寕禁鳥鼠之巢穴, 棟瓦盡圯 將迫風雨之飄摇, 校院羣儒 撫杖屨而興感. 鄕里舊老 瞻堂宇而齎嗟
글 읽는 소리 양양하게 울려 퍼지니 참으로 많은 선비가 수학하는 곳이 되었지만, 불행이 그 터가 더럽고 벽진 곳에 있기에 오래되지 않아 사당과 집이 황폐해질 것입니다. 큰 내가 곁에서 돌아 흘러 매번 병 있는 사람은 건너는 걱정이 있었고, 사는 사람이 매우 적어 참으로 뜰에 잡초가 무성하여 탄식하였습니다.
대와 기초가 이미 기울어져 새와 쥐가 둥지와 구멍을 파는 것을 어찌 막을 것이며, 기둥과 이미 무너졌으니 장차 비바람이 몰아칠 것이니, 학교의 여러 선비는 지팡이와 신발을 어루만지며 느낀 바가 있었고, 고을의 원로들은 당우를 바라보며 탄식하였습니다.
是以淨區移廟之論 并謀濂翁主壁之舉 挹氣像於光風霽月. 尙像畢老景仰之 並血祀於一曉諸賢. 曾有尤爺之講定 從大聖而腏食 非無上丁之豊禋. 押羣哲而追躋 盖遵先正之遺志.
이에 구역을 정화하거나 사당을 옮기는 것을 논의하면서, 염옹(김종직)을 주벽에 모시는 것을 함께 도모하여 광풍제월의 기상을 받들고자, 항상 점필제를 우러러면서 한 번에 제현에 대해 아울러 제향하고자 하였습니다.
일찍이 우암 선생이 강론하여 정하기를 공자님을 따라서 철식하라 하였는데, 상정의 제사처럼 풍성한 제사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철인을 누르고 추향하는 것은 대개 선정의 유지를 따른 것입니다,
*상정(上丁) : 옛날 사당의 제향을 봄에는 2월, 가을에는 8월에 지냈는데, 첫 번째 정일을 초정(初丁)ㆍ상정(上丁)이라 하여 문묘ㆍ향교에서 행사하였고, 서원이나 기타 사당에서는 중정에 행사하였다. *선정(先正) : 죽은 현인.
爰伻相地之神眼 愽求妥靈之吉基 眷彼半面紫山 素稱一邑住麗. 鑑湖若襟帶之勢 是謂地理莫如倻山有環揖之形 充爲天作之址. 編氓出栗 可見秉彝之攸同, 緇徒運材 亦緣遺德之孚感.
땅을 잘 보는 이를(신안을) 시켜 신령이 편안한 길지를 널리 구하다가, 자산 한쪽을 돌아보니 고을의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감호가 허리띠를 두른 듯이 하였는데 이러한 지리는 야산이 빙둘러 싸고 있는 형세에 못지 않았으니, 충분히 하늘이 만든 터였습니다.
호적에 있는 백성들이 곡식을 내어주며 병이를 그대로 드러내고, 승려들이 재목을 운반하며 끼친 덕을 느끼며 연을 맺었습니다.
*편맹(編氓) : 호적에 편입된 백성 *병이(秉彝) : 타고난 천성을 그대로 지킴.
芬苾之所旣定 實幸名區之應時. 鼛鼓之響不勝 庶幾神功之不日. 幾歎未遑于古. 彊基爽明 寕復有湫隘之歎. 似若有待扵今. 道里均便 今始得守護之方. 爰簡吉辰 將舉大棟.
제사 지내는 곳을 정하니 다행히 좋은 땅이 때를 맞추어 응하였으니, 역사를 울리는 북소리 감당하지 못해 바라건데 신공이 몇 일 안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옛날보다 겨를이 없어 얼마나 한탄하였습니까. 터전이 상쾌하고 밝으니 어찌 다시 더럽고 좁다고 한탄하겠습니까. 마치 오늘을 기다린 것 같습니다. 도로와 거리가 고르고 편안하니 지금 비로소 수호할 방안을 얻었습니다. 이에 좋은 날을 택해 큰 대들보 들어올리고자 합니다.
*분필(芬苾) : 향기로운 음식. *고고(鼛鼓) : 역사(役事)를 할 때 울리는 북이다. 《시경》 〈대아 면(綿)〉에 “모든 담장을 일으켜 세우니, 고고 소리가 감당하지 못하네.[百堵皆興, 鼛鼓弗勝.]”라고 하였다.
抛梁東 澄川一帶勢彎弓. 問渠那得淸如許 疑是眞源洙泗通.
대들보 들어 동쪽에 놓으니, 맑은 시내 활처럼 굽이치네. 어찌하여 이처럼 맑은가 개울에게 물으니, 맑은 근원 사수에 통한 듯 하다네.
*수사(洙泗) : 泗洙. 중국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를 지나는 두 개의 강물인 사수(泗水)와 수수(洙水)를 말하는 말로. 공자가 사이에서 제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보통 유가(儒家)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抛梁西 風月無邊庭艸萋. 千載濂翁留物色 一般淸意古今齊.
대들보 들어 서쪽에 놓으니, 풍월은 끝이 없고 뜰에 풀이 무성하네. 천 년 전에 염옹이 물색을 남겼으니, 맑은 뜻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가지런한게 일반적이네.
*염옹濂翁) :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를 말한다. 주돈이가 여산 연화봉(蓮花峯) 기슭에 자리 잡고 살면서 그 앞에 흐르는 시내를 염계라 이름하고 성현의 도를 즐기며 청아한 나날을 보냈다 한다.
抛梁南 滿麓松杉繞院菴. 嫡統新文傳不墜 烱然秋月照寒潭.
대들보 들어 남쪽에 놓으니, 기슭 가득한 소나무 삼나무가 서원을 감싸네. 적통은 새 글로 전해져 떨어지지 않으니, 가을 달 찬 연못에 비추듯이 환하네.
抛梁北 翼翼華甍如矢棘. 鬼護靈立若有待 紫山自此生顏色.
대들보 들어 북쪽에 놓으니, 날아갈 듯 용마루 화살이 날아가듯 곧네. 영귀가 보호하며 서서 시립한 듯하니, 지금부터 안색이 좋아진 자산이 되었네.
*시극(矢棘) : 모서리는 화살이 빨리 날아가듯 곧다는 표현. <시경> 소아(小雅)편에 보임. *자산(紫山) :중국 촉지방에 있는자암산(紫岩山)을 이르는 고유명사. 여기서는 남쪽지방의 관문인 김천시 모암동에 잇는 자산을 칭함. 자산(紫山)의 유래도 중국의 자암산에서 유래되었다고 추정됨.
抛梁上 先哲大名山斗仰. 性善元來皆可堯 斐然狂簡嗟吾黨
대들보 들어 위쪽에 놓으니, 선철들의 큰 명성을 태산북두처럼 우러러보네. 원래 본성은 착하여 모두가 요임금이 되는데, 뜻은 크나 실천이 없는 우리 고을. 문학적 재능이 있네.
*광간(狂簡) : 뜻은 크나 실천이 없이 소홀하고 거칠다
抛梁上 威儀秩序倣黌舍. 扵焉樂育羣英才 佇見青丘振文雅
대들보 들어 아래쪽에 놓으니, 위의와 질서있는 모습이 향교를 모방했네. 여러 영재 교육하니 청구에서 문풍 덜치는 것을 바라보겠네.
*낙육(樂育) : 맹자(孟子)가 말한 삼낙(三樂)의 하나. 곧 천하의 영재(英才)를 얻어 교육하는 것. *저견(佇見) : 멈추어 서서 바라봄
伏願, 上梁之後 精禋永薦 眞儒蔚興, 勤講磨之工 冬詩夏禮. 服仁義之敎 家程戶朱. 郁乎文煥乎章 毋負菁莪之化 幼而壯而用 庶作禎幹之材. 生不同時 縱未親灸扵火德 任恭守土 竊自寓感扵斯文. 太守 尹琰 謹題
엎드려 바라오니 상량한 뒤에 정결한 제사 오래 받들어 참 선비가 크게 일어나게 하시고, 부지런히 갈고 닦아 사시사철 시례를 익히게 하고. 인의의 가르침을 행하여 가가호호 주자와 정자를 가르치게 하소서. 문장의 화려함이 성대하게 일어나 청아의 교화를 버리지 말게 하시고, 어려서부터 배우고 어른 되어 쓰임이 있어 두루 나라의 재목이 되게 하소서.
태어난 때가 달라 화덕(火德)에 친히 뜸을 들이며 따르지 못했지만, 삼가 수령을 맡아 외람되이 이 글에 감회를 부칩니다. 태수 윤염이 삼가 짓다.
*청아(菁莪) : 시경(詩經)의 편명. 인재 교육을 노래한 것임. *화덕(火德) : 《사기(史記)》 봉선서(封禪書)에서 “황제(黃帝)는 토덕(土德)을 얻었고, 하(夏)는 목덕(木德), 은(殷)은 금덕(金德), 주(周)는 화덕(火德)을 얻었다.”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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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公退巖府君行狀(윤염행장)
윤행임(尹行恁,1762~1801)
先公諱琰。字仲玉。自號退巖。尹氏系出坡平。始祖莘達。高麗太師瓘。立功北方。謚文肅。司業威封南原伯。爲南原人。敦爲高麗戰死。謚文平。璜門下評理。不仕本朝。謚忠簡。子臨以觀察使事獻陵。被廉吏選。三傳至議政府舍人時英。忤奸臣沈貞。斥補光州以歿。再傳克新弘文館應敎。又新龍陵君謚貞憲。應敎後三世。官翰苑,玉署,弘文館校理曄。弘文館修撰衡彦是也。貞憲之後三世殉于節。龍陽府院君謚文烈公暹。龍南君謚忠康公衡甲是也。卽先公所後與本生之系也。高祖弘文館應敎贈吏曹判書龍原君謚忠簡公諱棨。弘文館校理贈領議政謚忠貞公諱集。曾王考諱以明義禁府都事。爲皇明守志不出。贈吏曹參議。王考諱泓以掌樂院正。坐景宗壬寅士禍。被繫流遠方。及更化。陞敦寧府都正。贈吏曹參判龍平君。考諱宗柱廢貢擧。意在復讐。號曰醉隱。欝欝忼慨。早卒。贈吏曹參議。妣淑夫人慶州金氏。進士贈吏曹判書斗井之女。本生考諱天聖。以純孝贈司憲府持平。聘于都正豊壤趙公道輔之館。以肅廟己丑之七月二十有六日。先公降。卽幼。器宇弘大。志氣淸粹。三歲。誦周興嗣千字文。十四歲應擧。主司尹淳歎曰。文旣燁肰動人。筆亦可敬。儻從吾肄者。鍾,王可及。少遊尹屛溪之門。遂拜韓先生于南塘。聞性理之說。尤致力於庸學。訂確質難。發前人所未發。甞言詩書旣刪經而不傳者。周子通書,太極圖說。張子西銘,正蒙也。唐虞雖遠。有三代氣像者。邵堯夫也。又曰。六經本諸伏羲一畫。一畫者萬事之原也。時李文正講道寒泉。常以人物五常之性。與南塘議齟齬。門人弟子相觝紛肰。先公曰。來世自有剖析者。後生敢訾謷爲哉。缺 日以二程朱子書。沈潛反復。未始少懈。手輯天人性命陰陽理氣治亂消長有相關鍵者。因附以黃文肅諸子。命之曰性理類編。人或言何自苦乃爾。答曰。朝聞夕死。非聖訓乎。英宗己未。薦授惠陵參奉。庚申。選進士。序陞掌隷院司評。甲子。監石城縣。乙丑。丁祖母李氏憂。哀毁甚。奉仲父季父。同苫堊三年。且誠且敬。仲父素嚴峻。若有不怡色。乃拱手侍立。或俯伏階庭下。候弛怒始退。海西有屋數十間。梨栗數百株。良田數百頃。僮僕若而人。盖世世傳者也。世母欲取之。先公獻焉。家老迺曰。自昔析産。不以此者。以舊物也。宗家且貧窘。不可以從也。先公訶之曰。親親爲大。焉恤舊物。戊辰。從金吾秋官。爲水部郞。明年。出宰德山。朝廷創均役法。而始征于海。先公歎曰。漢時縣官甞漁。海魚不出。今魚其貴乎。居無幾。市魚日稀也。雅喜林泉。不樂仕。卜居于牙山之白巖。貨第於市。盡室南下。上聞之。用魏徵贖第事。出公錢以贖之。先公遂感激還居焉。旋拜世子翊衛司翊贊。被睿眷甚隆。外人多有不得聞者。謂趙竹石暾曰。聞書筵講聲淵弘。文義敷析極條暢。實萬斯年无疆攸休。自兩宮曁于八方。宣揚潛德之光。豈非卿大夫之責歟。盖趙公以內弟。有意氣相許也。丙子(1756년)。守金山郡。郡有景濂書院。鞠爲灌莾。先公慨肰謂院儒曰。朱子甞婘婘於白鹿者。以藏修之地也。諸君絃誦於斯。任其荒廢。豈可乎哉。遂割俸鳩材。徙建于爽塏。購經史以之。聚學徒日講學。文風蔚肰丕振。大嶺以南七十州。推金山郡學爲第一。自此始也。錢湖水大溢。久爲郡患。每夏潦。人乘屋以避。環湖數十里。田疇蕪沒不治。先公亟築堤以防汎濫。而設閘以通灌漑。是秋禾稼熟。牛羊散野。士女歌之。先是。官出輕估。責郡胥以供郡需。需愈繁而估愈低。蕩沒流亡相續。先公曰。聖人不云乎。物之不齊。物之情也。胥亦民耳。豈忍椎剝若是。捐月廩殖財。以淸宿弊。减山寺楮賦。蠲坊戶煙稅。及遞。吏民具蔬果獻歌謠。攀轅涕出不能行。三日始出境。村社皆伐石頌德。庚辰。莊獻世子將幸溫泉。行殿不戒于風雨。故途陵夷。朝廷難其任。以先公守溫。先公至。則經始之。上不費大農。下不勞疲甿。纔浹旬而衆事俱擧。及鶴駕戾止駐轎上。顧承旨任瑋曰。美哉橋也。人存則政擧。有如是哉。瑋對曰。某以經術文章聞於世。治一郡何有。及御行殿。慰諭以殿宇塗墍華而不侈。儉而不樸。眞賢太守也。衛士馬逸躝田糓。命償之。有老嫗年百歲伏路左。命予米綿。先公布諭郡民曰。償糓所以卲農也。優老所以敦風也。我儲君休烈。協寧爾烝庶。雖爾輩蚩蚩。寧不歆肰以動乎。聽者皆流涕而去。直夜半。御史李潭潛入郡。見先公曰。噫嘻艱危甚矣。此行計將奈何。先公曰。身與君孰重。曰君爲重。家與國孰大。曰國爲大。曰。知斯則奚問爲。遂反命言春宮仁聞播脩。父老爭頌萬歲。英廟始以爲喜。鶴駕旣還都。先公且求解以歸。自是洎己丑十年。閉戶掃軌。游心圖史。澹肰若忘世。世亦不以職事加之。然燕居長歎。人不知其何爲也。書分福下比名節上方八字於座右以自省。遂西遊松岳。南至于大嶺。東浮于江。至于原壤。時權貴日橫。時事顧有可憂者。竹石欲謝事歸鄕。先公勸之曰。急流勇退。惟錢參政一人。君誠躡其後。何遽不若錢參政。幸勿以功利屈。間有忠勳府都事,加平郡守之除。或出膺。而非先公志也。有貴戚以非理請邑人除役者。不聽而請愈力。先公笞其人曰。爾敢挾貴戚而持我耶。辛卯二月二十有一日棄不肖。享年六十三。今殿下御極之六年。行恁簪筆侍殿上。上顧謂曰。乃父不食之報也。庚戌。階二品。贈先公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捴府副捴管,龍恩君。丙辰。湖西觀察使言溫宮有壇曰射臺。庚辰臨射之地也。射已。命郡守植三槐。時七月。纔植而茂。今嘉陰滿地。邦人謂其樹曰靈槐。以寓於戱不忘之思。上慽肰流涕。樹碑而紀蹟曰。郡守尹某之所植也。因命行恁書其陰。加贈先公資憲大夫吏曹判書。時人比之孝陵之墨竹焉。先公性剛嚴峻正。竟日對方冊跪坐。家人進止。廩廩若朝廷。朋友嘉會。命觴賦詩。詞氣藹肰如春和。至古人忠孝大節。語未竟。涕泣如雨下。趙悔軒觀彬以爲當危急之時。可以托死生者。惟某其人也。少依外氏伯舅鶴塘公。以其肖己也。切愛之曰。吾握銓三十年。親戚賓客未甞不干我者。獨某朝夕我。不一言及政注。車馬紛華盛麗。視之如無。其操守高㓗類如此云。躬儉約。冬一豹裘。年多不易。有請改以輕煖者。先公曰。欲納余於奢何也。人無敢更言。時人科擧卛循私。如館胥院吏之微。尙亦與有力焉。人或有爲之先容者。先公大怒曰。士君子由他道進。將何以事君上。黃江漢景源知貢擧。欲擢第。使人致意。先公不答。因不赴擧曰。大卿幾誤人。大卿者。江漢之字也。英廟甞幸懿昭墓。筵臣有言彼山之阿。四㫌其閭者。尹忠貞古宅也。承旨李奎采曰。其孫某以循良稱。溫恭端吉。自是學問中人。上乃命調遷。其陪享于皇壇也。上曰。尹某於忠貞爲幾世。對曰玄孫也。右議政尹東度曰。素以績文名。承旨金應淳,洪梓曰。文學伏一世。尤嫺於詞命。上曰。爲人甚善。可貴已。及忠良科設。上曰。三學士之後爲幾何。領中樞府事兪拓基對曰。尹氏有若干人。尹某喜文章。屢擧不中。士林惜之。上曰。予亦知其人。又賜對便殿。上曰。狀貌甚豊厚可愛。乃祖尹泓。乃予潛邸舊僚也。見其孫。尙有典刑。左右白年少時已有華聞。由門廕歷典郡邑。以廉謹爲治。特命除牧使。當是時。甞所與遊者。幷列于公卿。而恥與之同和。絶問遺謝往還。常戒子弟曰。彼夫也驕甚不愛士。彼夫也妄意自尊。彼夫也不學而冥升。肰而不敗者未之有也。若曹未可與此輩遊。後皆驗。甞曰。宋之南渡也。朱子崇飾忠義。雖被緇負羽者。尙亦表章之。及至我朝。屢蒙大難。士大夫不能以風節相勵。尤庵宋先生乃取則於朱子。以章大義。以牖羣蒙。海上之人。至今免乎侏㒧。先生之功也。又曰。胡元雖主中國。史以正統歸者。無朱子故也。倘朱子復起。其斥之也。非帝魏者比也。若許衡者。失身於夷狄。惡可配食夫子之廡乎。東國之有崔鳴吉。猶宋之有秦檜也。背明天子。力贊城下之盟。罪當誅。今執政者請錄其後。不其甚於伊川之被髮乎。年五十五。居趙夫人喪。飦粥不進薑桂柴削。凜肰若不保朝夕。及啓靷。有大嶺介于路。巖石錯肰。轝夫不能前。先公親受以肩。且行且哭。靡不感激泣下。不踰時。並力而前。家廟有事。先其期汛灑庭內。其夜輒燭以至厥明。樽鉶盃勺。輒用手滌。祭已。躬檢以藏之。人自丘墓來者。輒冠而後見。持平公甞思進西苽。以不利病也。故不進焉。金夫人疾且劇。欲甞菁葅。亦不進也。先公每以爲恨。二物終不近。竹石有弟曰曮。置酒以葅爲殽。先公自不禁泫肰。座上咸曰。六十而慕。公惟一人焉耳。宗黨有喪。貧且不能庀。輒傾儲以予之。雖䟽宗遠姻。㷀㷀無所依。皆畜之家中。衣服飮食。與子弟無間。繩履弊衣。常交於室也。爲文章。本之經傳。未甞留神乎詞律。曾與諸公賦皇壇享事。有化蝶遼㫌逐。看羊漢節持之句。詩人南肅寬閣筆曰。聲格無如此者。在金吾時。有大議讞。輒須先公以判决。郞吏皆稱神明。雖異趣者。莫不驚服曰。爲國當大事。毅肰不撓。卽創覯云爾。行恁甞拜竹石于雙里之第。竹石執手言。爾若踵先人者。在朝爲藎臣。在家爲賢子。趙忠定璥謂行恁曰。先公風範。逈出塵表。弘毅正大。古亦罕倫。今不可以復見。宋雲坪能相每言某不登庸。關世運也。趙,宋二公爲中表。而知先公甚詳也。先公元配慶州金氏。考郡守致慶。文貞公弘郁之孫也。有淑行。早卒。贈貞夫人。繼配漢陽趙氏。考通德郞宗哲。弘文館校理備之孫也。以女士稱。世之言閨範者。皆取則焉。封貞敬夫人。男行儼。前任淸州牧使。女驪興閔百權侍直。元配出。男行儉通德郞。行恁前任吏曹參議。女延安金載龜,完山李行九進士。繼配出。長子子曰象鉉。庶子龍鉉,鳳鉉。次子子曰應鉉縣令。女曰延安李儞,南陽洪容默。行恁有二男三女幷幼。女長延安李脩。閔章顯都事,金鏽,李淑元外孫也。始先公衣履之藏。在加平郡。丙辰。移奉于龍仁縣治之東五里水靑灘向午之原。元配附焉。其右麓坐壬而位者。繼配也。嗚呼。先公承忠孝之業。稟陽剛之德。秉直道。與世寡合。際倫綱斁敗之時。絶意當世。齎恨九原。而褒崇之典。渙自天門。宜刻石神道。以詔來人。顧不肖窃慕朱夫子之銘退傅。泣血撰狀。秪擧其所共傳誦者。約而無華。以備先生之財擇焉。
○ 일성록 > 순조 > 순조 1년 신유 > 5월 25일 > 최종정보
“신은 대성(臺省)에서 물러난 뒤 서증(暑症)이 더욱 심해져 몸을 자리에 누이지 못하고 밤새도록 신음하며 아파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병증으로는 직임을 수행할 가망이 전혀 없습니다. 부디 속히 관직을 삭탈하여 사사로운 분수를 편안하게 해 주소서.
아, 윤행임의 요망함과 사특함은 이미 소계에서 토죄하기를 청한 내용에 자세합니다. 신이 충청도에서 올라올 적에 여러 사람의 말을 들으니, 윤행임이 제 아비를 위하여 원우(院宇)를 짓고 사당을 설치한 일이 호서와 영남 사이에서 이미 두세 군데가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그 아비는 전혀 일컬을 것이 없는 음관(蔭官)인데도 이렇게 거리낌 없이 사사로이 제사를 설행하였으니, 사사로이 원우를 설치하자고 먼저 논한 선비 및 금하지 않은 수령에 대해, 형조로 하여금 해당 도(道)에 관문(關文)을 보내 묻게 하여 찬배(竄配)하는 형전을 시행하고, 만들어 놓은 원우는 즉시 헐어 없애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윤행임이 아버지 윤염(尹琰)을 온양군(溫陽郡)의 금곡서원(金谷書院) 충효당(忠孝堂), 석성현(石城縣)의 봉호서원(蓬湖書院), 김산군(金山郡)의 경렴서원(景濂書院)에 배향한 것을 가리킨다. 《純祖實錄 1年 8月 9日》
○ 순조실록 3권, 순조 1년 8월 9일 계축 1번째기사 1801년 청 가경(嘉慶) 6년
비국에서 호서·영남 에서 보내온 관문에 대해 아뢰다
비국(備局)에서 아뢰기를, "지난번 지평 심보영(沈普永)의 상소로 인하여 윤염(尹琰)을 서원(書院)에 멋대로 제향(祭享)한 일이 있는지 없는지를 호서(湖西)·영남(嶺南) 두 도(道)에 관문(關文)을 보내어 문의하였더니, 사보(査報)가 지금 비로소 일제히 도착하였습니다.
그런데 호서에는 전 도신(道臣) 이태영(李泰永)이 있을 때에 온양군(溫陽郡)의 금곡 서원(金谷書院) 충효당(忠孝堂)에 멋대로 제향하였고 지금의 도신 윤광안(尹光顔) 때에 석성현(石城縣)의 봉호 서원(蓬湖書院)에 멋대로 제향하였으며, 영남에는 지금의 도신 김이영(金履永) 때에 금산군(金山郡)의 경렴 서원(景㾾書院)에 멋대로 제향하였습니다.
대개 이 세 고을 유생(儒生)의 무리들이 권간(權奸)에게 아첨하여 빌붙어서 사사로이 제멋대로 제향하였는데도 처음부터 관유(關由)하지 않았고 영문(營門)에서 비록 알았다 하더라도 이상한 일이 있는 것을 금하지 않았습니다. 일이 이미 자기가 맡은 도내(道內)에 있었다면 살피지 못한 책임을 면하기 어려우니, 해당 양도(兩道)의 전후 도신을 아울러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세 고을의 수창(首倡)한 유생 등은 청컨대 도신으로 하여금 사실을 조사하여 엄중하게 감죄(勘罪)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대언(臺言)으로 인하여 그때의 수령(守令)을 잡아다가 감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