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여삼
성가정에서 태어난 순교자
?~1812, 세례명 바오로,홍주에서 매 맏아순교
이여삼(바오로)은 충청도 홍주 땅 배울에서 태어났다. 언제 그의 집안이 복음을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맏형 이무명을 비롯하여 여러 형제가 함께 교리를 실천하면서 성가정을 이루었다. 이여삼은 막내였다.
한 가족이 받은 박해와 수난
이 집안에서 처음 박해를 겪은 것은 1791년 신해박해 때였는데. 이때 이무명의 아들 이태권(李太權,베드로)이 체포되었다가 배교함으로써 석방 되었던것이다. 그리나 그는 집으로 듬아온 뒤 다시 가족의 신앙 안에서 열심히 생활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로 이여삼의 집안은 다시 한번 수난을 겪게 되었다. 이때 이무명과 이여삼은 전라도로 피신하였다가 그곳에서 체포되어 홍주로 압송된 뒤. 다시 공주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이무명의 아들 한 명과 이태권도 체포되어 공주 감영에서 문초를 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석방되고, 이무명만 전라도로 유배형을 받았다. 풀려 난 이여삼은 즉시 자신의 심약한 마음을 뉘우치고 형 한 명과 함께 공주에 있는 산으로 피신하여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듬해 2월 이태권은 숙부 두 분이 공주의 산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이때 뒤쫓아온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이들 모두 공주로 압송되고 말았다. 여기에서 이들 가족은 다시 한번 마음이 약해져 배교함으로써 이태권은 석방되었고, 이여삼 형제는 유배형을 받았다.
한편 이무명은 1804년에 유배지인 전라도 땅에서 사망하였다. 그리고 여러 차례 배교하였던 이태권은 1839년의 기해박해 때 다시 체포되어 이번에는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하다가 전주에서 참수되었다.
1802년에 유배형을 받았던 이여삼은 10년 후에나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고향에서 살지 않고 전라도 금산의 개지기(지금의 충남 금산군 남이면 건천리)로 이주하여 신앙 생활을 하였다. 그때까지 예비 신자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의 신앙은 점차 굳세어져 순교할 마음까지 갖게되었다.
한편 조정에서는 1811년에 천주학쟁이들을 찾아내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결과 1811〜 1812년 사이에 충청도 홍주, 해미, 덕산 등지에서 10여명에 이르는 신자들이 체포되었는데. 이때 이여삼의 친척 중 몇 사람도 체포되었다. 친척들은 이내 이여삼을 고발하였고,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이여삼이 살고 있던 개지기 마을로 포졸들을 이끌고 오기까지 하였다. 그때가 1812년 6월경이었다. 이로써 이여삼은 세 번째로 박해자들의 손에 체포 되어 홍주로 압송되었다.
순교하는 순간 하늘에서 이상한 광채가
그러나 그의 신앙은 분명 이전과 달랐다. 홍주 감옥에 5개월 동안 갇혀 있으면서 여러 차례에 걸쳐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그는 끗끗하게 신앙을 증거하면서 모든 물음에 당당히 답변하였다. 비신자인 그의 친구 몇 명이 찾아와 “굴복과 아첨하는 말 몇 마디 하고 목숨을 보전하라"고 권유하였으나, 그는 한결같이 “하느님을 위하여 죽기로 결심하였다"고 대답했다. 관장은 ‘끝내 그를 배교시킬 수 없다’ 는 것을 알고 사형을 언도 하였다.
11월 말, 홍주 목사는 장날에 그를 처치하기로 결심하고 힘센 두 명의 형리를 시켜 삼모장으로 그를 치게 하였다. 오랫동안 매질을 당한 뒤 이여삼이 꼼짝않고 엎드려 있자, 관장은 형리에게 “아직 죽지 않았는지 보라”고 하였다. 형리들이 살펴보았을 때 이여삼은 거의 죽어 가고 있었다.
▲ 매질을 당하여 거의 죽어가던 이여삼은 물을 청한 뒤 갑자기 성호를 긋고 자신에게 세례를 거행하였다.
바로 이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꼼짝않고 있던 이여삼이 갑자기 몸을 일으켜 장엄한 예식이 있을 때 하는 것처럼 바르게 꿇어앉은 뒤 물을 갖다 달라고 청한 것이다. 그는 아직 예비 신자에 지나지 않았지만, 물을 갖다 주자 크게 십자 성호를 긋고는 자신에게 “세례를 주노라"라고 하면서 머리에 물을 부었다. 그런 다음 눈이 휘둥그래진 관원과 형리들을 올려다보며 말하였다.
"저는 큰 죄인입니다. 그런데 매를 이렇게 때린다면 아직도 죽을 길이 아득합니다. 제가 죽기를 바란다면 여기를 치십시오." 그러면서 이여삼은 옆구리 어느 한 부분을 손으로 가리켰다. 이에 형리가 그곳을 두 번 치니, 숨을 거두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마혼셋 정도였다.
이여삼이 순교하는 순간.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을 지나가던 젊은이 세 명이 찬란한 광채가 하늘까지 뻗쳐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이를 보고 그들은 “저게 대체 무얼까? 불도 아니고 참 이상한 걸!” 하면서 그대로 걸음을 계속하였다. 이 중 한 사람은 신자였는데, 집에 돌아간 지 3일 후에 이여삼이 순교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가만히 날짜와 시간을 따져 보니 그 광채가 나타났던 시각이 바로 그의 순교 시각과 꼭 들어맞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여삼이 순교한 뒤 친척들과 친구들이 장사를 지내 주려고 그의 시체를 거두었다. 그런데 매를 맞아 갈기갈기 찢기었던 시신에는 상처의 혼적조차 없었고. 오히려 환한 광채를 발하는 것 같았다. 그중 한 사람은 이 광경을 보고 감동하여 열렬한 신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여삼의 이름은 이때부터 홍주 관원과 포졸들의 입에 오랫동안 오르내렸다. 그리고 순교 당일에 광채를 보았던 사람과 그의 시신을 장사지낼 때 참여 한 사람의 어느 자제는. 훗날까지 그 기적을 만나는 사람들에 게 증언해 주었다. 그 후 홍주의 형리들은 신자들이 체포되어 형벌을 받을 때면. “여삼이처럼 매를 참아 받아야 하는 거야” 하고 말하였다. 그리고 순교자들이 죽은 뒤에 이상한 광채가 보이지 않으면, “이 사람은 아무래도 여삼이만 못해”라고 단정을 내리기까지 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