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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2025년 1월 19일 / 요 13:1-5
요 13:1-5 / 예수께서는 유월절 전날이 아버지께로 돌아가시기 전에 세상에서 지내실 마지막 밤인 것을 알고 계셨다. 2-3) 마귀는 이미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때를 이용해서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를 꾀어 그 밤 안으로 예수를 배신할 계획을 진행하도록 일러두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신에게 맡기신 것과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가 하나님께로 가실 것을 알고 자기의 제자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한층 더하셨다. 4) 그래서 예수께서는 식탁에서 일어나셔서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동이고는 5) 대야에 물을 떠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허리에 둘렀던 수건으로 그들의 발을 닦아 주기 시작하셨다.
1. 십자가를 볼 때에 가룟 유다를 생각하게 된다.
영적 전쟁이나 패배는 항상 생각의 영역에 있습니다. - 프란시스 쉐퍼 -
사탄은 사람의 생각을 통해 역사한다. 요한복음 13장 2절에 보면,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알아야 한다. 자신에게서 비롯된 생각인지, 하나님께서 주신 생각인지, 마귀가 넣은 생각인지를 분별해야 한다. 사람들은 생각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생각을 관리하지 않는다. 생각의 영역을 관리하지 않으면, 마귀가 생각을 장악한다. 그래서 말씀 묵상이 중요하다. 말씀 묵상은 생각 속에 말씀을 채워 넣는 것이다. 마귀가 넣은 거짓된 생각, 부정적인 생각 등을 말씀 묵상을 통해 걸러내야 한다.
그래서 시편 150편의 시가 있는데,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시편 1편으로 시편 전체의 서론에 해당하는 시이다. 복 있는 사람과 악인의 선명한 대조를 통해 행복의 길을 제시하였던 같다.
시 1:1-6 /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우리의 사고는 우리의 행동을 결정짓는 모판이다. 우리의 의식에서 하나님을 따르고 그의 뜻을 계속하여 지켜야 한다. 가룟 유다는 다른 제자들처럼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녔는데, 다른 제자들보다 똑똑했던 가룟 유다가 왜 이렇게 곁길, 잘못된 길로 나갔는지? 예수님이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라는 말씀처럼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아니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 .
2.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
날이 갈수록 사람들 사이에는 사랑이 식어 가고 있다. 오늘날의 사랑은 인스턴트 음식만큼이나 금방 데워지고 금방 식어버린다. 사실 처음 불같이 사랑하는 것은 쉬워도 끝까지 사랑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요한계시록에도 보면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을 유지하지 못하고, 끝까지 사랑하지 못하여 주님으로부터 회개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 남북전쟁이 일어났을 때 아름다운 소녀와 약혼한 청년이 군대로 떠났고, 그 청년은 전투에서 중상을 입게 되었다. 그가 사랑한 처녀는 그의 처지를 알지 못하고 그가 돌아올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낯선 글씨체의 봉투를 받았다. 그 편지에는 ‘전쟁 중에 양팔을 다 잃었으니 나의 남은 생은 다른 사람을 의지하며 살 수밖에 없소. 그러니 나는 당신을 자유롭게 해 주고 싶소.’라고 쓰여 있었다. 하지만 처녀는 즉시 기차를 타고 청년이 있는 병원으로 갔다. 그녀의 눈이 그와 마주친 순간 그녀는 ‘나는 당신을 결코 버리지 않겠어요. 내 생명 다하는 날까지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나의 양손이 당신을 도울 거예요. 그리고 당신을 돌봐 드리겠어요.’라며 울먹였다.
1절에 쓰인 ‘끝까지’라는 말은 ‘생애의 마지막까지’, ‘영원히’, ‘지극히’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사 람은 완전하지 않다. 장애인이 된 청년과 같다. 또 죄악에 물들어 있기에 흠투성이다. 그러나 이런 우리의 모습 그대로를 예수님께서는 사랑하셨다.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주면서까지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 예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며 반성도 해야 한다. 이에 가룟 유다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그 사랑을 배워야한다.
1. 예수님은 사랑의 식탁을 마련하셨다.
3절에 ‘저녁 먹는 중’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음식은 인간관계를 회복시키는 데 대단히 중요하다. 사랑의 식탁에서는 언제나 평상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해결도 된다. 성경에도 보면 사랑의 식탁을 통해 복을 받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베다니 마르다와 마리아의 가정은 사랑의 식탁을 통해서 예수님과 허물없이 지내는 가정이 되는 축복을 누렸다(요 12:2). 예수님은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의 기적으로 광야의 식탁을 차리시고 남자만 5천 명을 먹이셨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선생님을 부인한 자신들의 죄책감으로 고향에 돌아가 물고기를 잡고 있던 베드로를 위해 해변에서 사랑의 식탁을 마련해 주셨다. 그리고 본문에 기록되어 있듯이 유월절 전날 사랑하시는 제자들을 위해 식탁을 마련해 주셨다.
그뿐 아니다. 말세의 교회라고 불리우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계 3:14-20 /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계 3:20 /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2.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아시는 예수님은 혼란스러운 마음에서도 종의 도를 행하셨다.
팔레스타인의 길은 전혀 포장이 되어 있지 않아 먼지투성이었다. 건조기에는 그 길이 몇 인치씩 먼지 속에 파묻히고 우기에는 진흙투성이가 되어 버렸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신고 다닌 신발인 샌들은 먼지나 진흙을 방지하는데 아무 쓸모가 없다. 그래서 집집마다 문 앞에는 물 항아리가 마련되어 있었고, 손님이 왔을 때에는 종이 손님의 더러워진 발을 씻겼다. 그런데 이 만찬에는 발 씻어 줄 봉사자가 없었다. 이는 모두가 높은 사람, 섬김을 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눅 22:24).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요즘 신문, 잡지, 일반 서적들이 다루는 특집 주제에 관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최고가 되려고’, ‘섬김을 받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친히 상전으로서, 왕중의 왕으로서, 메시야로서 종의 일을 감당하셨다. 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을까? 먼저 세상을 이별하실 때가 가까웠기 때문이며, 자기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제자들에게 사랑의 정신을 심어주시고, 성도간의 사랑을 가르치시기 위해서였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일상생활의 장면들 속에서 서로를 신실하게 섬김으로써 사랑을 주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겸손과 봉사의 모습을 보여주셨다(눅 22:27).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사랑의 수고를 땀을 흘리도록 해야 한다.
♬ 220장 사랑하는 주님 앞에
❶ 사랑하는 주님 앞에 형제 자매 한 자리에 크신 은혜 생각하며 즐거운 찬송 부르네 내 주 예수 복을 받아 모든 사람 내 몸 같이 환난 근심 위로하고 진심으로 사랑하세
❷ 사랑하는 주님 앞에 온갖 충성 다 바쳐서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님만 힘써 섬기네 우리 주님
거룩한 손 제자들의 발을 씻어 남 섬기는 종의 도를 몸소 행해 보이셨네
❸ 사랑하는 주님 예수 같은 주로 섬기나니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여 친구들이여 한 몸 같이 친밀하고 마음으로 하나되어 우리 주님 크신 뜻을 지성으로 준행하세
3. 가장 미워할 사람을 가장 가까운 곳에 앉게 하셨다.
요한복음 1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하신 말씀을 찾아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개인적으로 말씀하셨다는 것은 곁에 유다가 있었다는 의미이다. 유월절 떡은 비스듬히 누워서 받아먹는 관습이 있다. 이것으로 보아 유다의 위치는 예수님의 왼편이었다. 요한의 머리가 예수님의 가슴에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의 머리는 유다의 가슴에 있었다. 예수님의 좌우에는 유다 그리고 요한이 앉았다. 주인의 왼편 좌석은 연회장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이며, 가장 친한 친구를 위한 자리이다.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되어질 일을 아시고도 이 귀중한 자리에 유다를 초대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3:34에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고 하셨다. 이렇게 사랑은 우리에게 주어진 예수님의 명령이다.
4. 가장 미워할 자에게도 떡을 찍어 주셨다.
주인이 손님에게 음식을 떼어 주는 것은 특별한 사랑의 표시이다. 룻기 2:14 이하에 보면, 보아스가 얼마나 룻을 존중히 여기고 사랑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는데, 그는 자기 옆으로 와서 떡 조각을 포도주에 찍으라고 룻에게 권했다. 이처럼 떡을 떼어 찍어주는 것은 신뢰와 우정과 사랑의 표시이다. 예수님께서 한 조각의 떡을 떼어 유다에게 주었던 것은 특별한 사랑의 표시였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번 자신 옆에 앉게 하시고 떡을 떼어 주시면서 유다의 어두운 마음을 향해 호소하셨으나, 그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배신할 궁리만 하고 있었다. 특별한 사랑의 표시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예수님을 떠나 밖으로 나갔으며, 그때는 밤이었다. 마음이 사랑의 등불을 끌 때 그곳은 언제나 밤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등을 돌릴 때 언제나 밤이 된다.
5. 유다의 나쁜 마음을 알고도 숨겨 주셨다.
유다의 체면과 그의 생명을 생각하신 예수님은 그의 흉계를 끝까지 숨겨 주시면서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 만일 다른 제자들이 유다가 하고자 하는 바를 알고 있었다면 유다는 살아서 방을 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배신자 유다를 저주하기보다 끝까지 사랑하며 용서해주셨다.
롬 12:17-21 / 악을 악으로 갚지 마십시오. 누가 보더라도 여러분이 정직하다고 인정할 수 있게 행동하십시오. 18) 어느 누구와도 싸우지 말고 할 수 있는 한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십시오. 19)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스스로 복수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원수 갚는 일은 내가 할 일이니 내게 맡기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20) 오히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그는 자신이 해온 일을 생각하고 부끄러워 머리 위에 숯불을 올려놓은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릴 것입니다. 21) 악이 기세를 부리지 못하게 하십시오. 선한 행실로 악을 정복하십시오.
그러므로 원수를 끝까지 사랑하고 용서하며, 그가 회개하도록 기도하는 성도가 되어야한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을 나타내는 삶을 사는 성도가 되자.
■ 찬송가 147장은 '거기 너 있었는가'라는 찬송이다. 이 찬송은 흑인 영가이다. 이 찬송의 저자는 야곱과 라헬이라는 흑인 부부였다. 그들의 이름은 그들이 몹시 사랑하는 성경에 나오는 이 두 인물들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야곱이라는 흑인은 준수한 체격에 튼튼한 모습을 지닌 사람이었다. 또한 라헬은 참으로 아름다운 흑인 여인으로 서로 몹시 사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인 야곱이 노예로 팔리게 되었다. 가족은 헤어졌으며 노예생활은 슬프고 외로웠다. 감독들의 사나운 채찍아래 살아가지 않으며 안되는 고달픈 생활이었다. 그런데 야곱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을 몹시 사랑하는 형제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슬픔과 고달픔과 고통 중에서도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를 생각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견딜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말씀을 생각하곤 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한 기도를 생각하며 그는 마치 자신이 십자가에 있는 것 같은 경험을 하면서 이러한 과정 속에서 찬송을 만들었다. 이 찬송은 은연중에 흑인들 가운데서 고통과 아픔 중에서 불려지게 되었다.
■ 이슬람교에 대한 자료를 살피면서 깜짝 놀란다. 저들의 경전인 코란에 ‘예수를 믿으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43:63). 그리고 코란에서 참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예수에 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코란에 나오는 예수님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성경에 나오는 것과 거의 비슷하다.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신 것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셨다는 것과 그 복음을 믿어야 한다고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놀라운 기적을 베푸신 것도 사실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것과 다시 재림하실 것도 기록하고 있다. 이쯤 되면 이슬람교는 유대교보다 우리 기독교에 더 가까운 종교라고 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자칫 이슬람교와 기독교는 충분히 대화가 가능한 종교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한 가지 있다. 바로 십자가이다. 저들은 예수의 십자가를 생략하거나 무시하는 정도가 아니다. 적극적으로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고 가르치고 있다(3:55). 십자가에서 죽음을 모면한 후 샘이 흐르는 곳으로 갔다고 기록하고 있다(23:50). 그래서 이슬람교는 예수님을 구세주가 아니라 알라가 보낸 위대한 선지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더 적극적으로 기독교가 예수님을 잘못 가르치고 있다고 기독교를 적대시하고 공격한다.
그렇다. 십자가가 결정적인 기준이다. 십자가가 빠진 예수님은 참된 예수가 아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기적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고,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과 승천까지 믿는다고 해도 나의 죄와 인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빠지면 그것은 헛된 것이다. 지금까지 지은 나의 죄와 허물은 어찌하고,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나는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그렇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인한다면 아무리 예수님을 치켜세우고 심지어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해도 그들은 적그리스도이다.
■ 백선임 / 일제시대에 평양에 14살에 결혼하여 16살에 남편이 세상을 떠남으로써 과부가 된 백선희라는 자매가 있었다. 그는 새벽이면 교회에 나가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목사님을 아버지처럼 여기고 신뢰하고 교회 일에 앞장서 봉사했다. 그리고 열심히 삯바느질을 하여 돈을 모았다. 어느 날 누군가 찾아와서 좋은 산이 하나 있으니 그 산을 사라고 말하니 소개하는 말만 믿고 그 산을 샀다. 모든 사람이 다 자기 같은 줄 알고 믿고, 좋은 산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좋은 산이라고 생각하고 산을 샀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 봤더니 그 산에는 나무 한그루도 없고 풀 한포기도 없는 그냥 돌산이었다. 속았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상하긴 했어도 기도 중에 ‘내가 그 산을 사서 다행이지, 다른 사람이 그 산을 샀더라면 얼마나 마음이 상할까?’하고 그냥 참고 있었다. 몇 년이 지난 후에 누군가가 또다시 찾아와서 ‘그 산을 많은 값을 줄테니 팔아라’라고 했다. 그때에 백선희 성도는 거절했다. 쓸모없는 산을 내가 파는 것은 양심이 괴로운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값을 많이 준다는 것은 그것도 괴로운 일이었다. 거절을 하니 또 다음에 찾아와서는 그때 값보다 10배를 더 줄테니 팔라고 또 매달렸다. 당시 일본은 도로를 내고 공장을 짓는 일로 시멘트의 원료인 석회를 찾고 찾다가 백선희씨가 소유한 그 산이 온통 석회로 가득 찬 돌산임을 알아낸 것이다. 그것을 알 턱없는 백선희씨가 그것을 팔지 않겠다고 거절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다. 나중에는 100배까지 값이 뛰었다. 200배까지 뛰었다. 그래도 안 판다고 말하자 일본사람은 그 여인의 신분을 조사하였다. 광물학자가 있는지, 고고학자가 있는지, 어떤 배경이 있는지 알아보라고 했는데, 배경을 알아보니 주위에는 아무 인물도 없고 다만 교회 다니는 신자라는 것만 알아냈다. 그때 일본 사람이 생각하기를 교회 다니는 신자들은 다른 사람 말은 안 들어도 교회 목사님 말씀은 잘 듣는다는 것을 알고 목사님을 찾아갔다. 그리고 일본 사람은 목사님에게 그것을 팔도록 권고해 달라고 말했고, 사실 그 산은 석회산이라고 말해주었다. 그제야 목사님은 백선희씨를 찾아가서 하나님이 바로 이때를 위해서 자매에게 큰 복을 주신 것이니 산을 팔라고 해서 250배의 돈을 받고 그 산을 팔았다. 사기 당한 줄로만 알았던 그 산, 값싸게 팔아도 될 수 있었지만 다른 사람 마음 아플까봐 갖고 있었던 그 산이 황금덩이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그래서 훗날 조만식 장로님의 기념관(서울특별시 중구 수표로 48-2 저동2가)을 지을 때 백선희씨가 거금을 내놓아서 기념관을 잘 지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백선희씨는 선한 일을 너무너무 많이 했기 때문에 그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이름을 백선임으로 불리게 되었다.
결론을 십자가 질 것을 다짐케하는 두가지 예화로 맺는다.
밸런타인데이(Valentine Day) / 매년 2월 14일은 밸런타인데이(Valentine Day)이다. 남자가 평소에 호감을 가지고 좋아하는 연인에게 초콜렛이나 사탕을 마련하여 카드와 함께 전달하면서 사랑을 고백하는 날이다. 이 세상에 가장 풍요롭고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있다면 누군가를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며 누군가로부터 또 사랑을 받는 사람이다. 많은 지식과 재물, 그리고 높은 지위와 명예를 가진 사람이라도 진정으로 사랑할 대상이 없고 사랑해 주는 사람이 없다면 타인의 원격조정으로 움직이는 로봇에 불과한 인생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생기 넘치고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사랑이다. 동식물도 사랑한다고 말하면 건강해지고 물도 사랑한다는 말을 외치면 아름다운 결정 모양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
그런데 여성이 남성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이 밸런타인데이는 주후 269년에 있었던 사랑의 이야기이다. 로마의 황제 클로디우스 2세는 청년들을 군대에 보내기 위해 ‘금혼령’을 내렸다. 남자가 결혼하게 되면 처자식에 매여서 전쟁이 났을 때 군대에 나가기를 꺼려하고 도망을 가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 주교였던 밸렌타인은 황제 몰래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을 결혼시켰다. 결혼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믿음을 실천한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황제는 크게 노하였다. 그래서 밸렌타인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고 로마신 쥬피터를 믿으면 살려주겠다.’고 했다. 그때에 밸렌타인은 말했다. ‘쥬피터는 신이 아니요, 그것을 섬기는 것은 우상이며 참된 신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구원자도 예수님뿐입니다.’ 황제는 밸렌타인을 처형키 위해서 로마시장에게 그를 보냈다. 시장은 법관 아스테리오에게 맡겼다. 밸렌타인이 아스테리오집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 집에는 시각장애를 입은 한 딸이 있었다. 밸렌타인 주교는 그 딸을 보는 순간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그는 그를 붙들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의 딸의 눈이 떠지게 되었다. 그 일로 인하여 그 아스테리오 법관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고, 전 가족과 일가친척 40여명이 함께 세례를 받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눈을 뜨게 된 그 여자 아이는 밸렌타인을 사랑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들이 결국 황제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법관을 오스티시라고 하는 곳으로 끌고 가서 참수형에 처하게 했고 밸렌타인은 끌어다가 회당에서 몽둥이로 때려죽이라고 명하였다. 그 날이 바로 주후 270년 2월 14일이었다. 그 처형이 있기 전 밸렌타인은 그 죽음을 앞에 놓고 사랑하는 여인에게 천국에서 만나자는 작별인사를 썼다. 이것이 바로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우리에게 전해준 그런 밸런타인데이가 된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밸렌타인처럼 신앙을 지켜야 합니다. 고난이 있어도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한다. 신앙은 결단이다.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십자가를 져야 한다. 고난의 십자가이다. 사명의 십자가이다. 그런 사람에게 부활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죄가 매를 맞으면 무슨 칭찬이 있겠는가? 그러나 선한 일을 위해 고난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니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등에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Quo vadis, Domine?) / 로마의 제5대 황제 네로(37-68년)는 17세에 왕이 되어(54-68재위) 통치 초기에는 해방노예를 중용, 감세, 원로원 존중, 매관매직 폐단 시정으로 선정을 베풀었으나 점차 그의 포학한 성격이 노골화되어 의붓동생과 어머니와 아내를 살해하더니 마침내 로마시에 불을 지르고 그 책임을 기독교회에 전가시켜 그리스도인 대학살을 감행하였다. 그때 로마의 성도들이 베드로에게 이 환난을 피하여 생명을 보존하도록 간곡하게 권고하므로 그는 남쪽 성문을 나와 압비아 가도를 따라 도망가고 있는데, 마침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오시는 것을 본 베드로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물었다. 그때 ‘나는 네가 버린 로마의 어린 양들을 위해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러 가노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충격을 받은 베드로는 주님의 마음을 읽고 ‘주님 십자가는 제가 지러 가겠습니다’하고 로마로 돌아가서 박해 중에도 목회하다가 바티칸 언덕에서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였다. 지금은 그 Via Appia 길목에 ‘쿼바디스기념교회’가 세워져 있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자기 중심적 생각을 버리고 주님이 원하는 방향으로 살아가도록 교훈해 주고 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헌신하신 마지막 종점이다. 솔직히 우리가 헌신해야 할 상황이 발생하면 그 자리에 있다가도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십자가는 헌신의 절정이다. 십자가의 능력은 헌신하게 하는 능력이 있다.
기도문 / 주여, 저로 하여금 십자가 나무로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린 분에게로 가까이 가게 하소서 십자가에서 약해져 주님의 능력으로 강해지게 하소서 십자가에서 어리석어져 주님의 은혜로 지혜로워지게 하소서 십자가에서 죽어 주님과 함께 매일 다시 살게 하소서 십자가로 가까이 십자가로 가까이 내 생의 종착역이 가까워질수록 주님의 십자가에 더 가까이 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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