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전: 주제 컬렉션 | 국사편찬위원회 - 전자사료관[Archives of Korean History]
냉전시대 미국의 대내안보 인식과 한국경찰의 시위진압 훈련
1 들어가며
1950년대 중반이후 미국은 한국에 경찰원조를 제공했다. 대한(對韓) 경찰원조의 일차적인 목표는 경찰의 낙후된 장비와 시설, 체계를 현대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3세계 지역에서 전개된 냉전의 ‘특수한’ 성격으로 인해 경찰원조의 방향성은 점차 변화하였다. 제3세계의 공산주의자들은 전면전보다는 유격전을 통해 내부 분쟁을 유도하거나, 사회를 혼란시켜 내부로부터의 체제 붕괴를 꾀하는 방식 등을 활용하여 끊임 없이 체제 전복을 시도하였다. 동남아시아 지역의 내전, 쿠바 혁명 등은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시키기 위한 대내안보 기구의 중요성을 부각시켰고, 자연스럽게 경찰의 역할이 주목되기 시작하였다.
미국의 대한(對韓) 경찰원조는 공산주의 진영과 직접 총구를 맞대고 있는 한국 사회의 안정을 공고히 하여, 한국이 ‘동아시아의 보루’로서 기능하길 원했던 미국의 의도를 담고 있었다. 이때 중요한 점은 미국의 경찰원조를 통해 한국 경찰은 북한의 대남침투에 대한 대응능력뿐만 아니라, 시민사회의 저항운동 진압을 위한 역량도 함께 키워나갔다는 점이다. 냉전시대 한국사회에서 경찰은 시위 및 소요사태가 체제에 대한 위협으로까지 확산되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고 제어하는 기능을 부여 받았다. 미국이 시행한 경찰 원조의 내용과 시위 진압에 관한 대응책을 다룬 사료를 통해 냉전시대 미국이 한국사회와 경찰을 바라보는 시각을 보다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자.
2미국의 한국경찰 원조 사업과 대반란전(Counter-Insurgency)
경찰은 국가의 물리적인 행정력을 뒷받침하는 핵심적인 국가 기구이다. 군대가 외적으로부터의 침입을 방비하고 적을 물리치는 역할을 한다면, 경찰은 내부의 치안을 담당하면서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시키고, 필요시 물리적인 힘으로 국가의 강제력을 행사한다. 대대적인 시위가 발생하거나, 큰 국가적 위기가 발생했을 때 경찰이 현장에 출동하며 더 큰 혼란의 발생을 막는 모습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러한 경찰 조직의 성격으로 인해, 체제 간 경쟁과 사회 내부의 소요 사태가 자주 발생했던 냉전시대 제3세계에서는 경찰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이는 냉전과 동시에 수립된 대한민국이라는 신생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45년 해방이 되었을 때, 일제 조선총독부의 물리력을 뒷받침했던 식민지 경찰조직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남한 지역을 점령한 미 군정 입장에서는 통치를 위해서라도 경찰 조직이 절실히 필요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는 국가의 안정적인 통치와 지방에 대한 행정력 발휘를 위해 경찰 조직의 규모를 확대하고 장비와 시설을 현대화하려는 노력이 계속되었다. 이때 195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미국의 경찰원조 사업은 한국 경찰의 개혁과 현대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미국은 경찰 조직의 ‘민주화’와 ‘현대화’를 강조하면서 이를 위한 장비 지원, 교육 훈련을 시행하였다.
한편 1950년대 제3세계 지역에서 전개된 냉전의 독특한 양상은 경찰 조직의 역할 변화를 요구하였다. 세계 2차 대전 이후 식민지에서 독립한 신생국가들에서는 어떤 국가를 건설할 것인가를 두고 내부의 투쟁이 격렬하게 이루어졌다. 국가건설 노선을 둘러싼 내전은 자유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의 대결, 즉 냉전과 결합하면서 더욱 복잡하고 치열한 양상으로 펼쳐졌다. 말레이시아, 미얀마, 베트남, 필리핀, 태국, 한국 등 아시아 대부분의 지역에서 내부 갈등은 무력 충돌을 동반한 치열한 싸움으로 확대되었다. 제3세계 지역의 냉전을 냉전(Cold War)가 아닌 ‘열전(Hot War)’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때 미국이 주목한 것은 제3세계 국가들의 '사회 안정' 문제였다. 오랜 식민통치로 인해 누적된 경제적 모순과 향후 건설될 국가의 방향성을 두고 일어난 치열한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갓 독립한 제3세계 사회는 사회적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더하여, 신생정부는 사회를 안정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여력을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다. 미국은 이러한 불안정한 사회상이야말로 체제 전복을 위한 공산주의자들의 끊임없는 시도가 발생하는 토양이라고 인식하였다. 따라서 미국은 사회의 안정, 즉 공안(Public Safety)를 확보하기 위한 지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공안을 확보하기 위한 지원의 중심에 경찰 원조가 배치되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대반란전(Counter-Insurgency)라는 개념은 경찰 원조의 내용과 성격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끊임없이 발생하는 공산주의자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사회를 안정적인 상태로 유지하는 역할이 경찰 조직에 부여되었다. 경찰은 단순히 국가의 행정력을 뒷받침하는 물리적 수단을 넘어서서, 국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공산주의자 또는 위험분자들을 색출하고 이들의 불온한 ‘반란’을 억제해야 하는 역할도 함께 갖게 되었다. 이러한 경찰의 역할 변화는 1960년대 미국이 한국에서 시행한 경찰원조에도 적용되었다. 경찰은 내부에서 발생할 수 있는 소요 사태에 대한 대응능력을 갖춘 무력 조직이 되어야 했다.
실제로 1960년 4월 혁명은 국가에 대한 대중의 광범위한 분노와 시위 행동이 국가 행정부를 붕괴시킨 중요한 사건이었다. 4월 혁명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체제 전복 시도와는 관계 없는 사건이긴 했으나, 미국은 이와 같은 사태의 재발과 혹여나 있을 공산주의자들의 ‘반란’ 시도를 우려했다. 미국은 동아시아의 주요 동맹국인 한국이 안정적으로 유지되길 원했다. 미국의 경찰 원조에서 본격적으로 시위 진압에 관한 내용이 강조되기 시작한 것도 4월 혁명 이후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미국의 지원을 통해 강화된 한국 경찰의 시위 진압 능력은 이후 시민사회의 저항운동이 전개될 때마다 위력을 발휘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연출했다.
여기에서 살펴볼 사료는 주한 미 대사관과 워싱턴 사이에서 한국의 치안 상황을 논의한 문서, 미 원조당국의 주도로 실시된 경찰원조 계획과 내용에 관한 것이다. 경찰원조에 관한 자료는 이미 국내에 상당히 많은 양이 수집되어 있기 때문에, 그 중에서도 대반란전과 연관된 미 원조당국의 경찰원조 자료를 중점적으로 소개할 것이다. 경찰원조가 시작된 것은 1950년대 중반부터였지만, 이 글에서는 1960년대, 4월 혁명이후 시행된 경찰원조를 중점적으로 다룰 것이다. 이를 통해 1960년대 미국의 제3세계 경찰원조의 성격을 확인하여, 대반란전이라는 냉전의 특수한 시대적 상황이 한국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엿보도록 하자.
3수집사료 소개1) 대한민국 경찰(Korean National Police, 1960. 7. 8.)
참조코드제목생산기간시작
AUS056_01_00C0164_010 | Korean National Police | 1960-07-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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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는 한국 경찰원조에 대한 자문 역할을 위해 미국에서 파견된 바이런 잉글(Byron Engle)과 로버트 로우(Robert Lowe)가 주한 미 경제협조처 처장 모이어(Raymond Moyer)에게 보낸 서한이다. 4월 혁명이후 미국은 한국경찰이 대중소요와 같은 혼란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조직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판단했고, 이를 위한 자문을 요청했다. 이에 본국에서 파견된 잉글과 로우는 1960년 6월 18일부터 약 3주 동안 한국에서 머물며 경찰 조직 재편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보고서는 공산주의자들의 체제 전복 시도로부터 국가를 보호하여 국내 치안을 유지하는 역할을 경찰의 핵심적인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대중시위와 폭동을 진압할 수 있는 경찰의 역량을 제고해야 하며, 그 방안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다루었다. 4월 혁명이후에도 변혁을 요구하는 대중운동이 계속되어 혼란스러운 정국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경찰의 치안 유지 역할은 더욱 중요해질 수밖에 없었다. 보고서를 작성한 후, 두 사람은 유솜에 한국 경찰에 관한 의견을 요약하여 다시 제출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이 사료이다. 자료의 내용을 살펴보면, 한국에서 국내 치안 유지를 담당하는 경찰의 역할이 간과된다면, 장차 한국과 미국의 이익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큰 소요가 발생했을 때, 미군이 작전통제권을 갖고 있는 한국군이 직접 투입되는 것보다는 경찰이 투입되어 사태를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도 담겨 있다. 따라서 이들은 경찰원조의 중요성은 앞으로 더욱 더 강조되어야 하며, 대반란전을 위한 조직으로서 경찰 조직의 효율성과 시위 대응 역량이 제고되어야 한다고 의견을 제시했다. 이 자료에서 눈여겨봐야 할 내용은 경찰이 국내 치안을 담당해야 하는 가장 핵심적인 조직이며, 경찰의 임무가 적절히 수행되어야만 국가의 정치·경제가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정치와 경제가 발전해야만, 공산주의자들의 체제 전복 시도로부터도 안전해질 수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 제3세계 지역의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반란사태’가 미국의 이해관계를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되면서, 미국은 ‘반란사태(Insurgency)’나 큰 소요를 진압하여, 안정적으로 국가를 유지하는 것, 즉 대(對)반란전을 국가의 정치·경제가 발전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동반되어야 하는 통치 전략으로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경찰을 국가의 대반란전 수행을 위한 핵심 조직으로 재편되었다. 이 자료는 이러한 미국의 인식 변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
2) 폭동 통제 계획(Riot Control Plan)
참조코드제목생산기간시작
AUS003_06_02C0009_006 | Riot Control Plan |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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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료는 1961년 2월 1일 작성된 ‘폭동 통제 계획(Riot Control Plan)’이다. 1960년 발생한 4월 혁명은 미국에게도 큰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부패한 이승만-자유당 정권의 독재가 지속되는 과정에서 치러진 3·15부정선거는 변화를 바라던 시민들의 거대한 분노를 낳았다. 학생들을 시작으로 그동안 누적되어온 대중의 불만은 폭발했고, 격렬한 대중시위로 이어지면서 정권은 붕괴되었다. 물론 미국 정부는 4월 혁명이 공산주의와 관계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혼란 상황의 수습을 위해 이승만의 하야를 종용하긴 했지만, 분노한 대중의 시위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다. 이 무렵 제3세계 지역에서는 체제 전복을 위한 민족주의-공산주의자들의 시도가 끊임없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미국은 한국에서 혹시라도 발생할 지 모를 통제 불가능한 상황을 사전에 대비하고자 했다. 게다가 4월 혁명을 통해 장면-민주당 정권이 수립되었지만, 변혁을 위한 대중의 요구는 시위 형태로 멈추지 않았다. 1961년 4월 혁명 1주년을 앞둔 시점에는 작년보다 더 큰 대중 시위가 발생할 수 있다는 예측이 심심찮게 제기되었다. 이 시기 미국 측 자료에는 4월 혁명 1주년의 대규모 시위를 미리 대비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지속적으로 확인된다. ‘폭동 통제 계획’은 실제로 발생할 대규모 시위에 대응하기 위해 작성된 훈련 계획이다.
1961년 2월 작성된 폭동 통제 계획의 내용을 살펴보면, 우선 시위에 대응하기 위해 필요한 경찰 인원을 상정하고, 필요한 장비의 목록을 나열하고 있다. 이때 필요한 장비에는 수송트럭, 최루탄, 바리케이트, 응급처치상자 등이 포함되었다. 또한 훈련방식을 설명하고, 5일 간의 교육을 반드시 수료하고 현장에 배치될 것이 요구되었다. 또한 폭동 발생시 상정한 진압 방식을 설명하였다. 이 계획은 폭동이 발생하면 해당 구역을 차단하고, 주동자를 확인하며, 거리를 통제해 시위가 통제할 수 없는 범위로까지 확산되는 것을 막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경찰에게 총이 지급된 것은 아니었지만, 최루탄과 봉, 호루라기를 사용하여 시위를 통제할 수 있도록 했다.
“Riot Control Plan - A Portion of the FY 61 National Police Modernization Program”[사료건 AUS003_06_02C0077_032]는 위 자료와 함께 참고할 수 있는 묶음 자료이다. 이 사료는 1961년 2월 13일 주한 미 경제협조처(USOM/K; 원조사업단)에서 미8군 헌병사령관에게 보낸 전문이다. 이 문서에서는 미 원조당국 공안부서에서 기획한 폭동통제계획이 주한미대사관, 유엔군사령부에서 검토되었으며, 유엔군사령부가 특정한 품목과 자금을 추가할 것을 미 원조당국에 요청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한국의 안보를 담당하는 핵심인 주한미군 역시 경찰원조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이 사료는 보여주고 있다. |
3) 공안(Public Safety) 보고서 1967년 5월 : 경찰의 대공행동대 활동
참조코드제목생산기간시작
AUS056_01_00C0061 | IPS # 2-2 / PS Monthly Reports W/ Attachments (Photos), Apr.-Nov. 1967, etc. | 1967-0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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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료철(IPS # 2-2 / PS Monthly Reports W/ Attachments[Photos], Apr.-Nov. 1967, etc.)은 미 국제개발처의 월간 보고서이다. 1967년 1월부터 11월까지의 내용이 묶여 있다. 그 중에서 72~79쪽의 자료 “Public Safety Report - May 1967”(72~79쪽)의 내용은 경찰 대공행동대(Sweep team) 활동에 관한 자료를 담고 있어 의미가 있다. 베트남전쟁에 한국이 전투부대를 파병하자, 북베트남 지원의 일환으로, 북한의 대남무력도발 횟수가 이전에 비해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북한의 무력도발로 인해 남북한 간의 긴장관계가 고조되는 과정에서, 북한의 폭탄 설치로 미군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에 간첩과 비밀 침투에 의한 체제 전복 시도를 억제하기 위한 더욱 강도 높은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여론이 고조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66년 5월 경찰 산하에 있던 수색대를 대폭 확대하여 대공행동대(Sweep Team)를 새롭게 설치하였다. 약 1000여명의 경찰로 구성된 대공행동대는 간첩의 침투를 방비하는 방첩·전투 수행 역할을 부여 받았다. 대공행동대는 산악과 해안 등 간첩이 침투할 수 있는 지역에 직접 배치되어 침투 루트를 봉쇄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대공행동대는 실제 무기로 무장한 대공전투 조직으로서, 이후 설립될 전투경찰대의 전신이라 볼 수도 있다. 미 원조당국은 대공행동대 소속 경찰들을 태국에 한달 간 파견하여 교육시키기도 했다. 같은 시기 태국은 미국의 지원 아래 경찰조직이 국경과 위험, 접경 지역에서 치안 유지뿐만 아니라, 군의 역할까지도 수행하고 있는 국가였다. 미국이 대공행동대 설립을 지원하면서, 태국에 파견 교육을 보냈던 것은 태국 경찰의 특수한 역할과 한국의 상황을 어느 정도 겹쳐서 보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후 1967년 8월에는 전투경찰대가 발족되었는데, 전투경찰대와 대공행동대는 모두 경찰이 국가의 물리력으로서 대반란전을 수행하는 핵심 기구로 배치되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원주에서 육군부대에 입영한 전투경찰대는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장교들에게 유격전에 대비한 훈련을 강도 높게 훈련 받았다. 미 원조당국은 전투경찰대의 역량 강화를 위해 차량, 무기 등의 장비 도입을 지원하였다. 이처럼 경찰은 단순한 치안 유지뿐만 아니라, 대간첩작전을 포함한 대반란전의 핵심 기구가 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강화된 경찰의 역량이 한국 시민사회의 저항운동을 탄압하고 억압하는데 활용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1969년 학생들의 삼선개헌 반대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경찰의 트럭에 “이 트럭은 미 국제개발처가 지원한 것”이라는 표식이 선명히 찍혀있었다는 이야기는 경찰원조와 관련된 역사적 아이러니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한편, 같은 사료철 80~86쪽은 대공행동대의 임무 수행·훈련 중 찍은 사진들 모음이다. 80쪽의 첫 사진은 산지에서 이동 중 찍은 사진으로, 사진만으로는 이들이 경찰 조직이라는 것을 전혀 구별할 수 없고 영락없이 군복을 입고 소총으로 무장한 군 병력처럼 보인다. 또한 산악 지역을 행군하며, 적을 겨누는듯한 이들의 훈련 모습은 이들이 오늘날의 경찰과는 분명히 다른 1960년대 냉전시대 한국의 상황을 보여준다. |
4미국의 대한 경찰원조에 관한 수집사료 현황 및 사료 이력
미국의 대한(對韓) 경찰원조에 관한 사료를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상당히 많은 양을 수집하여 소장하고 있다. 미국의 경찰원조는 1950년대 중후반부터 1960년대 후반까지 약 10여년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시기에 따라 주관부처의 성격 변화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미국 원조기관이 담당한 업무였기 때문에, 사업의 구체적인 내용들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들은 RG286 문서군과 RG469 문서군에 집중되어 있다. RG469문서군은 1942년부터 1961년 사이의 미국 원조기관 문서를 담고 있으며, RG286문서군은 1950년대 후반 이후의 자료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시기별로 성격을 구분해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특히 대반란전 수행을 위한 미국 경찰 원조의 강화는 RG286문서군에서 관련 자료를 확인할 수 있으며, 국사편찬위원회는 해당 자료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이미 상당히 많은 분량의 원조사업 자료를 수집하였다. Subject Files, 1956 - 1975 [Entry A1 31] (사료계열 AUS056_01)의 하위 사료철 175건에는 경찰원조 관련 자료가 다수 포함되어 있으며, 이 글에서 소개한 사료철 [AUS056_01_00C0164], [AUS056_01_00C0087]은 경찰원조와 관한 논의 내용과 구체적인 시행 사항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이외에도 사료철 제목을 통해 쉽게 경찰원조 관련 내용을 확인할 수 있으니, [사료계열 AUS056_01]을 직접 한 번 훝어보는 것도 좋다.
이외에도 미국 대사관 문서군인 RG84에서도 관련 자료를 확인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대반란전을 고려한 경찰원조는 미국 정부의 정책 결정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1960년대 미국 정부는 경찰원조의 방향성을 두고 내부에서 다양한 논의를 전개하였고, 한국사회의 치안에 관한 보고 속에서 경찰을 언급하기도 하였다. RG84군의 사료건 [AUS003_06_02C0009_006], [AUS003_06_02C0009_010] 등은 1960~1961년 사이 한국의 경찰력 강화를 다루고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5사료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