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三國志) (62) 조조의 혜안(慧眼)
다음날 진시(辰時: 오전 7~9시), 조조는 조인과 순욱을 대동한 채, 각각 갑옷 위에 상복(喪服)을 겹쳐 입고 출정 준비를 마친 병사들을 점검하였다.
출정 준비를 마친 병사들은 창과 투구를 비롯해 허리춤에 각각 조기(弔旗)를 상징하는 흰 베조각을 두른 상복을 입고 있었다.
그리하여 보수설한(報讐雪恨 :원수를 갚고 한을 씻는다) 이라고 쓴, 커다란 조기(弔旗)를 앞세우고 서주를 향하여 오만의 군사가 일시에 출발하였다.
얼마쯤 가지않아 마상(馬上)의 조인이 조조에게,
"주공, 이번 출정에선 왜 선봉대와 중군, 그리고 후군의 구분을 안 두시는 겁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조조는 ,
"하고 싶은 말이 뭔가?"
하고 즉각적으로 되물었다.
그러자 조인은,
"항상 철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출정할 때에는 누가 선봉이고, 누가 중군이고,후군인지 정하셨는데, 이번 도겸 토벌에는 왜 그리 안 하시는건지..."
그러자 조조가 냉정한 어조로 대꾸한다.
"이번 싸움은 전과 다르기 때문이야, 복수하겠다는 마음에 분노로 가득차서 이성을 잃었다고나 할까? 흥! 더 빨리 못 가는 것이 한이지! 해서, 이번에는 오만 대군이 모두 선봉대야!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서주를 취해, 힘을 아끼자는 것이지!"
그러자 순욱이 말을 받는다.
"원소와 원술 등 제후들은 주공의 부고를 받는 싯점에 도겸의 구원요청을 받을 게 분명합니다. 원소의 성격으로 볼 때, 며칠 망설이며 도겸을 도와야 할 지 말아야 할 지를 결정하지 못 할 것이니, 우리는 그 며칠 사이에 기필코 서주를 취해 손에 넣어야 합니다."
"들었나, 조인? ..이 얼마나 명쾌한 말인가? 내 설명보다 낫지않나?"
그러자 조인이,
"네, 이제야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한다.
그러자 순욱은 겸연한 어조로 조조에게,
"어찌 제가 주공에 비교 될 수가 있겠습니까. 주공을 오랫동안 모시다 보니, 요령을 터득한 것이지요."
"순욱, 내가 못 받아들일까 봐 걱정되시오? 내가 당신의 충심을 알기 때문이지, 당신을 질투하는 것은 나 자신을 질투하는 것이 아니오? 엉?"
이렇게 말한 조조는 일동을 휘 돌아 보며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그러자 대화에 끼어들었던 조인,허저가 조조의 웃음에 맞장구를 쳤고, 순욱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주공의 언변은 언제나 사람을 취하게 만듭니다. 하하하..."
어느덧,
조조의 오만 대군이 연주에서 출발한지 닷새만에 서주성 앞에 도착하였다.
그리하여 상복을 입은 조조가 말 위에서 서주성을 도도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데, 돌연 성문이 열리면서 상복을 입은 도겸이 단신(單身)으로 달려 나오는 것이었다.
도겸은 상복을 입은 채 천천히 달려 나왔다.
그리고 조조와 마주 보고 대화할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 온 뒤, 두 손을 읍하고 조조에게 허리를 굽혀 절을 한다.
"조맹덕(曺孟德)이 친히 대군을 이끌고 오시니, 적수가 못 됨을 알고, 내 이렇게 사죄를 드리러 왔소."
하고 말하고 난 뒤, 다시 한 번 허리를 굽혀 절한다.
조조가 냉엄한 어조로 대꾸했다.
"무슨 죄요?"
"조공의 부친께서 서주를 지나신다기에 나는 이 기회를 빌어서 조공과 친해지려고 했소. 해서, 우리 가족 모두가 부친을 왕궁...아,아니, 아버지를 모시듯이 부친을 모시었소. 가실 때에도 십만 냥에 달하는 예물을 함께 보내고, 장개 장군을 시켜서 연주까지 호위케 했소.
헌데, 그 자가 옛 버릇을 못 고치고, 공의 부친을 살해하고 재물을 약탈하고 도망하기에 이르러, 이 도겸을 씻지 못 할 죄를 저지른, 불의한 사람으로 만들었소.
그래서 우리일가 모두와 서주성 만 백성들은 모두가 부친을 위해서 상복(喪服)을 입었소."
그 말을 듣고, 조조가 마상에서 손을 들어 햇빛을 가리며 고개를 들어, 서주성 성루를 천천히 살펴 보았다. 과연 서주성에는 성벽을 비롯해 누각 곳곳에 조기를 상징하는 흰 천조각이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도겸이 계속 말한다.
"하여, 맹덕! 나, 도겸은 비록 병석에 있으나, 당장이라도 오봉산으로 달려가 장개 그놈을 잡아다가, 죄를 낱낱히 고하고 놈의 심장과 간을 도려내 하늘에 계신 부친의 영전에 바칠 것이오."
"듣기에는 좋소! 아버지의 원한은 천추에 남을 텐데, 그까짓 장개놈을 잡아 죽인다고 죄를 씻을 수 있다고 생각 하시오?"
조조는 냉엄하게 대꾸했다. 그러자 도겸은,
"내 비록 죄는 있으나, 이번 일은 호의에서 시작됐을 뿐, 부친이 살해 된 것은 나의 뜻이 아니었으니, 부디 조공께서는 이점을 참작하시어 죄를 사해 주시고, 잠시 퇴각후 놈을 잡아 속죄하게 해 주시오. 그리고 올해부터 해마다 연주에 공물을 바치겠소. 군량 20만 석!..."
도겸은 말하면서 손가락 두 개를 펼쳐보였다. 그러자 조조는 매우 아니꼬운 어조로,
"날 매수하는거요?"
하고 말하자, 도겸은 고개를 흔들며 즉각 대답한다.
"아,아니오,아니오, 절대 그런 뜻이 아니오..."
"그럼 무슨 뜻이오? 응? 도겸! 부하를 시켜서 아버지를 살해하고 원소와 결탁하여, 나, 조조를 공격하여 연주를 취한 뒤, 두 사람이 함께 나누려한 게 아니오?"
"조맹덕! .. 내가 야심이 없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오! 내 한 목숨을 지키기도 힘든데, 어찌 내가 남의 영토를 탐하겠소?"
"남을 속여도 난 속일 수 없소. 도겸! 당신은 항상 본색을 숨기고 위선으로 일관해 왔소. 솔직히 말씀드리면 상복을 입은 성의를 봐서, 오늘은 죽이지 않을 테니, 전쟁준비나 해 두시오. 이틀 후에 서주를 접수하겠소."
조조는 도겸을 향하여 매몰찬 선언을 하였다. 그러자 도겸은 이를 악물고 대꾸한다.
"조맹덕! 나 도겸이 명색이 서주 자사로써 황명을 받고, 국운을 받은 몸이다! 내가,네 부친보다 많은 연배임에도 불구하고, 비굴함을 무릅쓰고 사죄를 하며 이 정도의 성의를 보였건만, 그래도 용서를 못 하겠느냐? 기어이 서주를 강점해서 수십만 서주의 선량한 백성들이 필사의 항전을 해야겠느냐!"
"이틀 후에 당신 목을 베어, 아버지 영전에 바칠 것이니, 눈치가 있으시다면, 가서 목이나 씻고 기다리시오. 그리고 백성들에게 전하시오. 성을 함락해도 학살은 없을 것이며, 상복을 입은 자는 죽음을 면할 것이라고.."
말을 마친 조조는 매몰차게 돌아섰다.
그러자 도겸은 조조와의 협상이 거절되었음을 알고, 이를 악물고 돌아서면서, 외마디로 필사의 결전 의지를 다진다.
"흥!"
...
도겸과의 만남을 뒤로 하고, 진지로 돌아오는 길에 조인이 조조에게 묻는다.
"주공, 왜 즉각 공격 명령을 안 내리시는 겁니까? 단번에 서주를 취하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조조는 몇 발짝 걸으며, 조인을 힐끗 돌아다 보면서,
"이유가 있었네, 도겸이 생각보다 대단했기 때문이야, 유심히 살펴 보니 도겸은 성벽에 온통 조기(弔旗)를 걸어 놓기는 했지만, 그 조기 밑으로는 궁사(弓射)들을 숨겨 놓고 있었네, 겉으로만 보아선 비굴한 척 했지만, 실은 살의(殺意)를 숨기고 연기를 했던거지, 놈들은 필시 수성(守城)준비를 마쳤을 것이야. 더구나 성 안의 군민(郡民)들도 도겸과 생사를 같이 할거야."
이 말을 들은 조인은 손을 들어 서주성 쪽을 가르키며,
"그들이 아무리 완강하게 저항을 하더라도 서주군이라곤 팔천 밖에는 되지 않는데, 우리 오만 정병이 못 당해내겠습니까? 너무 염려가 크신 것 같습니다."
그러자 뒤따르는 조인을 한 번 힐 끗 뒤돌아 본 조조는,
"수비군 팔 천 외에도 수 십만 백성들이 있네. 도겸은 백성들을 인의(仁義)로 다스려왔기 때문에, 정작 싸움이 시작되면, 백성들은 누구라도 목숨을 바쳐 싸울 것이야.
더구나 성벽을 보니, 높이가 삼 장(三丈)이 넘고, 견고해 보이는군, 우린 수가 많아도 대부분 경비병이라 강공(强攻)하면 사상자만 많아지네, 이틀이라는 시간을 준 것도 어쩔 수가 없었네.
우리의 공성군(攻城軍)이 이틀 후에나 공성 장비를 가지고 도착할 테니 말이야.
장비가 도착하면 단박에 몰아쳐서 성을 취해야지...."
조조는 여기까지 말을 하고 난 뒤, 걸음을 우뚝 멈추고 말한다.
"명을 전하라! 지금쯤 도겸은 간담이 서늘해졌을 것이니, 승부는 끝장난 셈이라고... 지금부터 병사들에게 휴식을 주고, 이틀 후에 해가 뜨면 일시에 공격한다!"
"알겠습니다!"
조인은 대답한 후에, 뒤로 돌아서 군사들을 향하여 달려갔다.
조조는 이어서, 말 없이 자신을 수행하던 순욱을 불렀다.
"순욱?"
"예, 주공!"
"한잔 합시다!"
순욱은 조조의 명에 두 손을 모아,
"알겠습니다"
하고, 조조의 뒤를 따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