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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편백 휴양림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전 선생이 운전하는 승용차의 내비게이션이 기어코 심통을 부렸다. 남해읍을 지나 심심산골에 박힌 산림청의 편백나무 휴양림을 찾아 나서려는 결정적인 순간에 먹통이 되고 만 것이었다. 몇 번이고 전 선생이 껐다 켜기를 반복했지만 한번 맛이 가버린 내비는 돌아올 줄 몰랐다.
하는 수 없이 차를 세우고 길가의 행인에게 물어물어 산동면을 찾아가고 휴양림 이정표를 발견하였다. 우회전하여 또 몇 십 킬로를 달렸다. 남해도는 정말 큰 섬이었다. 섬 깊숙한 구석지에 그렇게 또 긴 골짜기, 큰 저수지, 높은 산비탈, 찍찍하게 우거진 숲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섬진강 휴게소에서 출발한 지 한 시간이 넘어서야 우리는 겨우 산림청에서 운영하는 편백나무 휴양림에 도착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백 채 이백 채도 넘는 목조건물들이 광활한 숲 곳곳에 띄엄띄엄 세워져 있었다. 우리가 찾아들어간 집의 이름은 ‘굴피집’. 욕실이 딸리고, 방 한 구석에는 싱크대가 놓여 취사를 할 수 있고,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가면 다락방이 나오는데 아래층이나 다락방이나 너댓 사람은 너끈히 취침할 수 있는 넓이였다. 이런 방이 두 곳 연립으로 세워져 있는데 그 두 곳이 우리 여덟 명의 차지였다.
중앙정부가 좋기는 좋고 산림청이 좋기는 좋았다. 편백나무 휴양림에 들어선 백 채 이백 채의 목조건물을 보고 너나없이 ‘아, 좋다. 이런 집 짓고 한 번 살아봤으면 좋겄다!’ 탄식을 했지만 그게 교사 봉급으로 수십 년 동안 근근이 살아온 서민들에게는 가당키나 한 일이던가.
목조건물은 특히나 정갈스럽고 건강에 좋아보여서 기분이 좋았다. 우리는 거기에 여장을 풀고 승용차 트렁크에 담아온 음식을 꺼낸 다음 먼저 산 낙지부터 먹었다. 꽤 머리통이 굵은 녀석들이었는데 열 마리에 5만 원 주었다 한다. 그 정도면 값이 괜찮은 편이다. 아무리 두 방을 뒤지고 다녀도 도마를 찾을 수 없어 탕탕이를 못 하고 내가 꼬물거리는 낙지를 죽 훑어 대강 물기를 뺀 다음 가위로 발을 잘랐다.
술판이 벌어졌다. 낙지 열 마리는 좀 많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웬걸, 여덟 명이라는 숫자가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접시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싱싱함도 그렇고 맛도 좋아서 순식간에 동이 났다. 대가리는 따로 떼어서 끓는 물에 삶았는데 그것도 금방 떨어졌다. 다음은 병치 회, 병치 맛도 썩 괜찮았다. 또 얼큰한 홍어 회 - 살과 코와 날개. 그럭저럭 거나하게 술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주변 숲길 산책. 저녁 식사. 전 선생과 이 선생이 전기밥솥에 밥을 짓고, 국을 끓이고, 반찬을 꺼냈다. 홍어 애 국도 먹을 만했지만 바지락을 넣고 끓인 된장국도 어찌나 시원하던지 술에 찌든 뱃속이 개운해지는 느낌이었다. 유 선생네 집에서 가져온 묵은지 맛도 일품이었다. 전 선생이 화원과 압해에서 꺾었다는 고사리나물도 아주 부드럽고 격조 높은 맛이었다.
요즘은 스포츠 채널 네 군데에서 날마다 네 도시에서 벌어지는 야구를 모두 중계해준다. 나는 야구 중계를 꽤 좋아해서 평일 저녁 6시 반부터는 야구가 끝날 때까지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는데, 아이고, 답답해라, 남해 편백나무 휴양림 목조건물 텔레비전은 케이블을 달지 않아서 야구 중계를 볼 수 없었다.
아예 포기하고 술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 순간 퍼뜩 야구에 생각이 미쳤다. 내 핸드폰은 인터넷이 안 되는 구식이었으므로 이 선생한테 부탁했다. 이 선생의 스마트폰에 야구 경기 점수가 문자로 떴다. 기아가 한화한테 5:4로 뒤졌다.
‘아이고! 어쩌다가 한화한테 다 지고 있다냐?’
옛날 기아가 해태였을 때에 어떤 선생이 나를 비웃으며, “해태가 우승했다고 껌이라도 한 통 줍디여 어쩝디여?” 껌 한 통도 얻어먹은 일 없지만 팔이 안으로 굽더라고 나도 모르게 광주를 홈구장으로 하는 기아에 마음이 쏠리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술 취한 사람들끼리 그렇고 그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까 또 시간이 흘렀다. 나는 다시 한 번 이 선생한테 스마트폰을 켜 보라고 부탁했다. 이게 웬 일? 경기가 끝났는데 기아가 한화한테 6:5로 역전승을 거두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여 광주에 사는 둘째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구 중계 봤지?”
“예.”
“어떻게 이겼데?”
“가르시아한테 3점 홈런 맞고 역전 당했다가 어찌어찌 재역전해서 이겼어요.”
“응, 알았다. 궁금해서 살 수가 있어야지. 여기 티브이가 안 나와서 전화했다.”
벌써 열한 시가 다 되었다. 다들 손발을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 술 마시던 방 2층에 올라가 보았더니 문 선생 혼자 누워 있다. 건넌방에 가보니 김 선생 혼자 앉아 있다. 그 방 2층에 올라가 보았더니 임 선생과 나 선생이 누워서 잠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술이 얼큰한 김에 거기 주저앉아 또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조금 있다 전 선생이 놀러왔다. 다시 내려가서 캔 맥주 네 병과 김 봉지를 가져왔다. 임 선생과 나 선생이 하는 수 없이 일어나 앉았다. 그 때부터 맥주를 마시면서 노인들의 농익은 음담패설이 시작되었다. 늙으면 양기가 입으로 올라 온다던가 어쩐다던가.
층층나무
여행 이틀째, 글쎄 그것이 사람마다 다 다르다. 공평하지 않다. 전 선생과 이 선생이 새벽같이 일어나 아침 식사 준비에 바쁜 걸 보면 루소의 ‘불평등 기원론’이 생각난다.
나는 몇 달 전에 허리 수술 했다는 핑계로, 종잇장도 들지 마라 했다고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나와 동갑인 임 선생 문 선생도 건강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고혈압, 당뇨, 비만, 통풍, 관절염이나 허리 통증. 그럭저럭 몸을 잽싸게 놀리며 부리나케 돌아다닐 나이가 지났다. 나이로야 김 선생이 가장 적지만 그는 암 수술로 명예퇴직을 한데다가 그 좋아하던 술 담배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끊고 다리 통증 때문에 잘 걷지도 못하는 형편이다. 그런대로 나 선생이 건강하지만 워낙 점잖은 성격인지라 단체 생활에 앞장서서 이러쿵저러쿵 장이야 멍이야 나설 계제가 못 된다.
자연히 일감이 총무인 유 선생과 전 선생 이 선생한테 돌아갔다. 나는 화장실을 들락거리다가 식사 준비하는 전 선생을 지나치면,
“고생이 많으시네. 도와드려야 할 텐디.......”
“천만에요, 그런 말씀 마세요. 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디 어쨌다요.”
일하는 사람은 세 명이지만 솔직히 유 선생도 나처럼 먹는 일에만 이골이 났지 요리는 서툰 편이다. 이 선생은 부지런히 봉사 활동을 하지만 내 눈에는 조수 수준이다. 여행 일정부터 시작해서 요리와 뒤처리에 이르기까지 사실상의 안방마님은 전 선생이 도맡았다. 여덟 명이 나선 여행길에 혼자서 힘든 일을 도맡다 보면 짜증이라도 날 법 하건만 그는 즐거운 마음으로 봉사한다. 나는 또 한용운의 시 ‘복종’을 떠올린다.
“복종하고 싶은 데 복종하는 것이 나의 자유입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아이고, 우리 마음씨 착한 전 선생! 봉사하고 싶은 데 봉사하는 것이 그의 자유이자 행복인 모양이다.
술도 약간 취했지만 편백나무 휴양림 목조건물에서 보낸 하룻밤은 참 가뿐하고 개운했다. 지난밤에 이어 또 전 선생, 유 선생, 이 선생의 수고로 맛난 아침을 얻어먹고 우리들은 단체로 숲길 산책에 나섰다. 다리가 불편한 김 선생은 조금 걷다 중도 작파했고, 문 선생은 일찌감치 홀로 산꼭대기를 향하여 올라갔고, 나머지 여섯 명은 골짜기로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숲길을 한가로이 걸으며 불쑥불쑥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렇게 나뭇가지들이 빙 돌아가며 층을 이루었다고 해서 층층나무라 불러요.”
자연히 지나치는 나무 이야기가 많았는데 층층나무, 옻나무 따위의 이름이 등장했다. 아이고, 부끄러워라. 사실은 내가 국어교사이니까 나무 이름을 알아도 내가 제일 많이 주워 섬겨야 옳은데 꿀 먹은 벙어리 시늉이고, 여행길에만 밝은 줄 알았더니 식물 이름도 전 선생이 제일 훤하다. 나 선생도 본래 난을 캔다고 산을 많이 탔던 사람이라 제법 나무를 많이 알고 심지어는 도덕 교사인 유 선생까지도 알은 체를 하는 마당에 나만 묵묵히 따라다니자니 그것도 괜히 멋쩍고 쑥스러운 일이었다.
내가 아는 것이라야 고작 흔해 빠진 개망초였다. 내 쑥스러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껑충하게 자란 개망초는 작고 순결한 흰 꽃송이들을 무수히 한들거리며 아침 숲길을 환히 밝히고 있었다.
다슬기의 천천한 세상
휴양림 부근의 산에 편백나무가 엄청 많았다. 누군가 몇 십 년 전부터 맘먹고 심은 게 분명했다. 존경 받아 마땅할 사람이었다.
편백나무 휴양림의 숲길은 아늑하고 상큼했다. 그 숲의 맑은 공기와 향기가 내게는 전혀 낯설지 않은, 아주 익숙하고 친밀한 냄새였다.
공휴일이나 방학, 나는 스무 살까지 나주 금성산 증조모와 종조부가 계시는 산가를 뻔질나게 올라 다녔다. 나무를 땔감으로 쓰던 시절이라 벌거숭이 민둥산이 많았다. 그러나 종조부가 사시는 금성산 상봉 부근은 여기저기 제법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었다. 나는 여름방학 때면 솔밭 그늘에 군용 간이침대를 옮겨놓고 거기에 누워 낮잠도 자고 영어책도 큰소리로 읽었다. 개미들이 종아리를 간질이고 계곡 쪽에서 올라온 솔바람 소리가 은은하게 울렸다. 무성하게 자란 여름풀들은 저마다 싱그러운 향기를 뿜어냈다. 숲과 함께 하는 삶에는 안식이 있었다. 낙원이 따로 없었다. 거기가 바로 낙원이었다.
골짜기로는 시냇물이 흘렀다. 맑은 냇물에서는 피라미 갈겨니도 살고 가재, 새우, 다슬기도 살았다. 골짜기 쪽에는 나무가 별로 없어서 햇빛이 잘 들었다. 너럭바위 위로 는 얕은 여울물이 흘러내렸다. 냇물이 흐르는 바위에는 다슬기들이 새까맣게 달라붙어 있었다. 중천에 솟아오른 휘황한 태양 빛으로 찬연하게 아롱지는 은빛 물의 장막 속에서 검정색 다슬기들은 움직이는지 움직이지 않는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느리게 진격했다. 시속 일 센티나 되었을까, 이 센티나 되었을까.
나는 그 다슬기들의 천천한 세상이 부러웠다. 사바세계의 사람살이가 바쁘고 급해질수록 다슬기의 천천한 세상이 그리워졌다. ‘슬로 시티’가 아니라 ‘슬로 골짜기’였다.
금성산 꼭대기에 군사기지가 들어서면서 종조부의 산가는 보상금 몇 푼에 강제로 헐리는 비운을 맞이했다. 종조부는 새로운 낙원을 찾아 계룡산 부근으로 떠나셨다. 그 일만 생각하면 입맛이 썼다. 평화로웠더라면 거기는 내 노년의 휴식처가 될 수도 있었는데.......
사십 년 동안 나는 금성산을 찾지 아니했다. 환갑이 다 되어서야 가까운 선생 차를 타고 스무 살 때 떠나온 산가를 찾아 나섰다. 오메, 오메! 민둥산 천지이던 금성산이 사십 년 동안에 온통 소나무로 칙칙하게 우거져 있었다. 편백나무가 아닌 소나무도 잘만 가꾸어 놓으면 훌륭한 숲을 이뤘을 텐데 심기만 하고 돌보는 사람이 없으니 제멋대로 자라 비집고 들어갈 틈조차 막연했다. 나는 종조부의 산가가 자리 잡았던 터를 찾아보려 했지만 칙칙하게 얼크러진 소나무 숲에 막혀 포기하고 말았다. 다슬기가 찬연한 햇빛을 받고 천천한 삶을 즐기던 너럭바위도 거칠게 우거진 솔숲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씁쓸해서 쩟쩟, 입맛만 다셨다.
가지치기와 간벌을 잘 해서 띄엄띄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곧게 자란 편백나무 숲 아래를 한가로이 거닐며 나는 다슬기들이 새까맣게 달라붙어 느리고 천천한 삶을 만끽하던 금성산 골짜기를 애틋하게 그리워했다.
흑산도 홍어
여행길에만 나서면 나는 왜 그리 쉽게 속이 헛헛해지는지 몰랐다. 바지락 된장국에다 유 선생네 묵은지에다 전 선생네 고사리나물에 아침을 아주 든든히 먹었는데도 남해도를 출발한 지 한 시간도 못 되어 속이 출출했다. 나만 그런 줄 알았더니 운전하는 전 선생도 시장기가 든다 했다. 우리는 연속극 ‘토지’를 촬영한 나오는 최 참판 댁 동네에 가서 파전에 막걸리라도 마시자고 했다가 계획이 바뀌어 지리산 자락 길가에 차를 세웠다.
흑산도 홍어가 담긴 스티로폼 상자와 소주 막걸리를 꺼내 들고 찾아 간 곳은 ‘악양루’. 중국에 악양루가 있다는데 거기에서 따온 이름일까. 계단을 올라 악양루 입구에 이르니 새끼줄이 쳐지고 출입 금지 푯말이 붙어 있었다. 건물이 낡아서 보수가 필요하니 고칠 때까지는 들어오지 말란다. 안쪽을 들여다보니 정말로 자그마한 누각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추레하고 후줄근했다.
우리는 악양루 곁의 빈터에 술판을 벌였다. 커다란 당산나무가 있어 술자리로는 안성맞춤이었다. 출출한 참이라 그런지 막걸리에 곁들여 먹는 흑산 홍어 맛이 각별했다. 차 안에서 임 박사가 트렁크에 실은 홍어 삭은 냄새가 심하다고 투덜거려서 오래 삭힌 줄 알았더니 먹어보니 그리 오래된 홍어도 아니었다. 지난밤에는 낙지와 병치 회에 가려 천대를 받던 홍어였는데 오늘은 수대로 부지런히 젓가락질을 했다.
지나가던 아저씨와 아주머니한테 홍어에다 술 한 잔 하고 가시라고 권했다. 아저씨는 밥 먹어야 한다고 고개를 젓고 가 버리고 아주머니만 남았다. 경상도 말씨를 쓰는데 홍어를 먹어 봤는지 안 먹어 봤는지는 모르지만 제법 집어먹었다. 어쩌면 그 아주머니는 홍어보다는 술에 더 마음이 쏠렸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튼 비위짱이 나보다 더 좋은 아주머니로 보였다. 끝까지 자리를 지키다가 술판이 끝날 즈음에야 요란한 인사말을 나눈 다음 헤어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