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관(史觀)이란 무엇인가?
2. 사관(史官)이란 무엇인가?
3. 사초(史草)란 무엇인가?
===3회===
3.사초(史草)란 무엇인가?
2013년11월7일자 조선일보에 의하면 "사초(史草) 실종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은
2007년 남북 정상회담 회의록 작성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 이었던 문재인 민주당 의원을
6일 참고인 신분으로 소환 조사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2007년 남북정상회담시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포기 발언 논란을 규명하기 위해
여야는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원본을 열람 하기로 하였으나 국가기록원 대통령 기록관에 있어야 할
회의록 원본이 실종 되었기 때문에 논란이 불거져서 결국은 검찰이 수사에 나서게 된것이다." 라고 게재(揭載)하였다.
이와같이 2013년은 사초(史草)실종사건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더니 해가 바뀌면서 흐지부지 되어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어느 시대이건간에 국가의 기록물은 영구히 안전하게 보전하는 것이 나라의 밝은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라고 사료되어 이미 1회=사관(史觀)이란무엇인가? 2회=사관(史官)이란 무엇인가? 를 간략하게 논하였고
마지막으로 3회=사초(史草)란 무엇인가? 에 대해서 미미(微微)한 소견(所見)이나마 피력(披瀝)하여 안타까운 마음을
달래고자 한다.
그러면 3.사초(史草)란 무엇인가?
사관(史官)이 기록한 사기(史記: 역사기록)의 '초고(草稿)'를 네 글자로 말하면 사기초고(史記草稿)가 되고,
이것을 다시 두글자로 줄이면 사초(史草) 또는 사고(史稿)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초(草)는 풀 초 이고 고(稿)는 볏집 고 로서 이것을 풀어보면 초고 (草稿)란 마치 논이나 풀밭(들판)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잡초(볏짚)처럼 거칠게 빠른 속도로 쓴글 또는 다듬지 않은 문장(文章)을 의미한다.
즉, 사관(史官)이 경연(經筵)이나 중신회의(重臣會議), 백관회의(百官會議) 등에 참석하여 회의 내용을 빠르게
초서로 흘려 쓰는데 처음 작성한 원고는 초초(初草), 이를 보완한 것은 중초(中草), 최종본은 정초(正草)라 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나중에 원본을 왜곡(歪曲)하지 않는 한도내에서 사실(事實) 그대로 정서체(正書體)로 다듬어서
기록한것을 사관(史官)이 썼다하여 일반적으로 사초(史草)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각종 첨단기기가 발달하여 회의시 쌍방의 대화를 빠르게 속기록하고 사진촬영과 함께
육성을 녹음할 수도 있어서 굳이 정서체로 다듬어 세초를 할 필요가 없지만 옛날에는 녹음이나 사진촬영은
불가능 (不可能)하였으며 더욱이 한글로 받아쓰는 것도 아니고 육성(肉聲)을 직접 들으면서 붓을 갖고
글자 구조가 복잡한 한자(漢字)로 빠르게 받아 쓰려면 초서(草書)로 임시 흘려 쓸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시대(朝鮮時代)는 오늘날 종로구 신영동 상명대학교앞 세검정 근처에 종이 뜨는 일을 맡았던
관청으로 조지서(造紙署)가 있었으며 세검정의 평평한 바위인 차일암(遮日巖)에서는 차일(천막)을 치고
세초(洗草)를 하는데 세초(洗草)는 실록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북한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계곡 물에,
흘려 쓴 초고(草稿)를 씻어 먹글씨를 지우고 종이는 재생, 활용하게 했다.
그리고 공개적으로 세초를 하였는데 그 이유는 무엇보다 대외비로 관리되던 사초의 유출을 막고 공간(公刊)된
정사에 대해 시비의 소지를 예방하기 위한 조처였다.
또 편찬자들의 의도에 상반되는 자료를 남겨 말썽을 야기하거나 분쟁에 악용될 소지를 없애기 위한 고려도 있었다.
이렇게 하여 임금은 세초에 참여한 관원들에게 술을 내려 잔치를 열어서 노고를 위로 하였는데 이를 세초연(洗草宴)이라고 한다.
연(然)하여 사초(史草)는 시비(是非)를 가리지 못하고 수정(修訂)을 할수도 없었고 더욱이 사초는 일절 공개(公開)하지 않아서
국왕(國王)도 볼수가 없었지만 조선의 25대 역대 왕들 중에서 유독 폭군 연산군 만이 사초를 문제삼아 많은 선비들에게 화를 입히는 무오사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무오사화(戊午士禍)의 발단(發端)은 사관(史官) 김일손이 성종실록 편찬을 위해 이미 죽은 그의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
(弔義帝文)(=항우가 초나라 의제를 죽인 것에 빗대서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판한 내용)을 사장(史章) (=사초를 적어놓은 기록부)에
올렸는데 당시 실록청 당상이었던 이극돈 (훈구파)은 김일손의 사초에 조의제문과 함께 이극돈 자신을 비난한 기록이 있는 것을
보고는 김일손(사림파)과 신진사류들을 제거하기 위해 유자광을 시켜 사초(史草)의 내용을 연산군에게 고자질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김종직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하고 김일손은 능지처참(陵遲處斬)하였으며 그밖에 많은 사림(士林=(儒林))들을 죽이거나
귀양을 보내는 화를 입혔는데 이것이 1498년 일어난 무오사화 (戊午史禍 = 士禍)이었다.
그렇지만 조선왕조실록1498년 연산군4년 기록을 보면
연산군이"김일손의 사초(史草)를 들여올것을 명(命)하니 이극돈 등이 일부를 절취하여 올렸다." 는
기록은 있으나 사림을 미워했던 연산군이 직접 사초(史草)를 마음대로 보았다는 기록은 없다.
물론 어느 임금이건 사초(史草)를 보고 싶은 마음이야 다들 있었을 것이다.
태종과 세종도 태조실록과 태종실록을 보고 싶어 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왕조 세종실록 세종13년(1431) 3월20일 기사에 보면 태종실록을 보는것에 대한 논의를 할때 세종이
"내가 이를 한번 보려고 하는데 어떤가?" 하니 우의정 맹사성 등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만일 이를 보신다면
후세에 임금이 반드시 이를 본받아서 고칠 것이며, 사관(史官)도 또한 군왕이 볼 것을 의심하여 그 사실을
반드시 다 기록하지 않을 것이니 어찌 후세에 그 진실함을 전하겠습니까."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그럴 것이다."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같이 조선초 태종과 세종은 신하들의 반대로 실록(實錄)을 보는 것을 단념 하므로서 후세의 역대 왕들이
실록을 보지않는 관행을 만들었으며 이렇게 하여 실록에는 역사의 진실이 담겨질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왕조 25대 472년간이라는 오랜 세월을 편년체(=년 월 일 순서)로 매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은 진실성과
신빙성이 높고 완전하게 보존된 역사 기록물로서 세계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우리 민족의 자랑거리 이다.
중국의 대청역조실록(大淸歷朝實錄)은 296년간에 걸친 실록에 불과하며 중국이 귀하게 여기는 황명실록(皇明實錄)은
글자수가 1600만자인데 우리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은 정확히 4964만6667자(字)이다.
이러한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초부터 오늘날까지 많은 곡절은 있었지만 오랜 세월동안 국가가 지정한 사고(史庫)에
보관하여 전해 내려왔으며 마침내 1997년 10월 유네스코 기록유산에 등재(登載)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오늘날까지 622년이라는 긴 세월을 조선왕조실록이 전해 내려오는데 반해서 불과 6년전인 2007년 남북정상회담
(南北頂上會談) 회의록(會議錄)이 실종(失踪)되었다고 하여 작년 2013년은 사초(史草)실종사건에 대한 시비(是非)로
1년 내내 온 나라가 혼란스러웠는데 2014년 들어서면서 흐지부지 되었다,
국가의 기록물을 온전하게 보존치 못함은 역사를 잃는 것이다.
'역사(歷史)를 잃은 민족(民族)에게 미래(未來)는 없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는 선조들의 뛰어난 지혜(智慧)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인가?
感謝합니다.
李承萬 : 前 徽文高校 敎師 明知專門大 講師
첫댓글 역사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건필하소서
8월 11일 메일 발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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