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16:1-2 - 교회의 일꾼
(16:1)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16:2)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겐그레아’는 고린도에서 남동쪽으로 약 12km 떨어진 항구 도시입니다. 바울이 제 2차 전도에서 돌아올 때 이곳에서 승선했으며(행 18:18),
또 제3차 전도 때에도 여기서 승선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동족 유대인들의 살인 음모 때문에 육로로 바꾸어 마케도냐를 통과한 적이 있었습니다.(행 20:3)
따라서 제 2차 전도 때 이 교회가 세워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즉 바울은 제 2차 전도 때 고린도에 도착하여 아굴라와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와 더불어 거하면서 고린도 교회를 세웠는데(행 18:1-18)
바로 이 고린도 교회로부터 복음이 그 주변 여러 도시로 전파되었고 그 결과 세워진 교회 가운데 하나가 겐그레아 교회입니다.
이 교회의 여자 집사인 뵈뵈를 본 편지의 전달로 삼은 것은 그녀가 마침 겐그레아에서 로마로 가는 도중 그 당시 바울이 머물면서 본 서신을 기록한 고린도에 들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교회’라는 말이 나옵니다. 교회란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 질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은 곧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고 작위적으로 인간을 위한 교회란 교회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없다’를 정답으로 해야된다는 말입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성령님이 오시기 되어 있는데
이 때 생겨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매사를 ‘마지막’으로 몰고 가야될 이유는 인간 세계에서 일어나고 일이란 처음부터 마지막, 즉 죽음과 심판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게 될것을 상정해서 마지막이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에덴동산에서 쫓겨난자체가 마지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언약이라고 하는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죽임바된 인생을 이러한 약속으로 되살리시기 위한 방편으로 우리에게 생명이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마지막’이라고 하면 그냥 마냥 기다리면 되는 것으로 아는데, 하나님께서 ‘마지막’이라고 쓰시는 이유는, 문제거리가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즉 마지막 때가 이 전에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에 의해서 세워지는 단체들이 많이 있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왜 ‘마지막’이 되도록 제촉하는 이유들이 되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하나님에게 소용없고 가짜들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그 교회에 담겨 있습니다. 창세기 3kd에서 인간들은 저주 아래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고생스러움에서 벗어나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천국 염원으로 이어집니다. 살아서는 고생했지만 죽어서는 낙을 보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꿈이 되고 힘든 세상생활을 견뎌내는 동기가 됩니다. 하지만 이런 다 부질없고 소용없는 짓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개입으로 그런 시도가 거짓됨임이 드러났기 때문입니.
예수님은 자신을 향하여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고 하십니다. 이 말은 인간의 힘으로 길과 생명과 진리를 만들어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개입이 곧 ‘마지막’ 때입니다. 이 마지막 때에 교회가 성령의 공동체, 곧 교회가 나타난다는 것은, 그 원인에 대해서 인간은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다는 말입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성도는 결과이지 결코 원인이 아닙니다. 그동안, 즉 ‘마지막’ 때가 아닌 시절에서는 인간들이 세상 만사의 원인을 자신들이 확보하려고 했습니다. 확보해서 뭘하게요? 자신들이 원한 세상을 만들어내기 위해서입니다. 원인만 확보하면 결과는 마음대로 조절이나 조정이 가능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망한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즉 예수님의 개입 없이 그들은 자신만의 완전한 세상을 꿈꾸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개입으로 생겨난 변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의 차이는, 뚜렷한 경계선으로 영원한 구분지어집니다. 인간 나라에서는 인간들이 서로 소통하는데 별 문제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만 개입하면 세상나라와는 다른 성질을 보여줍니다. 그 성질이 곧 ‘이미 결과물’로서 작용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라면 끓일 때 사용하는 냄비로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냄비 뚜껑에 꼭지가 달려 있습니다. 이 꼭지가 닳아버리면 헐거워져 떨어져나갑니다.
그러면 밑에 끓고 있는 수증기는 그대로 공중에 노출되고 김 다 샙니다. 창세기 3장에 의해서 저주가 들끓는 세상에서 이 저주를 덮을 뚜껑 꼭지같은 지점에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존재케 하십니다. 그 꼭지가 달린 그 지점 밑에서 이 땅을 덮치고도 남는 저주성이 들끓고 있습니다. 이것을 증거해야 하기 위해 나타난 자들이 바로 성도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 저주성은 성도 본인 밑에서 사라지지 않고 날마다의 삶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가 됩니다. 즉 스스로가 풍선처럼 온갖 세상 일을 감당하면서 괜찮은 존재로 유지하려는 모든 시도는 존재의 바탕을 이루는 저주성과 심판성이 가만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세상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때마다 주어지는 것을 자기라는 이름의 풍선을 불고서는 그 안에서 저장해두지만 언젠가는 폭발하고 맙니다. 풍선조차 갈기갈기 찢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스트레스입니다. 사람들은 현실을 모릅니다. 지켜보려고 아무리 애를 쓰고 공을 기우려도 마지막 때를, 마지막 때 답게 규명하려는 하나님의 작업 앞에서 그 봉합선이 다 터져버립니다.
즉 제발 마지막 때임을 보이라는 겁니다. 마지막 때임을 유도하고 부축이신 분은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인간들이 알고자 하는 원인을 일체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늘의 약속 자체가 원인임을 보여주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뵈뵈를 흉내내서나 모방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원인에 의해서 그녀로 하여금 그런 인생을 살게 하시는 겁니다. 마지막 때에는 원인 찾기가 소용없어지는 때입니다. 소나기를 품은 먹구름을 우리가 피할 수 없듯이 저주를 품고 실시되는 ‘마지막’ 때의 현상을 우리 인간들이 지연시키거나 보류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에 의해서 ‘의-죄’의 관계로 맺어집니다. 결코 실적과 실적의 관계가 맺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선교조차도 타락이요 예배 자체도 타락입니다. 전적으로 죄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죄-의’의 관계망으로 조사받는 세상에서의 구원이란 곧 ‘하나님의 의’의 등장뿐입니다. 이 하나님의 의는 ‘율법 외의 한 의’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의 율법 행위로 찾아가거나 접속이 가능한 그런 의가 아닙니다. 이 말은 인간으로서는 그 의를 만들어낼 수 있는 원인의 자리에 들어설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의’를 증거하기 위한 결과적 현상들입니다. 따라서 뵈뵈를 흉내내거나 모방하지 마세요. 성도는 각자 나름대로 그 자리가 곧 하늘의 선교가 진행중인 현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