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교구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혼란과 어둠 속에서 손꼽아 기다리던 말씀이신 구세주 예수님께서 오늘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기쁜 성탄 대축일을 맞아 주님의 사랑과 평화가 온 누리에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특별히 소외되고 가난하고 병든 이들,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모든 이들, 또한 북녘 동포들에게도 주님 성탄의 은총이 충만히 내리기를 기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성탄을 맞아 하느님께서 참 사람이 되신 강생의 신비를 더욱 깊이 묵상하게 됩니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우리에게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는 놀라운 신비를 알려줍니다. 구세주 예수님께서는 죄 많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필리 2,7 참조)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것은 인간의 지성으로는 이해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의 신비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낮추시고 비우셔서 사람이 되신 것은 인간에 대한 절대적이고 조건 없는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은 세상의 고통과 비애를 차마 보고만 계시지 않고, 인간의 비참을 몸소 함께 나누시려고 말씀이신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 성탄은 모든 사람에게 기쁜 소식이지만 특히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에게는 더 큰 기쁨이 됩니다. 예수님의 탄생으로 우리는 죄와 죽음을 극복할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모상으로 빚어진 인간 생명은 하느님으로부터 온 귀한 것이며 이보다 더 소중한 가치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 선포하신 ‘신앙의 해’를 지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넘치는 사랑으로 마치 친구를 대하듯이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인간과 사귀시며, 당신과 친교를 이루도록 인간을 부르시고 받아들이십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하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도 계속해서 성장하지 않으면 허약해지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 신앙인들은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에 모시고, 신앙의 기초를 굳건히 하고 말씀으로 꾸준히 성장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복음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믿음에서 믿음으로 계시되고,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로마 1,17)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말씀은 교회에서는 지탱과 힘이 되고 신자들에게는 신앙의 힘, 마음의 양식, 영신생활의 마르지 않는 샘이 되는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계시헌장 21항) 또한 우리 신앙인들은 ‘말씀이 사람이 되신 주님’을 따라 사랑을 실천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야고 2,17) 우리 신앙인들이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듣고 이 말씀을 우리의 삶에서 사랑으로 실천한다면 구세주는 우리 안에 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은 어두움이 사라지고 그리스도의 충만한 빛으로 가득찰 것입니다. 지난 수개월 동안 온 국민의 관심을 모았던 대통령선거를 통해 앞으로 5년간 우리나라를 이끌어갈 새 대통령이 선출됐습니다. 새로운 대통령과 지도자들은 말씀이 사람이 되신 성탄의 정신을 깊이 깨달아 국민과의 약속을 그대로 실천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관용과 화해로 모든 사람들이 어우러져 아름답게 공존하는 사회가 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기 바랍니다. 사회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우리도 각자의 자리에서 인간과 생명 중심의 사회가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탄을 기뻐하며 하느님의 은총과 평화, 그 생명의 빛이 우리와 온 세상에 충만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2012년 예수 성탄 대축일에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구장 염 수 정 대주교
춘천교구
“다시 하나 되는 사랑의 성탄절”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루카 2,14)
믿음의 문을 활짝 열고 있는 춘천교구 공동체의 형제자매 여러분. 그리고 성탄을 함께 기뻐해 주고 계시는 우리 이웃의 형제자매 여러분.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는 성경 말씀대로, 창조주 하느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신 오늘, 저는 대림시기의 희생과 보속의 삶을 통해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려 온 여러분 모두에게 깊은 감사와 축복의 인사를 전해 드립니다. 또한 다사다난했던 지난 한 해를 잘 갈무리 하여, 다가오는 새해를 희망차고 은혜롭게 준비하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우리는 지금 신앙의 쇄신과 올바른 실천을 위한 ‘신앙의 해’를 지내고 있습니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우리 믿음의 근원은 강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는 크나큰 사랑으로 인간이 되셨고, 인간이 되신 후에는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으며, 마지막 순간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 사랑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우리 신앙인은 바로 그 사랑을 세상 안에서 실천하고 증거할 의무를 지닌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해는 우리에게 진정한 복음 정신의 회복과 사랑의 실천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여전히 많은 이들이 어려움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들을 돌보고 함께 나누는 것은 이웃된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성탄의 영광과 기쁨이 온 누리에 퍼져 다함께 행복하고 평화로운 세상이 될 수 있도록, 구유 안에 계신 아기 예수님께 마음을 다해 기도합시다. 또한 지난 대선 과정에서 불목하고 갈라졌던 모든 것을 치유하고 다시 일치하여,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마음과 힘을 모으는 기회가 되도록 합시다.
지난 일 년 동안 정성을 다해 살아오신 교형자매들, 그리고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이웃에게 다시 한 번 온 마음으로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여러분 모두와 그 가정에 성탄하신 주님의 사랑과 은총이 충만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012년 예수 성탄 대축일 천주교 춘천교구장 김 운 회 루카 주교
대전교구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십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님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십니다.”(요한 1,14)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시는 아기 예수님의 사랑이 늘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오심은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든 이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 버림받은 사람들, 병자들,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 절망에 빠진 사람들, 그리고 죄인들을 통해 당신이 생명의 빛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오늘 특별히 외롭고 소외되어 사는 분들에게 위로를 주시고, 학업과 취업에 짓눌리며 무한 경쟁 속에 살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희망을 주시어 모든 어려움을 잘 극복하고 생명력 있게 살아가기를 아기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이 세상에 생명을 창조하시고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시어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되셨습니다(요한 1,2-4.9 참조). 곧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심으로써 죽음을 이기는 생명이 되시고, 어둠을 넘어서는 빛이 되셨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생명의 빛 안에서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요한 1,14 참조). 이제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경축하는 우리 역시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야 할 것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는 삶은 이웃을 위한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 안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1요한 3,14 참조). 그래서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생명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참 사랑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매우 각박하고 메마르고 어둡습니다. 가장 소중한 생명이 경시되고, 돈이 중심이 되고, 거짓과 반칙이 심하고, 폭력이 난무하며, 한탕주의가 팽배합니다. 자신만을 생각하는 인간의 탐욕은 무한 경쟁으로 무질서한 사회를 만들고, 환경을 파괴하여 인간 사회를 죽음의 길로 내몰고 있습니다. 나 혼자만 행복하려는 마음은 나도 불행하고 이웃도 불행하게 하여, 사회 전체에 불행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웃과 더불어서 함께 살아야 사랑이 가득하고 생명력 있는 사회가 됩니다. 거리에 울려 퍼지는 캐럴송을 들으며, 서로가 마음의 선물을 주고받으며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에 오신 아기 예수님께 사랑을 드릴 수 있을 때 죽음과 어둠의 현실로부터 생명의 빛으로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는 “신앙의 해”가 더욱 힘차게 사랑을 증언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믿음의 문』 14항 참조).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2코린 5,14)라고 말씀하시듯,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사랑의 복음을 선포하도록 재촉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 각자가 밀알이 되어 어두운 현실에서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길 희망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의 희생적 삶은 생명의 복음이 되고, 복음을 믿고 실천하는 삶이 곧 참된 신앙이 됩니다. 우리 삶의 한 가운데에 사랑으로 새롭게 태어나시는 예수님을 선포하도록 ‘새로운 열정’과 ‘새로운 방법’과 ‘새로운 표현’으로 살아가는 참된 복음의 선포자, 성실한 신앙인이 되었으면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님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어둡고, 썩었고, 각박하고, 거짓이 많다고 소리 질러도 어두움은 계속됩니다. 그러나 암흑 속의 작은 촛불은 세상을 비추는 생명의 빛입니다. 마구간에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비추던 샛별과도 같은 복음의 촛불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을 나누어 기쁨을 더 많게 하고, 어려움을 나누어 고통을 적게 하는 복음의 삶 안에서 생명력 있게 살아가도록 합시다.
아우구스티노 성인는 강론 중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이여, 잠에서 깨어나십시오. 하느님은 당신을 위하여 사람이 되셨습니다. 잠자는 이여, 잠에서 깨어나십시오. 죽음에서 일어나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빛을 비추어 주실 것입니다. 나는 다시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위하여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삶의 한가운데에 모시고 어두운 세상을 변화시키는 빛과 소금, 누룩의 역할을 하도록 합시다. 베들레헴의 마구간에 태어나신 예수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힘과 용기, 지혜와 위로를 주시고 계십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십니다.”(요한 1,14).
천주강생 2012년 예수 성탄 대축일에 천주교 대전교구장 주교 유 흥 식 라자로
인천교구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네(루카 1,68 참조)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의 탄생을 함께 기뻐하며 여러분 모두에게 성탄 축하 인사를 드립니다. 거룩한 성탄을 맞아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예수님의 축복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실로 어렵고 힘들었던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이 시기에, 우리는 구세주 예수님의 탄생을 행복한 마음으로 기뻐합니다. 거룩한 날이 우리에게 밝았으니, 어서 큰 빛으로 이 땅에 오신 구세주 예수님을 경배합시다.
새로운 대통령이 뽑히고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이때에, 구세주 탄생을 축하하고 기념하면서 이 나라가 예수님의 뜻대로 서로 용서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며 사는 나라, 서로 아끼는 나라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새 대통령은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사람을 알아주고, 힘겨워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힘을 주는 대통령, 우리 민족에게 밝은 미래를 제시하며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끌어 앉고 힘을 북돋는 헌신적이고 겸손한 대통령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모두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때가 찼을 때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어 여자의 몸에서 나게 하시고 율법의 지배를 받게 하신 것은, 율법의 지배를 받고 사는 사람을 구원해 내시고 또 우리에게 당신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갈라 4,4-5) 때가 차서 동정 마리아는 베들레헴의 말구유에서 구세주를 낳았습니다. 기구한 운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그 누가 마구간 말구유에서 비천하게 탄생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의 탄생은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나, 이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큰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 곁에 있던 천사가 수많은 하늘의 군대와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하고 외쳤습니다. 우리도 주님 오심을 찬양해야 하겠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야만 했을까요? 그 답을 위해서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당신 모습대로 창조하셨건만,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을 배반하고 악마를 따랐습니다. 그것이 원죄이고, 그 결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3,24에는 “이렇게 사람을 내쫓으신 다음, 에덴 동산 동쪽에 커룹들과 번쩍이는 불 칼을 세워,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시는 에덴으로 갈 수 없게 되었기에 좌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또다시 사랑하셔서 구세주를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너와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 (창세 3,15)
하느님의 구세주 약속이 이루어진 것이 바로 성탄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구세주로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요한 3,16-17)라고 말씀하시며, 예수님의 탄생 목적이 인류구원에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오신 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이 세상에 구세주를 보내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며, 탄생하신 예수님을 늘 사랑하고 충실히 모시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신앙의 해”를 지내며 맞이하는 올해의 성탄은 의미가 깊다 하겠습니다. 교황님은 이 시대가 세속주의와 상대주의의 위험에 깊이 빠져 있다고 걱정하십니다. 주님을 믿으면서도 많은 신자가 기쁨도, 행복도 부족합니다. 그래서 세속으로 나가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기쁨이나 행복을 찾고 있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주님을 절대자로 생각하기보다는 상대적인 인물로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고 살아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교황님은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십니다.
교황님은 “신앙의 해”를 선포하시면서 첫째 “주 그리스도와의 만남”, 둘째 “신앙의 아름다움 발견”을 강조하십니다. 주님과의 만남이 있어야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쁨이 없고 행복이 없기에 세속으로 돌아가 “여기 행복 없나?”하고 기웃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 (시 16,2) 그렇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주님께 있습니다.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분을 체험해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성사를 통해서,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성체조배를 통해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참 행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분이 누구 신지, 그분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잘 알아야 하는데, 교황님은 이를 위해서 “가톨릭교회교리서”와 “공의회문헌”을 공부하기를 원하십니다.
기쁜 소식으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의 성탄을 우리가 모두 경사롭게 여기며 함께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주변에 힘없고 가난한 이웃, 아픔과 슬픔이 있는 이웃이 있다면, 따듯한 사랑의 실천을 통해 성탄의 기쁨을 함께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성모님은 성탄의 기쁜 축제 맨 앞에 서 계십니다. 구세주이신 아들을 낳으신 성모님께 축하를 드리고, 우리 어머니이신 성모님께 도움을 청함으로써 어려울 때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성탄을 맞아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가정에 우리 마음에 오시기를 기도하며 살아가는, 늘 행복하고 믿음으로 충만한 주님의 자녀 되기를 기원합니다.
2012년 성탄 대축일에 천주교 인천교구장 최 기 산 보니파시오 주교
수원교구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 희망의 땅, 복음으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영적 쇄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하는 수원교구 형제자매 여러분, ‘교구 희년’과 ‘신앙의 해’에 맞이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탄생의 기쁨이 여러분의 가정과 본당 그리고 복음화에 헌신하는 모든 분들 안에 충만하시기를 빕니다.
하느님 사랑의 신비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택하신 방법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요한 3,16 참조). 우리와 친교를 맺고 사랑을 나누기 위해 높으신 분께서 낮아지셨으며 죽을 운명을 지닌 연약한 인간이 되어 오셨습니다(필리 2,6-7 참조). 이 강생의 신비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 사랑의 큰 표징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1요한 4,16 참조). 이 놀라운 사랑의 신비가 구유에 누워계신 아기 예수님에게서 환히 빛나고 있습니다. 온 교회는 구약의 백성과 함께 기쁨에 겨워 노래합니다.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주님께 환성 올려라, 온 세상아. 즐거워하며 환호하여라, 찬미 노래 불러라.” 인간의 육신을 취하시어 세상에 오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나라 복음을 선포하시기 위해 인간 삶의 가장 비참한 곳까지 내려오셨습니다. 그곳에서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과 운명을 함께 하셨으며 그들의 짐을 함께 져주셨습니다. 베들레헴의 탄생부터 골고타 언덕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분께서 보여주신 모든 것은 인간을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 자체였습니다. “끝까지” 그리고 “다 이루어질” 때까지 당신의 그 크신 사랑으로 세상에 참된 구원을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강생은 하느님 사랑의 신비가 세상에 드러난 사건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영광
이 하느님의 사랑은 순교자들의 삶을 통해 특별한 방식으로 재현됩니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들의 온 삶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분과 닮으려는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박해라는 극단적인 고통의 순간에도 결코 굴복하지 않고 영생에 대한 불멸의 희망으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동참하였습니다. 힘든 시련 속에서 그들은 주님의 고통을 함께 겪으며 그분께서 주시는 무한한 위로를 받을 수 있었고, 끝까지 견뎌내어 순교의 월계관을 받음으로써 천상 행복의 영광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사람이 되어 오신 말씀이신 주님과 온전히 일치하였으며, 순교를 통해 그분과 함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써 하느님 사랑의 신비에 온전히 참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순교자들을 “하느님 사랑의 극치”를 보여주신 분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순교자들의 정신은 특별히 우리 신앙선조이신 한국 순교성인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신앙이 삶의 전부였으며, 사랑이신 주님을 위해 자유로이 목숨을 내어 놓음으로써 우리에게 온전한 신앙과 삶의 참된 가치를 드러내었습니다. 그들의 순교는 오늘날 우리에게 하느님을 참으로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섬김
우리는 지금 수원교구 설정 50주년 ‘교구 희년’과 보편교회의 ‘신앙의 해’를 지내고 있습니다. 이 특별한 시기에 우리 교구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영적쇄신’을 위한 “잘 섬기겠습니다.”라는 표어로 ‘하느님 사랑과 섬김’, ‘이웃 사랑과 섬김’, ‘생명 사랑과 섬김’의 3가지 영성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하느님 사랑과 섬김’은 모든 영성운동의 근본 바탕이 됩니다. 우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의 모범을 보여주고 증거한 이들이 자랑스런 한국 순교성인들입니다. 순교자의 영성은 오늘날 우리가 본받아야 할 소중한 유산입니다. 우리가 교구 설정 50주년을 지내고 있는 오늘날 우리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애타게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살인과 폭력, 부정과 부패, 불의와 거짓, 쾌락주의 등이 난무하며, 인간의 존엄성과 참된 가치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우리에게 순교자들처럼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실천할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께서 말씀하시듯이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2코린 6,2) 세상은 그리스도인에게서 확신에 찬 신앙과 삶의 증언을 바라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며 그분의 사랑을 증거한 순교자들의 삶을 우리가 더욱 가슴깊이 새기며 실천할 때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실천
하느님을 섬기며 사랑하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그러나 우리 구원을 위하여 강생하신 하느님의 신비를 무엇보다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은 교회에서 거행하는 공적인 전례와 다양한 신심예식에 있습니다. 따라서 ‘교구 희년’과 ‘신앙의 해’에 거행되는 성체성사, 고해성사는 물론 매월 거행되는 성시간을 비롯한 모든 전례적 거행에 충실히 참여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살아있는 성경을 읽고, 쓰고, 묵상하는 것, 하느님의 말씀을 증거한 순교자들의 얼이 살아 숨 쉬는 순교성지를 방문하는 것, 보편교회의 ‘신앙의 해’를 지내며 교황님의 권고에 따라 [가톨릭교회교리서]와 [제2차 바티칸공의회문헌]을 공부함으로써 하느님 사랑의 의미를 깨닫고자 하는 것, 이러한 모든 실천은 교회의 모든 전례 안에서 하느님 사랑의 신비에 참여하는 중요한 요소이므로 적극적으로 실천해 주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큰 사랑이 세상에 나셨습니다. 참 희망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이 사랑과 희망을 이웃에게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 주위에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 독거노인, 끼니를 거르는 아이들, 가출 청소년들을 비롯해 우리가 함께 살고 있는 이 시대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웃들이 많습니다. 이들에게 너그럽고 열린 사랑을 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에 아무도 눈을 돌리지 않는 이들에게 각별한 마음으로 사랑을 실천하고 희망을 전달하는 그리스도인만이 이 시대에 순교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교구 설정 50주년 ‘교구 희년’과 ‘신앙의 해’를 지내는 여러분들의 삶 안에 참 기쁨과 희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 여러분의 신앙 여정에 늘 함께 하실 것입니다.
평화의 모후이시며 순교자들의 모후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2012년 예수 성탄 대축일 천주교 수원교구장 이 용 훈 마티아 주교
원주교구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0-11)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성탄의 기쁨과 은총이 여러분의 가정에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2천여 년 전의 한 아이의 탄생을 오늘 우리는 온 인류와 함께 기뻐합니다. 한 아이의 탄생일이 단순한 생일을 넘어 성탄인 이유는 이 아이가 자라나서 온 인류에게 하느님에 대해서, 구원에 대해서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이 아이가 바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곧 ‘임마누엘’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머무르신 하느님이 바로 우리의 희망입니다. 그런데 임마누엘이 이루어질 때,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실 때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놀라운 신앙의 신비가 발견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되어 오실 때, 구름을 타고 번쩍이는 빛으로 뒤덮인 찬란한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으십니다. 하다못해 백마를 타고 군대를 호령하는 왕의 모습으로 당신을 드러내지도 않으십니다. 조용한 시골 동네에 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떠오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5)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에게서 보다 철부지를 통해서 당신의 뜻을 드러내 보이시는 하느님께서는 처음, 당신께서 사람이 되어 오실 때부터 그렇게 하셨던 것입니다. 세상은 강함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 보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약함으로 자신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의 모습, 도움 없이는 도무지 살아갈 수 없는 나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나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하느님이시기에 처음부터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생명으로 탄생하는 아기는 그 부모에게 신비롭고 희망이기도 하지만 두려움이기도 합니다. 첫아기는 더욱 그러합니다. 부모에게 하느님의 위로가 전해집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 1,30-31)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20-21)
도움을 받아야만 살 수 있는 나약한 아기의 모습을 택하신 하느님께서는 어머니 마리아의 순종과 아버지 요셉의 협력으로 세상에 오십니다. 그리고 그분들의 보살핌 안에서 자라납니다.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임마누엘은 그렇게 처음부터 부모의 협력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가 자라나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세상에 알려주고, 하느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을 위해 당신 자신을 내어놓으십니다. 그리하여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세상에 오신 하느님은 나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도움 없이는 도무지 살 수 없는 존재인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가 하느님으로부터 세상에 던져진 ‘희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기는 죽음조차도 이겨내는 참된 희망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아기’라는 존재는 ‘희망’의 다른 이름입니다. 성경은 이 신앙의 신비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0-11)
올해 우리 교구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는 하느님’이라는 주제로 ‘청소년의 해’를 보내고 있습니다. 성탄이 기념하는 한 아기의 탄생 이야기는 이 ‘희망’이라는 주제와 너무도 잘 어울리며, 희망이 무엇인지를 잘 표현해 줍니다.
아기는 나약합니다. 아기는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아기는 도움을 통하여 자라나야 합니다. 그럼에도 아기는 부모로 하여금 모든 것을 감내하게 하는 힘입니다. 희망도 그러합니다. 나약하고,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도움을 통해 자라나야 하지만,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것을 감내하게 하는 힘입니다. 지금은 비록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지만’, 그 희망을 어떻게 가꾸어가는가 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표징입니다.
지난주에는 대선이 이루어졌고 우리는 이제 새로운 대통령을 맞이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이 결과가 기쁨이겠지만, 또 어떤 이에게는 절망으로 느껴지기도 할 것입니다. 또한 도무지 그 결과에 관심 없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선거를 치르는 동안 서로를 격려하며 함께 나간 이들도 있을 것이지만, 많은 아픔을 주고받으며, 다시는 보기 싫은 사람도 생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편이든, 네 편이든 우리는 모두 우리나라의 국민입니다. 같은 땅을 딛고 함께 살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서로가 지나간 정부들의 잘못을 이야기했습니다. 잘못했다면, 이제는 새로운 출발을 이루어야 합니다. 부의 집중에서 오는 경제적 빈곤 때문에, 무너진 정의 때문에, 파괴된 환경 때문에 절망했었다면, 이제는 다시 힘을 합쳐 일어서야 할 때입니다. 새로운 정부에서 또 다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감시하고 견제하고 격려하면서 희망을 일구어 가야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권을 가진 국민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아울러, 선거로 우리의 시선이 몰린 사이에 소외된 이웃들이 있는지 돌아봅시다. 일찍부터 몰아닥친 한파는 없는 이들에게 더 추운 겨울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약자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둘러보고, 우리의 눈에 뜨이는 그들이 바로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여진 아기’임을 잊지 말고 우리의 손길로 안아주도록 합시다.
어렵고 혼란한 때에 맞이하는 올해의 성탄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우리 모두에게 희망과 기쁨이 되기를 기도하며, 여러분 모두에게 평화를 빕니다.
2012년 성탄절에 천주교 원주교구장 김 지 석
의정부교구 성탄의 선물인 가난한 마음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예수님 성탄의 기쁨이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 가난으로 힘겨워 하는 사람들, 돌봐주는 사람 없이 혼자 외롭게 사는 분들에게 아기 예수님의 축복이 가득 내리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거룩한 밤, 예수님께서는 어두운 이 세상에 희망을 주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어둡고 고요한 밤 베들레헴 벌판에서 양떼를 지키고 있던 목자들에게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셔서 예수님의 탄생을 알립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카 2,10-11)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오랜 세월 기다렸던 구원자가 태어나셨다는 소식이 제일 먼저 전해진 사람들이 가난한 목자였습니다. 목자들은 달려가 구유에 누워계신 아기 예수님을 뵙고 경배합니다. “세상은 그 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지만”(요한 1,10) 목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경배합니다.
목자들이 본 아기 예수님은 가난한 구유 안에 누워 계셨습니다. 구원자이신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실 자리로 택하신 곳은 가난한 자리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은 아무 것도 내세울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희망을 주시려 하셨습니다. 당신의 외아들을 가난한 모습으로 태어나게 하신 것도 그런 이유였습니다. 가난이야말로 우리를 행복과 구원에로 인도하는 길임을 예수님의 성탄을 맞이하여 다시 한 번 깨닫도록 합시다.
우리는 과학의 발달과 경제성장으로 물질의 풍요를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는 짧은 기간에 이루어진 급속도의 경제성장이 국민들의 총체적인 삶의 문화나 윤리 도덕적인 균형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어린시절의 가난함과 빈곤의 추억이 생생하게 자리잡고 있는 가운데 오늘의 생활은 풍요로움과 편리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특히 IT산업의 놀라운 발전으로 생활은 편리해지고, 혼자서도 얼마든지 지낼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마련해 주고 있어 우리는 점점 이웃과 관계를 맺지 않은 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청소년들 뿐 아니라 어른들도 컴퓨터 세상에 정신을 빼앗겨 전자세계가 펼쳐주는 세상에 빠져버렸습니다. 물질의 풍요는 우리에게 편리함을 주었지만 반대로 작은 불편도 참지 못하게 하고, 자칫하면 이웃의 어려움이나 고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만의 세계 속에 살아, 가까운 이웃의 모습도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마음의 담을 쌓게 되었습니다.
사람들과의 만남도 세상과의 만남도 소홀히 한 채 홀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성탄절은 우리 마음을 돌아보게 하는 새로운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 처음 발을 들여 놓았을 때 가졌던 경건하고 감동 가득한 기쁨들이 사라져버렸고,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하여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다가갔던 발걸음과 마음이 뜸해졌습니다. 예수님 안에 모든 행복이 있고 우리 인생의 뿌리를 그 분께 내려야겠다는 생각들이 어느 틈에 무디어졌습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예수님의 가난한 탄생은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소중한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작고 가난한 모습으로 오시는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새롭게 태어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도 작고 가난한 모습이 될 때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찾아야할 것은 가난한 마음입니다. 가난한 마음은 우리의 고향입니다. 거기에 우리의 어린시절의 인정 넘치는 고향의 이웃이 있고, 서로 돕고 아끼며 살던 행복했던 시간들이 있습니다. 가난한 마음에서 서로의 사랑이 싹트고, 용서와 나눔이 생길 수 있습니다.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이웃이 있고, 돌봐주어야 할 이웃이 보입니다. 가난한 마음은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함을 깨우쳐 주시기 위해 탄생하시는 예수님의 선물입니다. 가난한 마음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 가장 중요한 것이, 하느님을 알고 그 분을 따르는 것임을 믿는 사람들이 가지는 마음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가난한 마음이 필요한 이 세상에 아기 예수님께서 가난한 모습으로 찾아오십니다. 이제 우리도 가난한 모습으로 주님의 오심을 맞이하며 그동안 주님을 만나는데 소홀히 하였던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고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고통받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소홀히 하고 멀리하였던 일들을 반성합시다.
2012년 예수 성탄 대축일에 천주교 의정부교구장 이 기 헌 베드로 주교
대구대교구 가난한 이들 가운데 계신 주님
아기 예수님의 평화가 교우 여러분의 가정에 가득하기를 빕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어 죄를 빼고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아지기를 원하신 주님께서는 하늘나라의 영광을 떠나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못난 우리가 보살펴드리고 안아드릴 수 있도록 힘없고 작은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추운 계절인데도 성탄을 맞아 절로 따뜻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은 사랑 때문에 이토록 먼 거리를 내려오신 주님의 겸손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저물고 있습니다. 안으로는 안보와 민생, 교육과 복지의 얽히고설킨 문제들을 둘러싸고 갖가지 논란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세계적인 경제 위기의 와중에 경기가 위축되고 일자리도 줄어들어 많은 이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런 어려움이 금세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밖으로부터는 전쟁과 재난의 소식도 끊이지 않고 들려옵니다. 며칠 전에는 이렇게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나라 살림을 맡아 일할 새 대통령도 뽑았습니다.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하며 저무는 해를 보내지만 우리 주변에는 희망을 걸어볼 만한 여지조차 없는 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정치의 쇄신이나 경제의 민주화와 같은 긍정적인 변화를 필요로 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제도상의 개선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희망의 끈을 놓아버린 이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사랑입니다. 스쳐지나가는 관심이 아니라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사랑, 멀리 떨어져서 대책을 논의하는 도움보다는 찾아가서 함께 있어 주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남아도는 것을 나누어주는 데 그치지 않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꺼이 손해를 보고 불편을 감수할 줄 아는 용기 있는 사랑이 꼭 필요합니다.
그런 사랑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시려고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랑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을 뿐 아니라, 스스로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되어 사셨습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하신 말씀은 상징적인 표현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진실입니다. 가장 크신 분께서 작은 이들을 형제라고 부르셨으니, 주님의 제자 된 우리는 마땅히 작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야 할 것이며, 힘들어하는 이웃을 볼 때마다 바로 주님을 뵙는다고 여겨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자선의 정신이며, 주님의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들의 올바른 자세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처음 오실 때에 그러하셨던 것처럼 주님께서는 이 성탄절에도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오십니다. 추운 겨울에 방을 얻지 못해 한 데서 태어나신 분께서는 우리의 발을 씻어주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5)하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참된 평화가 있고,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꺼지지 않는 희망의 불꽃이 있습니다. 은총 가득한 이때에 주님께서 모든 교우들에게 참사랑을 충만히 부어주시기를, 그리고 그 사랑이 넘쳐나서 우리의 이웃에게 흘러가기를 기도합니다.
2012년 12월 25일 예수 성탄 대축일에 천주교 대구대교구 조 환 길 타대오 대주교
부산교구
2012년 성탄절에
성탄을 맞이하여 모든 분들에게 우리에게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의 사랑과 평화를 기원합니다.
우리가 매년 성탄을 큰 축제로 지내는 것은 예수님의 탄생을 크게 한 번 기념하자는 행사적 의미를 훨씬 넘어섭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그 옛날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오늘도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새로이 탄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의미를 우리는 예수님의 성탄을 지내며 각자에게 새기는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서는 성모님께서 그랬듯이 ‘나의 삶 속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귀울일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내 중심의 생각만이 아니라, 매사에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깊은 삶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삶 속에서 들려오는 ‘착한 마음의 요청, 온갖 물신주의를 극복할 신앙의 요청, 사랑의 요청’을 예민하게 들으시어 예수님께서 모든 분들의 마음속에 탄생하시기를 빕니다.
다가오는 해에는 우리 신앙인들이 예수님의 사랑의 정신을 더욱 본받아 우리 사회에 ‘새로운 변화’의 희망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모든 분들을 이끌어 주시어, 다가오는 해에도 참된 평화와 축복이 가득한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2012년 예수 성탄 대축일에 천주교 부산교구장 황 철 수 바오로 주교
청주교구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1. 오늘 구세주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성탄의 기쁨과 평화가 신자 여러분과 모든 가정에 충만하길 기원합니다. 구세주 탄생의 기쁜 소식을, 루카복음은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카 2.11).
2. 오늘 베들레헴에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주님의 천사는 “온 세상에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목자들에게 전하면서, 탄생하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전해줍니다. 루카복음 2장 11절의 말씀대로 천사는 목자들에게 “오늘 너희를 위하여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라고 선포합니다. 먼저 천사가 전해준 기쁜 소식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는 우리의 ‘구원자’시요, 인류의 ‘구세주’시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오늘 탄생하신 아기는 ‘주님’이시라는 선포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참 하느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오늘 탄생한 아기는 ‘그리스도’(메시아)이심을 선포합니다. 원조 아담이 범죄한 후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시라는 말씀입니다.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는 단순히 위대한 인간이 아니라, 인류의 구세주 곧 인류가 고대해온 메시아요,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아기의 탄생은 온 세상에 큰 기쁨의 소식입니다.
3. 그러면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왜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셨습니까?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비천한 몸을 취하시어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셨다는 이 놀라운 사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그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기시고, 극진히 사랑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요한복음은 이 놀라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심으로써 인간은 자동으로 고상한 품위로 들어 높여졌습니다(인간의 구원자, 8항). 인간이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요한 3,17) 주시었으니, 창조주 하느님의 눈에 인간은 얼마나 고귀한 존재입니까?(인간의 구원자, 10항 참조). 마더 데레사는 “하느님은 당신의 외아들을 우리에게 내어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라고 강조하면서 “우리 모두 하느님께 귀중한 존재라는 것을,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를 자애로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하고 권고하였습니다.
4. 우리 사회는 하느님께서 그토록 귀하게 여기시는 인간을 과연 존중하고 있습니까? 오늘날 인간존중 의식은 세계 전역에 널리 확산되고 있지만, 아직도 국제사회는 전쟁과 테러, 폭력과 기아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부와 권력, 건강과 쾌락이 삶의 목적인 양 물질만능주의와 쾌락주의, 그리고 극단적인 이기주의가 만연되어 있습니다. ‘자유’가 ‘자유방임’으로 착각되어 나의 소유와 만족을 위해서라면 하느님의 법과 이웃의 권리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인간 초기 생명인 배아와 태아가 ‘난치병 치료’와 ‘여성의 선택권’이라는 명목으로 희생되고 있고, 청소년들의 욕설과 폭력, 그리고 청소년 자살이 사회문제로 급부상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바라보면서,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께 자비를 청하며, 온 세상에 참된 사랑과 평화가 임하고, 우리 사회도 배금사상과 인간생명경시풍조로부터 벗어나 서로 존중하고 나누고 사랑하는 따뜻한 사회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5. 성탄을 경축하는 우리 신앙인을 왜 그리스도인이라 부릅니까?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세례성사를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된 신앙인은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습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790항 참조). 그러므로 성탄을 경축하는 우리도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히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셨듯이, 우리 신앙인도 수정(임신)되는 순간부터 자연사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인간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심판에서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베푸는 사랑을 심판의 ‘척도’로 다음과 같이 표현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주었다”(마태 25,35-36항). 따라서 오늘 탄생하신 예수님을 경배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이 되시어 우리의 인간적 약점에 함께하신”(믿음의 문, 13항) 예수님을 본받아 이웃의 아픔을 기꺼이 함께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6. 오늘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요 주님이며 메시아이십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구세주요 주님으로 고백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언제나 희망을 가지고 이념과 세대 간의 갈등, 그리고 빈부격차의 갈등을 극복하고 특히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기꺼이 다가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해야 하겠습니다. 특히 새로이 출범할 정부가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대립을 넘어 공존의 길, 통합의 길을 모색하고, 인간생명과 존엄성에 기반을 둔 상생(相生)의 사회건설에 정진하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성탄을 경축하며 신자 여러분의 가정과 교구 공동체, 그리고 지역사회와 대선으로 새로이 출발한 한국사회에 성탄의 기쁨과 평화가 가득히 내리기를 기원합니다.
2012년 12월 25일, 예수 성탄 대축일 천주교 청주교구장 장 봉 훈 가브리엘 주교
마산교구 아기로 태어나시는 하느님
모든 백성들에게 기쁨의 복음을 선포하시는 아기 예수님께서 교구의 모든 형제자매, 수도자, 성직자 여러분에게 풍요로운 은총을 내리시기를 기원합니다. 우리 신앙 공동체는 대림절을 지내면서 예수 아기의 탄생을 고대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태어나시는 구세주의 탄생을 경축하고 기념합니다. 우리를 사랑하고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이 되신 분께서 태어나십니다.
하느님의 약속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것도 아기가 되셨습니다. 이로써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되겠다는 약속이 이루어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포기하십니다. 심지어 하느님으로서의 신원과 품위마저도 포기하십니다. 모든 거리감을 버리시고, 그 결과 어느 누구도 하느님을 모른다고 말할 수 없게 하십니다. 아울러 구유에서 태어난 아기를 자신의 삶 안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할 수 없게 하십니다. 아기의 모습으로 태어나시는 하느님에게서 우리는 성탄 축제가 지닌 신비의 숨은 뜻을 발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강압적인 힘을 이용하여 우리가 당신 앞에 무릎을 꿇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 대신 자유 안에서 우리와 새롭고 영원한 사랑의 관계를 맺고 싶어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이 당신 사랑의 초대에 응답하시기를 기다리십니다. 하느님께서 특히 인간의 응답을 기다리십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리십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는 순간 우리에게로 가까이 다가오시어 우리 가운데 거처를 잡으십니다.
숨어계시는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에 따라 지음 받은 우리가 당신께서 선물로 주시는 자유와 사랑을 누리도록 숨어계십니다. 참으로 어려운 곳에 숨어계십니다. 마구간에서 태어나는 아기 안에 숨어계십니다. 하느님의 신원과 품위에 비추어 볼 때 너무나도 파격적인 모습을 취하십니다. 그래서 아무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헤로데는 그 아기가 하느님이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께서 숨어 계신 곳에서 하느님을 찾지 못했습니다. 겉으로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고, 보이지 않는 본질에는 관심조차도 두지 않은 결과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눈에 보이는 세계를 유지하고 지탱시켜 준다는 인식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숨어계시는지 궁금합니다. 하느님께서 숨으시는 이유는 우리가 그분을 닮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한테서 진리와 사랑이 피어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숨으시기만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에게 ‘나를 찾아라’하십니다. 어디에서 어떻게 그분을 찾을 수 있는지 그 방도도 일러주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찾을 수 있도록 그분께서 우리를 찾아 나서십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 멀고도 먼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사람이 되고 아기가 되셨습니다. 그 아기 안에서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하느님의 사랑
성탄 축일은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일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하느님에게는 사람이 되실 수 있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자유로움과 넉넉함을 보여주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모두를 아시고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하느님께서 아기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도를 알려주십니다. 그분의 사랑을 감지하는 사람은 천사들이 알려주는 기쁜 소식에 무릎을 꿇습니다. 목자들은 베들레헴으로 가자고 서로 다짐하였습니다. 목자들은 들판에 머물며 깨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천사들이 외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았습니다. 우리 역시 베들레헴으로 가자는 초대를 받아들입니다. 이 초대는 천사들이 알리는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듣고 길을 나서라는 초대입니다.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다른 편으로 건너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그분을 바라보지 않고 살아갑니다. 우리의 생각과 계획은 언제나 하느님과 등지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버립니다. 하느님과 척을 지는 반대편에 서서 방향을 전환하려 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숨어계십니다. 그분을 찾으려면 반대편으로 건너가야 합니다. 고통의 길과 변화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오늘 날 우리는 참으로 많은 것을 할 수 있고 실제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피하기 위해서 그 많은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념하는 성탄 축제가 숨어계신 하느님을 찾고 만나기 위한 여정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과의 만남
우리와 가까이 계시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진리를 향해, 우리 각자의 마음 안에 태어나시는 하느님을 향해 걸음을 재촉해야 합니다. 아기는 모든 이를 위해 태어나십니다. 그래서 그 당시 목자들에게 일어난 일이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에게도 일어납니다. 우리도 목자들처럼 베들레헴으로 가서 진리이신 말씀을 만나야 합니다. 영적인 여정을 시작해야 합니다. 복음의 창문을 통해 흘러나오는 빛을 만나야 합니다. 희망과 기쁨으로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를 만나야 합니다. 특히 우리의 탐욕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하는 생명을 만나야 합니다. 소중하게 태어나지만 결국은 버림 받는 아기들을 만나야 합니다. 그 아기들을 받아들이고 보호해야 할 공간을 우리가 만들어야 합니다. 자기의 존엄한 생명을 자기의 것이라 주장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죽어가는 수많은 아기들을 만나야 합니다.
인사와 감사
기쁨에 가득 찬 성탄을 맞이하여 여러분 모두에게 한없는 사랑으로 이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님의 사랑이 풍성히 내리시길 기도합니다. 아울러 다가오는 새해에는 강생하신 우리 주님, 곧 인류 구원을 위해 세상에 오신 주님을 더욱 충실히 따르기 위해 함께 기도와 정성을 모아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우리 교구는 2010년부터 시작한 “순교 영성으로 세상을 복음화 시키자”는 사목지침을 마감합니다. 지난 3년 동안 기도와 헌신으로 본당과 교구를 위해 수고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다시금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는”(시편 96,11) 성탄을 경축 드립니다.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의 모습으로만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의 섭리와 은총 속에 다가오는 새해 그리고 하느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결코 만나지 못할 새해를 행복하게 맞이하시기를 빕니다. 새해에는 많은 결실을 기대하면서 희망의 씨앗을 뿌리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가운데 탄생하시는 아기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를 당신 품안에 안으시고 우리의 고단한 삶을 위로해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2012년 성탄 대축일을 맞이하면서 천주교 마산교구장 안 명 옥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주교
안동교구 강생의 신비와 새로운 복음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요한 1,14) 요한 복음사가는 주님 성탄의 벅찬 기쁨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토록 자신을 낮추시고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오신 것은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하느님에게까지 오를 수 없는 비천한 우리들을 들어 높이기 위해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 많은 우리 인간들을 한 사람도 구원에서 놓치지 않기 위하여 가장 누추하고 버림받은 자리인 마구간으로 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신 ‘강생의 신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처럼 놀랍고 오묘합니다. 그러면서도 지극히 겸손하고 단순합니다. 오로지 상대방의 처지에서 상대방과 함께하는 사랑, 내려갈 때까지 내려가는 지극히 겸손한 사랑이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 낮은 자리에서 상대방을 위해 내놓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내놓는 지극히 단순한 사랑이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사랑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는 분이십니다. 오늘 주님 성탄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사랑이 바로 그러한 사랑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통해 우리 가운데 드러내신 ‘강생의 신비’가 바로 그 사랑의 구체적인 방법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강생’으로 우리 인간이 구원되고 우리 인간이 하느님과 하나 되는 친교를 이루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 성탄의 신비, 강생의 신비인 것입니다.
강생의 신비는 그분이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시니 우리도 그에 맞갖게 사랑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작고, 약하고, 힘없는 가난한 사람들’ 안에서 우리가 주님을 알아보고(마태 25,31-46 참조), 주님을 섬기듯 그들을 극진히 섬기며 주님의 마음으로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들 또한 ‘강생의 신비’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신앙의 해’(2012년 10월 11일-2013년 11월 24일)를 보내고 있습니다. “신앙의 해는 온 세상의 유일한 구세주이신 주님을 향하여 참으로 새롭게 돌아서라는 초대입니다.”(「믿음의 문」 6항) 그러므로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주님으로부터 멀어진 이들이 신경(Credo)에서 고백한 신앙을 새롭게 재발견하고 새로운 열정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은 신앙의 해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책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에게서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셨음을 믿나이다.”고 세례 때 ‘입으로 고백한 바를 마음으로 믿어 구원을 얻기 위해서입니다.’(로마 10,10 참조) 2000년 전에 우리에게 오셨던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새롭게 오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탄 미사 전례 때 외치는 그대로입니다. “오늘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태어나셨다.”(성탄 밤 미사 화답송) 이러한 의미에서 강생의 신비는 우리 신앙 안에서 오늘도 살아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강생의 신비를 항상 새롭게 살아야 하는 것이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책무라면, 이런 신앙을 이웃에게 전하고 이런 신앙을 살도록 이끌어 주는 것 또한 이 신앙의 해에 우리 모두가 함께 이루어 나가야 할 ‘새로운 복음화’의 길이 될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강생의 신비를 항상 새롭게 살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우선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구유의 아기 예수님’(루카 2,12 참조)이 우리의 메시아, 구세주이심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신앙 안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지금 이 순간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며 다가오시는 그분을 알아 뵙고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분을 향한 ‘새로운 열정’을 우리 신앙 안에서 불러 일으켜야 합니다. 믿음이 약하거나 미지근한 사람들이 ‘구유의 아기 예수님’을 입으로 고백하고 마음으로 믿어 구원을 얻어 누릴 수 있도록 그분의 새로운 현존 방식을 ‘새로운 표현’으로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가난하고, 버림받고, 상처받은 이들 안에서 그분을 새롭게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루카 복음사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것이 우리에게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알아보는 표징’(루카 2,12 참조)이 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강생의 신비를 항상 새롭게 사는 우리의 새로운 생활양식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조건과 처지가 아무리 보잘것없고 비참하더라도, 아무리 죄스럽고 약하다 하더라도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구원해주는 분이십니다. 오히려 가장 보잘것없고 비참하고 죄스럽고 약한 이들 가운데 거처하시면서 그들을 구원하는 분이 우리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이 바로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셔서 모든 것을 함께 나누신 사람이 되신 하느님, 곧 ‘구유의 아기 구세주 예수님’이십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요한 1,14)
2012년 예수 성탄 대축일 천주교 안동교구장 권 혁 주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광주대교구
“평화를 빕니다”
2천 년 전 한 줄기 빛이 어둠을 뚫고 나와 우리네 삶을 비추고 있습니다. 그 빛은 슬픔과 절망에 몸부림치는 이들에게 희망이 되어주었고, 그 빛을 따라간 사람들은 평화 속에 머물렀습니다. 지나간 시간 동안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평화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새롭게 태어나셨습니다. 저는 참 평화와 인간의 구원을 위해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찬미하며 그 기쁨을 전 교구민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세상은 참 평화를 원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당시의 시대 상황을 이렇게 진단하였습니다. “인간의 지능과 창조적 노력에 의해 인간 자체의 변화가 일어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이 급격히 변화되고 종교 생활까지 그 영향을 받는 상황입니다.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아와 빈곤에 허덕이며, 지구촌은 극도의 대립과 분쟁으로 황폐되어가고 있으며, 인간의 뛰어난 능력발휘에도 불구하고 자신에 대한 불확실성이 확장되는 혼돈의 상태가 커져가고 있습니다. 인류는 미래에 대한 확신과 희망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혼돈과 갈등으로 불안해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50여 년 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먼 미래를 직시하는 예언자적인 혜안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많은 이들이 삶의 무게에 짓눌리며 절망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희망과 평화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교구 설정 75주년 및 대교구 승격 50주년을 맞아 “평화를 빕니다”라는 표어로 교구 영성운동을 선포하였습니다. 현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과 사회가 간절히 염원하는 것이 바로 ‘평화’라는 것을 감지하였기 때문입니다. 참 평화를 주기 위해 세상에 태어나셨던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 평화를 심는 일꾼이 되기를 희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주위를 살펴보면 평화보다는 다툼이 더 많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2천 년 전에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내어놓으시면서 세상에 용서와 사랑의 참 평화를 가져오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신 땅 이스라엘에서는 폭력과 갈등의 폭은 줄어들지 않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일본, 중국, 한국 주변국 사이의 영토분쟁 문제, 그리고 각국 세력들의 정치공세를 접하면서 우리가 갈망하는 참 평화는 현실에서 점점 멀어져가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또한 남북한 대화의 단절은 우리 모두에게 평화통일에 대한 관심에서 멀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삶의 소중한 가치관인 ‘신뢰’가 사라져가는 분위기가 팽배하고 있습니다. 돈이 최고의 가치로 부상하고, 돈을 위해 서로를 끊임없는 경쟁사회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은 물질만능주의가 대세를 이루고 현대인들은 삶의 굴레에 갇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선한 인간본연의 아름다운 모습을 상실해가는 불행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참 평화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은 자신이 지닌 모든 영광을 내려놓으시고 가난한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의 참 행복은 평화로 우리 인간 안에 내려오신 아기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 모두는 경쟁보다는 더불어 사는 삶,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닌 이웃을 배려하는 삶을 살도록 변화되어 나가야 합니다. 그것은 네가 먼저가 아니라 내가 먼저 그러한 삶을 선택할 때 가능해질 것입니다. 평화는 누군가의 힘에 의해 강요된 침묵이 아닙니다. 평화는 내가 너에게 평화가 되어 줄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참 평화는 너와 내가 이해와 수용, 인내와 용서, 나눔과 배려를 함께 공유할 때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참 평화를 이루는 삶을 우리는 아기 예수님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간을 향해 당신을 나눠주셨습니다. 그것은 당신 안에 모든 이들이 들어올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당신을 비움으로써 당신의 품 안에 모든 이들이 들어올 수 있는 자리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참 평화 안에 머무셨고, 당신처럼 자신을 비움으로써 당신 안에 들어온 이들에게 참 평화를 누릴 수 있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평화가 되어주심으로써 우리도 참 평화 안에 머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인류가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참 평화가 우리와 함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이제 우리 모두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처럼 참 평화를 누리도록 합시다. 이 특별한 신앙의 해에 서로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고 겸손과 사랑 자체이신 아기 예수님을 통하여 참 평화가 되어 주는 삶을 살아가도록 합시다. 슬픔과 절망을 넘어 희망과 기쁨의 세상을 우리 다 함께 만들어 갑시다. 이것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선물입니다.
평화를 빕니다
교형자매 여러분! 참 평화로 오신 주님의 이 귀한 선물을 받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도 주님처럼 평화의 사도가 되어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빛고을에서 시작한 평화의 발걸음이 온 세상으로 번져나가길 희망합니다. 여러분 모두의 평화를 빌며 저도 참 평화가 되어줄 것을 다짐합니다. “평화를 빕니다!”
2012년 예수 성탄 대축일에 천주교 광주대교구장 김 희 중 히지노 대주교
전주교구 성탄 대축일을 맞아
1. 1969년 미국 동부시간으로 7월 20일 오후 10시 56분 20초, 아폴로 11호에서 내린 닐 암스트롱은 인류 최초로 달 표면에 첫 발자국을 찍으며 말했습니다. “이것은 한 인간에게는 하나의 작은 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다.” 이 말은 이분이 거기에 남긴 발자국과 함께 인류의 뇌리에 새겨져 오래 남을 것입니다. 그는 달 위에서 3시간을 머물며 표본을 채집하고 연구를 진행한 다음 고향인 지구 별로 돌아왔습니다. 인류는 그를 영웅으로 바라보고 그렇게 대접했지만, 그 자신은 아주 평범하고 겸손하게 살다가 지난 8월 25일 천명을 다하고, 말하자면, 지구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남긴 말 가운데 우리 신앙인에게 더욱 깊은 의미가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인간이 달 위를 걸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지구를 걸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렇습니다. 해와 달과 별을 만드시고, 우주 전체를 창조하신 분이 이 작은 지구에 오셔서 인간과 함께 걷고 웃고 울고 죽음까지 당하셨습니다. 오셔서도, 단순하게 지구의 표면만을 걸으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 구석구석, 그 출생과 죽음, 기쁨과 슬픔, 희망과 좌절, 미움과 사랑, 빛과 어둠의 골짜기를 어느 한 구석도 예외 없이, 다 걷고 통과하고 맛보고 겪으셨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부터는 지구에 태어나 사는 사람 가운데 어느 누구도 자신의 삶 속에서 경험하는 가장 큰 기쁨과 슬픔, 희망과 좌절, 사랑과 배신, 심지어 하느님께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되는 극한의 외로움을 두고도, 하느님께서 그것은 이해 못 하실 것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역사 초기에서부터 불러온 주옥같은 노래가 이를 잘 표현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필립 2,6-7). 과연 우리의 하느님은 우리와 똑 같은 인간으로서 우리의 삶을 그 찌꺼기까지 몸소 맛보고 체험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2. 요르단 강은 2천년 전에 예수께서 그 물에 몸을 담그고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거룩하게 되었다고 믿기 때문에, 지금도 그 물은 따로 축성하지 않고 세례수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어찌 지구 위에서 아주 작은 그 강, 그 물뿐이겠습니까! 하느님이 들어오셔서 사신 이 지구, 나아가 물질세계 전체가 그분의 오심으로 거룩하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거룩하게 된 것이 어찌 외부세계만이겠습니까? 그분이 정말 들어오신 장소는 물질세계만이 아니라, 우주의 재료와 정기를 다 모아 만들어진 인간 자체가 아니겠습니까? 과연 그렇습니다. 물질과 정신,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진 인간 속으로 하느님이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로 해서 인간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이 계시는 곳, 곧 성전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성령이 계시는 성전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고린 6,19) 암스트롱은 달에 가서 그 표면에 자신의 발자국을 남겨놓고 3시간 후에 그곳을 떠나 고향인 지구 별로 돌아왔지만, 하느님은 지구에 오셔서 33년을 머무시고 당신의 생명, 그 영을 남겨놓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분은 몸으로 계실 때보다 더 깊이 더 효과적으로 우리와 함께 사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영은 사랑의 불길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의 불길이 옮겨 붙었습니다.
3. 예수님께서는 그 사랑의 불길을 우리에게 옮겨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속에 잠기는 또 하나의 세례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을 다 겪어 낼 때까지는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지 모른다"(루가 12,49-50). 그렇게 해서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하신 말씀을 스스로 실천하심으로써 하느님의 더 할 수 없는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삶 전체는 그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었기 때문에, 생애 첫 순간부터 십자가는 늘 이분을 따라다녔습니다. 이분이 탄생하시자마자 곧바로 죽이려한 헤로데의 음모, 그리고 마굿간에서 우리는 이미 십자가의 그림자를 봅니다. 십자가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보여주는 표지라면, 그분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장면에서부터 우리는 요한의 증언을 눈으로 확인합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요한 3,16).
사람이 되신 말씀 - 하늘과 땅은 사라져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그 말씀이 여러분의 가슴에 살아 있기를. 그리하여 이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른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가득 채워주시기를. 마침내 온갖 세상 걱정과 어려움 속에서도, 지금 여기에서부터 천상적 기쁨과 영원한 생명이 언제나 여러분을 감싸주시기를 빕니다.
2012년 예수 성탄 대축일 천주교 전주교구장 이 병 호 빈첸시오 주교
군종교구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카 2,10-11)
천사가 목자들에게 전한 큰 기쁨이 될 소식은, 바로 우리를 위해 구원자 주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보통 우리는 내가 희망하거나 내가 하는 일이 잘되는 데서 기쁨이 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보면, 기쁨은 무엇보다 내가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체험하는 데서 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랑 체험’이야 말로 기쁨의 원천이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온갖 탐욕에서 벗어나 마음의 순수성을 지닐 때 참된 기쁨을 체험하게 됩니다. 천사가 목자들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 최고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한 마디로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을 말해줍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요한 3,16)라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곧 나약했고 불경했고 죄인이었고 하느님의 원수였던(로마 5,6-10 참조) 우리 인류를 멸망에서 구하시기 위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내주셨습니다.
‘외아들을 내 주시어’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단순히 “아들을 보내주신다.”라는 뜻을 넘어서서, 외아들께서 나와 그리고 모든 이와 함께 동고동락하게 하시고, 마침내는 나와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혹독한 고통을 당하시고 십자가형으로 죽게까지 하신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외아들을 내주실 때, 하느님의 신성만 지닌 채 보내신 것이 아니고 인성을 취해, 곧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게 하시어 보내신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구체적인 표현을 요구하기에,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실제 몸을 취하신 외아들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외아들을 보내실 때에, 번쩍이는 광채와 웅장한 소리 가운데 하늘에서 직접 내려 보내신 것이 아니라, 한 여인 마리아의 태중을 통하여 가축들이 먹고 자는 마구간에서 보내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통해 그리고 세상의 지극히 가난한 환경 안에서 탄생하게 하셨습니다. 이 하느님의 사랑을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성 레오 대 교황은 당신의 유명한 예수 성탄 대축일 강론에서 이렇게 말하면서 기쁨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구세주께서 탄생하셨으니 기뻐합시다. 죽음의 공포를 소멸하시고 영원한 약속을 통해 기쁨을 부어주시는 생명께서 탄생하신 이날, 슬퍼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이 기쁨의 참여에서 아무도 제외될 수 없으며 기뻐할 이유는 모두가 다 지니고 있습니다. 죄에서 해방된 사람을 아무도 찾지 못하셨으므로, 죽음과 죄를 파멸시키는 우리 주님께서 모든 이를 해방시키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친애하는 교구의 사제, 수도자, 그리고 신자 여러분! 하느님의 이 사랑을 묵상하고 감사드리면서, 큰 기쁨 속에 성탄절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현실에서 볼 때, 어쩌면 기쁨보다는 슬픔을 더 느끼는 이들이 많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 못할 크고 작은 아픔들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이 아픔들은 자칫하면 인간을 좌절감에 빠뜨리고 그래서 희망을 상실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통하여 보여주신 한없는 사랑을 관상한다면, 우리는 어떤 아픔도 어떤 좌절감도 극복할 수 있고, 기쁨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예수님 성탄을 축일 중의 축일’이라고 말하고, “이날에 하느님께서 아기가 되어 인간의 젖꼭지에 매달리셨다.”고 말하면서, 아기 예수의 탄생일을 어느 축일보다도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 중에 보냈습니다. 또한 그는 이날에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과 굶주린 사람들의 배를 채워주기를 바랐고, 소나 당나귀까지도 평상시보다 더 많이 먹여주기를 바랐습니다.
우리 모두 기쁨 가운데 서로 인사하고 안부를 물으면서 축복을 빌어줍시다. 그리고 주님께서 “가장 작은 이들”(마태 25,40)이라고 하신 가난으로 고통받는 국내외의 사람들을 도와주며, 병자들과 외로운 노인들과 마음의 병으로 괴로워하는 이들을 방문하도록 합시다.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64년 폴란드 크라코프 대교구장으로 취임하러 가면서 병자들에게 특별한 편지를 전했습니다. 그는 편지 서두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제 사랑하는 형제여! 자매여! 저는 참으로 여러분의 병상에 가까이 있고 싶고, 여러분 가까이 있고 싶으며, 여러분을 자주 찾아뵙고 싶습니다…저를 믿어 주십시오. 어떤 아픔이건 그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생각이 저를 자주 엄습합니다.” 또한 우리는 불편을 기쁘게 감수하면서, 국가 차원에서 요구되는 에너지 절약을 위해 함께 노력하고, 내가 머무는 곳과 주위 자연환경을 깨끗하게 하는 데에 기쁘게 힘을 다하도록 합시다. 저는 특히 추운 겨울 어려운 여건 가운데서도 묵묵히 그리고 충실히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장병들과 군 지휘관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떼를 지키는’ 외롭지만 충직했던 목자들이 구원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을 가장 먼저 듣는 축복을 누린 것처럼, 이들이 성탄의 기쁜 소식을 그 누구보다 더 축복된 마음으로 들으면서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드리길 바라고 있습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어 외아들까지 아낌없이 보내주신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에 뜨거운 감사를 드리면서, 기쁨 충만한 성탄절 보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년에는 하느님의 사랑이 가져다주는 또 하나의 은혜인 희망의 덕을 더욱더 추구하도록 합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아멘!
2012년 성탄절을 맞으면서 천주교 군종교구장 유 수 일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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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