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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
유럽과 북미를 뒤덮고 있는 이슬람에 대한 공포증을 치료하는 완벽한 해독제 – UC버클리大 리즈 파텔 교수 -
자살폭탄 테러를 더 넓은 역사적 맥락에서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읽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 이 책은 이방인에 의해 느닷없이 뒤집혔다가 다시 똑바로 서려는 한 문명의 이야기다 - 세인트루이스 포스트 디스페치 -
9.11 이후 오늘날처럼 불안하고 반목을 일삼은 세계에서 이 책은 필독서다 - 칼레이드 호세이니(아프가니스탄 출신 미국 작가) -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 소말리아 해적,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분쟁까지 오늘날의 정치적 논쟁과 분쟁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 안내서. 세계를 파괴하고 있는 갈등을 문명의 충돌로 이해하는 것은 최선의 방법이 아니다. 그보다는 서로 맞지 않은 두 세계가 교차하면서 발생한 마찰로 이해하는 편이 낫다 - 샌프란시스코 클로니클 -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이 책의 ‘추천사’들로 이슬람과의 관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논쟁과 분쟁을 이해하기 위해, 혹은 해결점을 찾기 위해 읽어야 할 필독서라고 한 주장이 많은 것 같다.
“지구상의 모든 사회는 서로 얽히고 있다. 우리 모두가 함께 짜 내려가고 있는 이 천은 아직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다. 우리 가운데 다른 사람의 내러티브(narrative : 앎, 지식을 뜻하는 형용사 gnarus에서 파생된 단어로 ‘말하다’를 뜻하는 라틴어 narrare를 어원으로 한다)에 단순히 합류한 사람은 없다. 완성된 천의 가닥들 중에는 동아시아에서 온 것, 아프리카에서 온 것, 라틴 아메리카에서 온 것, 그리고 이슬람 세계에서 온 것도, 유럽에서 온 것도 포함될 것이다. 이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예측할 수 없다. 역사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너무도 복잡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우리는 사건이 일어나면 깜짝 놀라곤 한다. 하지만 진짜 질문은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가 아니라 지금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이다. 몇 년이 지난 뒤 뒤돌아보면 현재의 사건들은 이미 진행 중이던 어떤 이야기에서 가장 최근의 장이라는 점이 보일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들을 가장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이야기 전체를 따라가야 한다.”
저자 ‘타밈 안사리’가 한국어판 서문에서 한 말이다.
이 책은 제목에서 보듯이 세계사를 이슬람의 눈으로 본 것이다. 우리는 세상사의 무엇이든 논리를 들이대기 위해서는 논지가 무엇인지, 논자가 누구인지를 먼저 보게 된다. 저자 타밈 안사리는 1948년, 아프가니스탄 카불의 유서 깊은 이슬람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카불 대학교 교수였고, 어머니는 아프간 남자와 결혼하여 아프가니스탄에 정착한 최초의 미국 여성이었다. 저자는 1964년 미국으로 이민 가 그곳에서 대학을 나와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 편집자로 일하다가 칼럼과 소설, 어린이 책 등을 쓰고 있다. 타밈 안사리는 무슬림 가문에서 자라면서도 종교와는 거리를 두었지만, 1979년 남동생이 ‘이슬람 근본주의’에 심취한 이후 이슬람의 역사와 철학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다 9·11 사태가 일어난 직후에 친구들에게 당시의 상황이 자신의 눈에 어떻게 보였는지 메일을 보냈는데, 이것이 인터넷상에서 급속히 퍼진 것이 계기가 되어 대중들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은 책으로는 회고록 『카불의 서쪽, 뉴욕의 동쪽 West of Kabul, East of New York』, 역사소설 『과부의 남편 The Widow’s Husband』등이 있다. 역자인 ‘유한원’선생에 대해서는 생략한다.
지금의 탈산업시대에는 서구식 민주주의가 우리 사회의 이상적인 미래라고 상정하기도 하고, 그렇게 하기 쉽다. 그래서 현시점까지 이어져 온 세계역사의 내러티브는 다음과 같이 전개되는 것이 보통이다.
1. 문명의 탄생(이집트, 메소포타미아)
2. 고대(그리스와 로마)
3. 암흑시대(그리스도의 부상)
4. 부활(르네상스와 개혁)
5. 계몽(탐험과 과학)
6. 혁명(민주주의, 산업, 기술)
7. 민족국가의 부상 : 제국을 향한 투쟁
8. 제1,2차 세계대전
9. 냉전
10. 민주주의적 자본주의의 승리
그렇지만 이슬람의 눈으로 보면, 역사 전체를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분기점이 다르다. 무슬림들에게 원년은 예언자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매디나로 옮겨간 해인 히즈라, 즉 ‘무슬림 공동체’가 생겨난 해를 의미한다. 그 공동체의 이상을 완성하는 것이 역사의 틀과 방향을 결정하는 동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대 몇 세기 동안 이슬람 공동체는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져, 분열의 초래, 이슬람의 방향과 대립하는 역사의 흐름이 우리를 침범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무슬림 전통의 후계자들에게 역사의 의미를 승리가 아닌 패배에서 찾도록 강요당해 왔다. 이슬람 사회가 경험하고 있는 위축된 현재, 내러티브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고대 : 메소토타미와와 페르시아
2. 이슬람의 탄생
3. 칼리프조 : 보편적 통일체를 향하여
4. 분열 : 술탄 제국의 시대
5. 재앙 : 침략자들, 몽골족
6. 부활 : 3대 제국의 시대
7. 서양의 동양 침투
8. 개혁 운동
9. 세속 근대주의자들의 승리
10. 이슬람주의의 반발
인류 최초의 문명은 유속이 느리고 홍수가 잦았던 나일강, 인더스강, 황하강 그리고 유프라테스 강가에서 생겨났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6천 년 전, 혹은 그보다 오래전에 유목민과 사냥꾼, 목동들이 모여 마을을 세우고 농민이 되었는데, 그중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의 ‘비옥한 초승달 지대’는 지금의 이라크지역으로, 이곳은 아무런 자연 방벽이 없는 광활한 지역으로 천년 넘는 세월 동안 반복된 패턴이 이어져 왔다. 유목민과 도시정착민 사이에 복잡한 싸움이 반복되다가 갈수록 큰 제국이 탄생했다. 그러다 어느 시기에 한곳 이상에서 동시에 싸움이 일어나 한쪽은 제국으로, 다른 쪽도 제국으로 싹트기 시작해 두 제국은 서로 부딪혀 확장하다 결국 한쪽이 다른 쪽을 정복해 더 큰 제국을 형성했다.
약 5,500년 전, 유프라테스강을 따라 자리한 열두 개쯤 되는 도시가 ‘수메르’라고 불리는 하나의 네트위크로 통합되었고, 그곳에서는 문자, 바퀴, 수레, 도자기, 물레, 원시 숫자 체계가 발명되었다. 그러나 상류에서 내려온 거친 ‘아키드’가 수메르를 정복했다. 아키드의 사르곤은 역사에 이름이 알려진 최초의 정복자로 그가 이뤄낸 것은 점토판에 설형문자로 새겨졌다. 지독한 자수성가형인 그는 “이 자가 들고 일어나기에 내가 그를 쳐부쉈고, 저 자가 들고 일어나기에 내가 쳐부슀다.”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때마침 유목민 무법자들이 고원에서 내려와 이키드를 정복했다. 구티안, 가시트, 후리인, 아모리까지 패턴이 반복되고 그들의 영토는 비슷하기는 해도 조금씩 커졌다.
‘아모리’인들은 유명한 바빌론을 건설했으나 ‘아시리아’에게 자리를 내줬고, 아시리아는 바빌론보다 더 크고 웅장한 ‘니네베’를 수도로 세웠지만 아시리아는 그들이 다스리던 피지배 민족 ‘칼데아’에게 무너졌고, 칼데아인은 바빌론을 재건하고 천문학, 의학, 수학을 발전시켰으며, 또 그들은 12진법을 사용하고 1년을 12달, 1시간을 60분, 1분을 60초로 나누었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바빌론의 공중정원을 건설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참 뒤에 고원지대에서 내려온 무법자들에 의해 바벨론은 피바다가 되었다. 이들 무법의 침입자는 ‘페르시아’와 ‘메데’동맹군이었다.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이들 부족은 두 번째 바빌로니아 제국을 끝장내고 그 자리에 페르시아 제국을 세웠다.
페르시아 제국이 완성되었을 때는 더 이상 정복할 땅이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한다. 문명의 요람인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가 그들의 땅이었고, 서쪽으로 소아시아, 남쪽으로 나일강, 동쪽으로 이란고원과 아프가니스탄을 넘어 인더스강까지 뻗어 있었다. 페르시아인들은 야만인이 쳐들어오지 못하게 긴 성벽을 세우고 성벽 안 안정된 땅에서 점잖은 백성들이 문명의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들은 이미 엘람, 우르, 니네베, 바빌론 등 페르시아보다 앞서 일어났던 정복자들을 중앙 수도의 왕정이 통치하는 단일정치 체제로 통합해 둔 터였다. 페르시아는 광활한 지역을 통치하면서도 다문화 전략을 펼쳤는데, 세금을 내고 황제의 명을 따르는 조건으로 자신들 풍습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게 했다. 이는 후대 무슬림들도 페르시아의 전략을 따랐고, 오스만 시대까지 이어졌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가 적힌 장서들은 19세기 페르시아어로 해독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 장서들이 하도 방대해서 오늘날 우리는 1,200년 전 서유럽인의 일상보다 3,000년 전에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의 일상을 더 잘 알 수 있다. 정확하진 않지만 그리스도보다 1천 년 전쯤에 페르시아에는 어떤 종교가 들어왔다. 종교는 흰두교처럼 백만 명의 신을 믿거나, 이집트처럼 반인반수의 신을 섬기지도 않았고, 그리스처럼 크건 작건 자연의 모든 존재에는 신이 있고, 그 신은 인간처럼 생겼고 인간의 약점도 지니고 있다는 식으로 믿지도 않았다. 그들이 믿은 것은 ‘조르아스터교’라는 것으로, 조로아스터는 이란 북부 혹은 아프가니스탄 북동부 어디에서 왔다고 하나 정확하진 않다. 조르아스터는 자기가 선지자라고, 신성한 에너지를 가진 자라고 주장한 적이 없으며, 더구나 신이나 신적 존재라고 한 적도 없다. 그는 그저 자신이 철학자이자 구도자라고 했다. 하지만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를 성인이라고 했다.
조르아스터는 우주는 어둠과 빛, 선과 악, 진실과 거짓, 삶과 죽음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설교했다. 우주 창조의 순간에 우주는 이처럼 대립하는 진영으로 갈라졌으며, 대립과 투쟁 속에서 경주는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우주는 창조되는 순간 직후에 모든 창조물은 두 가지 반대되는 진영으로 나뉘었다.’는 이원론을 주장한 것으로, 유일신 신앙에 조금 다가가기는 했으나, 유일신 신앙은 아니었다. 조르아스터교는 사제를 ‘마구스’라고 불렀는데, 그 복수형이 ‘마가(magi)’다. 그리스도교에 등장하는 마구간에서 태어난 아기 예수에게 몰약과 유향을 가져온 ‘동방박사’세 사람은 조르아스트교 사제들로 마법사 ‘메지션’도 마가에서 유래했다. 사람들은 조르아스터교 사제들에게는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었다.
페르시아가 제국으로 성장하자 다리우스왕은 군사전략 첫 번째 원칙을 무시했는데, 그건 바로 유럽에서 육상전은 절대 벌이지 말라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리스인들이 마라톤 평야에서 페르시아인들에게 잊지 못할 교훈을 가르친 꼴이 되었다. 그러나 교훈도 한 세대가 지나기 전에 잊어버리고 다리우스의 우둔한 아들 크세르크세스는 아버지의 복수를 하겠다고 나섰다가 실수를 반복해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크세르크세스가 패배 후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는 페르시아가 유럽에서 벌인 마지막 모험인 듯 보였다. 하지만 싸움은 끝이 아니었다. 150년 뒤에 알렉산드대왕에 의해 페르시아는 망했다. 그리고 11년 뒤 그가 바벨론에서 갑자기 죽은 이유는 독감이나 말라리아 아니면, 과음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이로 인해 그리스는 여러 왕국으로 분할되고 말았다.
그리스 왕들은 단합하지 못해 약해졌고, 기저에 있던 페르시아가 다시 일어났다. 그들은 ‘파르티아’인이라고 부른 가공할 전사였다. 파르티아는 로마제국과 전투를 벌여 로마가 동쪽으로 더 확산하는 것을 막았다. 파르티아의 기사들은 움직이는 성채와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한참 싸우다가 꽁지를 빼고 도망하는 척하다. 적이 쫓아오면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순식간에 적군을 향해 돌진해 전멸시켰다. 이 전술을 ‘파르티안 샷’이라고 부른다. 전투를 제외하면 파르티아인과 로마인 사이는 사회적 교류가 거의 없었다. 파르티아 문명은 서쪽으로 넘어가지 않았고, 지중해권은 ‘중간 세계’로 분리된 채로 남았다.
파르티아인들이 세력을 키우기 시작할 무렵에 중국은 진秦 왕조가 처음 통일했고, 로마가 ‘가르타고’를 무너뜨렸을 때, 파르티아는 바빌로니아를 점령했다. 카이사르가 갈리아족을 뿌리채 뽑았을 때는 파르티아 세력은 중간 세계에서 전성기를 맞았다. 기원전 53년 파르티아가 로마를 뭉개버리고, 34,000명의 포로를 잡았으며, 카이사르-폼페이우스와 함께 로마의 공동통치자였던 크라수스 장군을 죽였다. 30년 뒤 파르티아는 로마황제 안토니우스에게 뼈아픈 패배를 안기고 유프라테스강을 두 제국의 경계로 삼았다.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났을 때 파르티아는 여전히 동쪽으로 확장하고 있었고, 파르티아인은 그리스도 선교사가 동쪽으로 흘러들어 왔을 때에도 그냥 내버려뒀다. 그들은 종교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리스도력 3세기에 일어난 지방의 반란이 마지막 파르티아 세력을 몰아내고, 사산 왕조를 세웠는데, 이들은 페르시아 기틀을 복원했다. 사산인들은 기념비적인 조각상과 거대한 건축물, 인상적인 도시들을 건설했다. 그 속에서 조르아스트교가 재기했고, 국교가 되었다. 불교 승려들이 아프가니스탄 서부를 돌아다니며 불교를 가르쳤지만 조르아스터교 토양에서는 자라지 못했다.
불루모스크 - 이스탄불
한편, 로마제국은 점차 무너지고 있었는데, 29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제국을 넷으로 나눴다. 중앙정부가 통치하기에는 너무 거대하고 버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중에 보니 제국의 부는 모조리 동쪽에 있었고, 서쪽 부분은 무너지고 말았다. 게르만족이 들어왔고, 정부의 역할은 축소되고, 교역은 쇠퇴하고, 학교는 무너졌다. 이후 800년 동안 암흑의 시대가 계속되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플에 중심을 둔 동로마 제국은 계속 버텼다. 그러나 이는 제국이 아니라 ‘비잔티움’이라고 불린다. 그리스도의 분파 정교회는 비잔티움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서양 역사를 배운 사람들은 소포클라스, 베르길리우스, 타키투스, 페리클레스, 알렉산드,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등 역사적 인물은 말할 것도 없고,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비잔티움 역사를 전공한 학자가 아니라면 비잔티움의 철학자, 시인, 황제 이름 하나도 제대로 대지 못할 것이다. 왜? 비잔티움은 거의 1,000년 동안 지속되지만, 오랜 시간 동안 비잔티움에서 일어난 일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만큼 드물다.
고대 로마제국과 비교했을 때 비잔티움은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것은 맞다. 하지만, 영토 안에서는 강대국이었다. 이는 비잔티움과 경쟁할 상대가 없는 데다가 성벽으로 둘러싸인 콘스탄티노플이 아마 최고의 난공불락 도시였기 때문일 것이다. 6세기 중반 무렵에 비잔티움은 소아시아 대부분과 지금 동유럽이라 불리는 대부분 지역을 지배했다. 비잔티움은 그 지역의 또 다른 초강대국인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인접해 있었는데, 이 둘은 지중해 해안을 따라 좁고 긴 분쟁지역에 놓여 있었으며, 그곳에서 두 세계의 역사가 중첩되면서 오늘날까지도 고질적 분쟁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이슬람이라는 종교이 태어나기 전까지 ‘중간세계’의 정치적, 지역적 배치도다.
이슬람이 탄생하기 이전의 역사와 지형을 【중간세계】라고 부른 당시 지중해 일대의 역사를 대략 살펴보았다. 책에는 상세히 설명되어 있지만, 너무 상세히 기술되어 있는 데다 우리와 다른 역사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역시 어렵다. 이제부터는 【히즈라】라고 하는 이슬람의 탄생(622년)과 【갈리프】, 【분열】, 【우마미아, 아바스 시대】, 【튀르크의 등장】,【대혼란】등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이슬람교는 아랍인으로부터 시작된다. 아랍인도 유대인과 같은 뿌리인 셈족의 혈통으로 아브라함(더 올라가면 아담과 이브)의 두 번째 부인 ‘하길’이 낳은 아들 ‘이스마엘’로부터 유래된다. 아담과 이브, 카인과 아벨, 노아의 방주, 요셉, 모세, 파라오 등 이들은 아랍 전통에 속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일부의 아랍 부족은 유목민인 베두인족이라 사막에 살았지만, 나머지 아랍 부족은 마을에서 정착해 살았다. 예언자로서 이슬람을 창시한 무함마드는 홍해 연안의 거대한 국제도시 ‘메카’에서 나고 자랐다.
무함마드는 서기 570년 무렵(신라 진흥왕 시대)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가 뱃속에 있을 때 남겨 놓고 재산도 없이 죽었고, 어머니는 그가 고작 여섯 살 때 죽었다. 그러나 그는 버려지지 않고 친척이 거둬줬다. 할아버지와 살다가 삼촌인 ‘아부 탈리브’가 맡아 아들처럼 키웠다. 스물다섯 살 때 부유한 미망인 ‘카디자’의 눈에 들어 그녀의 캐러밴(상단)을 관리하며 사업을 지휘했다. 둘은 결혼했고, 25년 뒤 카디자가 죽을 때까지 동반자였다. 무함마드는 마흔 살이 되면서 인생의 의미를 고민하기 시작했고, 차고 넘치는 부유함 속에서도 자신을 의지해 근근히 살아가는 과부들과 먹을 것을 얻으려 다투는 고아들을 보았다.
무함마드는 정기적으로 명상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어느 날 천사 가브리엘이 동굴에서 묵상하는 그를 찾아왔다. 그는 어둠 속에서 무시무시한 존재를 느꼈고, 동굴 속에서 다른 존재와 함께 있다는 것을 인지하면서 어떤 목소리가 무함마드에게 명령했다. “읊조려라!”라고. 글을 모르던 그는 무엇을 읊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계속 들렸고, 그는 가슴에 모여드는 무언가를 느끼고 따라 읊기 시작했다.
“만물의 창조자 하나님의 이름으로 읊조려라.
한 방울의 피에서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읊조려라!
너의 하나님은 가장 자비로우시니.
그분은 글로 인간을 가르치셨다.
인간이 모르던 것을 가르치셨다.”
무함마드는 두려움에 떨면서 산에서 내려왔고, 자신에게 악령이 씌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을 가득 채운 어떤 존재를 느졌고, 집에 와서 아내 카디자에게 동굴에서 일어난 일을 이야기했다. 카디자는 그를 찾아온 존재는 천사로 신의 부름을 받았음을 확신시켰다. 그녀는 “당신을 믿습니다”고 말하면서 무함마드의 첫 번째 추종자 무슬림이 되었다. 무함마드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신의 계시를 전하고, 결국에는 메카 전역 사람들에게 그것을 전했다.
“오직 한 분의 신이 계시다. 그분의 뜻에 따르라. 그러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신의 뜻에 따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말했다. “환락에 빠지거나, 술에 취하거나, 잔인하게 굴거나, 폭압하지 말아라, 약한 자와 온순한 자들의 곤경에 관심을 기울이며, 가난한 자를 돕고, 정의를 위해 희생하고, 대의를 위해 봉사하라.”고 외쳤다.
이슬람의 신 ‘알라’의 ‘알’은 아랍어로 정관사이고 ‘라’는 신을 뜻하는 ‘일라’를 줄인 말이다. 그러므로 알라는 유일신을 뜻한다. 이는 이슬람의 핵심으로 무함마드는 이 신, 저 신을 비교하지 않았고 ‘그분이 가장 크고 강한 신이니 그 신을 섬겨라.’고도 말하지 않았다. ‘라’가 유일한 진짜 신이며, 나머지 신은 모두 가짜라고도 말하지 않았다. 무함마드는 신은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제우스처럼 생겼다거나 영생을 누린다고 하지도 않았다. 어떠한 특정 형상이나 속성, 유한한 개념이나 한계와도 연관 지을 수 없는 만물을 모두 아우르는 보편적인 신이 있다고만 했다.
하지만 유일신 개념이 대세가 된다면 알라 아닌 다른 신을 섬기는 열성 신자들은 관광도시인 메카에 오지 않을 것이고, 결국 자신들이 망할 것을 두려워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당시 메카는 주점, 도박, 성매매 등의 유흥사업으로 소득을 올리고 있던 곳으로, 권력자들은 유흥사업에 반대하는 사내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무함마드의 삼촌 아부 탈리브는 12년 동안 비판에 맞서 무함마드를 변호하고, 아내 카디자의 후원도 힘이 되었으나, 기존 질서에 반대한 무함마드를 가까운 친척들 마저도 그의 암살을 기도하였는데, 그 일은 622년 9월 어느 날 밤에 거행될 예정이었다.
정보를 미리 안 무함마드는 친구이자 추종자인 ‘아부 바크르’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데리고 그날 밤 메카를 떠나 사막으로 갔다. 암살자들은 수색대를 보냈지만 찾지 못했다. 무함마드 일행은 ‘야트리브’로 도망가 그곳 원주민들의 도움을 받았다. 이후 야트리브는 도시라는 뜻인 ‘메디나(예언자의 도시)’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무슬림들이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이 사건을 ‘히즈라’라고 한다. 12년 뒤 무슬림들이 달력을 만들 때 이 히즈라를 이슬람의 기원으로 삼았다.(이하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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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