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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장의 동부에 위치하고 있는 신암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선사시대 유물인 즐문토기가 발견된 곳으로 옛날부터 기후가 따뜻하고 또 바다와 접하여 먹을 것이 많았던 지역으로 추정된다. 이 때문에 우리 고장에서는 가장 먼저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고 살았던 지역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유물은 서울 국립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신암리의 위치를 보면 북으로는 용리가 있고 동남으로 바다를 이루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명산리가 있다. 마을은 해안으로 달리는 31호 국도를 기준으로 볼 때 대부분 해안가로 자리를 잡고 있다. 이 때문에 마을 뒤로는 해송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앞으로는 바다가 확 트여 있다.
면소재지가 있는 이 지역은 각종 관공서와 금융기관이 들어서 있어 행정의 중심지인 동시에 학교가 많아 교육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현재 신암리에 위치하고 있는 관공서를 보면 서생우체국, 울산수협 서생지소, 서생농협, 서생파출소가 있고 또 서생초등학교와 중학교 등이 있다.
또 이 지역은 일제시대 어업을 크게 일으켰던 수곡상사가 광복이 될 때까지 있었기 때문에 상업 역시 활발했던 지역이다. 당시 수곡상사는 신암리에서 정치망 등 수산업을 크게 했는데 이렇게 해서 생산된 수산물을 부산의 여러 시장에 가져다 팔았다.
신암리는 지금부터 약 천년전에 윤씨(尹氏)가 처음으로 마을을 찾아 들어왔고 그 후 안씨(安氏), 이씨(李氏)가 차례로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였다. 이후 세 성씨의 대표들이 마을이름을 짓기 위하여 의논하고 있는데 그들 앞에 구름 같이 희고 큰 바위가 보여 그 바위 모양을 따서 구름 '운(雲)'자와 바위 '암(岩)'자를 따서 운암동(雲岩洞)이라 정하였다고 한다.
그 후 각 성씨들이 계속 모여들어 인구가 늘어나고 마을이 커지자 한 개의 마을을 4개 지역으로 분리하여 부르게 되었는데 이때 생겨난 4개의 마을이 훔턱각단, 솔진개, 새마을, 비학머리 등이다.
훔턱각단은 지형이 움푹 꺼진 곳이라 하여, 솔진개(현 송리)는 소나무 숲이 많이 우거져 있고 앞으로는 갯마을이라 해서, 새마을은 마을이 새로 생겼다 하여 그리고 비학은 인근의 강월 무학동에서 학이 떼를 지어 날아와 살았다 하여 각각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신암리에는 신암, 신리, 비학의 3개 행정마을이 있다. 그러나 이들 마을 중 신리의 일부와 비학 마을 전체가 원전 추가건설 고시지구에 들어가는 바람에 요즘 들어 각종 민원이 그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신암리는 당초 울산군 당시 외남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운곡리, 신생리, 효열리 일부를 병합하여 신암리로 서생면에 편입되었다. 그런데 1962년 면 전체가 동래군에 편입되어 이 지역도 동래군에 편입이 되었다. 이듬해인 1963년 다시 서생면 전체가 양산군에 편입되어 양산군에 속했다가 1983년 다시 울주군 소속이 되었다.
신암마을
신암리에서 북쪽에 위치하며 북으로는 나사리와 경계를 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 지역이 군령으로 불리었던 것을 보면 군사적으로 요충지대의 역할을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이 지역은 한때 구름같이 희고 큰 바위가 많다고 해 운암동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를 보여주듯 이 마을에는 과거 서생을 찾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한번씩 둘러보았던 신선암이 자리잡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선사시대의 유물인 즐문토기가 발견된 곳도 이 마을이다. 즐문토기가 발견된 곳은 면사무소의 남북 지역으로 남쪽에는 현재 수협이 있는 자리에서 발견되었고 북에서는 서생초등학교 인근에서 발견되었다.
또 이 마을에서 용리로 가다 보면 동삿재라는 산이 있는데 이 산 부근에는 광복 이후까지 고인돌 30기가 있었으나 마을 사람들이 과수원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없어지고 말았다.
신암리는 광복 이후 마을의 규모가 비대해져 신암회관을 중심으로 서남쪽은 중리로, 그리고 동북쪽을 송리로 나누려고 했으나 주민들의 반대로 실패했다. 그러나 요즘도 이들 두 지역은 지역정서가 달라 친목단체 등이 따로 운영이 되고 있는 형편이다.
마을 사람들은 농업과 어업을 같이 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비교적 여유가 있다. 마을 앞 해변은 주로 바위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때문에 해수욕은 할 수 없지만 사철 낚시꾼들이 모여들어 낚시를 즐기는데 흑돔과 노래미 등이 주로 잡힌다.
이 때문에 내륙에 위치한 마을에 비해 어업이 활발한 이 마을은 일찍이 어촌계가 조직돼 있었다.
신리마을
신암과 비학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31호 국도가 마을 중앙을 지나가고 있는 이 마을은 원전 개발로 마을의 절반이 원전 지구로 고시가 되어 있는 형편이다.
1970년대 초 고리원자력 발전소가 세워지면서 고리에 살았던 철거민 27호가 이 지역으로 이주를 했다.
이후 이 지역은 수산업이 발달하여 신리항이 2종항이 되어 태풍이 오는 날에는 이 일대에 있는 어선들이 모두 신리항으로 몰려들어 한때 이 지역에는 수협이 들어서기도 했다.
또 어업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과수 농사를 많이 해 이 지역은 우리 고장에서도 배의 집산지로 유명하다. 이 때문에 가을이 되면 골매 마을을 중심으로 도로가에 배를 내어놓고 파는 농민들의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이 마을에 있는 골매는 1970년대 토탄이 많이 생산되어 이 지역 주민들의 소득원이 되기도 했다. 이 지역은 인근 지역보다 지형이 낮아 파도가 높을 때 바닷물이 들어오면 빠지지 않는다. 따라서 파도를 따라 이곳으로 들어온 해조류가 오랫동안 썩으면 토탄이 되는데 토탄은 비료의 주원료가 되어 비싼 값으로 팔리었다. 한때 토탄을 파낸 자리가 웅덩이가 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메워져 있다.
신리마을의 지명은 운암(雲岩)마을의 이름을 따서 새운암으로 불려오다가 행정지침에 따라 마을명칭을 리(里)로 바꾸는 과정에서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신리(新里)로 바꾸게 되었다. 이 마을에 처음으로 정착한 사람은 경주 김씨로 알려지고 있으나 시기는 추정할 수 없다.
일제시대에는 이 마을에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으며 당시 건립되었던 서생어업조합 사무실과 사택건물 등이 아직 남아 있다. 일제시대에는 일본의 수곡수산(守谷水産)이란 회사가 부산과 방어진간의 물류를 운반했는데 이 화물선이 신리항에서 출입항 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한국의 제일무역회사가 출범, 어부들이 잡아온 붕장어(아나고)를 일본으로 수출하여 동해산 장어수출 기지항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이후 1960년대에는 밀복잡이 주항으로서도 명성이 높았다.
현재 원자력 추가 부지로 선정된 비학마을이 보상이 끝나면 마을 전체가 이주하게 된다. 그리고 신리마을 일부 골매(骨埋)와 본 마을 일부가 추가고시지역으로 지정되었고 비학마을 골매마을 주민들이 다 이주하게 되면 신리마을은 울주군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하게 된다.
비학마을
울주군 최남단으로 부산의 기장군과 경계를 하고 있다. 또 마을 서쪽은 효암천이 기장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현재 이 마을에는 농어민 120세대에 주민 350여 명이 살고 있는데 마을 전체로 보면 어민이 많다.
이 마을은 3백여 년 전 노씨들이 집단으로 들어오면서 형성되었다.
옛날에는 효암과 비학이 경계를 이루는 효암천에 사람들이 건너다니는 큰 돌다리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동안 각종 제방공사가 이루어지면서 이 다리가 사라졌다고 한다.
지형적으로 보면 이 마을은 소백산 줄기의 대운산 자락이 되어 소위 명당이라고 불린다. 이 때문에 옛날에는 전국의 유명한 풍수학자들이 많이 다녀갔다고 한다. 현재 원자력 연수원이 자리를 잡고 있는 마을이 '한림 명산'으로 불리는데 이것은 과거 이곳에서 공부를 하던 선비들이 많았음을 알려준다.
마을 이름이 학이 난다는 비학이 된 것 역시 이곳 지형과 무관치 않다. 즉 이 마을의 가장 끝자락에 있는 동묘산이 마치 학의 입 모습을 닮았다는 데서 마을 이름이 생겨났다고 한다.
실제로 이곳에는 학이 많이 서식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학의 무리들이 동묘산 소나무 숲에 둥우리를 만들고 무학들 일대에 먹이를 찾아 오르내리는 모습을 마을 사람들은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또 이곳에서 가까운 온곡 삼거리 마을을 학이 춤을 춘다는 뜻의 무학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비학 마을은 1960년대 초반 모범 방위촌으로 선정되면서 다른 지역에 비해 발전의 속도가 빨라졌다. 당시 비학마을이 모범 방위촌이 된 것은 이 마을에 나타난 간첩을 주민들이 신고해 체포를 했기 때문이다.
당시 간첩이 나타난 것을 신고한 사람은 어촌계장이었던 이건용이었다. 이때부터 비학마을은 경남의 모범 방위촌이 되었고 이계순 당시 경남지사가 이를 축하하기 위해 이 마을을 다녀가기도 했다.
이때 이 지사는 비학 마을의 숙원 사업인 방파제를 만들어 주었는데 이 때문에 비학 마을 사람들은 안전한 조업을 할 수 있었고 따라서 어민들의 소득이 크게 증가되었다. 이 방파제는 지금도 서생면에서는 가장 잘 만들어진 방파제로 손꼽히고 있다.
비학 마을은 또 다른 마을에 비해 어촌계 공동어장이 넓기 때문에 해녀들의 활동이 활발해 해녀들 역시 소득이 높았다. 당시 이 마을에는 20∼30여명의 해녀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큰 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
1992년에는 비학 마을이 울산의 '범죄 없는 마을'로 선정되어 또 한번 마을이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1980년대 이후 농어촌이 살기가 좋아지면서 농어촌에서도 각종 범죄가 자주 발생했다. 그러나 비학 마을은 주민들이 일치 단결해 범죄 예방에 힘쓴 결과 범죄없는 마을이 되었다.
이 때문에 비학 마을은 울산시로부터 범죄 없는 마을로 표창을 받고 또 포상금을 받았다. 당시 비학 마을이 범죄가 없는 마을이라는 기념비가 마을 입구에 세워졌는데 그 비석이 지금도 서있다.
경제적으로 여유를 얻은 비학 마을 주민들은 최근 들어 뿌리 찾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비학 마을은 지금부터 80여년전인 1922년부터 동적보를 기록해 오고 있다. 동적보에는 이장과 반장의 이름과 취임 연도가 정확히 기록되어 있다. 아울러 마을에서 벌어지고 있는 각종 사업도 기록되어 있어 동적보가 완성이 되면 외부 사람들이 이 책만 보아도 비학 마을의 발전상을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렇게 어려움을 이겨내고 마을 사람들이 고생해 이룩해 놓은 모범 마을이 요즘 들어 큰 시련을 맞고 있다.
그것은 한국 전력이 추진하고 있는 원전추가 건설 때문이다. 비학 마을에 원자력 교육원이 처음 들어선 것은 1978년이다. 당시만 해도 마을 사람들은 원전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잘 몰랐기 때문에 원전이 들어서는 것을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원전이 들어서면서 큰 불편을 겪어야 했다. 우선 대부분의 땅이 개발제한 구역으로 묶이는 바람에 개발을 할 수 없어 재래식 농어촌 가옥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또 논과 밭 등 각종 부동산이 팔리지 않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원자력 발전소가 이곳에 추가로 원전을 건설하겠다면서 주위 전답을 사들이고 있다.
현재 주민들의 표정을 보면 자신들의 과수원과 논밭이 원전 지정지역이 되어 제대로 보상을 받은 사람들은 만족을 하고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대부분 불만에 차 있다. 더욱 난감한 것은 현재 한전이 추진하고 있는 원전 건설 계획을 보면 지난 수백년동안 참혹한 어려움을 겪으면서 개발해 놓은 비학 마을이 없어질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곳 주민들은 전력 생산도 좋고 개발도 좋지만 부디 조상 대대로 살아온 이 땅이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지도상에서 없어지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회야강의 가장 하류 지역으로 서쪽은 서생, 남쪽은 대송, 그리고 동쪽은 온산, 북쪽은 온양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곳에 있는 진하 해수욕장은 울산에서 가장 큰 해수욕장으로 여름이면 울산은 물론이고 부산에서 많은 해수욕객들이 모인다.
진하는 이웃에 있는 간절곶과 함께 전국 명승지로 소문이 나 있다. 이 때문에 진하는 면적은 좁지만 면적에 비해 인구가 많은 편이고 또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을 상대로 하는 숙박업소가 많다. 아울러 여름철 해수욕객들을 상대로 하는 슈퍼마켓 등이 발달해 상가도 많은 편이다.
이 마을은 또 마을 곳곳에 해송이 군집을 이루고 있어 경치 또한 좋은 곳인데 특히 마을 앞바다에 있는 명선도와 이덕도가 아름답다. 이 마을의 경치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하는 것은 진하 8경 중 '선도귀범(仙島歸帆)'과 '대암초가(臺岩樵歌)' 등 2개가 이 마을에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선도귀범은 명선도 부근으로 고기잡이 배가 들어오는 것을 말하고 대암초가는 대바위에서 나무하는 초동들이 불렀던 노래소리를 말한다.
이 마을은 특히 1970년대 진하 해수욕장이 개장되면서부터 급격히 발달되었는데 마을 중심부에 있는 성동초등학교는 역사가 오래되고 운동장에 노송이 많이 심어져 있어 교내 전경 역시 좋기로 소문이 나 있다.
이 마을은 진하 해수욕장이 개장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멸치 어장으로 유명했고 또 진하 해변을 중심으로 갯방풍과 해당화가 많이 자랐다고 하는데 지금은 찾기가 힘들다. 이중 특히 갯방풍은 중풍의 예방에 좋다는 소문이 나면서 다른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 모두 꺾어가는 바람에 지금은 씨종자조차 구하기 힘들다.
대신 요즘은 자생은 없지만 이 풀을 재배하는 집이 이곳에 2∼3가구가 있다.
진하라는 이름은 서생포 동첨절제사가 있는 진지의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풀이되고 있다. 실제로 임란 후 조정에서는 현 서생포 왜성에 우리군을 주둔시켰다. 임란 이전의 마을 역사는 자료가 없어 고증할 수 없고 주민의 선대를 추정하여 보면 김해 허씨(許氏)등이 이미 오래 전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어 200여년 전에 이 마을이 이미 현재의 마을 모습과 비슷하게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진하는 현재는 모두 육지이지만 임진왜란 당시 일부는 육지로, 일부는 강(하구)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서생리 도독(都督) 구미가 선착장이라는 것에서 유추할 수 있다.
또 1970년 후반 지금의 금호장 횟집 주변에서 주민들이 술잔, 옹기 등 토기를 발견한 적이 있어 이곳에 인류가 살았던 흔적이 예상외로 오래되었을 것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진하마을
진하리 역시 진하 마을 하나로 이루어져 있다. 마을 인근으로 국도 31호가 지나가고 있어 교통이 편리한 이 마을은 임진왜란 때만 해도 바다였다고 하는데 그동안 해안의 융기 현상으로 지면이 높아졌고 이후 마을이 생겨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를 보여주듯 요즘도 이 마을의 흙을 파 보면 흙속에서 모래가 많이 나온다. 실제로 임진왜란 때는 이 마을 뒤편에 있는 서생왜성까지 배가 접안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 마을 중앙에는 만석정이라는 식당이 있는데 이 건물은 지금부터 60여년전 당대의 부자였던 이종수가 세운 한옥으로 지금도 우리 건축의 옛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 건물에서는 각종 문화행사가 많이 열리는데 최근에는 음식물 한일교류전도 이 집에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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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마을 역사를 잘 알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