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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1호] 2010년 06월 25일 금요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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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성상께서 신을 늙었다 하여 보내시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신이 성상의 은혜를 지나치게 입었으므로 죽고 삶은 염려하지 않습니다. 이제 종사(從事)할 사람을 가려서 소신을 보내도록 명하시면 피로된 사람들을 죄다 찾아서 돌아오겠습니다.(조선왕조실록에서)”
◇ 2010년 외교 인물, “이 예”
지난 6월 21일 외교통상부는 2010년 「우리 외교를 빛낸 인물」로 조선 세종시대 이예(李藝, 1373년 ~ 1445년)를 선정하였습니다. 이예는 근대 이전 우리 외교사에 있어 대일외교를 주도한 전문 외교관으로서 국민을 사랑하고 나라에 헌신하였던 인물 입니다.
◇ 이예의 사명 - 안정과 평화, “예(O.K.)”
이예의 가장 두드러진 공적 중의 하나는 조선 건국 초기, 왜구의 침입으로 불안정하였던 일본과의 관계를 안정시키는 데 공헌한 점입니다. 조선왕록실록에 따르면, 태조~세종시대 60년간 184회의 왜구의 침입이 있었습니다. 이중 조선 초기 18년간에는 총 127회(연평균 7회)의 침입이 있었으나 그 이후로는 연평균 1회 정도에 그치고 있습니다. 그마저도 계해조약이 체결된 이듬해인 1444년 이후로는 왜구의 침입이 한 차례도 없었습니다. 이 시기는 고려말(공민왕 22년)에 출생하여 1445년(세종 27년)에 별세한 이예의 활동시기와 정확히 겹칩니다.
왜구의 침입을 잠재울 수 있었던 것은 대일 강경책과 함께 이루어진 적극적이고 긴밀한 대일 외교의 결과였습니다. 대일 외교의 핵심에는 이예가 있었습니다. 43년간 외교관으로서 40차례가 넘게 일본을 왕래하면서, 때로는 원칙과 강경책을 앞세우고 때로는 회유책을 동원하여 대일 외교 일선에서 맹활약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예의 노력은 1443년(세종 25년)에 조일 통교(通交)체계의 근간을 이루는 계해약조(癸亥約條)를 체결함으로써 결실을 맺게 됩니다.
계해약조는 대마도의 세견선을 매년 50선으로 한정하고, 조선으로의 도항(渡航)선은 문인(文引, 도항 허가증)을 의무적으로 받도록 명시함으로써 조선초 대일관계 안정화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 이예는 왜인의 체류 문제, 입국 허용 조건 등을 지속적으로 협상해 나감으로써 대마도 중심의 대일 통교체제 수립을 주도하였습니다. 이로써 그는 울산을 비롯한 남해안 일대와 유구, 대마도 등지에서의 평화와 안정이라는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습니다.
◇ 국민과 나라에 대한 사랑에 있어선, 언제나 “예(YES)”
또한, 이예는 외교관으로 활약한 43년 동안 지략과 협상을 통해 667명의 조선인을 일본으로부터 귀환시켰습니다. 8세에 왜구에 의해 어머니를 납치당한 이후 평생 동안 어머니를 찾아다닌 그는 고려 말부터 횡행했던 왜구로 인한 국민들의 고통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가족과 멀리 떨어져 낯선 섬나라에서 고생하는 국민들의 일이 남의 일 같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예는 어머니를 다시 찾는 꿈을 꾸면서 죽는 날까지 국민을 구하는 일에 열과 성을 다했습니다.
그는 원래 울산 관아의 중인(中人) 계급 아전 출신입니다. 1396년 왜구에 붙잡혀간 자신의 군수를 구하기 위해 몰래 대마도까지 따라갔습니다. 이예는 결국 군수와 함께 조선으로 돌아왔고, 조정은 그의 충성심을 가상히 여겨 신분을 올려 주고 벼슬을 하사하였습니다. 25살의 젊은 나이에 군수를 구하겠다는 신념으로 목숨을 걸고 왜구의 배에 올라탄 일이 외교관으로서 첫 발을 내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예는 이후로 40여 차례가 넘게 일본에 파견되었습니다. 71세의 노년에도 대마도에 붙잡혀간 조선인 귀환 협상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는 건강을 걱정하는 세종에게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이 섬(대마도)에 출입한 신(臣)이 가는데 누가 감히 사실을 숨기겠습니까” 라며 대마도행을 자청할 만큼 깊은 충성심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이예는 나라에 대한 충(忠)과 어머니에 대한 효(孝), 그리고 국민에 대한 사랑(愛)의 마음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예는 국민을 보호하고 국익을 도모하는 일이라면 아무리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고 언제나 ‘예’라고 말했던 진정한 외교관이었습니다.
◇ 전문지식과 탁월한 언어 능력과 협상력, 그것이 바로 “예(藝)”
하지만 심성이 바르다고 ‘전문’ 외교관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외교관은 전문지식과 유창한 외국어 능력 및 협상력을 겸비해야 합니다. 이 세 가지를 아우르는 것이 바로 지략을 의미하는, ‘예(藝)’입니다. 외교란 국제 관계를 지휘하는 ‘지략’이라 할 수 있는데, 전투를 벌이지 않고도 지략을 통해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예가 거친 풍랑에도 굴하지 않고 1401년에 50 명, 이후 1410년까지 매년 일본을 왕래하며 500여 명, 1416년 40여 명 등 15차례에 걸쳐 667명의 조선인을 귀환시킨 사례는 대일외교에 대한 경험과 전문지식에 기반한 그의 지략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예는 쉽게 말해 조선의 ‘일본통’이었습니다. 그는 오늘날로 치면 아프리카나 이라크 같이 험지라 할 수 있는 당시로서는 동아시아 외교의 변방이었던 유구(오끼나와)와 일기도(이끼) 등에도 기꺼이 가서 국익을 위한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또한, 일본의 자전(自轉) 물레방아와 사탕수수 도입을 건의하고 우리의 대장경 및 불경 보급을 통한 불교문화와 인쇄문화 일본 전파를 위해 노력하는 등 문화외교에도 앞장섰습니다.
조선초 일본에 대해 이예만큼 잘 아는 인물은 없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일기도와 대마도의 정세(情勢)와 병세(兵勢), 일본 선박이나 문물의 장점, 문인제도, 대일 통교 정책까지, 이예가 얼마나 일본에 대해 통달한 사람인지 상세히 알 수 있습니다. 1426년 세종이 54세의 이예를 일본에 보내며 “(일본을) 모르는 사람은 보낼 수 없어 그대를 보내는 것이니 귀찮다 생각지 말라” 며 손수 갓과 신을 하사했다는 내용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을 만큼 그는 독보적 대일 외교통이었습니다.
◇ 李藝, 외교와 외교관에 대한 시사점
21세기 세계화 시대에 외교가 무엇이고 외교관은 어떠한 자질을 갖추어야 하는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21세기 선진 대한민국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에게 이예는 이에 대한 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국민을 보호하고 국익을 도모하는 일이라면 언제나 ‘예’라고 말하면서 맡은 직분에 ‘예(藝)’로써 최선을 다함으로써 대일관계 안정화에 공헌한 이예 는 오늘날 외교의 정도와 외교관의 자질에 대해 고민하는 우리들에게 큰 귀감이 됩니다.
애국심과 국민을 위한 헌신으로 공직자의 모범이자 국민들에게 감동을 안겨주는 그를 2010년 외교 인물로 선정한 것을 계기로, 우리 외교와 외교관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더욱 커지기를 희망합니다.
참고문헌 이명훈 엮음, 2005 『李藝의 사명, “나는 조선의 통신사로소이다”』 한일관계사학화 편, 2006 『통신사 李藝와 한일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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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덕분에 새로운 정보를 접했네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