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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만두 밸리 (KATHMANDU VALLEY)
카트만두 밸리에는 수많은 마을과 사원과 탑이 있고 전체가 산에 둘러싸여 있다. 사람이 바글거리고 교통이 복잡한 도시인 카트만두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조용한 마을과 무성한 수풀, 계단식 논이 있는 산간 지방이 나온다. 도시를 벗어난 곳도 요 몇 년 사이 확실히 변했다. 특히 도로 주변이 그러하다.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전통적 생활방식은 여전하며 사원들은 그들 삶의 중심이 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밸리를 따라서 당일치기 트레킹이나 하이킹도 할 수 있다.
불교의 옛 탑인 스와얌부나트는 네팔 중심부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극적인 장소로 네팔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곳이며 끊임없이 예불을 드리는 흥미로운 곳이다. 언덕 꼭대기에 올라서면 밸리 전체가 한 눈에 보인다. 만일 네팔에 방금 도착했다면 방향을 짐작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가장 중요한 힌두사원은 파슈파티나트로 카트만두 동쪽 공항 근처에 있다. 그곳은 전 인도대륙 전체로부터 순례자들이 모이는 곳이다. 이곳을 방문한 사람은 계속해서 근처에 있는 또 다른 불교 탑이 있는 보드나트도 함께 방문할 수 있다. 보드나트는 또 티벳공동체의 중심이다.
야크존(trek.pe.kr), buddhaeye의 2003 룸비니 순례中 부록
닭이 우는 소리에 잠이 깼습니다. 숙소는 세계 어느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단조롭고 깨끗한 호텔이었지요. 현지시각 밤 10시에 잠이 들었는데 깨어보니 4시 40분이었습니다.
함께 주무시는 무진행보살님의 짐은 단촐하게 배낭하나와 작은 카고백 하나입니다. 카고백이 뭔지도 저는 몰랐는데 ‘남대문 옷가방’이라고 해서 진짜 그런 줄 알고 남대문에 간 김에 도매상들이 쓰는 옷가방을 하나 샀더니 트레킹용의 빳빳한 카고백과는 영 달랐습니다. 어쨌든 형식은 가로가 긴 천가방이 카고백입니다. 여섯 명의 우리 일행은 셋으로 나누어져서 두 분의 스님과 두 분 남매분이 각각 한 방을 쓰시고 저와 무진행보살님이 한 방을 쓰게 되었습니다.
어디서나 그렇겠지만, 여기서도 인드라의 그물망 같은 인연들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야크존(trek.pe.kr)을 운영하시는 대원스님의 인연으로 모두 모였지만, 저와 대원스님의 인연은 이 트레킹에 저를 소개해 주신 스님 덕분에 이루어졌고, 두 분 스님은 이번 트레킹 이전에도 제가 1991년 ‘송광사 수련대회’에 참가하도록 도와주셨었습니다.
숫자에 약한 저의 기억이지만 ‘91년 송광사 수련 기념’이라고 글자 박힌 유리문진을 아직도 쓰고 있으니 대원스님이 '그때가 언제지?' 물었을 때 금세 '91년'이라고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수련생 옷을 입고 송광사 사자루에서 얼떨떨하게 있는 저를 원주스님이 찾아오셔서 이름을 묻고 가셨지요. 그분이 이번 트레킹의 대장이신 대원스님이고, 이 트레킹에 함께 오신 보명화 보살님은 그 때 후원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계셨다고 했습니다. 우리 일행이 첫만남의 인사를 하며 퍼즐을 맞추듯 기억을 더듬을 때, 송광사 수련대회의 마지막 날 찰밥이 생각났습니다. 그 맛을 아직 잊지 못하는데 그렇게 맛있는 밥을 지어주신 자원봉사자 분들 중 한 분을 이 여행에서 다시 만나게 되니 각별히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그렇게 연결되는 인연을 인연이라 한다면 스님들과의 인연도 그렇습니다. 송광사 원주로 소임 사시던 대원스님이 5년간이나 준비한 트레킹을 본격적으로 계획하신 칠불사 선원에서, 저를 아는 어떤 스님을 만났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인연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정말 우울하고 추웠던 저의 첫 번째 인도여행을 일순 백퍼센트 행복한 여행으로 바꾸어주셨던 그 스님과 종세라는 조각가, 저를 합친 세 사람은 멜라에서 일행과 떨어지는 바람에 지뗀이라는 화가의 집에서 노숙하며 만났지요. 그 밤이 너무 아름다워서 각자의 일정을 다시 조정하여 엿새 동안 촛불밖에 켜지지 않는 벌판의 오두막에서 생활을 했었습니다. 노래하고 이야기 하고 음식을 만들고 산책을 하고 지는 해를 바라보던 100퍼센트 행복의 경험, 동시에 그것은 여행일 뿐, 일상이 늘 그럴 수는 없다는 사실에 안타깝기도 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캘커타로 나와 도버레인 음악회를 나흘 밤 동안 함께 구경했었습니다.
'도버레인'은 50년이나 지속되어온 유서깊은 음악회로 춤과 음악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하는 인도의 예술가들이 각각 두 세시간씩 개인연주를 하는 것이 5일간 밤새 진행되는 것입니다. 체육관 같은 거대한 연주홀이 천막으로 덮이고, 청중은 할아버지에서부터 작은 꼬마까지입니다. 졸기도 하고 밖에 나가 커피를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서성이기도 하면서 그 음악을 들었습니다. 때로 빗소리가 음악에도 함께 섞이고, 그 비를 보고 등 뒤 천막안에서 울리는 음악소리를 들으며 처음만난 낯선 여행자의 긴긴 떠돌이 여행담도 듣다가 왈칵 어떤 감정들이 생기기도 하는, 이것이야 말로 즉흥음악이고, 음악의 본래 모습이 아닐까 했던 태어나서 단 한 번 겪은 특별하고 신비하고 아름다운 음악회였습니다.
스님과 조각가는 캘커타 하우라 역까지 배웅나와 뭄바이행 기차를 타는 저를 걱정해주었습니다. 그 때 2박3일간의 기차를 타고 달려간 뭄바이에는 이번 트레킹에 저를 소개한 스님이 성지순례차 오시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인연이라고 한다면 한 뿌리를 캐면 딸려나오는 고구마순처럼 길고 길고 긴 인연들입니다.
가장 마지막 순간에 확인한 인연은 큰스님의 11월 ‘서장 강의’에서 처음 뵙는 보살님이 ‘아, 그 트레킹의 젊은 보살’이 바로 저인가 물으셨을 때였습니다. 트레킹 일행께 워낙 도움만 잔뜩 받고 돌아온 저는 일순 걱정이 구름처럼 몰려왔습니다.
누군가 제게 도움을 주어도 유쾌할만하게,미숙해도 귀여워 보일만한 젊은 나이가 지난 지금, 이제 남을 돌봐야할 나이에 여전히 도움이 필요한 사람으로 남아있다는 것은 괴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날은 서장 강의를 듣는 날이니, 금세 걱정구름을 훑어버렸습니다. 이럴 때 사용하라고 ‘나는 없다’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나서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에 곰곰이 생각해보면 인연이 두터워짐에 있어 호들갑을 떨거나 장황하게 설명하거나 무거워질까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원래 인연이란 그렇게 자꾸 이어지게 된 것일테니까요.
사실 불교에서는 인연이라고 하고, 그냥 보통 사람은 ‘관계’라고 하는 그런 것이 제 삶을 짓누르는 문제 중에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저의 해결방식은 회피하거나 무조건 잘라버리기였습니다. 아마 누군가에 의해서 잘려진 경우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물이 한 물이듯이 우리가 하나임을 믿는다면! ‘인연’에 대하는 저의 ‘태도’가 이제는 이렇게 바뀔 것 같습니다.‘어쨌든 받아들일 것, 감사할 것, 그리고 가벼울 것!’
가뿐하게 의자 하나만을 차지한 무진행보살님의 짐과는 달리 바퀴달린 여행가방과 배낭에서 흘러나온 저의 짐들이 탁자와 의자들 위에 넘치듯 풀어져 있습니다. 카고백을 사서 정리를 할 때까지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저렇게 많은 짐들을 매일 풀었다 쌌다 해야한다는 것은 저에게 굉장히 걱정거리였습니다. 그런 걸 못하면 함께 움직여야 하는 트레킹을 할 최소요건에서 탈락입니다. 떠나야 하는데 짐을 챙기지 못하면 떠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트레킹을 하면서 시간 안에 짐을 챙기지 못해 머릿속이 아찔해지는 경험을 저는 몇 차례나 하였습니다.
혼자서 느슨하게 살던 저는 어쩔 수 없이 그럴 때마다 짐싸기와 인생을 생각하곤 했습니다. 짐이 간단하게 잘 챙겨져 있어야 언제든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고, 웃으며 인사할 여유도 생깁니다. 그런 버릇이 생각지도 않게 집에 돌아와 지금까지 정리를 아주 잘하는 좋은 습관을 남겨주었습니다.
어쨌든 트레킹 퍼미션을 받아야 하고, 여러 가지 준비를 해야하는 그 아침은 짐을 싸고 챙겨야 할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날이 밝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달걀과 토스트와 잼과 버터, 소세지, 버터구이 감자, 쥬스와 커피와 차, 과일, 호텔 조식의 기본은 갖췄으나 매우 간단해서 부담이 없는 네팔 호텔의 아침상을 받았습니다.
소세지 튀김을 먹고 싶었는데 “보일드 에그”했더니 뜨거운 달걀 두 개만 주고 소세지와 감자는 생략입니다. 그래서 트레킹을 다 마치고 호텔에 돌아와 조식을 먹게 되었을 때는 잊어먹지도 않고 있다가 “프라이드 에그”라고 말했습니다. 소세지는 조금 질기고 그다지 맛있지 않았습니다.
아침을 먹고 산책삼아 밖에 나오니 가게 문들이 닫혀있고 릭샤꾼들은 벌써 나와 손님을 기다립니다. 인도여행 때는 릭샤가 요금이 싸고, 그 밖의 탈것이 없어서 유용하게 굉장히 많이 탔었는데, 이번 네팔 여행에서는 길을 몰라서 한 번, 택시 대신 기념삼아 한 번 두 번을 탔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생활을 도우는 것’이라고 자주 대원스님이 말씀하셨지요.
짧은 거리를 자전거 릭샤를 타고 가는 건 비인간적이다 라는 생각보다는 지난 여행의 기억을 더듬는 즐거운 느낌을 갖게 했습니다.
릭샤를 몰지 않아도 될 만큼, 그들의 생활이 풍족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다음 여행 기회가 있을 때 아직 릭샤를 모는 어떤 사람이 있다면 또 택시 대신 릭샤를 타고 싶습니다.
하룻동안 우리는 스와얌부나트와 네팔국립박물관과 보드나트를 가려고 계획하였습니다.
삼툭라마가 봉고차를 가지고 왔습니다.
‘원숭이 사원’이라고 한다고 해서 어려운 이름인 스와얌부나트를 까먹고 원숭이 사원이라고만 기억하고 있는 이 사원에 대한 어떤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계단을 오래 걸었는데 닳고 닳아서 아주 부드러운 계단이었고 원숭이들이 많았고 그저 구경하듯 다녔던 것 밖에는 잘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아마도 이 사원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사원뿐만이 아니라 네팔에 대해서도 저는 그저 룸비니를 가기 위해 들렀던 나라일 뿐 별다른 정보가 없었습니다.
이번에 자료들을 찾아보니 네팔은 왕국입니다.
기원전 8세기경에 유목민들이 이주하여 정착했다는 기록이 가장 오랜 기록이라고 합니다. 7세기 초 티벳의 속국인 적도 있었으며 9세기에서 15세기에 걸쳐 인도의 라지푸트족이 이주를 해 와서 원래 있던 네와르족과 혼혈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이런 자료를 읽으면서 어쩐지 ‘인도사람과 네팔사람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인도여자는 예쁜데 네팔 여자는 조금 덜 예쁘다’라고 생각했던 그간의 제 선입관에도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번 여행에서는 아주 예쁜 처녀들도 많이 보았습니다.
정보의 부족과 경험의 부족이 제 머릿속에 오류를 만들었던 것이지요.
18세기에 구르카 왕조가 세워지면서 오늘에 이르는 왕조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하는데 이 구르카족은 티베트 진출을 꾀하다가 청에게 패하고, 19세기에 인도 침입을 꾀하다가 영국과 충돌하여 패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인도의 세포이 항쟁 때 네팔에서는 영국과의 관계를 위해 구르카병을 파견했다고 합니다.
구르카 용병이 영국외인부대로 유명하다는 이야기는 이번 여행에도 많이 들었습니다.
용병에 관한 이야기는 저는 몇 년 전에야 들었는데 프랑스 용병이 되려고 파리에 갔다가 떨어져 돌아왔다는 제 친구의 친구를 통해서였습니다. 남의 나라 군인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한국에도 있구나 싶어서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납니다.
네팔에 대해 읽어가면서 산맥과 산간분지와 협곡으로만 이루어진 이 척박한 땅에서 사람들이 살 길이 ‘바깥에’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의 나라안에 고도의 차이가 8000m 에 달한다. 히말라야 산맥의 주령인 동부의 에베레스트 산은 중국과의 국경과 거의 일치하며, 중부 서쪽으로는 마나슬루, 안나푸르나, 다울라기리 산이 있으며, 국경에서 티벳의 주변 산맥으로 이어진다.’
그러니 그 땅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제한되어 있습니다.
관광자원을 이용해 밖에서 들어온 돈을 벌거나, 한국에 진출하는 것처럼 돈벌러 외국으로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주민의 88퍼센트는 힌두교이고 8퍼센트는 불교이다’ 몇 년도의 기록인지 이런 기록도 있고, 이번에 제일 놀란 것은 카트만두가 벨리라는 사실입니다.
네팔이 거대한 산맥들을 가진 산악국가라면서 카트만두는 파키스탄의 길키트에서 느꼈던 그 압도적이면서도 보호받는 듯한 거대한 산들의 느낌도 없고, 그렇다고 인도에서 본 평야의 광대함도 없으며, 방콕처럼 화려하지도 못한, 뭔가가 조잡하고 아류의 냄새가 난다, 싶었던 저의 생각이 카트만두가 계곡의 마을이라는 사실에서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신비로운 것, 환상적인 것을 좋아하는 저의 습성이 만드는 믿을 수 없는 그냥,한 가지 저의 느낌일 뿐입니다.
우리의 첫 번째 도착지는 스와얌부나트라고 하는 사원입니다.
이 사원은 힌두교와 불교가 공존하는 사원이라고 합니다. 카트만두 중심가에서 서쪽 2킬로미터가 떨어진 곳에 위치한 네팔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이고 유네스코 지정의 세계 문화유산이라고 해요. 대원스님이 일행에게 카트만두 시내가 한 눈에 보이는 전망대에서 이야기 해주셨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아주아주 오래전 카트만두가 호수일때 이곳을 찾은 문수보살이 호수의 모든 물을 빼서 사람이 살 수 있도록 만들자 이 곳이 가장 먼저 수면으로 빛을 발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만 그 다음 이야기가 그래서 이곳에 사원을 세운 것인지, 처음부터 사원이 통째로 빛난것인지가 헷갈립니다.
어쨌든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그런 전설을 듣자 어쩔 수 없이 그런 것 좋아하는 저로서는 ‘몽키템플’이라고만 기억하는 것보다는 훨씬 마음으로 스와얌부나트가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사원의 힌두교적인 유물 속에서 불교적인 유적을 일부러 찾아도 보았습니다.
‘그래 불교도 힌두교 중에 한 부분이다, 부처는 정말 위대해.’라고 했던 예전 인도의 한 사두가 기억났습니다마는, 어쨌든 저는 불교도로서 불교의 유물을 찾고 싶은 솔직한 마음이었습니다.
부처상과 보살상과 그림들 마니차, 그 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불교유물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금강저. 더구나 모든 무지라는 무지는 모두 깨뜨려 부숴버릴 듯 튼튼하고 커다란 금강저입니다.
탑위에 우산을 말리고 있던 상인에게 얼른 뛰어가 초를 하나 사서 금강저 아래 불을 밝혔습니다. 그런 것이 힌두교적인 예식이라고 해도 마음으로 무엇인가 예를 올리고 싶었습니다.
거대한 금강저 아래 촛불을 밝히고 ‘혜명화(慧明華)’ 저의 법명과 ‘혜일파암(慧日破暗)’ 무비큰스님께서 제게 법명을 주실 때에 써주신 글귀를 떠올렸습니다.
지난 여름 서울에서 이 법명을 받을 적에 저는 큰스님께 삼배 올리고 싶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절에 가서 삼배하면 돼.’하고 답하셨었지요.
그래서 저는 절에서 삼배를 올렸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어떤 어둠도 깨뜨린다는 금강저 앞에 작은 초를 밝히고 제이름을 불러보는 그 시간은 아주 짧고 아주 깊었습니다.
가장 강함의 상징인 금강저는 한편 공(空)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공은 무엇으로도 깨뜨릴 수 없기에 강하다고 합니다.
트레킹을 하는 내내 ‘혜명화보살’ ‘혜명화’하고 법명을 불리었습니다. 이름을 불리울 때마다 저의 마음 조금씩 밝아지고 싶어서 트레킹을 가기 전에 모두께 특별히 그렇게 불러달라고 부탁을 드렸었습니다.
밝음을 사랑하는 동시에 ‘어둠과 밝음이 둘이 아니다’라고 들어 알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지요. 트레킹 중에도 스스로가 어이없게 느껴지는 순간에도 저의 여행은 무식하고 즐겁게 진행되었습니다.
저는 이 트레킹이 법명을 받고 떠난 여행이고, ‘무명실성즉불성 ’이라는 글귀를 알고 떠난 여행, ‘나는 없다’라는 금강저를 지니고 떠난 여행이라 언제나 자유롭고 기뻤습니다.(계속)
첫댓글 慧日破暗 慧明華님 그냥 그렇게 불러 봅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 _()()()_
잘 읽고 잘 보았습니다. 재미있고 의미있네요. 시공을 초월한 지금 이 여행이.
혜명화님 고맙습니다 더불어 여행하고 갑니다 _()()()_
마치 한 권의 책을 읽는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상세하고 재미있는 여행기입니다.
여전히 도움이 필요한 사람으로 남아있다는 것이 때론 행복할 수도 있지요^^ 오늘, 법회에서 인도 성지순례 선착순 100명 관심있는 분은 무소로 가십시오...하는 안내를 듣고 마음은 저도^^ 이미 인도에 가 있었다는,,, 정성이 담긴 사진과 글, 고맙습니다_()()()_
영상물과 함께 하는 여행후기 고맙습니다....부러버라^^*
어쩌면 이리도 상세하게 글을 쓰고 세밀한 그림들을 올렸는지,,, 나도 한번 네팔에로의 트레킹을 해 보고 싶군요!
잘 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_()()()_
慧明華님! 상세한 설명과 영상, 잘 보고 느끼고 갑니다. 고맙습니다._()()()_
네팔에의 여행이 생동감 있게 다가옵니다. 아~~ 나도 직접 가 보고 싶어라.. _()()()_
멋지네요.곳곳마다 혜명화님의 발자취가 어리어 있습니다.고맙습니다.^^*
가많이 앉아서 아름다운 영상과 글 잘 보고있습니다..감사합니다...후편 기다립니다..^^*
혜명화님 너무 상세하게 잘 써주셔서 글을 읽는동안 저도 같이 간것처럼 머릿속에 영화필름이 싹-싹- 지나가는것 같습니다. 사진과 상세한 글을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혜명화님과 함께하는 네팔 여행기...실제로 다녀온듯 생동감 있게 잘 보았습니다...고맙습니다. ^^*
慧明華님((()))
慧明華님의 반듯한 여행기는 함께 그 자리에 있는듯 합니다...^^*
같이 여행하면서 옆에서 慧明華님이 설명을 해 주고 있는 것으로 착각.... 여행 잘하고 갑니다..^^*
같이 떠나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혜명화님, 11월 서장 강의때 제 둘도 없는 도반이 왜 급하게 갔는지를 ^^ 다음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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慧明華님의 네팔 여행기 아주 짧게 잘 읽었습니다.^^* 재미난 그 다음호 또 기다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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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근조근 눈 앞에 그대로 안내해주시는 고운 님의 마음씀씀이가 더욱 돋보이는 장입니다. 금강저 정말 대단한 감동을 받으셨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원하시는 모든 일 이루세요! ^^*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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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_()_
혜명화님 ... 감흥이 저절로 ... 감사합니다 _()()()_
네팔 호텔의 아침상, 타고있는 촛불, 제가 좋아하는 강아지, 그리고 별로 안좋아하는 원숭이 ^^ , 아이들, 사람들, 인력거........ 사진에 담겨진 네팔의 생생한 모습들 마치 네팔에 가있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