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사진은 대감천 소감천 의성읍으로 가는 길로 제가 중학교 2년 간을 자전거 통학하던 길이기도 합니다.
대감천 소감천 어르신들이 우리 마을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갈지자로 비틀비틀 걸어가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군요.
왼쪽 끄트머리 파란색 지붕은 대감천이 고향이신 황 대목 어르신 집이고요
사진 상 잘 보이지는 않지만 바로 그 옆집은 이발소 집입니다.
황 대목 어르신은 선친과는 친구사이로 우리 방앗간을 짓기도 했지요.
목수 일을 하시면서 집도 지으셨는데 지금 생각해도 기술이 참 좋으셨던 것 같습니다.
우리들이 집에서 열고 닫던 문짝을 짜는 것을 보았는데 진짜 예술이었습니다.
초가집 문짝은 가로 세로로 문살이 단조로웠지만 미닫이문에는 여러 가지 모양의 문살무늬를 만들어 끼우기도 했습니다.
그 기술이 신기해서 자주 가서 쪼그리고 앉아 구경을 하였는데, 귀찮은 내색 한번 보이지 않고
사람 좋은 웃음으로 허허 웃으시면서 "니, 날아가는 비행기는 보이나? " 하면서 놀리시곤 했죠.
아이들에게 눈높이를 맞춰 대화를 한다는 것, 쉽지 않은 일이죠. 왜 비행기가 안 보이느냐고 놀렸냐고요?
제가 어렸을 때 눈이 좀 '뻐꿈'하게 들어가 보였답니다. -_-: 건강하게 살아 계신지?
그 옆이 이발소집인데 마을 끄트머리라 외딴 기분이 좀 들었지만 그래도 명절이 가까워 오면 꽤나 붐볐습니다.
키 큰 이발사 아저씨가 비누 거품을 연탄난로에 문지르거나 큰 가죽 허리띠에다가 면도칼을 벅벅 문지르기도 했는데요.
우리 같은 어린 아이들은 의자 팔걸이에 나무 판대기를 걸치고 앉혔는데
거울로 보면 아저씨는 늘 진지한 표정으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지만 솜씨가 그리 좋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_-
늘 잡소리 나는 라디오가 켜져 있었고 윤정희 고은아가 한복을 다소곳이 입고 서 있는 달력하며
돼지 새끼 여러 마리가 젖을 먹고 있거나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전형적인 '이발소 그림'이 걸려 있었지요.
오른쪽 뒤로는 창고가 보이는군요. 어마어마하게 크게 지어 놓았네요.
옛날엔 별로 크지 않았는데. 마침 옛날 모습의 창고 사진이 있 올려봅니다.
원래 저 창고는 농협 수매 창고였습니다.
저 창고 마당에서 여름이면 보리 수매를 하고 가을이면 나락을 수매하였지요.
매상을 대는 날이면 저 창고 마당은 읍내 장터보다 더 난리였습니다. 매상가마니를 싣고 온 소 구루마와 경운기는
빈터를 채웠고 웬만한 소리는 막걸리 냄새 흥건한 소음에 묻혀 버렸지만 가끔 배고픈 소 울음소리만은 하늘로 퍼졌습니다.
검수관이 칼같이 생긴 것을 가마니에 푹 찔러 빼내 대충 훑어보고는 등급을 매기면
그 뒤로 한 사람이 따라 다니며 초록색으로 된 등급 도장을 가마니에 기세 좋게 때립니다.
예상보다 좋은 등급을 받은 농부는 누런 이빨을 보이며 만족한 웃음을 짓지만
낮은 등급을 받은 농부는 시험에 떨어진 수험생마냥 아쉬운 표정입니다. 등급에 따라 수매 금액이 차이가 났기 때문이죠.
잠시 희비가 스쳐가지만 굳은살 박인 거친 손으로 돈을 세는 농부들의 모습은 한 결 같이 진지하기만 합니다.
고개를 끄덕여 가며 천천히 숫자를 세지만 다른 한편의 머릿속으로는 돈쓰일 곳을 계산하느라 분주하겠죠.
어깨에 잔뜩 힘을 집어넣으며 거드름을 피우던 '끗발' 좋은 읍내 농협의 검수관 일행은 누군가와 함께 색시 집으로 갑니다.
색시 집은 대낮부터 손님을 맞을 준비가 다 되어 있습니다. 매상 대는 날은 대목이니까요.
매상 대는 날은 돈이 쫙 풀리는 날이니 철이 없거나 대책이 없는 농사꾼들이 더러 객기를 부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리 숙한 시골 농사꾼에게 색시 집은 별로 어울리는 곳이 아닙니다.
술집 색시에게 갖은 서비스를 받고 같이 노래도 부르는 '영광'을 누려보지만 잠시 뿐입니다.
그 참하던(?) 색시에게서 욕지거리를 얻어먹을 일만 남았습니다. 색시 집에서는 술값은 항상 모자라게 마련이니까요.
꿈같았던 시간은 찰나이고 고통의 시간은 긴 것이 인생만사 아니겠습니까.^^
그 대책 없는 가장을 둔 가족들은 죄 없이 땅이 꺼지는 한숨을 쉬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간이 큰 농사꾼은 어쩌다 있었고 대개의 농부들은 막걸리 집에서 목을 축입니다.
그들도 색시 집에 갈 줄 몰라 아니 간 것은 아니겠지요. 다만 처자식을 생각해서 가지 않았을 뿐 일겁니다.
막걸리 몇 사발로 얼큰하게 취해 빈 구루마에 올라 앉아
소 엉덩이를 한번 철석 때리면 주인이 구루마에 누워 자더라도 소가 알아서 집으로 찾아갑니다.
고단한 농사 일중에 목돈을 받아 쥐고 목젖이 짜릿하게 막걸리를 걸치고
처자식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그날은 참으로 행복했겠지요.
우리들은 그런 든든한 아버지들 덕분에 반듯하게 자랄 수 있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이젠 그 옛날 아버지가 걸어갔던 삶의 궤적을 따라 우리가 가고 있네요.
가장의 책무를 온몸으로 보여 주시던 우리들의 아버지...
막상 그길을 걸어보니 아버지가 짊어졌던 그 짐의 무게를 비로소야 알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첫댓글 황대목 어르신이 저희집도 지었어요..제가 초등가기 전해 집을지었는데 저에게 연락병이란 직책을 주어 매일 막걸리 심부름 하고 잔심부름도 했죠..이때 구판장에서 막걸리 받아오면서 많이 먹었어요.주전자의 말걸리를 한모금씩 하고 모자라면 물타고 아니면 넘어졌다 하고등등....
아련한 옛추억들을 기억하게 해주시어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