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바르게 공부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망치기도 하지만 그와 관련된 사람들을 해치게 된다. 심지어는 자기의 이득을 위해서는 자기에게 인간되라고 가르친 스승까지도 해치고 있다. 이러한 사람을 간악한 인간이라고 말해왔다. 여기에 청백하기로 이름난 선비 구수담(具壽聃)이 ‘인간 독사(毒蛇)’에게 물려 죽은 이야기를 생각해 보고 우리는 교육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이며, 우리가 하고 있는 예절교육은 앞으로 어떻게 사회에 영향을 줄수 잇을 것인지를 생각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쓴 「부제학 구공 묘표(副提學具公墓表)」에 보면 구수담(具壽聃)의 인품을 짐작할 수 있다. 그 글은
기묘년(己卯年, 1519년 중종 14년) 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그해 겨울에 사화(士禍)가 일어났는데, 그때 공의 형인 병암(屛菴) 구수복(具壽福)이 관련되어 삭직되었다. 공은 이 일에 비분강개(悲憤慷慨)하여 10년 간을 두문불출하였다. 무자년(戊子年, 1528년 중종 23년)이 되어 비로소 등과(登科)하였고, 명종 무신년에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중략~ 공이 대사헌 임명에 대해 장차 대궐에 나아가 사은(謝恩)하려고 하면서 간신(姦臣)들이 날조해 꾸며낸 정상을 밝혀 극론(極論)한 한 소장(疏章)을 밤새 작성하였다. 그때 진복창(陳復昌)이란 자가 있었는데, 이 자는 원래 공의 형인 병암(屛菴)의 문인이었던 사람으로, 공이 앞서 그가 음흉하고 간특하다는 것을 말한 적이 있었으나, 병암은 능히 그와의 관계를 끊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공이 쓴 소장의 내용을 훔쳐보고 밤중에 이기(李芑)※1)에게 달려가 알렸다. 이기는 수렴청정(垂簾聽政)하던 문정 왕후(文定王后尹氏)에게 곧바로 아뢰어 공을 충청 감사(忠淸監司)로 내치게 하였다. 그때 이기는 공에게 크게 욕하며 말하기를, “네가 반드시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하였다. 공은 이 소장을 올리지 못한 채 강계부(江界府)로 귀양 갔다가 다시 갑산(甲山)으로 옮겨진 후, 기유년(己酉年, 1549년 명종 4년) 7월 결국 사사(賜死)되었다. ~중략~공은 인품이 매우 고상하고 학식이 매우 뛰어났으며, 매양 닭이 울 때 일어나 낯을 씻고 머리를 빗어 정신을 맑게 하고는 문을 닫고 책을 보았는데, 고요함이 마치 사람이 없는 것과 같았고 오직 연자영(蓮子纓)이 안상(案床)에 부딛히는 소리만 밖으로 들릴 뿐이었다.
(己卯春에 中司馬하야 冬禍作한대 公兄屛菴壽福與焉하니라 公ㅣ 悲憤慷慨하야 杜門不出者十年하니라 戊子에 始登科하고 明廟戊申에 拜大司憲하니라 ~중략~ 公將出謝하면서 夜構一疏를 極論姦臣構捏狀하니라 有陳復昌者한데 屛菴門人也ㅣ로 公ㅣ 先言其陰慝하나 而屛菴未能絶也l라 及是瞯公疏하고 夜奔告李芑하니라 芑는 卽啓于簾中하야 黜公爲忠淸監司하니라 芑는 大罵하야 曰汝必無生還之理리라 未上하고 竄江界府라가 旋移甲山하고 己酉七月賜死하니라~중략~公은 天分甚高하고 學力甚邁하며 每鷄鳴而起하야 盥櫛精明하야는 閉戶看書한데 寂若無人하야 惟時有蓮子纓※2)擊案聲만 聞外而已니라)
라고 할 만큼 청렴하고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였으나 문인인 진복창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그렇다면 진복창이란 자는 어떠한 인물이었을까?
진복창(陳復昌)은 교활한 성품과 어머니의 행실까지 방종하여 늘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렇지만 1535년(중종 30) 생원으로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부제학·부평부사 등을 지내면서 당시 세도가였던 소윤(少尹) 윤원형(尹元衡)의 심복이 되어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대윤(大尹)에 속한 사림의 숙청에 앞장서서 자기 스승이며 자기를 추천하여 준 구수담(具壽聃)까지 역적으로 몰아 사사(賜死)하게 하는 등 윤원형이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앞장서 옥사를 일으켜 제거하자 ‘극적(極賊)’이라는 혹평을 들었다. 대사헌을 거쳐 1560년 공조참판에 올랐으나 윤원형으로부터 간교, 음험한 인물로 배척, 파직되어 삼수(三水)에 유배되었다가 배소에서 죽었다. 그래서 그는 사화 때 사림의 숙청에 크게 활약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자 사관(史官)들로부터 ‘독사(毒蛇)’로 기록되었다 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동각잡기(東閣雜記)』※3)에 보면, 퇴계(退溪) 형이신 온계(溫溪) 이해(李瀣)※4) 선생은 송백 같은 기상으로 절조를 지켜 칡덩굴처럼 뒤얽힌 세상의 척의와 인맥에 연연하지 않다는 말을 듣던 분이셨는데 대사헌으로 계실 때 당시 우의정이던 간신 이기(李芑)를 규탄하여 체직시켰다. 이기는 이 일로 이해에게 앙심을 품고, 당시 진복창(陳復昌)무고를 하여 온계 선생은 형장(刑杖)을 맞고 갑산으로 유배 가던 중 양주에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온계(溫溪) 선생 인품을 잘 대변해주는 글은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5)이 쓰신 「이해(李瀣)선생 일고 서문(溫溪李先生逸稿序)에 있다.
“하늘이 강대(剛大)하고 준위(俊偉)한 특출한 인물을 내는 것은 장차 세상을 위해 크게 쓰려고 해서인데, 왕왕 간사한 소인배의 손에 걸려 생각지도 못한 횡액을 당한 사람들이 고금에 이루 다 기록할 수도 없다. 그러나 혹 공심(公心)과 직도(直道)를 믿고 지나치게 격양(激揚)하여 중용의 도리에 맞지 않는 것도 귀하다고 할 수 없으니, 오직 너그러움에 바탕을 두고 굳건함으로 다스려서, 어떤 경우라도 오직 의리로 비추어 보아 모면할 수 없게 된 다음에야 운명으로 돌릴 수가 있는 것이다. 퇴계(退溪) 선생이 조정암(趙靜庵.조광조)의 행장을 쓰면서 그 출처(出處)의 전말을 상세히 쓰시고는 결론짓기를 “시운에 막히고 방액(邦厄)에 걸렸으니 천지에 사무치는 유감이다 [關時運 係邦厄 天地之所憾]” 하셨다. 나는 일찍이 이러한 관점으로 온계(溫溪) 이 선생(李先生. 李瀣 1496~1550)의 행적을 살펴보고는 애통하고 가슴 아파 눈물을 흘렸었다(天之生剛大俊偉非常之人은 蓋將以有裨於世인대 而往往厄於奸小之手하야 橫罹禍孼者ㅣ 古今不可勝紀니라 然ㅣ나 或恃其公心直道하고 過爲激揚하야 不合於中庸하면 則亦未足爲貴하니 惟本諸寬偉而濟之以剛毅하야 儻然惟義之視而不得免하고 然後에나 歸之於命焉하니라 退陶先生ㅣ 狀趙靜庵之行하면서 詳其出處始終하고 而結之에 以關時運係邦厄하니 天地之所憾하니라 愚는 嘗以是觀溫溪李先生之事爲하고 痛傷流涕也ㅣ니라).”
라고 하였다.
진복창(陳復昌). 이것을 보면 맑고 강직한 사람들이 진복창의 농간에 많이 희생되었음을 알 수 있고, 한 인간을 길러내는 교육 현장에서는 올바른 인간을 길러내어야 함을 잘 보여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요즈음 코로나 19로 교육의 본바탕인 대면(對面) 교육이 없고 화상교육으로 시간을 보내니 사제지간(師弟之間)의 정(情)과 벗들 간의 우정(友情)이 생길 수가 없으니 살벌한 인성이 길러질까 걱정이다. 우리 모두 바른 예절과 인간다운 삶을 가르쳐 진복창과 같은 간악한 위인이 생겨나지 않게 해야 할 것 같다.
※참고
1) 이기(李芑 : 1476(성종 7) ~1552(명종 7) : 본관은 덕수. 자는 문중, 호는 경재. 1501년(연산군 7)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했으나, 외직을 전전했다.
1533년 김안로(金安老)에 의해 유배되었다가, 1537년 김안로가 제거되자 풀려나와 중종의 신임과 이언적(李彦迪)의 추천으로 형조판서·병조판서를 지내고 우의정이 되었다.
그러나 소윤 윤원형(尹元衡)과 결탁하여 을사사화를 일으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여 보익공신 1등으로 풍성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좌의정을 거쳐 1549년(명종 4) 영의정을 지내면서 윤원형과 함께 사림파를 비롯한 반대파를 숙청했다.
죽은 뒤 문경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나, 을사사화의 원흉이라 하여 선조 때 모든 관직이 삭탈되고 묘비까지 제거되었다.
2) 이해(李瀣) : 1496년(연산군 2) ~1550년(명종 5) :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명(景明), 호는 온계(溫溪). 시호는 정민(貞愍). 퇴계(退溪) 형이시다.
1525년(중종 20)에 진사가 되었고, 1528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1544년 대사헌에 두 번 제수되었다. 인종(仁宗)이 즉위한 뒤에도 계속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권신 이기(李芑)를 우의정에 등용하려는 것을 반대하고 탄핵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이기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명종이 즉위하면서 소윤이 득세하자 이기의 심복인 사간 이무강(李無彊)과 진복창 등의 탄핵을 받아 무고사건에 연좌된 구수담(具壽聃)의 일파로 몰리게 되었다. 그 때 주위사람들이 권세에 거짓으로 굴복하면 모면할 수 있다고 권하였으나 거절하였으며, 마침 김안로(金安老)가 인근에 살면서 그를 이끌고자 하였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갑산에 귀양가는 도중에 양주에서 병사하셨다. 예서(隷書)에 뛰어났으며 선조 때 벼슬이 환급되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영주의 삼봉서원(三峰書院), 예안의 청계서원(淸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이다.
3) 연자영(蓮子纓) : 성호(星湖)의 『성호사설(星湖僿說)』 「일득(日得)」에 우리나라 초기의 풍속은 상고할 수 없으나 다만 김한훤(金寒暄)은 연자영(蓮子纓)을 사용하였다. 연자(蓮子)란 못에서 나고 못은 속명으로 방축(防築)이라고 하는 까닭에 이 연자영을 방축영(防築纓)이라고도 한다. 이것이 차츰 변해져서 호박과 대모 따위로 만든 것일지라도 이 연자영이란 이름만은 고치지 않았다. 이로 본다면, 이 연자영이 있기 전에는 이보다 더 나은 딴 갓끈이 없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으니, 옛날 검소한 풍속은 이와 같았다.
4) 동각잡기(東閣雜記) : 조선 선조 때 이정형(李廷馨:1549~1607)이 지었다. 내용은 조선 태조의 선조들로부터 선조 때까지의 사실을 서적 또는 견문에 의하여 연대순으로 수록했으며 특히 정도전의 난, 세종의 문치, 수양의 찬위, 사륙신의 복벽운동, 기묘사화, 을사사화, 기축옥사 등의 중대한 일들을 사실 그대로 명확히 모두 기록되어 있다.
5) 이상정(李象靖 : 1711년(숙종 37) ~ 1781년(정조 5) : 경상북도 안동 출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경문(景文), 호는 대산(大山). 1735년(영조 11) 사마시와 대과에 급제하여 1753년 연일현감이 되어 민폐를 제거하고 교육을 진흥하는 데 진력하였다.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오직 학문에만 힘을 쏟아 사우들과 강론하고, 제자를 교육하는 데 전념하였다. 정조가 왕위에 오른 뒤 병조참지·예조참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는 영남 이학파의 학풍을 계승하는 한편, 그 근원이 되는 이황의 사상을 계승하고 정의하는 입장에서 사상적 터전을 마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