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 찬양의 가사를 보면 성령님의 사역에 대해서 아주 정확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 가사를 통해서 성령님의 사역과 성령님의 사역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찾으면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1.허무한 시절, 깊은 한숨, 탄식, 고아
이 가사에서 성령님이 오시지 않았을 때 우리에게 일어날 일을 허무한 시절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깊은 한숨을 쉬는 때라고 합니다. 더 나가서는 고아처럼 버려진 시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에게 그러한 때가 있었습니까? 언제 그랬습니까?
혹시 지금 그러한 삶을 살고 계신 것은 아닙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말은 하는데 혹 그러한 삶이 우리 자신의 삶은 아닙니까? 지금 우리의 삶이 허무하고 길이 보이지 않습니까? 하는 일마다 한숨만 나오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지는 않습니까?
고아처럼 버려져 그 어디에도 의지할 것이 없이 사는 자처럼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종종 우리는 착각하고 살 때가 있습니다. 세상은 돈을 의지 하는 사람은 잠시는 보람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도 든든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돈이 세상이 우리를 바르게 인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착각하게 만들 뿐입니다. 괜찮아 보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든든하게 보이고 괜찮아 보인다고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신기루에 불과하며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산다면 무엇이 진정 우리를 살리는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이 어디에서 오며 우리의 기쁨이 어디어서 얻어지며 우리의 의지할 곳이 어디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2.성령이 오셨네, 내 주의 보내신 성령,
우리 인생 가운데 오신 성령
이 찬양 가사는 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셨네! 그렇습니다. 성령님이 오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령님은 내 주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령님은 우리 인생 가운데 오셨다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성령이 오셨네! 찬송가 185장에서는 이기쁜 소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온 세상에 전해야 할 소식이라고 말합니다. 환난고통을 당하는 자에게 주 믿는 성도들이 다 전할 소식은 바로 ‘성령이 오셨네’라는 소식입니다.
왜 성령님이 오신 것이 기쁜 소식이라고 합니까? 그것은 내 주께서 보내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목숨을 다해 아끼는 사람이 보내신 분이라고 하면 우리에게 무엇을 줄까요? 그것은 내게 중요한 것은 내게 필요할 것은 주실 것이 분명합니다.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무엇을 하신 분입니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셨고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부활하셔서 우리의 소망이 되신 분이었습니다.
그런 분이 우리에게서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것도 우리 인생 가운데 성령님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허무한 시절을 보내는 인생 가운데 한숨과 탄식으로 살아가는 인생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게서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기쁜 소식이 됩니다. 우리의 허무한 시절을 보람있는 시절로 보내줄 성령님이시기에 기쁜 소식입니다. 한숨과 탄식을 기쁨과 감사로 보내게 해 주실 성령님이기 때문에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셨다는 사실을 기쁜 소식이 됩니다.
3.그 나라 꿈꾸게 하시네,
피난처가 되시는 성령님 참 자유, 진리
성령님은 친히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오셔서 하시는 일은 그 나라 꿈꾸게 하십니다. 그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꿈꾸고 우리가 가기를 원하는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련한 그 나라입니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입니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기 원하던 그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도록 할 뿐 아니라 그 나라에 이르도록 인도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친히 찾아 오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억눌린 자, 갇힌 자, 자유함이 없는 자에게 피난처가 되십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에 눌려서 삽니다. 돈에 눌려 살고 사람에 눌려 살고 환경에 눌려 삽니다. 왜 눌려 사는 것입니까?
눌려 산다는 것은 그것에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령님은 우리로 진정 두려할 분은 알려 주십니다. 진정 두려할 분은 누구입니까?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만이 두려워하는 이는 다른 그 어떤 것에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더 이상 돈에 억압을 받지 않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환경에 억눌림 당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그 모든 것 위에 있으면 그 모든 것은 지배하며 그 모든 것은 주실 수도 있고 빼앗을 수 도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주의 영이 있는 곳에 참 자유가 있게 됩니다. 주의 영 곧 그리스도의 영 하나님의 영 아래에 있는 자는 참 자유가 있게 됩니다. 더 이상 돈이나 세상이나 권력이나 환경에 지배를 받는 자가 되지 않기에 참 자유가 있게 됩니다.
4.이러한 성령님을 어떻게 맞이할 수 있습니까?
성령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19:2)
첫 번째 성령님 곧 예수 그리스도의영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오시려면 거룩해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한 사람이 되고 안 되고는 다른 방법이 있지 않습니다. 오직 거룩함에 있습니다. 우리 속에 죄악을 품고 성령의 충만함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우리 속에 더러움이 있을 때 오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이나 모든 교회의 역사 속에서 보면 성령의 역사가 있을 때 반드시 먼저 일어나는 것은 회개의 역사가 먼저였습니다. 회개의 역사가 없이 성령 충만함이나 부흥의 역사는 없었습니다.
두 번째 성령님은 믿는 자에게 오십니다.
믿음은 문은 여는 것입니다. 믿음은 성령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령님은 믿는 자에게 오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가 자유함이 있고 기쁘고 진리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세 번째 성령님은 말씀을 가까이 해야 오십니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진리는 말씀으로 오십니다. 그렇기에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말씀 없이 성령님은 역사 할 수 없습니다. 기분이나 감정이 아니라 성령님은 말씀으로 오십니다.
그렇기에 말씀을 듣는 시간을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하며 말씀을 묵상하는 삶을 살아야 하며 말씀을 나누는 삶을 살아갈 때 성령님은 역사할 수 있으며 그 성령님을 통하여 자유와 평강과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님이 우리 속에서 함께하시고 역사할 때만 우리는 자유와 평강과 기쁨이 있습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이고 주님이 원하시는 삶이고 그래야 하나님 나라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날마다 회개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말씀를 가까이 하셔서 신앙이 날마다 날마다 성숙하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