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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서론
▣ 고린도전서 서론
▣ 도시:의문의 여지도 없이, 고린도는 헬라(그리이스)의 가장 중요한 도시이다. 그 한 가지 이유를 들자면, 고린도는 아가야 지방의 로마 수도인데, 동방에서 서방으로 여행하는 주요 경로로서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로마 제국의 4대 도시 중에 고린도는 상업, 문명, 부패함으로 주목을 받았다. “고린도 여인“이 어떠한가에 대해서는 누구나 알고 있었고, “고린도의 축제“는 그야말로 사치와 방종의 밑바닥이었다. 고린도는 여신 비너스(Venus)를 숭배하는 본거지였으며, 또한 애굽과 아시아에서 온 몇몇 불건전한 신비 종파의 중심지였다.
▣ 교회:제 2차 전도 여행에서 바울이 고린도를 방문하였을 때는, 문화가 발달한 아덴에서 외관상으로 실패를 경험한 후였다(행 18:1-17). 그는 장막을 만드는 두 유대인(아굴라와 브리스길라)과 교제하며 일 년 반 동안 고린도에 머물면서 매주 회당에서 강론하였다.
실라와 디모데는 베뢰아에서 그들의 사역을 마치고 바울과 합세하였다. 회당장이 회심하여 바울에게 세례(침례)를 받았고(행 18:8/고전 1:14-16) 그리스도께서 바울에게 고린도에 머물라고 특별한 격려를 하셨으므로(행 18:9) 그는 일 년 반 후에야 에베소로 떠나갔다. 그는 고린도에 풍부한 영적 은사를 받은 교회를 뒤에 남겨 두고 떠났으나(고전 1:4-7), 그 교회는 세상적인 지혜와 도시 자체의 무서운 사막함으로 말미암아 심하게 유혹을 받았다.
▣ 서신:바울은 에베소에 3년간 머물러 있었는데(행 19:1-) 몇 가지의 문제를 교정하기 위해서 고린도를 두번째로 방문했던 것으로 보인다(고후 13:1). 에베소로 돌아온 그는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음행에 대한 신랄한 편지를 썼으나(고전 5:9) 이 편지는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후 고린도 교회는 바울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 교회의 회원인 스데바나와 브드나도, 아가이고편에 보낸 것 같다(고전 16:17).
이 편지는 교회의 교리와 실제에 관한 몇 가지 매우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있었고,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죄에 대한 책망을 겸하여 이 질문들에 답하였다(고전 7:1/고전 8:1/고전 11:17). 그는 교회를 단합시키고 정화하는 일에 형제들을 돕도록 디모데를 앞서 보내었다(행 19:22/고전 4:17/고전 16:10-11). 고린도전서 16장 17절에 언급된 세 사람의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이 고린도전서를 그들에게 전달한 것 같다.
디모데는 교회가 그 편지를 받았으나 모든 것이 바르게 되지는 않았다는 소식을 가지고 바울에게로 돌아왔다. 그러자 바울은 디도를 고린도에 보내어 신자들이 바울의 사도적인 명령들에(고후 7:13-15) 순종하는지 보게 하였고, 디도는 위반자(고전 5장)들이 징계를 받았으며 교회는 바울의 교훈에 순종하였다는 좋은 소식을 바울에게 전해 주었다(고후 7:6-17 참조). 이때에 바울은 디모데와 함께 고린도후서를 기록하여(고후 1:1) 교회를 칭찬하고 계속 전진하여 선한 사업을 끝마치라고 격려하였다.
디도가 이 편지를 고린도에 가져갔고,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모금하는 일에 교회를 도우려 기다렸다(고후 12:17-18/고후 8:6). 바울은 사도행전 20장 1-4절에서 마지막으로 한 번 고린도를 방문하였다.
▣ 기록 목적: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쓴 데에는 두 가지의 근본적인 목적이 있다. 즉, 교회 안에서 허용한 끔찍한 죄들로 인하여 그들을 책망하려는 것(1-6장)과,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교리에 대한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함이다. 그는 글로에의 집과(1:11) 스데바나, 브드나도, 아가이고에게서(16:17) 죄에 대한 보고를 들었다. 그리고, 그가 에베소에서 이 도시를 방문했을 때에는 교회 안에 분열과 다툼이 있다는 것을 직접 알게 되었다.
신약 성경 중의 어떤 서신서에도 지교회의 문제를 이처럼 설득력 있게 다룬 곳은 없다. 그리고 오늘날 이처럼 소홀히 되는 서신서도 아마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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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1-9
▣ 그리스도인의 지위와 신분-고린도전서 1장-
1. 칭찬-그리스도 안에서의 지위(1:1-9)
바울은 신자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이 갖는 놀라운 축복을 상기시키는 가장 요령있는 방법으로 편지를 시작한다. 그는 그들의 죄를 책망하기에 앞서 축복을 상기시키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특권 이하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생활하지 못하고 있었다(엡 4:1-). 바울은 그들의 영적인 축복들을 열거한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음(2절)-이것은 그들이 성별되어(따로 분리됨) 선택된 그룹인 교회에 속해 있다는 뜻이다. 그들은 성도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성도인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3-4절)-은혜란 내가 받을 만하지 못한데도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것이며, 자비란 내가 마땅히 받아야 하는데도 주지 않으시는 것이다. 이 은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하나님께로서 오는 은사(5, 7절)-그는 12-14장에서 성령의 은사를 논하는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성령의 은사들, 특별히 말을 다루는 구변의 은사들로 놀랍게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이다(14:26). 이들은 또한 지식에도 풍부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은사들과 지식을 가지고도 사랑이 결여되어 있었으며(13:1-3) 서로 잘 지낼 수가 없었다!
하나님에 대한 증거(6절)-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하여 하실 수 있다고 바울이 말한 모든 일들이 그들의 생활에 일어났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생활가운데 현실로 된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소망(7-9절)-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강림의 빛 가운데서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요일 2:28).
그들이 비록 지상에서 죄가 있더라도 하나님은 하늘에서 그들을 흠없게 하실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죄를 범해도 좋다는 핑계가 될 수는 없으며, 이것은 오히려 우리가 비록 주님을 실망시켜드린다 해도 하나님은 신실하시다는 격려이다.
고전 1:10-16 "
2. 고발-그리스도인으로서의 죄악된 상태(1:10-16)
효율적으로 그들을 칭찬하고는 첫번째로 교회 분열의 문제를 다룸으로써 그들의 죄에 대한 토론에 들어간다. 바울은 그들의 분열에 대한 슬픈 소식을 글로에의 집과, 또한 그를 방문한 친구에게서 들었다(16:17-18). 교회의 문제거리에 대한 나쁜 소식은 그처럼 신속히 전파되면서도 복음의 기쁜 소식은 전혀 외부로 퍼져나가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교회에는 분열과 다툼에 있었는데(11:18/12:25/3:3), 이것은 주의 만찬 때에조차(11:20-34) 있었다! 바울은 “완전히 서로 연합하라“고 간청하였는데, 이것은 부러지거나 제자리에 있지 않는 뼈를 고정시킨다는 뜻의 의학용어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가 되지 않을 때에는, 그리스도의 몸(교회)이 괴로움을 당한다.
바울은 그들이 분열된 이유를 설명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눈으로 보지 않고 자신의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인간의 지혜를 의지하였고(2:5), 인간의 업적에 영광을 돌리고 있었으며(3:21), 종들을 서로 비교하며 인간들을 자랑으로 삼고 있었다(4:6), 3장에서 바울은 인간들에 대해 이처럼 열중하는 것은 육신적인 삶의 표식이며, 이 “영적인 고린도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사실상 어린 아이들임을 나타내는 증거라고 말한다.
이 교회에는 네 개의 파당이 있었다. 한 그룹은 바울을 따랐는데 이들은 아마도 주로 이방인들이었을 것이다. 이는 바울이 이방인들의 사도였기 때문이었다. 다른 그룹은 능숙한 웅변가인 아볼로를 따랐는데(행 18:24-28), 사람들은 아마도 그의 훌륭한 멧세지를 즐겼을 것이다. 세번째 그룹은 유대인의 사도인 베드로를 의존하는 유대인들이었고(갈 2:7), 네번째 그룹은 “그리스도“만을 따름으로써 나머지 그룹보다 더욱 신령하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하였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나뉘어지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모두 한 몸의 지체들이다(12:12-3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이지, 사람들이 우리를 위하여 죽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이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침례)를 받는다! 바울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그가 고린도에서 세례(침례)를 베풀고는 더이상 세례(침례)를 주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고 하였으며, 만일 그가 계속해서 직접 세례(침례)를 주었더라면 분열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바울의 사역을 조력한 사람들이 세례(침례)를 베풀었는데, 바울의 특별한 사명은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세례(침례)의 의미를 어떤 뜻에서든지 축소시키려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어떤 전도자가 세례(침례)지원자들을 검토하고 세례(침례)를 베푼다면 얼마나 어려울 것인지 상상해 보라(1:17 에 나오는 “보내심“이란 단어는 헬라어로는 “특별한 사명을 가지고 파송된 자“의 뜻이다). 사도행전 18장 8절은 많은 고린도 사람들이 믿고 세례(침례)를 받았다고 알려 준다. 바울은 물세례(침례)를 실행하였으나 언제나 자신이 세례를 준 것은 아니었다."
고전 1:17-31
3. 설명-분열의 이유(1:17-31)
고린도 신자들이 분열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지위에 합당하게 살지 못한 이유는 복음을 세상의 지혜와 혼합하고 있었으며, 인간들을 영화롭게 하였고 복음사역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데에 있었다. 1-2장에서 바울은 세상의 지혜 대(對) 하나님의 지혜를 다룬다. 그리고 이 구절들에서 모든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복음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데에 일곱 가지 증거를 제시한다.
바울의 사명(17절)-그는 복음에 인간의 철학을 더해서가 아니라, 오직 복음만을 전파하도록 보내심을 받았다. 복음에 다른 무엇을 섞지 않도록 얼마나 경계해야 하는가!
개인적인 경험(18절)-그들은 복음의 능력을 개인적으로 경험했었다.
성경(19-20절)-바울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지혜를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이사야 19장 12절, 29장 14절, 33장 18절을 인용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하나님은 세상의 지혜를 파괴하실 것이다.
인간의 역사(20-21절)-그 모든 “지혜“를 가지고도 세상은 하나님이나 구원을 발견할 수 없었다. 인간의 역사를 추적해 보면, 역사란 인간이 점점 더많은 지식을 얻어가는 것에 대한 기록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참된 지혜는 점점 줄어든다. 특히 영적인 문제들은 더욱 그렇다.
로마서 1장 18-32절을 읽고 세상이 어떻게 하나님께 등을 돌렸는지 알아보자. 하나님의 계획은 대단히 단순하고 독특한 것이어서 세상에게는 어리석게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에 대하여 친히 말씀하신 바를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신다.
바울의 사역(22-25절)-바울은 전 로마 세계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전파하였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갈구하였고, 이방인들, 특히 헬라인들은 철학적인 지혜를 구한다는 잣을 바울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을 둘 다 뛰어 넘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가능하게 하셨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에 대한 멧세지는 유대인들에게는 걸리는 돌이었는데, 이들이 갖고 있던 메시야에 대한 개념은 퍽 다른 것이었다. 그리고 복음은헬라 사람들에게 어리석게 보였는데, 그것은 복음이 자기들의 철학적인 제도들보다 저급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어리석은 복음“이 부르심을 받은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였음을 보았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능력과 지혜이시며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다.
그들 자신의 소명(26-29절)-바울은 “만일 하나님이 인간의 지혜와 영광을 필요로 하신다면 왜 당신들을 부르셨겠는가 ?“라고 말한다. 고린도교회에는 육신적으로 유력한 사람이나, 귀족이나, 지혜로운 자들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셨다! 사실상, 하나님은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들에게는 그의 진리를 고의적으로 감추시고, 겸손하며 거절당한 사람들에게 나타내신다.
전 성경을 추적하여, 그리스도께서 역사상 “무명인들“을 취하여 어떻게 위대한 지도자들이 되게 하셨는지를 알아보자(아브라함, 모세, 기드온, 다윗 등).
그리스도의 충족하심(30-31절)-모든 성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며 그리스도는 모든 성도들에게 그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되신다! 우리는 성도의 지혜나 능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께서 계신다! 그는 우리의 구원이시며 우리의 의이시고, 우리의 지혜이시며, 우리의 모든 것이다. 그리스도나 그의 십자가에 무엇을 첨부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축소시키는 것이며 그 능력을 빼앗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에게서 그들의 시선을 뗄 때에 사람들은 분열되기 시작하며, 인간의 지혜를 신뢰하고 인간의 영광을 추구하게 되며, 결국은 늘 분열상태로 있게 될 것이다."
고전 2:1-8
▣ 하나님의 지혜 대 인간의 무지함-고린도전서 2장-
본 장에서는 복음과 인간의 지혜에 대한 바울의 토론이 계속된다. 고린도에는 인간의 철학을 칭송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는데, 아마도 아볼로의 웅변이 이를 자극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가 단순하고 비웃음을 받는 십자가의 멧세지보다도 인간의 지혜와 철학을 사용하는 편이 회심자들을 얻는 데에 훨씬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1. 바울이 전한 두가지의 멧세지(2:1-8)
복음-바울이 고린도에 왔을 때는 아덴에서 외관상 실패를 경험한 후였다(행 17:22-). 그 곳에서는 헬라 철학자들에게 연설을 했는데, 회심자들을 거의 얻지 못한 정도였다. 이러한 경험 위에 순수한 복음만이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확신이 더해져서, 바울은 고린도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사역을 하게 되었다. 그는 웅변술의 유혹적인(설득하는) 말이나 철학을 이용하지 않았으며, 다만 성령의 능력으로 단순하게 전도하였다. 그는 신자들이 인간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게 하려고 열성을 다했다.
목회자들이나 전도자들이 “그들 자신에게로“ 회심자들을 만들며, 사람들에게 오직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 것을 보게 됨은 슬픈 일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신자들에게 “기댈 수밖에 없고“ 그들 스스로는 걷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는 것은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3장에서 바울은 이런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젖먹이“라고 부른다(3:1-4).
비밀(mystery)-그러나, 바울은 단순히 복음을 선언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는 믿음에서 더욱 성숙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깊은 지혜를 가르쳤다. 유감스럽게도 고린도에는 성숙한 사람이 몇 명 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 지도자들만을 바라보고 비교하며 말씀 안에서 자라는 데에 실패하고 있었다.
지교회에서 목회자와 교사들이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다. 그런데 믿음에서 성장해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가르치는 것도 역시 중요하다. 복음을 전하는 것만으로 강력한 교회를 만들기란 불가능하다. 여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계획과 비밀에 대한 가르침이 수반되어야 한다. 비밀(mystery)이란 구약에서는 감추어진 진리인데, 이제 하나님의 가족에 속한 사람들에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계시된 것이다. 이것도 외부 사람이아닌 내부인들에게만 알려진 “가족의 비밀“이다.
물론, 바울이 고린도에서 가르친 비밀은 에베소서 2-3장에 요약된 대로 현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으로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며 한 몸, 곧 교회를 이룬다는 사실이다. 이 비밀 또는 하나님의 감추어진 지혜는 “이 세상의 관원“들이 결코 알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영적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신앙을 고백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진실로 이해하지 못한다! 이로 인해 오늘날 우리 교회들이 촛대, 분향, 의식적인 복장, 화려한 건물, “첫째는 유대인에게“라는 식의 가르침, 유아세례(침례) 등과 같은 이 시대에 속하지 않은 “유대인의 골동품“에 여전히 속박당하고 있다.
1장과 2장에서 바울은 이 세상의 지혜를 하나님의 지혜와 대조한다. 이러한 대조점들에 유의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세상의 지혜 하나님의 지혜
말의 지혜(1:17/2:4) 말뿐이 아닌 능력의 지혜(2:4-5)
인간의 말(2:4) 성령의 말(2:13)
세상의 영(2:12) 하나님의 영(2:12)
하나님 보시기에 미련함(1:20) 인간들에게 미련하게 보임(2:14)
철학자(1:20) 전도자(1:31/2:4)
무지함(1:21) 하나님을 앎(2:12)
멸망으로 인도함(1:18) 영광으로 인도함(1:18/2:7)"
고전 2:9-13
2. 오늘날 세상에 있는 두 영(2:9-13)
이 세상의 영(12절)-분명히 사단은 이 세상에 동력을 공급하는 영이다(엡 2:1-3). 사단은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자아를 부풀리고 마음을 눈멀게하는 “지혜“를 주며, 하나님의 말씀의 단순한 진리로부터 그들을 멀리 인도해간다.
오늘날 많은 학문의 장(場)에서는 성경을 원하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신성과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필요성을 거부한다. 이러한 무지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했는데 사람들은 “교육받은“ 이들조차 그 이후로 계속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오고 있다. 이 세상의 영은 적그리스도의 영이다(요일 4장).
하나님의 영-성령께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일들을 가르치는 분이신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9절에서 바울은 이사야 64장 4절을 언급하고 있으며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지금 여기서 누릴 놀라운 일들을 준비하셨다고 언급한다. 이 구절은 하늘(heaven)의 일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오늘날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신 영적인 축복들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러한 축복들을 어떻게 우리에게 계시하는가? 주님의 영을 통해서(10절) 하신다. 사람의 내부에 거하는 영이 외부 사람들은 전혀 모를 일을 이해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이해하며 말씀을 통하여 이러한 진리들을 우리에게 계시하신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아는 데“ 거하기를 원하시며, 어두움에 거하기를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고 우리를 가르칠 성령을 보내신 이유가 이것이다. 신자들은 인간 교사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말씀으로부터 그에게 교훈하는 영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말씀으로 우리를 가르치신다는 것에 유의하자(13절). 여기서 성경의 축자영감설, 즉 모든 말씀이 성령에 의해 주어졌다는 것을 보게 된다. “영적인 일은 영적인 일로 분별함“이란 말은 “영적인 일은 영적인 말과 결부됨“ 또는 “영적인 일을 영적인 사람에게 설명함“이라고 번역될 수도 있다.
이들 중 어떤 경우이거나 전해 주는 진리는 명확한데, 그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가르침을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거나 세상의 사람들이 가르친 인간의 말을 믿거나, 둘 중의 한 편에 설 수 있다."
고전 2:14-16
3. 오늘날 세상에 사는 두 종류의 인간(2:14-16)
자연인(육에 속한 사람)-구원받지 않은 사람이며, 세상에 속하였고 세상에 있는 것이 행복한 사람이다. 그는 성령의 일들(말씀)을 받을 수 없는데, 그것은 영적인 분별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의 몸과 마음에는 성령께서 내주하시지 않는다. 사실, 그에게 있어서는 성령의 일은 어리석게 보인다.
1장 23절에서 바울은 헬라인들이 복음을 어리석은 것으로 생각하였다고 말한다. 헬라인들은 대단한 철학자들이었는데도 그들의 철학으로는 십자가에서 죽은 하나님이라든지, 인간을 돌보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들의 신들은 인간의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리고, 인간의 몸에 대한 그들의 생각으로는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늘날에 있어서조차 세상의 위대한 “선생들“은 복음과 성경의 교훈에 대해 조소한다.
영적인 사람(신령한 사람)-이는 성령에 의해서 조절을 받는 신자이다(다음 장에서 바울은 육신의 조절을 받는 그리스도인, 곧 육적인 사람을 다룰 것이다). 영적인 사람은 분별 있는 사람이므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평가할 수 있다.이것이 참된 지혜이다. 세상의 사람들은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나 영적인 지혜가 결여되어 있다.
15절을 다음과 같이 의역할 수 있다. “영적인 사람은 영적인 일들을 이해하며 또한 그에 대한 지혜를 가진다. 그러나, 세상에 속한 사람은 영적인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불신자들에게 있어서는 풀기 어려운 문제거리다!
영적인 사람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한다(빌 2장 참조). 이 말은 말씀을 통하여 성령께서 신자들을 도우심으로써 예수께서 생각하시는 대로 생각하게 하신다는 뜻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마음을 소유한다는 것, 이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수 많은 세월을 흘러내려 오며 영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말한 일들을 예언했는데, 그것들은 현실로 나타났다. 영적인 마음을 가진 성도는 세상에 속한 사람이 인간의 정보로부터 얻은 것보다 더많은 세상의 일들을 성경으로부터 알고 있다.
이 두 장에서 바울은 복음이 전하는 멧세지를 설명하며, 복음을 인간의 지혜와 혼합시키거나 또는 복음을 인간의 철학으로 대치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강조해 왔다. 다음 두 장에서 그는 복음의 사역을 다루며, 우리의 눈을 인간에게서 옮겨 그리스도에게만 두어야 함을 보여 준다."
고전 3:1-5
▣ 상급을 내다보는 봉사-고린도전서 3장-
3장과 4장에서 바울은 복음의 사역을 다루며, 복음의 사역자란 무엇이며 교회는 사역자와 그가 하는 일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말해 준다.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우리에게는 극단적인 면들이 있는데, 어떤 교회는 그들의 사역자들을 “신성화“하여 그들을 우상시하는가 하면, 반면에 또다른 이들은 사역자들을 무시하며 존경하기를 거부한다! 다음의 두 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종들의 모습을 여섯 가지로 보여 주는데 세 가지는 3장에, 다른 세 가지는 4장에 나온다.
1. 다른 이들을 섬기는 사역자(3:1-5)
여기서 “사역자“(minister)라는 단어는 집사라는 용어와 같은 단어에서 온 것으로서, “종“이라는 뜻이다. 18개월 동안 바울은 고린도에서 그리스도의 종으로 있으면서 사람들을 말씀으로 먹이고, 훈련시키고, 격려하고,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도록 도왔다.
교회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바울의 실수가 아니라 성숙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이 된 그들의 잘못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젖먹이였으며, 대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천국 사역에 대한 성경의 보다 깊은 진리들(히 5:11-14), 곧 말씀의 단단한 고기를 먹을 수 없었다. 바울은 간호원이 하듯 젖으로 그들을 먹여야 했다! 어린 아이들처럼 이들은 파벌로 나뉘어져 인간 지도자들을 따랐다. 야고보서 3장 13절-4장 17절을 읽고, 교회에 왜 다툼이 생기고 분열이 일어나는지 알아보자.
참된 목회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 종의 마음을 가져야만 하며(빌 2장), 기꺼이 그리스도를 첫자리에, 다른 사람들을 둘째 자리에, 그리고 자신을 마지막에 둘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일을 실천하기란 언제나 쉬운 일만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지도자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다른 이들의 종이 될 수있는 은혜와 힘을 주시도록 기도해야만 한다."
고전 3:6-9
2. 복음의 씨를 뿌리는 사람(3:6-9)
바울은 가족에 대한 표현에서 밭에 관한 것으로 바꾸어, 사역자의 모습을 들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묘사한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마 13장의 씨뿌리는 비유 참조)이며, 사람들의 마음은 각기 다른 종류의 토양이다. 지교회는 목회자를 정원사로 둔 영적인 “정원“이다(9절,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하나님의 정원).
어떤 농장이든 여러 다른 일꾼들을 필요로 한다. 어떤 사람은 토양을 경작하고, 다른 이는 씨를 뿌리며, 잡초를 뽑는 이가 있으면, 또 다른 사람은 추수를 한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추수에 참여한 것이다. 각자는 정당한 삯을 받을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들을 비교하는 너희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나는 고린도 교회를 창설했으므로 씨를 뿌린 것이고, 뒤를 이어 아볼로는 설교와 사역을 통하여 그 씨에 물을 주었다. 그러나, 추수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뿐이시다. 아볼로와 나는 아무 영광도 받을 만하지 못하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만이 모든 것이 되신다!
그 교회는 인간 지도자들에 따라 분열되었다. 그러나, 바울은 8절에서 말하기를 “일꾼들은 목적과 마음에서 연합하여 하나이므로, 교회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이 목회자들과 전도자, 교사들을 마치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운동 선수나 영화 배우들을 비교하는 방식으로 비교한다면 이는 얼마나 비극인가! “함께 수고하는 사람들“, 이것이 언제나 우리의 표어와 동기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마음밭이 굳고 차가와서 말씀의 씨를 받지 못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돌보아야만 한다."
고전 3:10-23
3. 하나님의 성전 건축자(3:10-23)
이 부분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오해가 많은 구절 중의 하나이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불이 내세에서 인간을 정화한다는 연옥의 교리를 “입증하는“ 데에 이 구절을 사용한다. 그리고, 현대주의자들은 이 구절을 행위로 말미암은 구원을 증명해 보이는 데에 사용하며, 또한 많은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은 목회자에 대한 것보다는 개별적인 그리스도인에게 적용시킨다.
이 구절이 가르치는 것은 신자들의 영혼이 아니라 그 행위가 그리스도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인 한편, 근본적인 적용은 목회자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역자들에 대한 것이다.
지교회는 건축물, 곧 성전에 비유되며 목회자는 건축자로 비유되는데, 그의 책임은 성전의 재료들을 최선의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에 기초를 놓는 일을 위해 하나님께 사용되었으며 그 기초는 복음이 전하는 바, 그리스도이시다. 뒤를 이어 아볼로가 그 기초 위에 건축하였고, 또한 다른 목회자들이 뒤를 이어 왔다. “모든 사람은 자기가 어떻게 건축하고 있는지 신경을 써야 한다“고 바울은 경고한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세 종류의 그리스도인 사역자들을 설명한다.지혜로운 건축자(14절)-금, 은, 보석 등의 영속적인 자료들을 사용하는 사람이며, 나무, 풀, 짚과 같은 값싸고 허름한 재료는 사용하지 않는다. 이 건축자는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며, 인간의 칭찬을 얻으려는 양(量)적인 면보다는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려는 질(質)적인 면에 목표를 둔다. 그는 말씀을 사용하고, 기도하며, 성령을 의지한다. 그 결과, 그가 한 일은 영속된다. 불이 그가 한 일을 영광 가운데서 시험할 때에도 견딜 것이다!
세상적인 건축자(15절)-이들은 시험에 견딜 수 없는 재료를 사용한다. 많은 군중을 모으려고 급히 서두르는 그리스도인 사역자로서, 교회를 세우는 데 천천히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려고 하지 않는다. 그의 재료는 세상으로부터 온다. 즉, 나무나 풀이나 짚과 같은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진실로 거듭났는지 아닌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인간의 생활을 시험해 보지 않으며, 다만 그들을 회원들로만 취급하여 주보에 보다 큰 통계 숫자를 적어 넣는다. 그는 강단에서 “웅변가“일지 모르나 자기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 특히 교회에 관한 비밀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의 사역은 영원에서 시험을 받을 때 불타버릴 것이다. 그는 구원은 받았으나 상은 없을 것이며, 롯처럼 불 가운데서 구원을 받은 것과도 같을 것이다.
파괴자(17절)-그는 전혀 교회를 세우지 않으며, 오히려 교회를 헐어버린다. 17절에 나오는 “더럽힌다“는 말은 사실상 “파괴한다“는 말이다. 무엇을 파괴하는 일에는 어떠한 재능이나 지능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어린 아이조차(고린도 교인들은 젖먹이였다), 무엇을 부수는 일은 할 수 있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오늘날 목회자의 이기적인 사역이 지교회를 육성하는 대신 파괴하는 경우가 있다. 하나님은 맹렬한 심판으로 그들을 기다리고 계신다.
바울이 이런 모든 말을 통하여 가르치고 있는 것은,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자기의 목회자들을 사랑하며 존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교회를 건설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권하는 내용이다. 이기적인 목적을 위하여 “목회자를 추종하는 사람“은 목회자가 나무나 풀, 또는 짚으로 집을 짓도록 돕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말씀을 사랑하고, 목회자가 말씀을 가르칠 때에 이에 순종하며, 지교회로 하여금 최선의 영성을 유지하도록 하려는 그리스도인은 금과 은과 보석으로 건축하도록 목회자를 돕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많은 “위대한 교회들“이 실제로는 전혀 위대하지 않음을 드러낼 것인데, 모든 것들이 불타 버릴 것이다!
18-23절에서 그는 사람들을 영화롭게 하는 일들로 그들에게 주의를 주고 있다. 2장 5절에서 그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고 경고하였는데 이제는 사람을 영화롭게 하지 말 것을 경고한다. 젖먹이 그리스도인은 “위대한 사람들“의 빛을 쬐기를 좋아한다. 19, 20절에서 바울은 욥기 5장 13절과 시편 94편 11절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있는데 왜 인간들을 영화롭게 해야 하는가? 만일 아볼로나 바울이 그들에게 축복이 되었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지 그들에게 돌려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은, 재능 있는 사람들이거나, 생활의 축복이거나 앞으로 올 일이거나 무엇이든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축복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면 인간에게 영광을 돌리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이다.
새로운 그리스도인이 지교회, 그리고 목회자에 대한 자기 자신의 관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가족의 한 구성원으로서(1-5절) 그는 음식을 받고 자라가야 하며(엡 4:1-16), 하나님의 정원의 일부로서(6-9절), 그는 말씀의 씨앗을 받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 또한 성전의 돌로서(10:1-15/ 벧전 2:4-8),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성전이 성장하며 강해지도록 도와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을 살펴보면 교회가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어 지고 있는지, 아니면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지어 지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그리스도인은 그의 목회자에게 영광을 돌려서는 안되나, 그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며 따르듯이 그를 존중하고 순종해야 할 것이다(히 13:17)."
고전 4:1-7
▣ 바울이 보인 겸손의 본-고린도전서 4장-
바울은 세 가지의 목회자상을 제시하며 사역에 대한 논의를 계속한다.
1. 하나님의 재산에 대한 청지기(4:1-7)
청지기에게는 자신의 소유가 없다. 그는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노예이다. 창세기 24장을 읽고, 아브라함의 재산을 다루며 그의 명령을 준행하는 동양의 청지기상을 알아보자(눅 12:35-/눅 15:1-8/눅 19:12-27/마 25:14-30 참조). 목회자는 청지기의 일을 하는 종이다. 1절에 나오는 “일꾼“이란 말은 본래 “배의 가장 낮은 곳에서 노를 젓는 노예“를 말한다. 바울은 얼마나 겸손한가!
청지기의 책임은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이다. 그리고 목회자의 책임은 주님께 속한 일들을 가르치는 일, 특히 교회의 비밀(mystery)에 관련된 진리를 가르치는 데에 충성을 다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주인에게서 그의 신실함에 따라 판단을 받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일꾼들을 판단하고 서로 비교하는 것은 참으로 비극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3-5절에서 바울은 세 가지 종류의 심판을 제시한다. 첫째는 인간들의 심판으로서, 바울은 이에 찬동하지 않는다. 둘째로는 자기 심판이며, 그는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다“고 말한다. 세째로는 하나님의 심판으로서 유일한 참된 심판이다. 다른 말로 하면, 고린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다른 종들을 평가하며 서로를 비교하면서 스스로 매우 영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바울은 그들이 매우 육신적이라고 말하며, 그들의 판단은 하나님의 영적인 종들에게 아무 의미도 없다고 말한다.
참된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재산을 관리하는 청지기이며, 그의 유일한 관심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지 인간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심판이 열릴 때, 하나님은 은밀한 일들을 나타내시며 상을 베푸실 것이다. 그 때에 모든 사람은 자신의 상을 얻을 것이며(3:8),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4:5). 인간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사는 것은 우리의 청지기 직분을 생각할 때에 어리석은 일이다.
6-7절에서 바울은 전체의 문제를 요약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서서는 안 되며, 성경이 허락하는 정도를 벗어나 사람들을 취급해서는 안된다. 이들은 자신의 영적인 지도자들을 사랑하고 존중해야 하며, 말씀을 가르치는 이들에게 순종해야 한다. 서로를 비교하거나 인간들에게 영광을 돌리거나, 또는 인간을 높이며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일이므로 피해야만 한다.
결국, 사람을 서로 다르게 만드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모든 사람은 각자의 은사를 가지고 있는데, 이 영적인 은사들조차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은사에 대해서 누가 감히 자랑할 수 있을 것인가!"
고전 4:8-13
2. 세상의 구경거리(4:8-13)
세상은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자들에게 반대가 된다. 바울은 약간의 “영적인 풍자“를 사용하여 이렇게 말한다. “너희 고린도 사람들은 서로를 자랑하며 이 사람과 저 사람을 비교한다. 그리고는 마치 보좌에 앉은 왕처럼 군다. 왕으로 다스리며 다른 사람들을 내려다 보기란 참으로 멋진 일일 것이다! 나 역시 너희와 함께 다스리고 싶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 나는 미움받는 사도가 되어야 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상의 구경거리요 얼간이가 되어야 한다“.
바울이 묘사한 내용은 바울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것이었다. 승리를 거둔 장군이 귀환할 때는 언제나 성의 거리에서 영광스러운 행진을 벌였다. 그의 전공을 자랑삼아 사로잡은 귀족들과 적장들을 전시하고는 그 행진이 끝나면 그들을 투기장에 넣어 짐승들에게 죽임을 당하게 하였다. 바울은 자신을 이 포로된 군인들에게 비교하면서,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이 이 행진 대열의 맨 앞에서 자랑하고 있는 반면에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기로 예정된“ 자로 여겼다. 하나님의 참된 종이 세상에 구경거리가 되어야 하다니!
바울은 유대인의 위대한 지도자로서 명예와 재산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것을 포기하였으며(빌3장), 굶주림과 헐벗음, 위험과 죽음을 택했다. 세상은 이러한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으며 이러한 사람을 어리석다고 부른다. 고린도 사람들이 자신의 육신적인 삶을 바울과 다른 사도들이 하고 있는 희생과 비교했을 때 얼마나 죄악됨을 실감했을 것인가!
바울은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그들은 지혜로왔으며, 바울은 연약하였으나 그들은 강하였다. 바울이 세상의 미움을 받았던 반면에, 이들은 세상의 호의를 구하며 세상의 지혜를 따르고 있었다. 바울은 13절에서 자신을 “이 땅의 찌꺼기“(세상의 쓰레기)라고 부르는 데까지 이른다. 바울은 사람들이 복음을 들을 수있게 하기 위하여 얼마나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였는가!
이러한 마음 자세는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의 종들에게도 있어야 한다. 세상에 정착하여 세상과 같이 살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가! 그리고, 모든 사람이 우리에 대해서 칭찬하는 것을 경계해야 할 때에 세상의 기준을 받아들이고 명예를"
고전 4:14-21
구하게 되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가!
3. 영적인 아버지(4:14-21)
예수께서는 지상에 있는 어떤 사람에게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라고 경고하신다(마 23:9), 그러나, 영혼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그들에게 “아버지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살전 2:11 참조). 바울은 그들에게 영적인 아버지였었고, 이로 말미암아 그는 복음을 전하여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일을 도왔다.
죄인은 성령(요 3:6)과 말씀(벧전 1:23)을 통하여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난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을 복음으로 인도하는 데에 인간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신다. 고린도에 교회를 세울 수 있기 위해서 바울은 “영적인 산고“를 겪어야 했다(갈 4:19).
바울을 따랐던 사람들은 고린도 교회의 교사들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한 아버지만이 있었으며, 그를 더욱 존중하고 그의 말에 더욱 귀를 기울여야 했다. 바울은 죄에 대하여 그들을 경고하였으나 그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있어 그들을 돕기 위하여 디모데를 보내고 있다. 이 일이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그가 직접 가게 될 것이었다.
아버지로서, 바로잡아 주는 매를 들고 올 것인가, 아니면 칭찬과 승인을 가지고 올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태도에 달려 있었다. 역사는, 그들이 젊은 디모데의 말을 듣지 않았으므로 디도가 고린도에 가야 했다고 전한다.
본 장에는 육신적인 우월감을 나타내는 “교만“이라는 단어가 여러 번 나온다(6, 18절/ 5:2). 그들을 교만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었는가? 교회에 머물러 있는 죄의 누룩이 아니었겠는가?(5:6) 죄의 누룩이 자람에 따라 그릇된 영성, 교만을 부풀게 하였다. 바울은 이 점을 경고해야 할 필요성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러한 “교만한 자세“는 언제나 말을 많이 하는 데서 나타난다. 그들은 “바울은 결코 여기에 오지 않을 것이다. 엄격한 편지를 써서 우리를 위협하지만 결코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 분명해!“라고 말하고 있었다(18-19절).
그러나, 사도는 이렇게 경고하였다. “조심하라 ! 말이란 값싼 것이다. 내가 가면 이 말이 많고 자만스러운 그리스도인들이 어느 정도로 말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어느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볼 것이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말이 많은 그리스도인이요 자랑하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나 그의 생활에는 하나님의 영이 나타나지 않는다“(2:4 참조).
물론, 바울이 그의 영적인 자녀들에게 이런 식으로 말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그는 충성스럽지 않으면 안 되었다.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주의를 주고 훈계해야 하는 것처럼 “영적인 아버지들“(목회자)도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의를 주고 훈계해야만 한다. 이것은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필요한 것이다.
이 두 장에서 바울은 목회자에 대한 교회의 자세를 설명하고 있다. 목회자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며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그를 높이고, 그가 전하는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을 높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하는 세상적인 영광이어서는 안 된다.
목회자는 말씀을 맡아 사역하며, 씨를 뿌리고 성전을 세우며 하나님의 비밀을 나누어 준다. 그리고 세상이 바라보는 앞에서 부끄러움의 고난을 감내하며 사랑으로 교회 가족의 아버지 역할을 감당한다. 이것은 막중한 책임이므로, 하나님의 충만하심만이 사람으로 하여금 이러한 책임을 완수할 수 있게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