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면서 크는 아이들
안녕? 난 연아란다. 내가 누구란 걸 알고 나면 너는 이 편지를 끝까지 읽지도 않고 쓰레기통에 버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겠다.
개학을 하니 네가 학교에 오지 않았더라. 아파서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말을 처음에 들었을 땐 솔직히 '저 놈이 천벌을 받았지.' 라고 생각했었어. 그런데 네가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도 학교에 오지 않으니 왠지 궁금하기도 하고 섭섭했어.
(중략)
어서 빨리 나아서 학교에 나오렴. 학교에 나와서 나랑 다시 싸우자!
연아의 편지는 너무도 강하게 끝맺음을 하고 있었다. 여름방학을 마치고 개학을 하니 한 남자 학생이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병원에 입원했다고 했지만 평소에 건강했던 아이라서 별로 걱정을 하지 않았으나 3일이 지나도 등교하지 않는다. 은근히 걱정이 되던 어느 날 아침에 그 학생의 동생이 전해 준 어머니가 쓰신 편지 속에는 40도의 고열에 시달리며 사경을 헤맨 일이며, 방학 내내 원인규명을 위해 각종 검사를 받으면서 지치고 힘든 시간을 보냈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반 아이들에게 친구의 상태를 알려주며 A가 어서 빨리 나아서 학교에 나올 수 있도록 격려편지를 쓰도록 했다. 토요일 늦은 오후에 편지가 가득 든 큰 봉투 속에 내 편지도 함께 넣고서 병문안을 갔다. 볼이 통통한 아이였는데 힘든 병원 생활로 얼굴이 많이 얇아져 버렸다.
인규의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에 A는 즐겁게 편지를 읽고 있다. 문득 그 아이의 얼굴 표정이 복잡 미묘해 보여서 재미있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가장 기억에 남는 편지가 어떤 것이냐고 물어보았다. 인규는 마치 무슨 암호가 가득해 보이는 편지 한 통과 B라는 여자아이가 쓴 편지가 가장 인상적이라고 했다.
학교에 돌아오면 암호 같은 편지는 네가 도저히 못 풀겠다고 하며 누가 쓴 것인지 물어서 해결하면 되겠다고 말해주면서도 나는 내심 연아라는 아이가 쓴 편지 내용이 몹시 궁금했다. 연아라는 아이는 1학기 내내 반 친구들로부터 엄청나게 왕따를 당해서 담임인 나로써도 몹시 마음이 안타깝던 아이였기 때문이다. 그 아이의 왕따 문제는 가장 해결하기 힘든 문제였고, 가장 신경을 많이 썼던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진행형이었다.
인규는 연아에게 내가 보는 앞에서도 심한 말과 행동으로 상처를 주는 일도 많았기에 더욱 궁금했다. 특히 언어폭행은 극에 달할 정도로 심했었다. 나에게 보여 줄 수 있느냐고 했더니 편지를 넘겨주었다.
난 이 기회에 인규에게 연아랑 사이좋게 지내면서 2학기에는 네가 앞장서서 연아와 반 친구들이 서로 좋은 친구가 되도록 앞장서 달라는 당부를 했다. 자세한 내용을 모르시는 인규의 어머니께도 그 동안에 일어났던 일들을 들려주면서 협조를 부탁했다. 그 어머니는 B에게는 꼭 답장을 해 주라고 하면서 아들을 타일렀다. 인규의 진지했던 표정을 생각하면서 병원을 나서는 발걸음이 경쾌했다.
그 후 1주일 뒤, 아직 완쾌되진 않았지만 조금씩 적응하기 위해 교실로 돌아온 인규는 하교하면서 - 많은 제자들을 두신 이정선 선생님께 선생님만 믿고 공부하는 인규 올림 -
[퇴원을 하고] 라고 쓴 편지 한 통을 전해 주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 인규에요.
병원 있다 와서 글씨가 이상해졌네요.
이게 최대로 노력한 것이니 이해해 주세요.
저 이번을 계기로 많은 걸 배우게 되었어요. '사랑' '믿음' '배려심' 3가지요. 특히 앞자리에서 같이 입원해 있는 동생에게서 사랑을 배웠어요. 걔는 부모도 없고 '다운증후군'이라는 장애를 가지고 있어서 애망원이라는 복지시설에서 살아요. 많은 장애아 사이에서 사랑을 받지 못하다가 우리가 귀엽다고 자꾸 사랑을 주니 일어서기도 했어요.
또 '믿음!'
저를 담당하신 의사선생님들을 믿을 수 있어서 나았어요.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배려심!' 연아한테 배웠어요. 그 때 그 편지보고 말이에요.
1년 동안 저 맡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이제 많이 배웠으니 공부도 열심히 할게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이 편지를 읽으면서 너무 기뻐서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몇 번을 읽고 또 읽었다. 육체의 큰 아픔을 통해 정신적으로 부쩍 자라난 모습의 그 기쁨은 며칠 뒤에 인규의 일기장을 검사하면서 더욱 감동으로 가슴이 뜨거워져서 나도 모르게 눈이 젖어 들고 있었다.
일기 제목 : 친 구
토요일에 내가 강원이랑 친구 B한테 편지를 주었다.
편지 때문일까?
둘은 나에게 대하는 행동이 바뀌었다.
강원이에게는 친해지고 싶었는데 말을 못해서 썼고, B에게는 병원에서 잘못을 뉘우친 뒤에 내 잘못을 사과하려고 썼다.
학교에서도 강원이는
"인규! 안녕?"이라고 먼저 인사해 주고 집에 갈 때도 같이 가자고 부르기도 했다.
연아는 오늘 미술 시간에 휴지가 많이 필요해서 휴지를 빌렸는데 너무 많이 써서 내일 새 것 하나 준다고 했다. 그런데 화내지 않고 웃으면서 괜찮다고 말했다.
비록 편지 한통이지만 나랑 떨어져 있던 친구가 가까이 있으니 나도 편하고 고맙기도 하다.
특히 나는 싸움이 없어져서 좋다. 역시 친구란 이럴 때 일수록 생각이 나는 것 같다.
이제는 다른 친구와도 좋은 사이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고맙다. 인규야!
너의 일기를 읽는데 감동이 밀려와서 눈물이 다 나는구나. 어서 예전처럼 건강해 지자.
생각도 바르고 행동도 바르다면 바로 '참사람'이란다. 또 건강이 가장 중요하겠지. 예전처럼 어서 건강해지렴. 앞으로 친구들과 더욱 친하게 지내길 바란다.
나는 일기장 끝에 짧은 글을 써 주면서 속으로는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이 순수하고 예쁜 아이들, 곱고 바른 마음으로 변화하는 아이들이 있음을 또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아프면서 크는 아이들' 하지만 아이들이 병마와 같은 큰 고통을 받지 않고 큰 상처도 없이, 스스로 견뎌낼 수 있을 만큼의 아주 작디작은 아픔만 있었으면 좋겠다.
진도 앞 바다에 4월의 꽃 같은 아이들이 떠났다. ‘세월호’는 한 세월도 살지 못한 꽃봉오리를 삼키고 우리를 슬픔의 바다로 내몰았다. 아프면서 크지도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