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字(한자)의 書體(서체) 변화와 書藝(서예) 작품 감상
박물관이나 기타 전시 공간에서 다양한 서예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한문작품도 대단히 많다. 특히 조상들의 남긴 기록들은 한문으로 된 것이 많은데 한자는 어떻게 만들어지고 변천되었는가를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한자의 기원은 甲骨文(갑골문)에서 시작되어 金文(금문), 篆書(전서), 隸書(예서), 楷書(해서), 草書(초서), 行書(행서)의 형태로 발전하여 왔는데 그 정의와 특징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자 甲骨文(갑골문): 甲骨의 '甲(갑)'은 거북의 배 껍질의 의미이고, '骨(골)'은 소 같은 짐승의 어깨 뼈나 넓적다리 뼈 같은 것입니다. 기원전 1,500년경부터 1,000년 무렵까지 있었던 중국 고대 殷(은)나라[商(상)이라고도 함]는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정치형태를 지니고 있었는데, 전쟁 등의 국가 중대사부터 모든 행위와 현상을 제사장이 天神(천신)이나 自然神(자연신), 혹은 祖上神(조상신)에게 이 갑골을 이용해 점을 쳤습니다. 점을 치는 방법은 주로 갑골에 구멍 같은 흠집을 내고 그것을 불에 올려놓고, 열로 인해 그 흠집으로부터 갈라진 방향에 따라 吉凶(길흉)의 판단했습니다. 주로 점을 친 후에 그 결과를 갑골에 기록을 해 놓았기 때문에 甲骨文(갑골문)은 “卜辭(복사)"라고도 불리고, 칼로 새겨놓았기 때문에 “契文(계문)”이라고도 합니다. 또한 1899년 홍수 때 처음 발견된 갑골문은 그 지역[현재 하남성(河南城) 안양현(安陽縣) 소둔(小屯)]이 殷(은)나라의 도읍지였기 때문에 '은나라의 옛터'라는 의미로 ‘殷墟(은허)'라고 불리고 그 문자를 ‘殷墟文字(은허문자)'라고도 합니다. 갑골문의 특징을 보면 갑골은 그 자체가 아주 딱딱하기 때문에 그 표면에 글자를 새기기 위해서 靑銅(청동) 같은 금속이나 硬玉(경옥) 같은 단단한 칼날을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래서 갑골문은 서체가 가늘고 긴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소수의 갑골문은 먹이나 붉은 먹을 이용해 붓으로 쓰여진 것들도 발견되고 있습니다. 또한 갑골문은 원시 문자의 성격을 지니고 있어 회화적 요소가 강한 특징이 있습니다. 사물의 모양을 그대로 묘사해 문자화했기 때문에 象形文字(상형문자)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주로 단독적인 獨體字(독체자)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현재 대략 4,000여 자 정도를 확인했는데, 아직 상당수의 글자는 해독을 못하고 있고, 특이한 점은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동일한 글자도 그 모양의 차이가 상당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金文(금문) 또는 鐘鼎文(종정문): ‘金(금)'은 중국 고대 靑銅(청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로 金文(금문)은 靑銅器(청동기)를 주조할 때 주물 틀(거푸집)에 새겨 넣은 글자들인데, 이로 인해 金文(금문)의 다른 명칭으로 청동기의 대표적인 유물인 樂器類(악기류)의 쇠북[鐘]이나 禮器類(예기류)의 솥[鼎]의 이름에서 유래해 鐘鼎文(종정문)이라고도 합니다. 시기적으로는 중국 고대 周(주)나라 시절의 유물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지만, 그 이전 왕조인 殷(은)나라에서 사용된 금문이 발견되기도 하였고, 후대 鐵器(철기) 시대인 漢(한)나라 때까지 금문의 형태를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거의 1,000년에 가까운 사용 시기로 인해 다양한 서체의 특징을 보이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갑골문 보다 더 원형에 가까운 자형을 나타내고있는 것들도 있습니다 아울러 금문이 새겨진 器物(기물)에는 한 글자만 주조된 것부터 몇 백 글자가 주조된 기물까지 발견되었는데, 새겨진 내용으로는 주조된 청동 기물의 축복을 기원하는 내용을 표시하거나 주조된 연원이나 기물의 주인 등을 표시했고, 또한 전반적인 당시의 상황인 전쟁이나 祭禮(제례), 계약 등을 기록하고 있어 당시의 정치나 사회, 문화 등을 이해하는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金文의 특징을 보면 금문은 청동기를 주조할 때 주물의 틀에 글자를 새기는 것이었기에, 주조되어 완성된 器物(기물)에 명확하게 글자가 보여지기 위해서는 새기는 글자의 크기가 크고 굵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가늘고 긴 서체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던 갑골문과 비교하면 금문은 넓고 굵은 서체의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동안 광범위한 지역에서 사용되었던 이유로 인해 동일한 글자가 여러 모양의 형태로 나타나는 異體字(이체자)가 많은 특징을 보이고 있습니다. 또한 갑골문에 비해 금문은 회화적 요소로부터 점차 문자로서의 특징을 지닌 기호적 요소가 많이 나타나 점차 문자의 틀이 발전되어 가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 주로 두 개 이상의 개념으로 분석이 가능한 合體字(합체자)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篆書(전서): 이전의 서체에서 획일적인 변화를 보인 篆書(전서)는 인위적인 수정 작업으로 인해 탄생된 서체였기에 통일된 특징을 갖추기 시작한 최초의 문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본래 篆書(전서)는 大篆(대전)과 小篆(소전)으로 구분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전서의 대표격은 小篆을 주로 말합니다. 殷代(은대)와 周代(주대)의 甲骨文과 金文의 사용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졌지만, 周나라 말기의 春秋時代(춘추시대)와 戰國時代(전국시대)를 거치면서 각 지역별 문화의 특성이 독립적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문자 역시 각 지역의 국가별로 개별적 특징을 보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진나라의 전국통일로 인해 모든 문화와 문물의 인위적 통일까지 이어집니다. 역사에 등장하는 진시황의 文字統一(문자통일)이라는 것이 바로 小篆(소전)의 서체로 획일화시킨 것입니다. 사료에 의하면 진시황제의 丞相(승상)이었던 李斯(이사) 등이 이전에 흩어져 있던 복잡하고 불편한 문자들을 통일시키게 됩니다. 특이한 점은 진나라가 통일 이전에 사용하던 주나라 宣王(선왕)때 太史(태사)가 만들어 주나라 말기 전국시대까지 사용하던 문자를 그대로 계승한 것이 아니라 이것을 바탕으로 새롭게 개량해서 만들게 되었는데, 통일 이전 사용하던 점과 획의 범위가 복잡한 조형미를 지녔던 문자를 大篆(대전)이라 하고, 통일된 새로운 문자를 小篆(소전)이라고 하는데 진의 흥망과 함께 운명을 같이하여 사용시기는 그리 오래지 않고 곧 새로운 서체인 隸書(예서)가 등장하게 됩니다. 篆書(小篆)의 특징을 보면 인위적인 통일이라는 점으로 인해 서체가 거의 획일적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갑골문과 金文(금문)이 지닌 단점 중의 하나인 동일 글자의 다양한 異體字(이체자)들로 인해 통일성이 부족한 아쉬움이 있는 것에 비해 小篆(소전)은 인위적으로 통일을 시켰기 때문에 자형의 불일치를 완전하게 해소하였고 小篆(소전)은 자형 자체로 보더라도 이전의 갑골문이나 금문보다 상당하게 象形(상형)의 회화적 성격을 탈피하고 문자의 기호적 성격으로 전환하고 있는 특징을 보입니다. 이와 같이 자형의 일치로 인해 하나의 완전한 글자들로 형태를 지니게 된 소전은 현재까지 文字學(문자학) 연구의 기본적인 자형으로 이어오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까지 완전한 문자의 특성을 지닌 것은 아닙니다. 가장 미흡한 점이 서체에서 획이 꺾이는 부분을 모두 둥글게 표현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隸書(예서): 隸書(예서)의 명칭은 예서가 형성된 배경과 연결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학설로는 法家(법가)를 바탕으로 철권통치를 행했던 秦(진)나라였기에 강한 刑罰(형벌)의 행사로 勞役(노역)의 죄수들이 많아 이 죄수들을 관리하는 刑吏(형리)들이 간편하고 쉬운 행정 문서를 다루기 위해 고안했다고 해서 '노예 예(隸)'자를 쓴 隸書(예서)라 명명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의 문자의 흐름은 秦(진)나라의 焚書坑儒(분서갱유)에 이어 漢(한)나라 초기까지는 예서의 체제가 완성되지 않았는데, 漢(한) 武帝(무제) 시대에 예서가 국가의 공식 문자로 정착되고 儒學(유학)이 國敎(국교)가 된 이후 經傳(경전)의 해석을 둘러싼 왕성한 학문적 발전과 함께 서체 역시 큰 진전을 가져오게 됩니다. 한 무제의 앞 景帝(경제) 때 山東(산동) 지방 曲阜(곡부)의 孔子(공자)의 古宅(고택)을 개축하다가 벽 속에서 대량으로 발견된 經傳(경전)에 대한 해석으로 訓?學(훈고학)이 발전하는데, 이 벽 속에서 발견된 경전에 기록된 문자는 한대의 예서보다 훨씬 이전의 서체였기에 이를 古文經書(고문경서)라 하고 당시 사용되던 경서를 今文經書(금문경서)라 합니다. 隸書(예서)의 특징을 보면 진나라의 小篆(소전)은 이전의 甲骨文(갑골문)이나 金文(금문)에 비해 획기적인 발전을 이룬 한자의 개념을 제시한 서체였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문자 자체로 보면 획이 둥글고 자형의 성분들을 그대로 살린 다소 불편하고 복잡한 형태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실용적 방향으로 의미전달에 큰 지장이 없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쉽고 빨리 쓸 수 있는 형태로 간략하게 된 것입니다. 곡선의 둥근 자형으로 인해 아직 회화적 요소가 남아 있던 소전의 자형에서 완전히 벗어나 직선의 기호적 성격을 지닌 서체를 만들어 전체적인 자형이 사각형 모양으로 되는 전형을 이루게 됩니다. 현대의 한자에서 둥근 원형 모양의 획이 없는 것이 바로 이 예서에서 형성된 것입니다.
楷書(해서): 중국 후한(後漢)시대 말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楷書(해서)는 ‘楷'자가 본보기, 모범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듯이 표준으로 삼을 만한 서체라는 의미입니다. 魏(위), 晉(진), 南北朝(남북조)시대에 그 기틀이 완성된 楷書(해서)는 東晋(동진)의 유명한 王羲之(왕희지)와 함께 唐(당)나라에 들어서 歐陽詢(구양순)이나 顔眞卿(안진경) 등의 걸출한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그들 이름의 서체라는 명칭이 생길 정도로 서체의 전형이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해서가 현재까지 표준 서체로서의 면모를 지닐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인물들에 의해서 완성되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한가지 楷書體(해서체)의 정착에 앞서 隸書(예서)에서 또 다른 한 축을 이룬 서체로 八分體(팔분체)를 언급합니다. 漢나라 중기에 蔡邕(채옹)이라는 인물이 만들었다는 팔분체는 篆書(전서)의 요소를 완전히 탈피한 예서의 틀을 완성시킨 서체인데, 특히 장식미를 더한 양식의 서체로 후한시대에 많이 사용됨으로 해서 예서와 해서의 과도기적 단계의 서체라고 보기도 합니다. 楷書의 특징을 보면 隸書에서 발전된 해서체의 가장 커다란 특징은 隸書體 자형의 전체 윤곽이 다소 가로로 퍼진 형태라면, 楷書體는 다소 세로로 퍼진 형태를 지니고 있는 점입니다. 이는 서체가 보다 부드러우면서도 명확한 양식으로 발전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인데, 역시 유명한 서예가들의 서체 전형으로 인해 정착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草書(초서): 초서는 아주 거칠고 단정하지 못하다는 의미인 “草率(초솔)하다"는 의미에서 극도로 흘려서 쓴 서체라는 의미로 草書(초서)라는 명칭을 사용합니다. 表意文字(표의문자)의 단점인 書體(서체)의 복잡함과 난해함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으로 극도로 흘려서 빠르고 간단하게 쓴 서체를 생각해 낸 것입니다. 규격을 갖춘 서체인 隸書로부터 楷書로 발전했지만, 글자를 쓸 때 너무 복잡하고 많은 정성이 들어가 쓰는 시간도 꾀 필요한데,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간략하게 흘려 쓰는 草書가 생겨난 것입니다. 현재 초서는 문자로서의 실용성을 넘어 예술적 경지로까지 발전하여 그 멋을 자랑하고 있지만, 너무 간략하게 흘려 쓰게 된 결과 解讀의 어려움을 가져와 실용성을 상실해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草書의 특징을 보면 隸書나 楷書의 규격성과 복잡함을 해소하기 위해 글자의 윤곽이나 일부분만으로 표현하면서 전체적으로 획을 연결해서 신속하게 쓸 수 있게 발전합니다.. 발생시기도 예서가 한창 번성하던 한漢나라시대에 함께 등장했는데, 초기의 章草(장초)에서 東晋(동진)시대의 今草(금초)와 唐(당)나라 때의 狂草(광초)까지 다양하게 발전을 하지만 실용성은 떨어지는데 章草는 초기의 초서체로 秦末漢初(진말한초)에 隸書體(예서체)를 간략하게 흘려 쓰기 시작하면서 발생되었는데, 章帝(장제)가 즐겨 써서 章草라고 하고 今草는 後漢(후한)에서 東晋(동진)시대에 章草에서 발전해 독자적인 서체의 틀을 완성해 현재까지 일반적인 草書의 틀을 의미하며 狂草(광초)는 마치 미친 듯이 거의 끊어짐 없이 글자들까지 이어서 쓰는 형식으로 唐(당)나라 때 벌써 예술적 경지로 발전합니다.
行書(행서): 규격체로 인해 비능률적인 楷書(해서)의 단점과 지나친 간략화로 난해한 草書의 단점을 함께 보완하고자 생겨난 서체가 行書(행서)입니다. 발생시기에 대해서 흔히 行書(행서)가 楷書(해서)와 草書(초서)의 중간형태를 띠고 있고, 일반적으로 草書가 서체의 종류 가운데 가장 흘려 쓴 형태이기 때문에 복잡함에서 단순함으로, 곧 규격체에서 흘림체로 변천하는 과정으로 볼 때 초서가 가장 마지막 단계의 書體(서체)로 보여, 발생시기도 초서가 가장 후대의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 후대의 서체는 行書(행서)입니다. 行書의 특징을 보면 後漢(후한) 말기부터 시작되어 晉(진)의 王羲之(왕희지)가 등장하면서 확고한 틀이 완성된 行書는 楷書의 筆記體(필기체) 형태를 띠고 있어 草書처럼 획을 연결해 쓰면서도 지나친 간략화를 하지 않아 쓰기 쉽고 보기 좋은 두 가지 양상을 모두 해결했습니다. 특히 서예의 대표적 작품으로 꼽는 왕희지의《난정서(蘭亭序)》는 행서의 특징인 표현의 다양성과 형태의 변화를 만끽할 수 있는 최고의 작품으로 전해집니다. 행서의 기본적인 특징은 해서와의 차이점에서 쉽게 알 수 있는데, 楷書가 획을 쓰는 방식이 정성을 들여 헛된 부분이 나타나지 않게 쓰는 감추는 방식인 ‘藏鋒(장봉)의 필체'인 반면에 行書는 자연스럽게 필기하는 방식이어서 획의 연결선 등을 드러내는 방식인 ‘露鋒(노봉)의 필체'를 지니고 있습니다. 앞으로 서예작품을 감상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기 바라고 글자체는 아래 그림을 참고하세요 |
출처: 권춘강 원문보기 글쓴이: 권춘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