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빌레몬의 신앙생활'입니다.
빌레몬서는 한 장 뿐인 짧은 내용인데 사도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골로새 교회의 성도인 빌레몬과 그 교회에 편지를 쓴 것입니다. 왜냐하면 빌레몬의 집에서 오네시모라는 종이 도망 나왔다가 잡혀서 로마감옥에 있는 중에 사도바울을 만나 복음을 듣고 거듭나게 되자 그를 주인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맞아주라고 부탁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파하라고 했는데, 실제로 자신은 정말 그렇게 살았습니다. 자유의 몸일 때는 어디든지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잡혔을 때는 감옥 안에서도 복음을 전하여 제자를 삼고 또 다른 방법이 없을 때는 편지를 써서 복음을 전하고(기록으로 남겨 문서 선교를 하고), 셋방에 살 때는 그 집을 전도의 처소로 사용하였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핑계를 대는지 모릅니다. 좁은 집에 살 때는 넓은 데 이사 가야 이웃을 초청할 수 있겠다 하고 넓은 집에 가서는 형편이 조금 풀려야 초청도 할 수 있겠다 하고 여름에는 더워서 안 되고 겨울에는 추워서 안 된다고 합니다. 건강할 때는 바빠서 안 되고 병들었을 때는 아파서 안 된다고 하지만 사도바울은 육체의 가시라고 여길 질병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은 도리어 자기를 낮추게 하고 겸손하게 하는 도구로 삼으면서 핑계치 않고 전도했습니다. 바울은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돼’ 가 아니라 ‘이래도 되고 저래도 돼’였습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전파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상황을 복음 전하는 기회로 사용하고 자신을 주께 드리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베스도총독과 아그립바왕 앞에서는 내가 지금 포승줄에 묶인 것 외에는 당신도 예수님을 믿고 나와 같기를 원한다고 하면서 전도했습니다.
1. 본문에서 바울은 빌레몬의 신앙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스승에 그 제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먼저 5절에 보시면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라고 합니다. 빌레몬은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듣고 바울사도는 그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항상 감사드린다고 했습니다. 빌레몬은 주님만 사랑하고 주의 종과 성도는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주님과 함께 보이는 형제, 자매를 주님 사랑하듯 사랑했습니다. 성도를 사랑하되 차별하여 대하지 않고 모든 성도를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나와 마음이 맞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기에는 비록 어설프고 답답해도 미워하고 멸시하지 않고 안타까이 여겨 감싸주고 기도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열심을 내어 잘 하는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하지 않고 더 잘하도록 칭찬하고 배우고 도전 받는 것이 사랑의 마음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신앙이라면 성도를 또한 주님처럼 사랑하는 것은 신앙의 실천입니다. 빌레몬은 그런 신앙의 삶을 살았습니다. 멋지지 않습니까!
빌레몬은 예수님을 믿은 뒤 복음 사역에 열심을 내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 사역이라면 그의 집을 예배 처소로 제공한 것입니다. 그래서 골로새 교회는 빌레몬의 집에서부터 출발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시작되고(행12:12), 빌립보 교회가 비단 장수 루디아의 집에서 시작되고(행16:40), 에베소 교회가 천막기술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의 가정집에서부터 시작된 것처럼 골로새 교회는 빌레몬의 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편지 서두에 세 사람이 나옵니다. 빌레몬, 그리고 압비아, 아킵보입니다. 압비아는 빌레몬의 아내이고 아킵보는 빌레몬의 아들입니다.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 그랬는데 이것은 즉 빌레몬, 압비아, 아킵보의 집에 있는 교회라는 말입니다. 당시엔 교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가정이 곧 교회였습니다. 곧 골로새교회입니다.
고전16:19에도 보시면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라고 합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도 그 집을 교회로 사용했습니다. 그게 에베소교회입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눔바의 집에 있었습니다(골4:16). 그래서 초기 기독교역사에서 3세기까지는 교회당 유적이 발견되지 않습니다. 교회 건물이 없이 성도의 집을 교회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 당시에만 있는 일이 아니라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선교사님이 복음의 불모지에 들어가서 한 가정을 전도하면 그 집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선교사님들도 어디서 생활하고 어디서 예배를 시작했습니까? 김 아무개 댁, 박 아무개, 강 아무개 댁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 집들이 하나님의 교회로 쓰임 받아 이후에 큰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이렇게까지는 못해도 집이나 가게를 복음전하는 장소, 전도의 장소로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목사 올까봐, 예배드리자고 할까봐 겁내지 마시고요!
복음에 붙들린 빌레몬은 이처럼 주님을 위해 헌신하면서 성도에게는 풍성한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사랑과 믿음은 로마감옥에 있는 바울에게 들려질 정도였습니다. 본문에서 '사랑'이란 단어를 ‘아가펜(αγαπην)’으로 사용하였는데, 이는 그가 성도들을 아가페 사랑으로, 즉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아가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에로스 사랑이 아닙니다. 에로스 사랑으로 사랑하면 큰 일 납니다. 스톨게 사랑도, 필레오 사랑도 아닙니다. 그것을 뛰어넘는 아가페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 즉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실 때, 이 사랑이 아가페 사랑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계명입니다. 혹 얄미운 사람, 만나기 싫은 사람이 있습니까? 얄미운 짓 하는 그에게도 문제가 있겠지만 내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부족한 것도 문제입니다. 내 안에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채우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미움보다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가 정말 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소문이 나게 됩니다. 생활 자체가 예수님의 향기가 나는데 소문이 이상하게 날 수 있겠습니까? 꽃은 향기가 나지만 쓰레기는 악취가 나는 것처럼 예수님을 제대로 믿으면 빌레몬처럼 좋은 소문, 향기가 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감옥에서 그런 소문을 듣고 기뻐했습니다. 우리 성도님도 좋은 소문이 들려서 듣는 우리가 다 즐겁고 기뻐할 수 있길 축복합니다.
2.두 번째는 6절에 보시면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즉 빌레몬을 통한 믿음의 교제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했다는 것입니다. 선을 알게 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여러 가지 축복과 하나님이 행하시는 선하신 계획들이 얼마나 오묘하고 아름다운지를 알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성도의 교제라고 해서 앉아 이야기하다가 도리어 시험 들고 꺼림직 함을 느끼게 된다면 차라리 만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성도간의 바른 교제는 자기 자랑이나 험담이나 불평, 원망으로 영혼이 침체되고 소망이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본문처럼 믿음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께 더 이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소망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나도 저처럼 믿음을 가져야지, 저렇게 어려운 가운데서도 주님을 섬기며 사랑하는구나, 나도 저렇게 사랑해야지, 인내해야지, 기도해야지, 라고 도전을 갖게 하고 비전을 갖게 해줘야 합니다.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데 브레이크를 걸게 하고 방향을 잃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두 세 사람이 모이이더라도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주님이 듣고 계심을 믿고 주 앞에서 하듯 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믿음의 교제입니다. 그러한 교제는 우리로 하나님의 선을 알게 하고 교제 속에서 기쁨을 얻고 연약한 무릎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내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다고, 하나님이 이렇게 해주셨다고 간증한다면 듣는 사람도 소망을 그리스도께 가지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께 나아가도록 할 것입니다. 빌레몬과의 교제가 이러했습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우리도 이러한 교제가 있게 되길 축복합니다.
3. 세 번째는 결과입니다만 7절에 보시면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고 합니다. 빌레몬을 통해서 성도들의 마음이 평안함을 얻었습니다. 바울사도는 기쁨과 도리어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 빌레몬은 어떤 사람입니까? 한 마디로 해바라기 노래 제목처럼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입니다. 그대 내게 평안을 주는 사람, 그대 내게 기쁨을 주는 사람, 그대 내게 위로를 주는 사람, 그대 내게 소망을 주는 사람, 그대와 함께라면 나는 좋겠네, 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실 이 노래를 들으면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이란 가사를 반대로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나는 누구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인가’, ‘나는 누구에게 평안을 주고 기쁨과 위로를 주고 있는 사람인가’, 반문해보아야 합니다. 나는 누군가를 힘들게 하고 어렵게 하고 불행하게 하지는 않는가요? 우리도 행복을 주는 사람이 되길 축복합니다.
'평안'이란 단어의 뜻은 ‘쉬게 하다. 회복시키다. 안식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빌레몬의 사랑과 믿음의 행함이 많은 성도들에게 평안을 끼쳤습니다. 빌레몬은 생각만 해도 웃음 짓게 하고 힘이 나게 하고 평안함과 위로를 주는 성도였습니다. 바울은 감옥에서도 빌레몬을 생각하니 흐뭇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서로에게 평안함을 주고 기쁨을 느끼게 하고 마음을 위로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생각만 해도 그리워지는 사람, 찾아가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어야지, 지척에 있어도 지나가다 만날까봐 걱정하고 마주쳐도 피하고 싶은 사람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도 누군가에게 그리움을 주는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보고 싶어 찾아오는 사람이 있어야지, 찾아가도 만나주지 않으려고 피하는 사람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고 평안을 주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가는 곳마다, 만나는 이마다 분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선포하시고 사랑하게 하시고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세상이 알지 못하는 참 평안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안식을 주러 오셨습니다. 내게로 오는 자를 쉬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기쁨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기쁨을 주리니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리라, 그래서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평안과 기쁨을 주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고백합니다. 고후1:24에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도 다른 사람의 기쁨을 위하고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일하는 것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게 목적이 아니라 진정한 목적은 당신이 충만한 기쁨을 찾고 행복을 찾도록 돕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의 사역 목적이고 방향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지만 성도의 행복과 기쁨도 위하는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 진정한 기쁨을 찾고 자유를 얻고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거친 세상을 살면서 잃어버리고 빼앗긴 것들을 주님으로 인해 찾고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이고 목적이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도 그리되길 소원합니다.
빌레몬의 신앙생활은 우리에게 너무도 귀한 본이 되고 있습니다. 그는 바른 신앙생활을 한 성도입니다. 우리도 신앙이 생활로 나타나는 삶이, 신앙에 의한 삶이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