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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투쟁의 성지 연변조선족자치주를 가다(47)
반일인민유격대 창건 준비과정과 창건 후 항일투쟁
역사적인 《반일인민유격대창건》 종합(4)
9. 조-중 반일 · 항일연대투쟁을 위한 반일부대공작사업
나라를 빼앗기고 정든 고향 조국산천을 떠나 낯 설고 물 설은 남의 나라 땅에 가서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고 투쟁의 길에 나선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다 장애가 되었다. 특히나 현대사회도 여전하지만 약소민족 및 나라들 사이에 이간질을 부추기는 것은 제국주의자들의 속성이다. 즉 “분열하여 통치하라”라는 원칙에는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만약 자신들이 지배하고자 하는 나라나 민족들이 분열하지 않고 모두가 일치단결하여 자신들에게 저항을 하게 된다면 제국주의침략자들에게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약소민족이라 할지라도 모두가 목숨 걸고 저항을 한다면 그들의 야욕은 좌절되거나 설사 목적을 달성한다 할지라도 자신들의 희생이 너무 크다. 따라서 온 누리에 제국주의가 등장한 이래 그들에게는 철칙이 있는데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제국주의 침략자들이 지배를 하고자 하는 나라나 민족들에 대해서 종족 간, 민족 간, 나라간 또는 지역 간에 철저히 분열을 시킴으로서 그들의 단결을 무너뜨림으로서 자신들에게 저항을 할 수 있는 힘을 약화시키거나 아예 없애버리는 것이다.
조선의 젊은 새 세력들이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고 이전 세대들인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나 공산주의운동가들이 벌인 반일 · 항일독립투쟁과는 완전히 새로운 단계의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하던 1930년 초 역시 조선반도의 강탈한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은 《대동아공영권》 실현이라는 야욕을 달성하기 위해 조-중 양 민족 사이에 분열을 조장하기 위해 이간질 책동이 극에 달 하였다. 이미 앞 선 장들에서도 살펴보았듯이 만보산사건이 그 대표적이다. 또 1930년과 1931년 중반까지 벌어진 각종 명목의 폭동을 이용해서 양 민족 간의 이간책동 역시 교묘하고도 치밀하게 진행하였다.
또한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은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이고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하던 조선의 젊은 반일 · 항일세력들의 성장에 대해 결코 가만히 두고만 있지 않았다. 일제는 새 세대 반일 · 항일세력들을 고립시키기 위해 갖은 모략과 음모 선전선동을 음흉하게 진행하는 한 편으로 공식적인 매체나 기관 또는 문화 등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여 당시 새로운 사조인 공산주의에 대해 대대적으로 악선전을 하였다. 이는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인 세력들이 당시까지는 대부분 학력수준이 높고 아주 젊은 층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본격적인 항일투쟁에 나선다면 자신들의 야욕을 달성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일찍부터 그 싹을 잘라버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새조를 받아들인 조선의 젊은 세대들에 대해 사상적으로 불순하다는 악선전을 함으로서 그들을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가들에게 우선 동족이라는 동질성보다 먼저 사상적으로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불손한 집단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어 민족의 단합을 철저히 깨뜨림으로서 분열을 조장하였다. 반면 일반백성들에게는 공산주의에 대해 교묘한 묘략선전선동을 해대면서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인 조선의 젊은 반일 · 항일세력들과 철저히 분열시키고자 하였다.
또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은 자신들이 일찍부터 꿈 꾸어오던 《대동아공영권》 실현을 위해서는 만주와 대륙 그리고 시베리아를 점령해야 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당시 민족주의자이건 공산주의자이건 조선인들이 가장 많이 이주해서 살고 있던 동북만과 남만을 조-중 양 민족 간에 철저히 분열시켜야 했다. 즉 자신들이 침략을 수월하게 하고 침략 후 지배를 원활히 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인민들과 중국의 인민들이 단합하면 안 된다. 조선인민과 중국인민들 사이에 단합을 하면 자신들의 야망실현에 커다란 장애가 됨으로 철저히 분쇄를 해야 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전 장들에서 여러 번에 걸쳐 살펴보았다.
당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일반 조선백성들과 중국인들의 분열이간질도 결코 허투루 하지 않았다. 반면 양 민족 사이에 이간질에 집중한 것은 조 - 중 반일세력들 이었다. 여기에는 민족주의계열의 반일세력과 공산주의계열의 반일세력 간, 구국군 반일세력과 공산주의세력 간, 더 나아가서 공산주의세력 내에까지 교묘하고 교활한 방법을 동원하여 분열이간질을 하였다.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의 분열이간책동은 한계가 없었으며 그 대상 역시 특정하지 않았다. 무차별적인 이간질 책동을 무한대로 벌였다. 이는 결국 모두가 적이 되어 싸워야 하는 극단적 상황이 도래할 수 있는 위험이 있었다. 결국 일제는 자신들의 야망실현을 위해 조-중 양 민족 간의 “이이제이전법(以夷制夷戰法)”을 교묘하고 교활하게 무차별적으로 적용을 하였다.
공산주의사상가들이 아닌 구국군은 중국민족주의계열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당시로서는 새로운 사상인 공산주의사상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구국군들이 가지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반감이 얼마나 대단했겠는가. 더구나 당시 조선인들이 반일 · 항일투쟁을 벌이고 있던 지역이 조선의 국내가 아니고 중국의 지배력이 미치는 땅이다 보니 중국 민족주의계열이라고 할 수 있는 구국군들은 행여 조선인들이 항일투쟁에서 승리하고 나면 만주 땅을 조선인들이 차지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의구심을 기반으로 한 구국군들은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을 조선인들이 만주로 끌어들였다고 생각하는 극단적 상황에까지 치달았다. 물론 이러한 의구심을 구국군들이나 중국인들이 가지게 되기까지에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의 교묘한 음모와 모략 그리고 이를 적극적으로 선전선동을 한 결과였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이와 같은 구국군들의 새 세대 공산주의자들 뿐 아니라 젊은 조선인들에 대한 극단적 반감은 결국 젊은 조선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잡아다가 처형을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물론 이들 중에는 공산주의자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에 맞서 항일무장투쟁에 나서겠다는 신념으로 새 세대 젊은 조선의 지도자의 주위에 모여들던 조선의 젊은이들이었다. 이는 결국 일본제국주의자들의 민족 이간책동이 일정 정도 성공을 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당시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이고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에 맞서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하던 조선의 젊은 지도자와 세력들에게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로 대두하게 되었던 것이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 이후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이고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하던 조선의 젊은 반일 · 항일세력들에게는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에게 반기를 들고 항일의 길에 나선 중국 구국군과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큰 난제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결국 조선의 젊은 항일투사들은 일본제국주의라는 강력한 적(敵) 뿐 아니라 같은 적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는 구국군 역시 적이 되어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이러한 상태가 계속 지속되게 된다면 결국 항일무장투쟁을 제대로 벌일 수 없는 대단히 어려운 난관이 조성될 수밖에 없다.
결국 조선의 젊은 지도자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군군을 찾아가게 된다. 본 문제에 대해서 이미 전 장들에서 상세히 분석을 하였기에 여기서는 북측 자료에서 핵심내용만 인용하면서 분석하도록 한다.
❝ 이런 실정으로부터 그 고장 지하조직에서는 참군을 요청하는 청년들을 안도로 많이 보내주었다. 조직의 추천과는 관계없이 우리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자발적으로 찾아오는 청년들도 많았다.
돈화의 진한장도 호진민(호택민)이라는 중국청년을 데리고 내앞에 나타났다. 호진민은 화룡에서 사범학교 교원을 하던 사람이다.
어떤 날에는 청년들이 한꺼번에 10여명씩 무리를 지어 우리를 찾아오기도 하였다.
그런데 구국군이 도중에서 그들을 붙잡아다가 무리로 학살하였다.
당시 중국 동북지방에는 동북자위군, 반길림군, 항일구국군, 항일의용군, 산림대, 대도회, 홍창회와 같은 형형색색의 반일부대들이 많았다. 반일부대라는것은 일제가 만주를 강점한후 항일구국의 기치를 들고 구동북군에서 떨어져나온 애국적인 군인들과 관리들 그리고 농민들로 이루어진 민족주의군대를 말한다. 이 부대들을 통털어 구국군이라고도 불렀다.
만주지방의 반일부대가운데서 유명한것으로는 왕덕림, 당취오, 왕봉각, 소병문, 마점산, 정초, 리두의 부대들을 들수 있다.
동만에서 제일 큰 반일부대는 왕덕림부대였다. 왕덕림은 한때 목릉과 수분하일대의 밀림속에서 아무런 주의주장도 없이 《록림호걸》의 토비생활로 청년시절을 보내다가 부하들을 이끌고 장작상예하의 길림군에 편입되여 정규군의 외모를 갖춘 장교로 된 사람이다. 그는 9.18사변전까지 구길림군에서 3려단 7련대 3대대장으로 복무하였다. 민간에서는 그의 대대를 《구3대대》라고 불렀다.
일본군대가 만주를 침공한후 그의 상관이였던 려단장 길홍이 투항하여 관동군사령관을 만났다. 그는 일본제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고 길림경비사령관으로 임명되였다.
자기 상관의 반역행위에 분개한 왕덕림은 즉시에 반변하여 항일구국을 선언하였다. 그는 500여명의 대원들을 데리고 산속에 들어가 중국 국민구국군을 조직한 다음 오의성을 전방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일본제국주의침략군대에 대한 항전을 개시하였다.
라자구일대를 활동거점으로 삼고 간도지방의 적을 견제하면서 후날 우리 유격대와도 피의 인연을 맺은 오의성, 사충항, 채세영, 공헌영은 모두 왕덕림의 충실한 부하들이였다.
……
안도의 산간오지로 밀려든것은 오의성의 휘하에 있는 우사령부대였다. 이 부대의 드살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조선공산주의자들을 일제의 앞잡이로 보았으며 조선사람들이 만주대륙에 일제침략군을 끌어들인 장본인이라고 생각하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조중 두 나라 인민들사이에 쐐기를 박느라고 리간질을 계속하는데다가 5.30폭동과 만보산사건에서 받은 조선사람들에 대한 나쁜 인상이 그때까지도 중국사람들의 머리속에서 지워지지 않고있었다.
……
조선사람들도 중국인민의 원쑤가 될수 없다는것을 리해할만한 정치적판단력과 통찰력을 가지지 못하고있었다. 그들은 공산주의에 대해서도 맹목적으로 적대시하고있었다. 그것은 구국군의 상층부가 대부분 자산계급출신들로 이루어져있는 사정과 관련된다. 구국군의 상층부는 조선사람은 공산당이며 공산당은 파쟁군이며 파쟁군은 일제의 앞잡이라는 제나름의 공식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기준으로 삼아 조선의 청장년들을 가차없이 박해하고 학살하였다.
……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물론, 산림대와 독립군들까지도 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을 반대하였기때문에 우리는 문자그대로 사면초가의 고립무원에 빠지게 되었다.
반일부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지 않고서는 우리 유격대의 존재와 활동을 합법화할수 없었다. 유격대를 합법화하지 않고서는 대오도 확대할수 없었고 공개적인 군사활동도 할수 없었다.
……
우리는 그때 일본군대들뿐아니라 구국군과 만주군패잔병까지도 피해다녀야 했으며 공산주의자들을 적대시하는 조선의 일부 민족주의자들과 반동분자들도 경계하면서 다니였다. 합법적으로 나타나기만 하면 공산당이라고 막 쏘고 행패질을 하는 판이여서 정말 문제거리였다. 연길, 화룡, 왕청, 훈춘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
〈세기와 더불어 새 무장력의 탄생 중에서〉
위 인용문에 대해서는 크게 따로 분석하지 않아도 된다. 이미 이전 장들에서 상세하였으며 위에서 대략적으로 언급을 하였다. 위 인용문을 올려주는 것은 당시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이고 본격적인 새로운 단계의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하던 조선의 젊은 반일 · 항일세력들에게 얼마나 어려운 장애가 조성되었었는지에 대해 근거 자료를 제시하기 위해서이다.
인용문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하기 위해 조선의 젊은 지도자의 두리에 모여들던 조선인들을 잡아다가 무차별적으로 학살을 하였으니 그 문제가 얼마나 심각하였었는지 알 수가 있다. 당시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하는 조선인 한 명 한 명은 모두가 대단히 귀중한 존재들이었다. 이들이 사실 자신들과 똑 같은 적을 향해 총구를 겨누겠다는 같은 목적을 가진 조선인들을 자신들의 편견과 오해에 사로잡혀 무차별적으로 잡아다가 처형하고 있었으니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위에서도 언급을 했지만 그 한 가운데에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음모와 모략이 자리잡고 있음을 인용문을 보면 알 수 있다. 인용문은 이에 대해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조중 두 나라 인민들사이에 쐐기를 박느라고 리간질을 계속하는데다가 5.30폭동과 만보산사건에서 받은 조선사람들에 대한 나쁜 인상이 그때까지도 중국사람들의 머리속에서 지워지지 않고있었다.”라고 하여 구국군들이 조선의 젊은 반일 · 항일세력들에 대한 극도의 증오심을 가지게 된 데에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있었음을 말 해주고 있다.
또 중국 구국군들이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인 조선의 젊은 반일 · 항일세력들에게 증오심을 가지게 된 데에는 새로운 사조에 대한 무지와 편견도 큰 이유였다. 이에 대해 인용문을 보면 아래와 같다.
“조선사람들도 중국인민의 원쑤가 될수 없다는것을 리해할만한 정치적판단력과 통찰력을 가지지 못하고있었다. 그들은 공산주의에 대해서도 맹목적으로 적대시하고있었다. 그것은 구국군의 상층부가 대부분 자산계급출신들로 이루어져있는 사정과 관련된다. 구국군의 상층부는 조선사람은 공산당이며 공산당은 파쟁군이며 파쟁군은 일제의 앞잡이라는 제나름의 공식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기준으로 삼아 조선의 청장년들을 가차없이 박해하고 학살하였다.”
구국군부대가 조선의 새 세대 공산주의 반일 · 항일투사들에게 반감을 넘어 증오심까지 가지게 된 본질적인 이유를 인용문은 잘 묘사하고 있다. 즉 그들 상층부는 대부분이 《자산가 계급》 출신이라는 본질적 이유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새 세대 항일투사들에게 주어진 조건이 얼마나 어려웠었는지를 인용문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물론, 산림대와 독립군들까지도 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을 반대하였기때문에 우리는 문자그대로 사면초가의 고립무원한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고 당시 처한 상황을 전해주고 있다. 동지는 없고 온통 적들만 존재하였으니 그야말로 사면초가에 빠져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 어려운 것은 같은 동족인 조선의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세력들까지 조선의 젊은 새 세대 항일투사들을 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또 이미 패잔병 신세가 되어버린 구만주군까지 적이 되어 날뛰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인용문은 아래와 같이 전해주고 있다.
“우리는 그때 일본군대들뿐아니라 구국군과 만주군패잔병까지도 피해다녀야 했으며 공산주의자들을 적대시하는 조선의 일부 민족주의자들과 반동분자들도 경계하면서 다니였다. 합법적으로 나타나기만 하면 공산당이라고 막 쏘고 행패질을 하는 판이여서 정말 문제거리였다. 연길, 화룡, 왕청, 훈춘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위 인용문을 보면 1931년 《겨울명월구회의》에서 토의 결정된 유격대를 창설하고 유격근거지를 건설하기 위해 치열하게 준비해나가던 조선의 젊은 항일투사들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어려웠었는지를 알 수 있다. 결국 인용문과 같은 상황이 주어졌다는 것은 동지는 전혀 없고 모두가 적만 존재하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해 인용문은 “반일부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지 않고서는 우리 유격대의 존재와 활동을 합법화할수 없었다. 유격대를 합법화하지 않고서는 대오도 확대할수 없었고 공개적인 군사활동도 할수 없었다.”라고 조선의 젊은 지도자가 결심을 하고 있었음을 말 해주고 있다.
제일 심각하게 론의된것은 공산주의자들이 중국의 민족주의자들과 손을 잡는것이 옳은가 그른가 하는 문제였다. 구국군은 그 상층부가 자산계급출신들로 이루어져있고 지주, 자본가, 관료계급의 리해관계를 대변하는 군대인데 우리 공산주의자들이 그들과 손을 잡는것은 계급적원칙의 포기이고 타협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품는 동무들이 한둘이 아니였다. 그들은 구국군과 일시적으로는 관계를 개선할수는 있어도 동맹관계를 맺을수는 없다고 하면서 그들의 적대적행동에 대하여서는 실력으로 눌러놓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실로 위험천만한 주장이였다.
우리는 구국군이 비록 여러가지 제한성은 있어도 투쟁목적과 처지의 공통성으로부터 항일전쟁에서 우리의 전략적인 동맹자로 될수 있다는 확고한 립장을 가지고 구국군과의 관계를 개선하는것은 물론, 그들과 련합전선까지도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사상과 리념이 다른 두 무장력의 련합전선에 대한 문제는 당시까지만 하여도 처음으로 제기된것이기때문에 복잡한 론쟁을 불러일으켰다.
반일부대들과의 련합전선을 실현하는것은 중국공산당에서도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였다. 동만특위에서는 일찍부터 왕덕림부대에 주의를 돌리고 7~8명의 우수한 공산당원들을 파견하여 구국군과의 공작을 하게 하였다. 우리도 리광을 비롯한 조선공산주의자들을 구국군부대들에 파견하였다.
……
이런 형편에서 나는 우리 유격대가 당분간 우사령부대에 들어가서 별동대로 활동하는것이 합리적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
이 문제를 가지고 당조직의 본부가 있는 소사하 김정룡의 집에서 하루종일 회의를 하였다. 그 모임을 지금은 소사하회의라고 한다. 그 회의가 아주 격렬하였다. 구국군부대안에서 별동대로 활동하는것이 가능한가 불가능한가, 유익한가 유익하지 않은가 하는 문제를 걸고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목이 아프게 론쟁을 하였다.
……
결국 별동대에 관한 나의 착상은 동무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
나는 그냥 내가 가야 한다고 고집하였다.
……
유격대의 존망이 우사령과의 담판에 달려있고 우리의 성패도 그들과의 련계를 조정하는데 달려있다는것과 구국군을 동맹자로 만들지 않고서는 우리가 동만땅에서 유격전은 고사하고 문전출입조차 할수 없다는것이 엄연한 현실로 되고있었기때문이였다.
……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면 혁명을 하지 못한다, 내가 중국말을 잘하고 청년운동시기에 풍랑도 여러차례 겪어본것만큼 가기만 하면 얼마든지 우사령을 만날수 있다, 그러니 내가 가야 한다고 동무들을 설복하였다. 그런 다음 박훈, 진한장, 호진민 그밖의 중국청년 한명을 더 데리고 우사령을 찾아 떠났다. 아무런 신변안전담보도 없는 모험의 길이였다. ❞
〈세기와 더불어 새 무장력의 탄생 중에서〉
인용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사상이 다른 두 세력이 적이 같다고 하여 연합군을 형성할 수 있겠는가 하는 사상적 차이를 극복하는 문제이다. 이미 지난 장에서도 언급을 했지만 사상적 교조는 비단 이전 공산주의 세대들만이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새 세대 공산주의자들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교조주의를 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아무리 새 세대 공산주의자들이라 해도 당시로서는 인용문 정도의 교조주의를 범하지 않은 사상가들은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다만 새 세대 조선의 젊은 항일투사들을 이끄는 조선의 지도자가 워낙 뛰어난 현실 판단능력과 지략, 전술전략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하나 중요한 내용은 바로 구국군부대의 별동대로 활동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부분을 중시해야 한다. 이는 소위 동북항일연군에서 존재하는 흔히 말 하는 조선인들로 조직된 《독립사단》이라는 성격에 대해서도 그 전술전략이라는 차원에서 대입해보면 알 수가 있다. 즉 그 목적은 젊은 반일 · 항일투사들이 조국의 해방을 위해 투쟁을 하고 있는 땅이 조선 국내가 아니라 중국지배력이 미치는 지역이라는 점이다. 결국 별동대 혹은 항일연군 독립사단 등은 모두 조선의 해방과 혁명투쟁을 위해 조-중 양 인민 간의 연대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별동대 항일연군 독립사단을 조직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는 것은 제1목표는 조선의 해방이요 제2목표는 만주를 침략한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승리를 함으로서 중국인민들에게도 일제의 압제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는 동시적인 목적달성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이는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이고 항일무장투쟁에 나선 조선의 젊은 세력들이 구국군부대의 별동대가 되고, 동북항일연군에 소속되어 독립사단을 구성하였다고 하여 구국군이나 중국공산당 부대에 종속된 부대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렇게 별동대를 구성하거나 동북항일연군에 소속되어 독립사단을 구성하는 것은 1930년 6월 30일 카륜회의의 주요결정사항인 《반일통일전선》을 실현하여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에 맞서 조-중 양 인민이 연대를 하여 강력하게 투쟁을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이 점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 상대측의 사령부는 량강구에 자리잡고있었다.
구국군이 우리더러 어디에서 왔는가고 물으면 우리는 안도에서 왔다고 하지 말고 길림에서 왔다고 대답하기로 약속하였다. 구국군들앞에서 유격대의 주둔구역인 동만의 지명을 대는것은 재미가 없었다.
……
내 짐작과 같이 우사령은 정말로 우리를 자기네 부대에 들어오라고 하였다. 나보고는 사령부선전대 대장을 하라고 요구하였다.
나의 속심은 자기 군대를 만들어 그것을 합법화하자는것인데 사령이 나더러 선전대 대장을 하라고 하니 나로서는 참으로 난처하였다.
……
그의 제의를 수락하였다. 우사령은 몹시 흡족해하였다. 그는 즉석에서 부하에게 임명장을 쓰라고 하였다.
……
소원밖의 황당한 결과였지만 우리로서는 어차피 거치지 않으면 안되는 사닥다리였다. 사실 이 벼락감투가 유격대를 합법화하는데서 큰 은을 내였다.
……
그런데 그날 저녁 우리는 뜻하지 않은 일에 부닥치게 되였다. 구국군이 연길에서 푸르허로 넘어오는 조선청년들을 70~80명이나 붙잡아서 성시로 끌어왔던 것이다.
……
우사령이 참모부로 들어왔다. 그는 붙잡혀온 청년들을 내다보며 또 공산당원들을 잡아온 모양이라고 하면서 공산당이 만주땅에다가 어느새 저렇게 많은 새끼를 쳤는지 모르겠다고 머리를 흔들었다.
……
아니, 폭동을 일으키고 땅을 빼앗으려 하다가 일본놈들까지 끌어들였는데 그래두 공산당이 일본놈의 앞잡이가 아니야?
……
《사령님께서는 공산당이 나쁘다는것을 책을 보고 아십니까? 말을 듣고 아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무엇때문에 공산당원들을 나쁘다고 하십니까?》
《책은 무슨 책. 말을 듣구 알지. 입을 가진 사람이면 모두 공산당원들을 나쁘다구 해. 그래서 나두 나쁜줄로 알구 있는거야.》
……
사령님, 아까운 청년들을 자꾸 죽여선 뭘하겠습니까. 저 사람들에게 총은 당장 줄수 없겠지만 창이나 하나씩 주어서 한번 돌격대로 써볼 필요가 있지 않습니까? 왜놈들 하구 잘 싸우는가 어쩌는가를 시험해보잔 말입니다. 잘 싸우면 그이상 더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저 죽여버릴거야 없지 않습니까.
… 음, 그건 그래. 그럼 선전대장이 나가서 그 문제를 해결해보게.
……
내가 바로 김성주올시다. 나는 지금 여기 우사령부대에서 선전대장으로 일하고있습니다.
우사령은 방금 나에게 당신들이 구국군에 합세하여 싸울 의향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걸 알아보라는 과업을 주었습니다. 우리와 함께 싸워볼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있다고 말해주십시오.
온 장내가 《싸우겠습니다!》라고 이구동성으로 웨치였다.
나는 우사령을 찾아가서 청년들의 동향을 그대로 전달한 다음 우리가 그들을 흡수해서 일본군대와 싸움을 시켜보는것이 어떤가고 제기하였다.
우사령이 그 제의에 선뜻 동의해나섬으로써 청년들의 생사와 운명문제는 우리의 요구대로 결정되였다.
우리앞에는 반일련합전선을 실현할수 있는 더 넓은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렇게 유격대를 합법화할수 있는 문어귀에 거의 도달했을 때 우사령의 뒤에서 그를 조종하고 있는 조선인고문이 말썽을 부리였다.
……
그러면 반일을 하겠다는 사람들을 많이 모집해야지 어째서 자꾸 죽입니까? 사상이 다르다고 죽이면 됩니까? 조선사람이 제 나라 땅에서 살지 못하는것만 해도 분한 일인데 여기 만주에 쫓겨와서 구국군들한테까지 잡혀 죽으니 이 이상 억울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공산주의를 했건 민족주의를 했건 주의를 가리지 말고 단결시켜서 일제와 싸우게 해야지 자꾸 배척하고 잡아제껴서 좋은 일이 무엇입니까?
그 사람은 선전대장의 말이 옳다고 하면서 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렇게 되여 두번째 장벽이 허물어졌다.
우사령은 우리의 담화가 호의적인 분위기속에서 결속되는것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나는 우사령에게 사령께서 나를 믿으신다면 선전대장자리는 호진민 같은 사람들에게 겸직으로 주고 나에게는 차라리 조선사람들을 모아가지고 투쟁할 대장책임을 하나 줄수 없느냐고 제기하였다.
……
나는 처음부터 구국군에서 떨어져나오겠다고 하면 우사령의 노여움을 살것같아서 그에게 사령의 명의로 부대의 이름을 하나 지어달라고 요구하였다.
옆에 있던 류본초선생이 《그럼 별동대라고 하지. 조선인별동대라고 하는것이 좋겠소.》하고 말하였다.
류본초선생의 제안에 우사령도 찬성하고 나도 찬성하였다.
비밀유격대를 합법화하기 위한 기초작업은 별동대의 탄생과 함께 성과적으로 종결되였다. 우리는 이 별동대안에 안도에 있는 비밀유격대 성원들과 우사령부대에 억류되였던 70~80명을 다 포함시켜 유격대를 합법화하였다. ❞
〈세기와 더불어 새 무장력의 탄생 중에서〉
인용문을 보면 힘들 것이라고 예측하였던 우사령부대와의 연대문제가 의외로 쉽게 풀렸음을 알 수 있다. 그건 곧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인 새 세대 조선의 젊은 반일 · 항일투사들을 이끌어가는 젊은 지도자의 뛰어난 외교술이 자리 잡고 있다. 두 가지의 전술전략을 가지고 협상에 임하되 결코 꼼수를 부리거나 음흉한 속셈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된다는 교훈도 함께 전해주고 있다. 거짓 없이 진실하고 정성을 다 한 자세로 협상에 임한다면 성공은 담보된다. 인용문은 바로 이 점을 말 해주고 있다. 이러한 자세는 비단 개인 간의 문제 뿐 아니라 나라와 나라들 사이의 국제외교협상 역시 마찬가지이다. 잔꾀를 부리거나 겉과 속이 다른 속셈을 가지고 국제사회에서 외교를 해나간다면 그건 결코 오래 가지 못한다. 오늘의 남쪽 외교의 현실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현재 남쪽의 외교는 아예 없다고 보는 것이 옳을 판단일 것이다.
우사령부대에서 조선인들에 대한 방향을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과거 김좌진 부대에 속해있던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가 출신의 문제이다. 이 문제 역시 정확한 정세판단과 현실인식 그리고 전술전략을 제시하는 조선의 젊은 지도자의 논거에 완강했던 민족주의계열의 조선인 독립운동가 역시 전적으로 지지를 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는 것 역시 대단히 중요하였다. 이는 항일무장투쟁에 참가하기 위해 조선의 젊은 지도자를 찾아오다가 잡힌 조선인 70~80여 명 정도의 운명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이다. 결국 조선의 젊은 지도자의 명분과 사리에 맞는 설득과 논거에 의해 자칫 목숨을 잃은 뻔 했던 젊은 조선인 70~80여 명이 든든한 항일투사로 거듭날 수 있었다.
조선의 젊은 지도자의 우사령부대 방문은 대 성공을 거두었다. 이에 대해 인용문은 아래와 같이 당시 상황을 전해주고 있다.
“나는 우사령에게 사령께서 나를 믿으신다면 선전대장자리는 호진민 같은 사람들에게 겸직으로 주고 나에게는 차라리 조선사람들을 모아가지고 투쟁할 대장책임을 하나 줄수 없느냐고 제기하였다.
……
나는 처음부터 구국군에서 떨어져나오겠다고 하면 우사령의 노여움을 살것같아서 그에게 사령의 명의로 부대의 이름을 하나 지어달라고 요구하였다.
옆에 있던 류본초선생이 《그럼 별동대라고 하지. 조선인별동대라고 하는것이 좋겠소.》하고 말하였다.
류본초선생의 제안에 우사령도 찬성하고 나도 찬성하였다.
비밀유격대를 합법화하기 위한 기초작업은 별동대의 탄생과 함께 성과적으로 종결되였다. 우리는 이 별동대안에 안도에 있는 비밀유격대 성원들과 우사령부대에 억류되였던 70~80명을 다 포함시켜 유격대를 합법화하였다.”
위 인용문을 보면 당시 협상에 임했던 조선의 젊은 지도자가 얼마나 현명하면서도 정확한 상황판단을 하고 있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결코 자신의 주장만을 강하게 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교훈을 전해주고 있다. 인용문과 같은 협상자세가 결론적으로는 자신의 의사를 관철하는 가장 강력한 주장인 셈이다. 당연히 상대방을 기만하려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진정성과 진실 그리고 정당성을 확보하고 그에 따르는 협상을 해야 성공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말 해주고 있다. 조선의 젊은 지도자의 우사령과의 담판 내지는 협상과정은 이를 증명해주는 훌륭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젊은 지도자의 이와 같은 협상자세는 우사령과의 협상을 대성공으로 이끌었으며 뒷골방에서만 뒹굴어야 했던 비밀유격대가 밝은 세상에 나와 합법적이고 강력한 항일유격투쟁을 할 수 있게 하였다.
인용문에서도 언급했지만 우사령부대에 소속된 별동대라고 하지만 이는 카륜회의 주요 결정사항인 《빈일통일전선》을 실현하여 더 강력한 항일투쟁을 전개하기 위한 것이지 구군군 부대에 종속된 유격대가 아니다.
우리는 우사령과의 담판에 성공함으로써 유격대의 존재와 활동을 합법화하고 우리와 련합하여 일제와의 항전을 벌릴수 있는 동맹군을 가지게 되였다. 담판의 성공은 또한 우리에게 애국애족의 대의를 내세운다면 사상과 리념이 서로 다른 타국의 민족주의자들과도 통일전선을 뭇고 공동투쟁을 벌릴수 있다는 신심을 가지게 하였다.
……
소사하에 돌아온 나는 왕청지구에서 구국군공작에 고심하고있는 리광에게 우사령과의 담판내용과 조선인별동대가 조직되게 된 경위를 상세히 통보해주고 안도의 경험을 참작하여 왕청에서도 지체없이 별동대를 하나 조직할데 대한 과업을 주었다.
그때까지도 리광은 지하활동을 하고있었다. 나는 한개 중대의 인원을 리광에게 보내여 거기에서도 별동대를 조직해가지고 지하활동으로부터 합법적인 활동으로 넘어가게 하였다.
……
그때 우리가 별동대라는 이름을 가진것은 우리 유격대의 합법적활동을 보장하며 구국군과의 련계를 강화하고 그들과의 반일련합전선을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전술적조치였다고 말할수 있다.
우리는 별동대를 내온 다음 그것을 확대하고 재편성하여 빠른 시일안에 반일인민유격대를 내오기 위한 준비사업을 활기있게 다그치였다. ❞
〈세기와 더불어 새 무장력의 탄생 중에서〉
새 사조를 받아들이고 이전의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단체나 교조와 종파 그리고 좌경모험주의에 물젖어 있으면서 반일투쟁에 있어서는 변변한 투쟁도 이끌어보지 못한 공산주의계열의 운동단체들과는 완전히 새로운 단계의 항일무장투쟁을 위해 하나하나 치밀하게 준비해나가는 과정 가운데 하나인 중국인민들과의 반일연합전선을 이루고 중국 구국군부대가 젊은 조선인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학살을 하는 극히 위험한 상황을 벗어나 합법적이고 공개적으로 유격대활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낸 조선의 젊은 지도자의 구국군부대와 벌인 첫 번째 협상은 완벽하게 성공을 하였다.
1932년 초 새 사조를 받아들인 조선의 젊은 반일 · 항일투사들의 지도자가 중국 구국군부대와 벌인 협상에서 얻어낸 성공은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는 날까지 않은 조-중 양 민족 간 반일투쟁의 길에서 변치 않은 동지적 관계를 가지는 징검다리가 되었다. 이는 조선인민들의 《반일민족통일전선》 실현과 비록 민족이나 나라가 다를지라도 반일감정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모두 하나가 되어 항일투쟁을 벌여 반제전선에서 승리를 하겠다는 《반일통일전선》을 실현하는 길에서 첫 번째 성공을 거둔 쾌거였다. 더구나 구국군의 상층부는 중국 자산가 계급이었으며 그들은 민족주의계열의 부대들이었다는 점에서 담판성공은 그 의의가 훨씬 더 크다.
이에 대해 인용문은 아래와 같이 당시 상황을 전해주고 있다.
“우리는 우사령과의 담판에 성공함으로써 유격대의 존재와 활동을 합법화하고 우리와 련합하여 일제와의 항전을 벌릴수 있는 동맹군을 가지게 되였다. 담판의 성공은 또한 우리에게 애국애족의 대의를 내세운다면 사상과 리념이 서로 다른 타국의 민족주의자들과도 통일전선을 뭇고 공동투쟁을 벌릴수 있다는 신심을 가지게 하였다.”
물론 사상을 같이하는 중국 공산주의자들과는 같은 반일의 길을 걸었다 할지라도 1932년 초까지 군사적 관계를 직접적으로 맺었던 것은 분명 아니었다. 후일 조-중 양 민족 공산주의자들끼리 《동북항일연군》을 조직해서 한 전호(戰戶) 속에서 항일무장투쟁을 벌였지만 이는 인용문의 협상성공 이후에 있었던 군사적 연합이었다.
조선의 젊은 지도자의 중국 구국군부대와 벌인 협상의 성공은 당시 반일유격대 창설을 준비하고 있던 다른 지역의 조직들에게도 모범이 되었다. 이에 대해 인용문은 당시 상황을 아래와 같이 전해주고 있다.
“소사하에 돌아온 나는 왕청지구에서 구국군공작에 고심하고있는 리광에게 우사령과의 담판내용과 조선인별동대가 조직되게 된 경위를 상세히 통보해주고 안도의 경험을 참작하여 왕청에서도 지체없이 별동대를 하나 조직할데 대한 과업을 주었다.
그때까지도 리광은 지하활동을 하고있었다. 나는 한개 중대의 인원을 리광에게 보내여 거기에서도 별동대를 조직해가지고 지하활동으로부터 합법적인 활동으로 넘어가게 하였다.”
위 인용문은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위 내용은 조선의 젊은 지도자가 동북만과 남만 각 지역의 반일유격대창설을 직접적으로 지휘하고 있었다는 당시의 상황을 전해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우사령 구국군부대와 협상을 벌인 진정한 목적이 마지막 문장에 잘 나와 있다. 즉 중국 사람들일지라도 그가 반일감정을 가지고 있고 항일의 길에 나섰다면 비록 사상이나 정견 신앙이 다를지라도 손을 잡고 반일의 길을 함께 걸어간다는 《반일통일전선》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인용문은 “그때 우리가 별동대라는 이름을 가진것은 우리 유격대의 합법적활동을 보장하며 구국군과의 련계를 강화하고 그들과의 반일련합전선을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전술적조치였다고 말할수 있다.”라고 하여 당시 협상에 임했던 목적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즉 항일의 길에서 반일감정을 가진 중국 인민들과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에게 승리를 하기 위한 높은 단계의 전략과 전술적 차원이었지 결코 중국 구국군이나 중국 공산당에 종속되는 관계는 아니었다. 이 점을 항상 잊어서는 안 된다.
10. 1932년 초부터 간도 각 지역에서 대대적으로 창설된 반일유격대
지금까지 《반일인민유격대》 창건과 동북만과 남만 등 간도 각 지역에서 1932년 초부터 《반일유격대》가 어떤 과정을 통해서 대대적으로 창설되기 시작한 것인지 북측 자료와 연변조선족자치주학술자료 그리고 남측자료를 비교분석하여 그 실체를 고증하고 논증하였다. 그럼 이제부터 동북만과 남만일대에서 1932년 초부터 대대적으로 창설되기 시작한 《반일유격대》에 대해 간략하면서도 종합적인 분석을 해보기로 한다. 여기에는 모든 자료들을 간략하게 인용하기로 한다.
1) 연변조선족자치주학술자료
1932년 초부터 대대적으로 창설되기 시작한 《반일유격대》에 대한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자료는 화룡현유격대, 왕청유격대, 훈춘유격대, 연길유격대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에 대한 상세한 자료는 《항일연재22》편을 참고하기 바란다. 여기서는 당시 내린 결론부분만 인용하기로 한다.
→ 〈http://www.jajusibo.com/sub_read.html?uid=26055§ion=sc46§ion2=〉
“연변조선족자료를 분석할 때마다 가지게 되는 부족한 점은 당시 동북만주와 남만 등에서 이루어진 반일항전은 모두 중공당에 의해서 조직되고 주도가 된 것으로 기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연변조선족자치주가 현 중국의 영토이기에 빚어지는 한계라고 이해를 하면서도 전혀 공감을 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자료의 정확성과 사실성 그리고 상세함은 인정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반일단체의 조직과 투쟁과정에서 중공당이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을 하면서 전체적인 맥락을 깨뜨리고 있다. 위 유격대창설과정에서 볼 수 있듯이 모든 유격대의 조직이 중공당의 지휘로 이루어진 것처럼 기술을 하였지만 그 구성원 대부분이 중국인들은 전혀 없고 대부분이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살 길을 찾아 동북만주와 남만 등으로 떠난 조선인들이다.
위에서 인용한 자료 역시 마찬가지이다. 유격대 창설을 주도한 이들도 조선인들이고, 유격대구성원들도 대부분이 조선인들이다. 창설을 주도한 이들도, 유격대원들도 대부분이 조선인들임에도 굳이 중공당의 지시운운하면서 조선인 반일독립운동가들이 중공당의 지시를 받아 수동적이고 피동적으로 움직이는 하부구조로 묘사를 하고 있다. 우리는 이 점을 간과하지 말고 연변조선족 학술자료를 참고를 해야 할 것이다.
물론 당시 동북만과 남만 일대에서 반일·항일투쟁을 벌인 조선인들이 중공당이나 반일감정을 가진 반일구국군부대들과 연합전선을 갖추고 투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중공당의 지시 또는 지휘아래 조선인들이 피동적이고 수동적으로 반일항전을 했다는 식으로 묘사를 하는 것은 당시 상황에 비추어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북의 자료나 남측의 자료를 동시에 비교분석해보면 증명이 되고 있다.”(항일연재22)
위의 내용은 항상 잊지 말고 본 분석자료들을 대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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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화룡현 반일단체조직 및 유격대창설
① 1930년 “붉은 5월 투쟁” 후 중공화룡현위와 각구의 당조직에서는 개산툰, 달라자, 평강, 삼도구 등지에서는 유격대, 적위대, 돌격대 등 노동자, 농민 무장단체를 조직했다.
② 중공화룡현위 달라자구위에서는 “붉은 5월 투쟁”속에서 건립된 적위대를 기초로 1932년 여름 “달라자장총대”를 건립, 김창섭이 대장을 맡았다.
③ 평강구에서도 1932년 여름 적위대를 기초로 유격대를 건립, 김세가 대장을 맡았다. 20여명의 대원을 갖고있는 평강유격대는 평강, 장인강, 투도구 일대에서 무기탈취투쟁을 전개했다.
④ 1932년 12월, 화룡현위의 지시에 따라 각구의 유격대는 어랑촌에 집결, 화룡현유격중대를 건립하였다. 김세가 중대장을 맡고 “김아줌마”(별호 본명 김병활)가 정위를 맡았다.
⑤ 1933년 봄 무장한 80여명의 화룡현유격중대는 화룡현중한항일유격대대로 확대편성되었으며 대대장을 장승환이 맡고 정위를 차룡덕이 맡았다. 화룡중한항일유격대대는 아래에 3개 유격소대를 두고 평강, 삼도구, 달라자, 개산툰 등지에서 계속하여 활동하였다.
⑥ 1934년 3월, 화룡현유격대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제2퇀으로 편성되었다.
(2) 왕청현 유격대 창설시기
① 1932년초에 군사부장 김명균에게 유격대를 건립할 과업을 맡겼다. 김명균은 2월초에 현당위련석회를 열고 적의 무장을 탈취하여 자신을 무장하기로 했다.
② 1932년초 왕청현 열혈청년들은 소왕청 최창호네 방앗간에 모여 10여명으로 구성된 왕청현로농반일유격대의 건립을 선포하였다. 김철이 대장을 맡았다. 회의에서는 또 리광 등 9명을 구국군에 파견하여 통일전선을 강화하기로 결정하고 리광을 대장으로 하는 별동대를 조직하였다. 유격대는 뒤골짜기의 사시나무숲속에 귀틀집을 짓고 유격대대부를 설치하였다.
③ 1934년 3월, 왕청현유격대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제3퇀으로 개편되여 항일투쟁의 새로운 로정에 올랐다.
(3) 훈춘현 유격대 창설
① 1932년 1월, 중공훈춘현위 군사부의 김한구(김혁), 방철산, 리국진 등 15명의 반일 청년들은 대황구 서대마구 두도령 심산속에 밀영을 세우고 별동대를 건립하였다. 대장은 강석환이 맡았다.
② 1932년 2월에는 연통라즈 서구에서 10여명의 대원으로 돌격대를 건립, 강일무를 대장으로 추대했다.
③ 1932년 6월 중공훈춘현위는 중공동만특위의 지시에 근거하여 대흥구 청수동에서 공산당, 공청단 열성분자회의를 열고 훈춘현유격대의 건립을 결정하고 연통라즈 서구에 연구유격대(령남유격대라고도 함)를 건립하였다. 강일무가 대장으로, 리청(중국인)이 정위로 임명되였다. 처음에는 1개 중대밖에 없었는데 김태준이 중대장을 맡았다. 7월에는 대오가 2개중대로 늘어나자 구선일이 제2중대 중대장을 맡았다. 겨울에 이르러 대원이 130여명으로 늘어나고 총 100자루가 되자 유격대는 3개 중대로 편성되였다.
④ 1932년 대황구에서 황구유격대(령북유격대라고도 함)를 건립하였다. 강석혼이 대장으로, 박두남(후에 변절함)이 정위로 임명되였다. 그후 구국군 왕옥명을 데리고 유격대에 넘어오자 그를 대장으로, 윤석원을 정위로 임명했다.
⑤ 1933년 1월, 유격대에 대한 령도를 강화하기 위하여 중공훈춘현위에서는 연구유격대와 황구유격대를 합병하여 훈춘현유격총대를 편성, 공헌신을 총대장으로, 박태익을 정위로 임명하였다. 총대밑에 2개 대대를 두고 제1대대장에 공헌신, 정위에 박태익, 제2대대장에 심랑동, 정위에 박두남을 임명하였다. 유격총대는 130여명으로 늘어나 훈춘현 대황구, 연통라즈, 왕청현 라자구일대의 밀림속에서 활약하였다.
⑥ 1934년 3월말, 훈춘유격대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제4퇀으로 편입되여 새로운 전투임무를 수행하였다.
(4) 연길현 유격대 창설
① 1932년 봄 의란구, 로투구, 팔도구, 해란구 등지에서 돌격대, 《적위대》를 조직하였다.
② 1932년 초여름, 연길현 의란구와 로투구에서 유격대가 건립되였다. 의란구유격대는 대원 30여명이였으며 대장 박춘이였고 로투구유격대는 대원 20여명이였으며 대장은 박주철이였다.
③ 1932년 10월, 의란구유격대와 로투구유격대는 련합하여 연길현유격대를 건립하였다.
④ 점차 장대해진 연길현유격대는 유격대대로 확대되였다. 대대장에 박동근, 정치위원에 박길이 임명되였다. 대원은 130여명이었다. 대대아래에 4개 중대를 두었는데 제1중대는 삼도만 능지영에, 제2중대는 부암에, 제3, 4중대는 왕우구, 북동에 주둔하였다. ❞(항일연재22)
인용문에 대한 분석은 하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만 언급하고자 한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연변조선족자치주학술자료를 보면 중공당이 지시하고 지휘해서 모든 반일유격대가 창설가 창설된 것으로 기술해놓았지만 인용문을 보면 한 가지 특징이 있다. 즉 화룡, 왕청, 훈춘육격대는 1934년 3월과 4월 모두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로 편입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화룡, 훈춘, 왕청유격대는 1934년 3~4월에 모두 김일성 주석이 이끄는 조선인민혁명군으로 편입되었다는 말이다.
이 말의 의미는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의 젊은 지도자가 구국군 우사령부대와 담판을 벌여 《별동대》를 무었다는 말과 같다. 또 1934년 초를 기점으로 동만 각지의 유격대가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로 편입되었다는 것은 그 부대의 유격대원들이 대부분이 조선인들이었으며 편입이전부터 당시 조선의 젊은 지도자인 김일성 주석의 지도와 지휘를 받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북인민혁명군(남측자료: 동북항일연군)에서 일반대원 80%이상, 지휘관은 90% 이상이 조선인들이었다고 대부분의 남측 자료들이나 북측 자료들이 밝히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1931년 말부터 1932년 중반까지 조선의 젊은 지도자의 지도와 지휘를 받아 동북만과 남만일대에서 《반일유격대》가 대대적으로 창설되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2) 반일유격대 창설에 대한 남측 자료
1931년 말부터 1932년 초까지 간도 일대에서 대대적으로 창설되기 시작한 남측 자료 역시 결론부분만 인용하기로 한다.
혹 자세한 자료가 필요한 독자들은 아래를 참고하기 바란다.
→ 〈http://www.jajusibo.com/sub_read.html?uid=26196§ion=sc46§ion2=〉
→ 〈http://www.jajusibo.com/sub_read.html?uid=26337§ion=sc46§ion2=〉
→ 〈http://www.jajusibo.com/sub_read.html?uid=26447§ion=sc46§ion2=〉
❝ 이종석의 자료
동만 각 현의 유격대 조직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연길현 유격대: 연길현에서는 먼저 노두구 유격대(1932년 초)와 의란구 유격대(1932년 초)가 건립되고 이들이 합쳐져서 연길현 유격대(1932년 10월)로 발전하였다. 연길현 유격대는 1933년 1월 화련리 유격대를 합병함으로써 대원 130여명의 연길현 항일유격대대로 확대되었다(대대장은 박동근이며, 정치위원은 박길).
화룡현 유격대: 화룡현 유격대는 개산 툰구 권총대와 대감자·평강 등의 유격대가 합병되어 1932년 12월에 건립되었다가 1933년 3월 대원 80여명의 화룡현 유격대대로 발전하였다(대대장은 양성룡이며, 정치위원은 김일성).
훈춘현 유격대: 훈춘현 유격대(일명 훈춘현 유격총대)는 1932년 1월에 세워진 대황구 별동대가 발전한 영북 유격대(1932년 9월)와 영남 유격대(1932년 6월)가 합펴져서 1933년 초에 건립되었다(총대장은 중국인 공산당원 공헌침이며, 정치위원은 박태익). 대원 120명의 이 유격대는 산하에 2개의 대대를 두었다.
이종석의 자료에서는 왕청현 유격대와 안도현 유격대 창설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 이러한 점들이 남측 자료에서 볼 수 있는 한계이다.
신용하 교수 자료
1932년 봄부터 ‘춘황폭동(春慌暴動)’을 일으킴과 동시에 본격적인 유격대 조직을 시작하였다.
동만지역 유격대 창설
연길현 유격대: 1932년 9월 박동근(朴東根)을 총대장, 박길(朴吉)을 정치위원으로 하는 ‘연길현유격대(延吉縣遊擊隊)’를 창설하였다.
화룡현 유격대 : 1932년 12월에 김세(金世)를 중대장으로 하는 ‘화룡현유격중대(和龍縣遊擊中隊)’를 창설하였다.
왕청현 유격대: 1932년 11월에 양성룡(梁成龍)을 총대장, 김명균(金明均)을 정치위원으로 하는 ‘왕청현유격대(汪淸縣遊擊隊)’를 창설하였다.
훈춘현 유격대: 1932년 11월에 공헌조(孔憲趙)를 총대장, 박태익(朴泰益)을 정치위원으로 하는 ‘훈춘현항일유격총대(琿春縣抗日遊擊總隊)’ 등이 조직되었다.
동만주지방의 4개현 유격대는 총병력이 약 360명이었는데, 그 약 95%이상이 한국인이었고, 간부도 마찬가지로 대부분이 한국인이었다. 신용하 교수 역시 안도현 유격대인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
남만지역 유격대 창설
남만주지방에서는 … 1932년 봄에 인수의(藺秀義)를 총대장, 김산(金山)을 지도원으로 하는 ‘유하현유격대(柳河縣遊擊隊)’가 조직되었다.
동년 6월에는 장진국(張振國)을 총대장, 양좌청(楊佐靑)을 정치위원으로 하는 ‘반석공농반일의용군(礬石工農反日義勇軍)’이 출범했다.
동년 11월에는 맹걸민(孟杰民)이 총대장으로 취임한 ‘홍군(紅軍) 제32군단 남만유격대(南滿遊擊隊)’가 결성되었다.
12월에는 왕인수(王仁洙)가 총대장으로 취임한 ‘홍군 제37군단 해룡유격대(海龍遊擊隊)’가 창설되었다. 1933년 봄에는 이민환(李民煥)이 이끄는 ‘농민유격대(農民遊擊隊)’가 활동을 시작했다.
북만지방 유격대 창설
북만주지방에서는 … 한국인 공산주의자 청년들에 의해 1932년 10월에 박복신(朴福臣)을 총대장, 이인근(李仁根)을 참모장으로 하는 ‘탕원유격대(湯原遊擊隊)’를 창설하였다.
1933년 3월에 장보산(張寶山)을 총대장, 김백만(金白万)을 부대장으로 하는 ‘밀산반일유격대(密山反日遊擊隊)’가 창설되었다.
1933년 4월에 최용건(崔庸健)을 총대장, 김문형(金文亨)을 주임으로 하는 ‘요하노농의용군(饒河勞農義勇軍)’을 창설하였다.
1933년 10월에 조상지(趙尙志)를 총대장, 이복림(李福林)을 지도위원으로 하는 ‘주하반일동북유격대(珠河反日東北遊擊隊)’를 창설하였다.
1934년 2월에 총병력 약 5백명의 ‘수령반일동맹군(綏寧反日同盟軍)’, 동년 5월 백전정(白殿貞)을 총대장으로 하는 ‘영안유격대(寧安遊擊隊)’가 각각 창설되었다.
이와 같이 일제의 만주침략·강점 초기에 일제 침략군에 대항하기 위한 ‘유격대’ 조직과 ‘유격구’ 설치는 처음에는 한국인 공산주의 청년들이 주도하여 시작했고 발전시켜 나갔다.
남측 학위논문 자료
남만 지역 유격대 창설 : 1931년 10월 남만주의 이통에서 창건된 적위대는 만주지역에서 중공당이 이끄는 첫 무장조직이었다. 이 적위대의 대장 이홍광을 비롯한 청년 7명은 모두 조선인이었다. 남만에서는 이 조직이 바탕이 되어 1932년 6월 ‘반석공농반일의용군’으로 발전하였다.
동만 지역 유격대 창설: 1932년 연길현유격대가, 화룡현 에서는 평강유격대가 조직되었다. 왕청현, 안도유격대를 묶은 왕청유격대가, 훈춘에서는 영북유격대와 영남유격대가 조직되었다가 후에 훈춘유격대로 발전하였다. 이 4개의 유격대원도 90% 이상이 조선인이었다. 이 유격대는 1934년 3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로 크게 발전하였다.
서적자료
안도현 유격대 창건: 김 일성을 중심으로 하여 이 영배, 김 철희 등이 1932년 4월 25일 안도현에서 항일유격대의 최초의 부대를 조직하였다.
동만 각 지역 유격대 창설: 1932년 봄에는 왕청, 연길, 화룡, 훈춘 등의 각 현에서 각각 유격대가 결성되었다.
남만 지역 유격대 창설 : 동만에서 뿐만 아니라 북만과 남만에서도 항일유격투쟁을 전개하였다.
북만 지역 유격대 창설: 북만의 화현, 방정현의 지구에서는 김 책, 이 기동 등의 동지들이 활동하고 있었고, 하현, 호림현, 무원현 등의 지구에서는 최 용건, 이 학만 등의 동지들이 활동하였다. ❞(항일연재25)
1931년 말에서부터 1932년 초까지 동북만과 남만일대에서 대대적으로 창설되기 시작한 《반일유격대》에 대한 남측 자료들은 비교적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서적자료를 제외하고 모든 자료들이 의도적이던 아니던 김일성 주석에 관해서는 일절 다루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동안 우리가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하여 수십여 회에 걸쳐 분석했지만 당시 간도 지역에서 대대적으로 창설된 반일유격대는 새 사조를 받아들이고 반일 · 항일의 길에 나섰던 젊은 조선인들의 지도자인 김일성 주석이 주도하였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 점을 간과하거나 다루지 않는다면 알맹이 없는 분석이 되며 그 자료는 자료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핵(核)이 없는 세포는 죽은 세포이며 그것은 이미 생명력을 잃었기에 전혀 가치가 없다.
자료제공: 연변항일독립운동역사학자 이 송덕
사진제공: 이 창기 기자
2016년 8월 21일
이 용 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