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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낙민
조비[趙備]의 묘갈명(墓碣銘) -박세채(朴世采)
제용감정 조공묘갈명 濟用監正趙公墓碣銘
공(公)의 휘(諱)는 비(備)요, 자(字)는 사구(士求)인데, 그 선대는 한양부인(漢陽府人)이다. 조양기(趙良琪)란 분이 고려(高麗) 때에 대대로 북쪽 변방을 지켰으며, 일찍이 흡단(哈丹)의 군사를 격파하여 원 세조(元世祖)에게 칭찬을 받은 바 되었다. 본조(本朝)에 이르러서는 양렬공(襄烈公) 조인벽(趙仁璧)과 양절공(良節公) 조온(趙溫)은 뜻과 의리와 공훈과 문벌이 아울러 세상에 나타났다. 4대를 전하여 조방언(趙邦彦)에 이르러서는 참판(參判)을 지냈는데, 이분이 바로 공의 고조(高祖)가 된다. 증조(曾祖) 조옥(趙玉)은 현감(縣監)으로 증(贈) 참판(參判)이며, 조부(祖父) 조양정(趙揚庭)은 증 판서(判書)이며, 선고(先考) 조찬한(趙纘韓)은 좌승지(左承旨)를 역임하고 호(號)가 현주(玄洲)인데, 문장(文章)으로 큰 이름을 얻었다. 선비(先妣)는 행주 기씨(幸州奇氏)인데, 첨정(僉正) 기효증(奇孝曾)의 딸이고, 고봉 선생(高峰先生) 기대승(奇大升)의 손녀이다.
공은 만력(萬曆) 병진년(丙辰年, 1616년 광해군 8년) 12월 초하루에 태어났다. 이때 현주공(玄洲公)이 영천군(榮川郡) 수령으로 있었는데, 군(郡)에 소백산(小白山)이 진산(鎭山)이 되므로 현주공이 마침내 공의 소자(小字)로 지어 주었고, 공은 또한 소산(小山)의 뜻을 미루어 자호(自號)를 ‘총계와(叢桂窩)’라 하였다. 소년 때에 이미 민첩하여 총기가 있었고 장성함에 이르러서 경사(經史)를 깊이 관통하였으며, 문장력이 절륜(絶倫)하였고 겸하여 필법(筆法)도 훌륭하였다. 그리고 더불어 교유한 자가 모두 이름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풍자(風姿)가 높고 시원스러웠으며 의론(議論)이 탁 트이고 매서워서 항상 첫 자리에 꼽혔는데 간혹 꺼리는 자들이 많이 있었다. 이윽고 택당(澤堂) 이공(李公, 이식(李植))의 집에 장가를 들었는데, 이공이 매우 사랑하고 중하게 여겼다.
얼마 있다가 현주공의 상사(喪事)를 당하여 백씨(伯氏) 용궁공(龍宮公, 조휴(趙休))을 따라 여묘(廬墓)살이를 하면서 예(禮)를 다하였다. 상을 마치고는 숭정(崇禎) 을해년(乙亥年, 1635년 인조 13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다음 해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또 백씨를 따라 어버이를 받들어 모시고 영남 지방에서 난을 피하였다. 호남(湖南)의 장성(長城)에 옮겨가서 살면서 한가롭게 봉양을 지극히 하였고, 형제간에 서로 즐겁게 지내면서 여생(餘生)을 보낼 계획이었다.
수년이 지나서 헌릉 참봉(獻陵參奉)에 선발하여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거듭 사옹원 참봉(司饔院參奉)에 제수되었는데, 대부인(大夫人)이 비로소 권면(勸勉)을 하자 마침내 명(命)을 따랐다. 얼마 있다가 세자익위사 시직(世子翊衛司侍直)에 옮겼고, 전직되어 위솔(衛率)에 이르렀다. 청하 현감(淸河縣監)에 제수되었는데, 이때에 백씨가 계속하여 같은 도의 수령이 되어 번갈아 가며 (대부인(大夫人)을) 판여(板輿)에 모시고 받들고 왕래하는 빛남이 있었다. 청하는 본래 십실(十室)의 잔약한 고을인데, 공이 힘써 절축(節縮)을 더하여 백성을 병들게 하지 않았으므로 백성들이 오래도록 공의 공덕을 생각하였다.
신묘년(辛卯年, 1651년 효종 2년) 9월에 비로소 알성 문과(謁聖文科)에 등제(登第)하여 겨우 이름을 불렸는데 날이 이미 어두우니 효종이 어촉(御燭)을 거두어 일방(一榜, 장원)에게 주라 명하고 직접 타이르기를, “너희들은 마땅히 나의 뜻을 알아야 한다.” 하였다. 공이 물러나와 남에게 이르기를, “나는 지금부터 마땅히 나랏일에 죽을 것이다.” 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문법(文法)에 걸려 파직되어 돌아갔다가 금방 겸춘추(兼春秋)로 ≪인조실록(仁祖實錄)≫을 편수(編修)하는 데에 참여하였다.
이어서 시강원 사서(侍講院司書),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겸 지제교(知製敎)에 제수되었고, 홍문관(弘文館)에 뽑혀 들어가서 수찬(修撰)이 되었다가 승진하여 교리(校理)에 이르렀다. 얼마 있다가 특별히 보내는 명(命)에 따라 호남 여단(湖南癘壇)에 치제(致祭)를 하고 돌아와서 상소(上疏)하여 어버이 봉양을 청원하여 임실 현감(任實縣監)이 되었다. 이때에 공이 비록 임금 마음에 들어 등용되고 있으나 스스로 종적(蹤迹)이 외로움에 매었음을 생각하고 세속에 따라 이랬다저랬다하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대부인(大夫人)의 춘추(春秋)가 점점 높아지자 영화롭게 봉양하는 것이 더욱 급했다. 부임을 하여 선비를 교육하는 데 뜻을 두어 친히 고을의 자제를 경사(經史)로써 가르쳐 주고 겸하여 과장(科場)을 설치하고 제술(製述)을 시험 보여 권면을 하니, 문풍(文風)이 크게 떨치고 공사(貢士)의 수가 배로 늘어났다. 고을의 산성이 오래도록 버려져 있는 것을 보고 공이 항상 남북(南北)의 병란(兵亂)에 징계를 하고, 또 온지방의 사민(士民)들의 소원을 따라 강개한 마음으로 진소(陳疏)하여 수리할 것을 청하였는데, 임금이 비답을 내려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그러나 조정의 논의는 ‘마땅히 할 바의 말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또 대부인을 위하여 수석(壽席)을 베풀었고 선친(先親)의 문집에 뒤이어 아울러 백씨(伯氏)의 유문(遺文)을 판각(板刻)하였는데, 좋아하지 않는 자가 충동질하여 너무 지나치다고 지목을 하였다. 그사이에 옥당(玉堂, 홍문관(弘文館))의 언로(言路)가 견지하여 그대로 유임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뒤이어 대신(大臣)이 영장(營將)을 대우한 실수를 아뢰어 마침내 파직되어 돌아왔다.
서용(敍用)되어 병조 정랑(兵曹正郞)에 제수되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 제용감 정(濟用監正) 겸 서학 교수(西學敎授)가 되었다. 이때에 대부인이 고당(高堂)에 계심으로 힘써 녹사(祿仕)를 하였으나, 다만 선비를 공부시켜 시험에 보충하기를 더욱 엄하게 하였으니, 그 맡은 직분에 마음을 둠이 그러하였다.
우재(尤齋) 송공(宋公, 송시열(宋時烈))이 전형(銓衡)을 주간하면서 다시 공을 전의 이력으로 처우하자고 논의했는데, 갑자기 기해년(己亥年, 1659년 효종 10년) 2월 17일에 병으로 집에서 세상을 뜨니, 나이가 겨우 44세였다. 그해 5월 모일(某日)에 고양군(高陽郡)의 치소(治所) 동쪽 향적산(香積山)의 선영(先塋) 갑좌 경향(甲坐庚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배위(配位) 덕수 이씨(德水李氏)는 바로 택당공(澤堂公) 판서(判書) 이식(李植)의 딸로 부덕(婦德)이 매우 갖추어졌는데, 배위의 막내아우인 상국(相國) 이단하(李端夏)가 그 묘지(墓誌)를 지었다. 2남 6녀를 낳았는데, 아들 조인상(趙獜常)은 현감(縣監)이고, 조귀상(趙龜祥)은 도사(都事)이다. 딸은 좌랑(佐郞) 이형직(李亨稷), 박염(朴溓), 직장(直長) 한제유(韓濟愈), 이계(李啓), 이필은(李苾殷), 진사(進士) 변광식(邊光軾)에게 각각 시집갔다.
공은 부모를 섬기는 데 지극한 성품이 있었다. 어릴 적부터 과일 하나라도 얻으면 반드시 먼저 친정(親庭)에 받들어 올렸으며, 어버이가 세상을 떠나자 또한 양조(羊棗)를 먹지 않는 행실1)이 있었다. 만년에 대부인(大夫人)을 봉양하는 데 혼정 신성(昏定晨省, 조석으로 부모의 안부를 물어서 살핌)과 맛있는 음식을 올려 봉양함이 대략 ≪소학(小學)≫의 법을 본받았으며, 계절마다 장수를 축하하되 술과 풍악을 갖추어서 그 뜻을 즐겁게 해드리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백씨(伯氏)를 대우하기를 엄부(嚴父)와 같이 하였는데, 그가 일찍 죽은 것을 절통하게 여기어 종가(宗家)를 가까운 이웃에다 지어 두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기를 더욱 지극히 하였다. 집은 전부터 가난하였고 자녀들이 무릎 앞에 가득한 형편에 조석(朝夕)의 끼닛거리가 자주 떨어졌지만 그에 대처하기를 항상 편안하게 여겼다. 양절공(良節公, 조온(趙溫))의 후손이 매우 한미하여 거의 제사를 지낼 수 없게 되자 공이 내외 후손들과 모의하여 성(城) 서쪽에 사당을 세워서 향화(香火)의 복록을 받게 하였다. 고봉 선생(高峰先生, 기대승(奇大升))에게 시호를 내림이 오래도록 거행되지 않자 공이 문득 글을 구하고 시호를 청하여 연시연(延諡宴)까지 미치도록 힘을 다하고서야 그만두었으니, 그가 조상을 높이고 어진 이를 숭상함이 또 이와 같았다.
본디 성품이 인자하고 자상하여 비록 농담을 좋아했으나 스스로 남을 해칠 뜻이 없었으며, 사람과 더불어 사귀는 데 신의(信義)를 지키기를 하루같이 하였다.
중세(中歲)에 택당공(澤堂公)의 가르침에 더욱 복종하여 한 뜻으로 굽은 것을 바로잡되 반드시 참착하고 후하며 드러나지 않게 교양하는 것으로 스스로의 길을 삼았다. 항상 말하기를, “내가 외구(外舅, 장인을 이름)의 은혜가 아니었던들 면하기가 어려웠다.”고 하였다.
임실(任實)에서 돌아온 뒤로부터 백악산(白岳山) 아래에 거처를 정하고 두 간의 서실(書室)을 짓고 좌우(左右)에 서책[圖史]을 놓고 시가(詩歌)를 읊으면서 스스로 쾌적하게 지냈다. 그리고 ‘낙천 지명(樂天知命)’ 네 글자를 써서 벽에 걸고 관찰하면서 반성하였다. 비록 시대와 모순이 되어 헐뜯고 빈정대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리더라도 항상 편안하게 생각하며 말하기를, “사람이 세상에 사는 데 의(義)가 있고 명(命)이 있으니, 이것을 나는 편하게 여길 따름이요 나의 처지 밖의 일은 생각할 바가 아니다.” 하였다. 죽음에 미쳐서는 평일에 공을 비방하던 자들도 다들 애석한 마음을 더하였으니, 또한 공의(公議)가 본래 정해진 바를 볼 수가 있었다.
공은 육예(六藝, 예(禮)ㆍ악(樂)ㆍ사(射)ㆍ어(御)ㆍ서(書)ㆍ수(數))에 다 능하였다. 이미 문장으로 자임(自任)을 하고 한편으로 활쏘기 말부리기[射御]와 전서[篆籒]ㆍ그림[圖繪] 등에 통달하여 오묘(奧妙)한 경지에 이르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끝내 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일찍이 가업(家業)을 이어받아 부(賦)와 변려문(騈儷文) 두 가지 문체(文體)를 가장 잘하여 사람들이 추앙해 복종하는 이가 많았다. 뒤에 다시 마음 깊이 사문(詩文)을 연구해서 공부된 것이 더욱 깊었다. 유집(遺集)으로 12권이 있다.
처음에 택당공(澤堂公)이 동국(東國)의 명신 사적(名臣事蹟)에 대해 증거 될 만한 글자가 없는 것을 병통으로 여겨 공에게 일러 말하기를, “자네와 신 계량(申季良, 신최(申最))은 이 책임을 맡을 만하다.”고 하였는데, 이는 공은 기억력이 뛰어난 데다가 고사(古史)에 익숙하고, 신공(申公)은 바야흐로 문장(文章)의 성대한 명성이 있는데다가 또 모두가 서로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공은 이미 환경이 불우하게 되어 그 일을 할 겨를이 없었고 신공도 일찍이 이로 인하여 제공(諸公)의 성명(姓名)을 대략 기록해 놓았으나 얼마 안 되어 환난(患難)을 만나 이루지 못했으니, 하늘이 인재(人才)를 내었으나 이처럼 때를 만나지 못하고 끝내는 일찍 죽어 베푼 것 없이 그치게 함은 또한 유독 어째서인가? 아! 신 계량은 바로 신최(申最)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선비가 왕국(王國)에서 태어나 재능이 있으나 임금과 만남이 적고, 이미 더러 있다고 해도 또한 끝마치는 이가 적네. 내가 공의 일을 기록하자니 처음과 끝이 찬연히 빛나네. 충성을 다하고 효를 다한 것이 도리어 허물이 되었네. 밖에서 이르는 것이 비록 어지러우나 공에게는 병될 것이 아니었네. 즐거워한 것은 하늘이고 아는 것은 타고난 운명이다. 고요한 저 한 채 집에는 사기(史記)가 있고 경서(經書)가 있네. 이래서 군자(君子)를 일러 절개를 잃지 않는다 한다네. 나무 울창한 향적산(香積山) 무덤에 비석이 옥돌과 같네. 내가 명(銘)을 지어 알려서 후인(後人)들에게 법으로 삼게 했네.
각주
1) 양조(羊棗)는 작은 대추의 일종으로, 부모가 즐기던 음식을 말함. 공자(孔子)의 제자 증삼(曾參)이 지극한 효도로 어버이를 섬겼는데, 그 아버지 증석(曾晳)이 양조(羊棗)를 대단히 좋아하였으므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에 차마 양조를 먹지 못하였다는 데서 온 말임.
濟用監正趙公墓碣銘 六月十六日
公諱備字士求。其先漢陽府人。有諱良琪。當高麗時世守北邊。嘗破哈丹兵。被元世祖所奬。至本朝襄烈公諱仁璧,良節公諱溫。志義勳閥。並著于世。四傳而至諱邦彥參判。是爲公高祖。曾祖諱玉。縣監贈參判。祖諱揚庭。贈判書。考諱纉韓。左承旨號玄洲。以文章獲大名。妣幸州奇氏。僉正諱孝曾之女。高峯先生諱大升之孫。公生于萬曆丙辰十二月初吉。時玄洲公方莅榮川郡。郡有小白山爲鎭玄洲。公遂以命公小字。公又推小山之義。自號叢桂窩。少已敏悟。比長淹貫經史。詞藝絶倫。兼善筆法。所與游皆一時名勝。然風姿亢爽。議論踔厲。率常屈其一座。間多有忌之者。旣而委禽于澤堂李公之門。李公極愛重之。俄丁玄洲公憂。從伯氏龍宮公廬墓盡禮。卒喪中崇禎乙亥進士試。明年虜難作。又隨伯氏奉親避兵于嶺陬。轉寓湖南之長城。間居致養。兄弟相樂。有終焉之計。踰數歲選授獻陵參奉不赴。洊除司饔院參奉。大夫人始勉之。遂赴命。俄遷世子翊衛司侍直。轉至衛率。除淸河縣監。時伯氏繼爲同道宰。替奉板輿。往來有煒。河本十室殘邑。公乃務加節縮。俾不病民。久而能懷焉。辛卯九月。始登謁聖文科。纔唱名日已昏黑。孝廟命徹御燭以賜一榜。面論曰爾等當知予意。公退謂人曰吾今當死國事矣。未幾坐文法罷歸。旋兼春秋。與修仁祖實錄。連拜侍講院司書,司諫院正言兼知製敎。選入弘文館爲修撰。陞至校理。俄膺別遣之命。致祭湖南癘壇。旣歸上疏乞養。爲任實縣監。時公雖嚮用。自念蹤跡羈孤。不喜隨俗俯仰。大夫人春秋漸高。尤急於榮養。旣至留意敎士。親授邑子以經史。兼設場試製以勸之。文風大振。貢額倍增。見縣有山城久廢。公常懲於南北兵亂。又從一方士民之願。慨然陳疏請修治。聖批嘉納。而朝議以爲非所宜言。且爲大夫人設壽席。踵先集並刻伯氏遺文。不悅者慫惥之。目以過濫。間復玉堂言路持之。請仍任。繼有大臣白待營將之失。遂罷歸。敍拜兵曹正郞。屢陞成均館司藝,濟用監正兼西學敎授。時以大夫人在堂。黽勉爲祿仕。顧於課士補試益嚴。其任職存心然也。尤齋宋公秉銓議。復處以舊踐。公遽以己亥二月十七日疾卒于家。年堇四十四。以其年五月某甲。葬于高陽治東香積山先壟抱庚之原。配德水李氏。卽澤堂公判書植之女。婦德甚備。季弟相國端夏誌其墓。生二男六女。子麟祥縣監。龜祥都事。女適李亨稷佐郞,朴溓,韓濟愈直長,李啓,李苾殷,邊光軾進士。公事親有至性。幼時得一果物。必先奉親庭。親歿又有不食羊棗之行。晩奉大夫人。定省滫髓。略倣小學矩則。時節上壽。具酒樂以娛其志不怠。遇伯氏如嚴父。痛其早歿。營置宗家于比隣。庇恤孤孀益至。家故貧子女滿前。朝夕屢空。而處之常晏如也。良節公後孫甚微。幾於不祀。公謀諸內外苗裔。立祠城西。俾得就祿。高峯節惠久而不擧。公輒求文請諡。以及延宴。竭力乃已。其尊祖而賢又如此。素性子諒。雖喜善謔而自無忮害意。與人交。信義如一日。中歲尤服澤堂公訓。一意矯揉。必以沈厚晦養自程。常曰吾非外舅之恩。難乎得免矣。旣歸自任實。卜居于白岳山下。營而架書室。左右圖史。嘯詠自適。以樂天知命四字揭壁觀省。雖與時矛盾。訾嗷四至。而常怡然曰人生於世。有義有命。此吾自安處。外非所恤。及歿平日謗公者咸加嗟惜。亦可見公議之素定也。公於藝無所不能。旣以詞翰自任。旁通射御篆籀圖繪之屬。靡不臻妙。而終不屑爲。蚤承家業。最工賦儷兩體。人多推服。後更究心詩文。所造者益深。有遺集十二卷。始澤堂公病東國名臣事蹟無徵。字謂公曰如君及申季良可任此責。蓋以公記性絶人。尤習古史。申公方有文章盛名。又皆相喜故耳。公旣落拓不暇爲。申公亦嘗因此疏錄諸公姓名。已而遭患難不遂。天之生才不偶如此。卒之夭閼。無所施而止。亦獨何哉。嗟夫。季良名最。銘曰。
士生王國。鮮才而逢。旣或有之。又鮮其終。我記公事。本末燦然。原忠原孝。反以爲愆。外至雖紛。在公非病。所樂者天。所知者命。闃彼一室。有史有經。是謂君子。不失于節。鬱鬱香山。貞石若珉。我銘詔之。以式後人。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