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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수 적금도에 있는 신씨의 자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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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여수시 적금리(적금도)에 거주하고 있는 신평옥씨는 1971년 5월 북한에 납북되었다가 1972년 5월 10일 귀환한 서해안 납북귀환어부 피해자이다. 고향에서 가정경제를 돕던 그는 24살에 결혼한 뒤 생계를 위해 강원도로 향했다. 당시 가장 손쉬운 돈벌이였던 오징어잡이 배를 타기 위해서였다. 신씨는 강원도에서 오징어잡이 조업을 하던 중 군에 입대했고, 제대 후에도 생계를 위해 다시 배를 타야 했다.
"군대 갔다 와서 돈이 없으니까 집에 있을 수는 없고 해서 군산으로 배를 타러 갔어요. 마침 군산에 적금리 사람들이 선장, 기관장을 하고 있던 배가 있었거든요. 그곳에서 그물 손질하는 법을 배우며 배를 탔죠. 배를 타면서 한편으로는 항해 공부를 해서 소형어선 면허를 취득했어요. 그러고는 남성호라는 작은 배를 몰면서 선장 일을 시작했죠."
2년여간 군산에서 선장 일을 하다가 여수로 내려온 신씨는 당숙의 소개로 동림호를 운항하게 되었다고 한다. 동림호는 주로 추자도, 가거도 등에서 조기를 잡았고 1971년 5월에 처음으로 연평도 근해까지 올라가 조기 조업을 하게 되었다.
연평도 해역은 처음이었던 신씨는 물때나 물길을 알지 못해 다른 어선들의 뒤를 따라 다녔다고 한다. 조업 중인 어선들의 아래, 즉 남쪽에서 그물을 치며 물길이나 물때를 익혔다. 특히 무전기나 해도조차 없던 동림호였기 때문에 다른 어선들과 떨어지지 않도록 신경 쓰며 조업했다.
"다른 어선들 아래쪽으로 붙어 그물을 쳤어요. 납북 당일날 낮 12시 정도 되니 안개가 심하게 끼더라고요. 한 50m도 안 보일 정도로 심한 안개였어요. 안개가 심하니 어선들끼리 서로 부딪힐까 봐 간격 유지를 위해 서로 드럼통을 두들기며 조업해야 했어요. 저쪽 배에서 드럼통을 두들기면 이쪽에서 두들기며 서로 위치를 확인했죠. 안개가 심하니 해경 배인가 다가와서는 선단 신고 안 했다며 빨리 항구로 들어가라고 하더라고요, 그때가 오후 2시경이었어요. 그래서 곧바로 그물을 걷고 있는데 그 해경 배가 10미터 정도 나갔을 때 곧바로 북한 경비정이 붙더라고요."
북한군 모자를 쓴 군인들이 동림호로 올라와 선원들을 한곳으로 모이게 한 후 납치했다. 2시경에 납치되어 북한 항구에 들어간 시각이 저녁 7시쯤이었다고 한다. 북한에서 1년가량 억류되어 생활하는 동안 한 일이라고는 주로 관광이었다고 한다. 긴 시간 억류되어 있는 동안 신씨가 가장 걱정한 것은 함께 납치된 선원(8명)이 낙오없이 한국으로 무사히 귀환할 수 있을까였다.
기약 없던 억류 생활은 1972년 5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북한에 다녀갔다는 소문이 퍼지며 끝이 보였다고 한다. 72년 5월 10일 북한은 동림호 선원을 모두 이름 모를 항구로 이동시켰다. 그곳에는 깨끗이 정비된 동림호가 미리 와 있었다.
고문 받지 않는 법을 터득하다
그렇게 1년여간의 억류 생활을 끝내고 동림호를 타고 대여섯 시간 항해한 끝에 한국으로 귀환했다. 군사분계선을 넘자 한국 경비정이 다가와 배를 검문했고 그 배를 따라 인천항에 입항했다. 인천항에서 차를 타고 어느 여인숙으로 이동한 선원들은 여인숙 방 하나에 한 명씩 입실했다. 2평 정도 크기의 방에는 취조를 담당하는 수사관과 선원 두 명뿐이었다.
신씨를 담당한 수사관은 3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사람으로 경기도 말투를 썼다고 한다. 사복 차림의 수사관은 밥상에 서류를 올려두고 진술조서를 작성했다. 수사관이 주로 질문한 요지는 납북 경위와 북한에서 지령을 받았는지 여부라고 했다.
조사에 앞서 수사관은 신씨에게 '안 맞으려면 무조건 사실대로 말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말을 하면 맞을 줄 알아라'라고 협박하면서 '이 새끼, 저 새끼'라는 욕을 퍼부었다고 한다. 북한에서 어떤 지령 사항을 받았느냐는 질문에 그런 지령을 받은 사실이 없다고 부인하자 곧바로 수사관의 각목 구타가 시작되었다. 선장이던 신씨가 북한에서 지령을 받지 않았을 리 없다며 무차별 폭행을 가했다.
한동안의 구타가 지나간 후에 재차 조사가 시작되었고, 지령 사실을 부인하자 수사관은 다시 신씨의 오금에 두께 4~5cm의 각목을 끼우고 꿇어앉게 한 다음 어깨를 누르고 허벅지 위로 올라타 밟으며 고문했다고 한다.
그렇게 일주일가량 조사를 받았다. 조사를 받다가 졸기라도 하면 바가지로 물을 끼얹어 잠을 잘 수 없도록 했다고 한다. 쏟아지는 졸음에 헛소리를 하면 그 내용을 범죄 사실이라고 적어놓았고, 정신이 혼미한 틈을 타 서류에 지장을 찍기도 했다고 한다.
지령을 대라는 수사관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던 신씨는 영문도 모른 채 고문당해야 했다. 그렇게 고문당하던 어느 날 그는 고문을 받지 않는 법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최형도라는 동료 선원이 있었어요. 하루는 수사관과 화장실을 가면서 최형도 방을 지나가는데 그 방에서 최형도가 '돈묵(적금리 지명)에서 몇 월 며칠 새벽 3시에 접선하기로 했다'라고 말하는 것을 얼핏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 수사관들이 원하는 대답이 이거구나'라고 생각해서 화장실 다녀온 뒤로 나도 이렇게 지령을 받았다고 꾸며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최형도가 말한 식으로 수사관에게 '서당섬'(지명)에서 몇 월 며칠 몇 시에 북한에서 오는 접선 방법을 허위로 이야기했어요. 그러자 고문이 멈춥디다. 아, 이래서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형도씨가 고맙더라고요. 안 그랬으면 죽어났을 거라고 합니다. 그렇게 조사가 끝나고 나서 고문도 멈췄습니다. 그렇게 조사받은 날이 일주일가량 되는 것 같습니다."
고문이 멈추고 수사가 종결되는 듯했다. 그러나 신씨는 미군 정보대에서 다시 일주일간 추가 조사를 받고서야 여수로 내려올 수 있었다고 한다. 헬리콥터를 타고 여수공항에 내린 신씨는 순천구치소로 수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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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씨의 집에서 함께한 식사. 남녘 바닷가의 향이 가득 묻어났다. 차려진 밥만큼이나 평화가 깃들길 바라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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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의 죽음
형식적인 검찰 조사와 형식적인 법원 재판이 이어졌다. 결국 그는 고의 월선한 것으로 범죄 사실이 조작되어 징역 1년 6개월의 형을 살게 되었다고 한다. 변호사조차 선임할 수 없는 가난한 형편의 신씨였기에 그는 직접 항소이유서와 상고이유서를 작성해 법원에 제출해야 했다.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마침 군산에 살고 있던 남동생이 면회를 왔고, 그 동생에게 상고이유서를 작성하기 위해 법전을 사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끝내 동생은 법전을 보내주지 못했다.
"법원에서 말해봐야 소용없다고 생각했는데 1심 끝나고 나서야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항소문을 썼어요. 그런데도 똑같이 1년 6개월 형이 선고되니까 안되겠다 싶어서 상고이유서를 잘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남동생이 면회왔길래 법전을 사달라고 부탁했죠. 동생이 알았다며 돌아가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어요. 결국 법전 없이 혼자 끙끙거리면서 상고이유서를 겨우 써서 냈습니다.
그런데 고등법원에서 무죄가 되었던 것까지 대법원에서 유죄가 되어버려서 너무도 속이 상했죠. 제 판결이 대법원 판례 교육 자료로 남았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막상 재판이 끝나고 나니 동생이 법전을 안 보내 준 것이 마음에 남았는데, 나중에 출소해서 동생이 그 법전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 배를 타고 나갔다가 그 길로 사고가 나서 죽었다는 것을 알고는 얼마나 괴로웠는지 모릅니다."
출소 후 멸치잡이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던 신씨는 다른 납북귀환어부들과 마찬가지로 경찰의 지속적인 감시 속에 살았다고 한다. 사복 차림의 경찰은 일상을 감시하기도 하고, 전향을 종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출소 후 몇 년간 바다에 나갈 때마다 신고해야 했고, 신씨로 인해 광주에서 학교 다니던 딸들도 느닷없는 경찰의 전화와 감시를 받아야 했다고 한다.
"나중에 동네 사람들이 그럽디다. 동네 사람들도 경찰서에서 돈을 받고 나를 감시했다는 겁니다. 여기 대나무밭에도 숨어서 감시하고, 저기 마루 밑에 들어가서도 감시하고. 그렇게 감시를 심하게 했다고 합디다. 그러니 어디 가서 말 한마디 할 수가 없었어요. 술을 먹어도 절대로 북한말은 하지도 않았고, 누구와 다툴 일이 생겨도 내가 입을 닫아버렸습니다."
신씨는 자신의 문제로 인해 피해 받은 자식들에게 가장 미안하다고 했다. 한국전력에 입사 시험을 봤던 아들은 시험에 합격하고서도 신원조회에 문제가 생겨 여러가지 곤란을 겪어야 했고 우여곡절 끝에 입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신씨는 진실규명을 신청하고, 재심을 하려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을 했다.
"제가 억울해서요. 동네에서도 내가 이북 갔다왔다는 '때'를 벗어야겠어요. 마을 이장에 나오고 싶어도 납북자라는 이유로 이장을 할 엄두를 못 냈어요. 북한에 다녀온 사람을 누가 이장으로 뽑겠냐고요."
옆에서 가만히 남편 신씨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내는 남편이 납북되었다가 재판을 받고 출소할 때까지의 생활이 지옥이었다며 눈물을 보이며 하소연 했다. 생사조차 모르는 남편을 뒤로한 채 아이들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닥치는 대로 바닷일, 농사일을 해내야 했다. 그녀의 손마디는 보통 남성의 손마디보다 굵었고 성한 곳 없이 모두 휘어져 있었다. 그렇게 돈을 모아 남편의 고문 후유증을 치료해 내야 하고, 아이들의 교육과 먹을 것을 해결해 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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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씨 아내의 손. 지팡이에 의지해야 할 만큼 무릎은 망가졌고, 휘어지고 굵어진 손마디에는 그녀의 힘들었던 삶이 그대로 묻어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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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신씨의 사연이 여수지역 방송국에 소개되면서 함께 납북되었던 피해자들이 하나둘씩 소식을 알려온다고 한다. 그리고 신씨와 같은 납북 피해자들의 피해 사실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신씨는 지난 10월 4일 광주고등법원에 재심 신청까지 마쳤다. 이제 지역과 국가가 답을 해야 할 때다. 동해와는 다르게 이제 막 납북귀환어부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한 서해 납북귀환어부들의 피해 사실을 조사하고 밝히는 것에 지역사회와 시민단체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할 것이다. 신씨의 용기 있는 고백은 진실규명의 불씨가 되어 들불이 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