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길
비밀 없는 사람은 없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깊은 우물 속 밑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혼자만의 비밀이 있다. 지난날 잉꼬부부처럼 지내던 지인이 각자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놀라움이 가슴에 스미었다. 그는 자녀 교육을 위해 아내가 뉴욕에 건너가 영주권을 얻으며 부부가 떨어져 살게 되었다. 남의 깊은 속내막은 알 수 없으나 나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이미 각방 쓴 지 오래다. 직장 생활을 하느라 반평생 각자의 길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퇴임 첫날 무척 당황스러웠다. 식사를 마치니 갈 곳이 없어 거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켰다. 주말마다 앉던 그 자리가 낯설었다. 이러한 변화는 나뿐만이 아니라 아내도 마찬가지였을 듯하다. 갑자기 혼자 누리던 리듬이 흔들리고 익숙한 시간에도 변화가 찾아와서 그녀도 나만큼이나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그녀가 타 온 차를 마시며 잠시 몇 마디 얘기를 나누었으나 단답형의 말만 오갈 뿐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평소보다 말수가 줄어들고 입가의 미소 마저 사라져 버렸다.
괜히 눈치가 보여 길을 나섰다. 누군가 불러주면 찬밥 더운밥 가리지 않고 달려갔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곳저곳에서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알량한 지난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청해오면 그에 맞춰 떠들어 대고, 혹자는 개인 과외수업하듯 물어오는 이 있으면 그에 답해주곤 했다. 이뿐 아니다. 몇몇 해외 봉사단체에도 기웃거렸다. 손꼽아보니 벌써 여러 해 지났다. 이제 ‘동가식서가숙’하는 유랑이 낯설지 않다. 한데, 근자에 아내로부터 숫 검댕이 세수하나 마나, 앞 못 보는 이가 눈뜨나 마나, 자신이 결혼하나 마나라는 하소연이 내 귀에 닿았다.
불현듯 이렇게 나돌아치다가 집에서 쫓겨날 수 있겠다는 처량한 마음이 똬리를 틀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일전 꿈속에서 판사에게 호출당해 졸경치르다 잠에서 깨어났다. 바로 일어나 법전을 뒤져보았다. 민법에는 부부가 동거하고 부양하며 협조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이후 다른 부부를 유심히 엿 보았다. 어느 집이고 크고 작은 부부간의 갈등이 있다. 갈등은 반드시 불륜이나 큰 싸움에서 오는 건 아니다. 이는 표현 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되고, 서로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해 서운함이 쌓이면서 싹튼다. 어쨌든 갈등이 오래가면 관계는 더 조금씩 멀어진다. 각방을 쓰거나 별거하면서 생활 방식이 따로 굳어져 버리면, 자는 시간이 다르고, 먹는 취향도 바뀌고, 주말에 각자의 시간을 즐기려고 한다. 결국 처음에는 서로 편해 보일지 모르나 오래가면, 부부가 남보다도 못한 더 어색한 사이가 되는 경향이 적지 않다.
돌아보면 내게는 각자도생하게 길들여 진지 모른다. 집에 돌아오더라도 식사를 챙기고 청소하고 세탁소에 빨래를 가져다준다. 그리고 어쩌다 만난 아내에게 밥을 하고 고기를 구워서 밥상을 차려 주기도 한다.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한순간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고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간다. 하지만 대화의 모습은 서툴고 어색하기 그지없다.
“음식물 쓰레기는……”
매번 듣는 소리다. 아내가 집안에서 냄새나지 않게 하자는 데 아무런 이의가 없으나 그녀가 입만 열면 귀를 닫으려고 한다.
“잔소리 그만.”
거두절미하고, 내 입에서 자동 발사기처럼 튀어나온다. 그 말 한마디 때문에 그녀는 설거질 하면서, 불을 끄고 누운 뒤에도 그 말을 떠올리며 서운한 감정의 벽을 쌓는다. 마침내 내게 더 이상의 기대할 게 없다는 듯 묵언 수행 중이다.
부부관계는 늘 빛과 어둠을 넘나든다. 정말 무서운 것은 순간 미워질 때보다 더 이상 기대하지 않을 때다. 어디에 가는지 궁금하지 않고, 늦게 들어와도 신경이 쓰이지 않으며, 힘든 일이 있어도 배우자에게 먼저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면, 같은 집에 있어도 가장 먼 사람이 될 수 있다. 부부 사이를 끝까지 이어주는 건 싸우지 않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서로에게 궁금함이 남아 있는 마음이 아닐지.
비밀은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말하지 못한 서운함과 작은 기대들 속에 숨어 있다. 나이를 먹어가며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조금씩 밝아지는 것 같다. 이제 각방을 쓰든, 별거하든 그리 중요하지 않다. ‘각자의 길’ 그 존재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맡기면 될듯하다. 다만 함께 산다는 것은 같은 지붕 아래 머무는 일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지 싶다.
첫댓글 유병덕 수필 <각자의 길>질 읽었습니다.
수필 칭직을 통해 삶을 구현하시는 모습이 아름딥습니다
마지막 금요일 만나 함께 작품을 합평하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