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 : 깃대봉광장(동구도심건강길1길)
일시 : 2022.06.02(목) 10시,
참가 : 동명강공수 김상문 산해김재일 석당나종만 춘강박남용 아석양수랑 월전윤상윤 밝뫼윤정남 가산장휘부
서정정원길 등 10명
불참 : 월봉김영부(함평농장) 송헌최문수(당분간 쉼)
회 비 : 100,000원
지 출 : 80,000원(쌈 돌솥밥 10)
잔 액 : 20,000원
이월잔액 : 493,000원
총 잔액 : 513,000원
학동증심사 입구역 부근 솔밭 쉼터에서 시작된 산행에는 7명(강공수 김재일 나종만 박남용 양수랑 윤상윤 윤정남 등)이 참가하였다. 먼저 점심 먹을 식당을 정하였다. 그리고 불참자들이 시내버스 무등파크정류장 부근에 있는 식당(참숯갈비마을)으로 점심때인 12시 30분에 올 수 있도록 문자를 보냈다.
우리는 조선대부속고등학교를 지나 에이원골프연습장을 지났다. 모두 언제 조선대학교 부속고등학교가 이곳으로 이전하였는가를 궁금해 하였다. 전에는 이 학교가 지금 조선대 치과병원 뒤에 있다가 조선대 산하 학교 시설을 재배치하면서 그 자리는 부속중학교가 들어서고, 부속고는 아주 조용한 이곳으로 이전하게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조선대학교의 청룡등(왼쪽)에서 잠시 조선대를 바라보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드문 3개의 삼각형 지붕을 가진 독특한 형태의 건물이 중앙에 버티면서, 그 양쪽 날개에 역시 3개의 삼각형 지붕을 가진 독립건물 형태의 건물을, 삼각형 지붕으로 줄줄이 연결하여 지어진 매우 안정되어 보이는 건물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내 생각으로는 조선대학교는 풍수지리에 딱 맞는 안정된 모습의 대학촌으로 숲 속에 오밀조밀하게 여러 가지 형태의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세계적으로 이렇게 잘 배치된 대학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항상 했었다.
내가 1973년 늦은 나이에 대입학력고사-고사장 감독관으로 김제복 친구가 왔었다-를 보고, 조선대학교 경제학과 1학년에 입학하여 2부대학 수강을 할 때, 그 넓은 운동장을 아마 축구장 5개 이상이 되는 운동장을 지나고, 또 몇 백 개의 계단을 지나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은 대학본관을 들어서서 또 백 여 개의 계단을 지나 5층에 있는 505강당을 들어서면 저녁에 먹었던 밥이 다 소와가 될 정도였다. 당시 박철웅총장이, 광주시민들이 이부대학(야간수업) 강의실의 불빛을 다 볼 수 있도록 가장 높은 건물의 가장 높은 층에 강의실을 설치하도록 하여야 한다는 신념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나중에 4학년 때인 1976년에는 마침 대학교 정문 바로 옆에 있는 공과대학 건물이 신축되어 거기에서도 가장 높은 층에 이부대학 강의실을 설치하여, 역시 광주시민들이 그 불빛을 바라보면서 저기는 ‘여러 가지 이유로 적령기에 대학을 가지 못한 호남의 청소년들에게 늦게나마 고등교육의 기회를 준 곳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박총장 역시 높은 곳에 위치한 대학 본관에 있는 총장실까지 출근하는 시간을 절약하려고 공과대학 건물에 임시 집무실을 만들어 거기에서 집무를 보기도 하였다. 나는 직접 박총장이 오늘 밤 열차로 상경하여 문교부에 제출할 문서에 딸린 자료 사진을 인화하여 젖은 사진을 말리려고 고무줄을 쳐놓고 친히 거기에 사진을 걸어 말리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기도 하였다. 박총장이 대학을 사유화 하였다는 원성을 듣기도 하였지만 오늘날 세계적으로 내 놓은 수 있는 조선대학이 만들어지기 까지는 박총장의 눈물겨운 비사(秘史)도 많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또 그가 원성을 듣는 것은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독선적 대학 운영방식 때문일 것이다. 타인들이 인정하지 않는 문제를 자기는 최선이라 생각하여 밀어 붙이니 그런 원성을 듣게 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느 대학 총장이 자료로 제출할 사진을 직접 말리는 일을 하고 있겠는가, 또 아직 마르지 않는 사진을 열차 속에서 역시 고무줄을 쳐 놓고 거기에 걸어서 밤새도록 말려서 문교부에 제출하겠다고 생각이나 할 것인가, 그런 것을 보면 그는 어떤 면에서는 아주 소박하고 순박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게 도립 조선대학은 몇 개의 칼리지(단과대학)에서 시작하여, 어떤 계기로든 그것을 운영해 온 박총장은 이제는 겉으로나 안으로나 어느 대학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세계 유수의 유니버시티(종합대학)의 초석(礎石)을 세웠지만, 최후에는 좋은 이미지를 가진 인물과는 거리가 먼 인물로 각인이 되기도 한 것이다.
우리가 중학교를 졸업하였을 때, 인재(人才)를 양성하겠다고, 조대부고에 한 명이 아닌, 한 학급의 장학생반(60명)을 만들기도 하였으며, 각 단과대학에 4년 장학생과 여러 명의 장학생을 두어 인재 양성에 기여하기도 하였지만, 그 장학 혜택을 받은 학생들이 박총장의 학교 운영 비리에 반기를 들어 시위를 주동하기도 하였으니, 어찌 보면 내○ 주고 뺨맞는 꼴이 되기도 한 것이어서, 박총장의 입장에서는 억울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조선대 설립 초기에. 학교 부지 내에 살고 있던 민간인들을 학교 경내에서 매끄럽게 내 보내지 못하고, 그들과 충돌한 일들이라든지, 학교 운영방식에 불만을 품은 교수들에게 불이익을 주거나, 변칙적인 학사운영 등은 박총장을 대변하는 이미지에 대한 어두운 면일 것이고, 고려시멘트 회사를 설립하여 건축의 기본이 되는 시멘트를 값싸게 확보하고, 공과대학 교수들이 설계하고 자체적으로 최소한의 가격으로 튼튼하고 효율적인 학교 건물을 건축하였는가 하면, 열효율을 극대화한 설계로 시설유지 비용 절감 등은 어느 대학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박총장을 대변하는 빛나는 업적일 것이다.
나는 조선대학에서 4년의 시절을 보내고, 1977년 2월에 학사모를 쓰고 졸업식에 참가하였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45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지나가 버렸으니 참으로 조선대학의 모습은 상전벽해(桑田碧海)처럼 달라져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깃대봉 광장은 3년 전인 2019년까지만 해도-코로나19가 번지기 전에는-새벽 6시만 되면 인근 사람들이 저절로 모여 들어 아침운동을 하였던 곳이다. 어느 댄스 스포츠 강사가 자기도 아침 운동을 하러 왔다가 여기에 모인 사람들에게 댄스 시범을 보이고 재능 봉사로 솔선하여 가르쳐 주었고, 그것이 몇 년을 이어져 오다가 감염병 확산으로 아침운동이 끊긴지 벌써 3년이 되었다. 언제쯤 그런 자생적 운동모임이 다시 생길지 알 수 없다. 다만 이 깃대봉 길이 코로나 시절에 달라진 점은, 전에는 매우 울퉁불퉁한 암석이 돌출한 산행로였는데 동구청의 노력으로 소형 굴착기가 들어와서 평탄 작업을 하더니 거기에 야자매트를 깔아서 지금은 산행하기에 아주 좋은 매끄러운 산행로로 변화되어 산을 즐기는 광주의 등산객들에게 최적의 산행로를 제공해 주어서 동구청장이 크게 찬사를 받고 있는 중이다.
게다가 3년 전에 어느 늦은 봄날, 한 40대의 젊은이가 한 묶음의 무슨 풀을 가지고 와서 심는가 싶더니, 다음 해 이른 여름에 그 자리에서 작은 꽃대가 하나씩이 올라오고 그 가냘프고 긴 꽃대 끝에서 빨간 나리꽃을 피워 올렸다. 상사화(相思花)였다. 그 다음 해에는 상사화 꽃이 떨기로 피었다. 아마 올 여름에는 더 많은 상사화 떨기 꽃이 만발할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이 깃대봉 능선길에 상사화 꽃밭이 그 예쁨을 자랑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 나는 그 풀 다발을 심던 젊은이를 찾지 못하고 있다. 모든 꽃이 꽃망울이 맺힌 다음 꽃이 피는데, 상사화는 아무 예고도 없이 꽃만 먼저 피었다가 꽃이 진 뒤에 잎이 나오듯이, 갑자기 나타나서 꽃만 심어 놓고 누가 알까 봐 연기처럼 사라진 그 젊은이는 누구였을까?
오늘은 금주의 노래를 부를 장소도 마땅치 않고, 산행에 참여한 회원 수도 적어서, 노래 행사를 하지 않고 바로 식당으로 갔다. 그래도 모인 회원 수는 두 자리 수를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