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여행기312-터키(앙카라, 데린쿠유)
6월12일 앙카라시 한국공원에 갔습니다.
이스탄불에서 새벽에 앙카라로 갔습니다.
앙카라는 터키의 수도입니다.이스탄불에 이어 두번째로 큰도시입니다. 인구는 459만(2014년통계)입니다.
앙카라는 터키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정치적 중심지로 1923년 오스만제국이 멸망하고 터키공화국이 세워지자 이스탄불 대신해 수도로 지정됐습니다. 아나톨리아 지역의 상공업의 중심지이며 도로와 철도 교통의 중심지입니다.
한국 공원이 앙카라에 있습니다. 터키는 한국전쟁때 UN군 파병규모 4위로 14,936명의 터키군은 대부분 지원병으로 그중에 전사자 1,005명 부상자 2,147명, 실종자 409명, 포로 229명이었습니다. 용인 금양장리 전투와 판문점 동북부 네바다 전투에서 큰 전공을 세운바 있으며 용인시에 터키군참전비가 세워져있으며 한국전쟁중 사망한 전사자 시신은 부산 UN기념공원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터키군은 한국전쟁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꼽히는 평안북도 군우리 전투 등에서 용맹을 떨쳤다고 합니다. 1951년 11월 교통요충지인 군우리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남하하는 중공군을 막아낸 덕택에 유엔군의 한부대가 몰살돼는 위기를 넘겨 반격할수 있는 시간을 벌었고 그외에도 용인, 철원등 전투에서도 육박전으로 중공군을 물리치는 큰 공을 세웠습니다.
서울 여의도에도 앙카라공원이 있습니다. 지하철 9호선 샛강역 3번 출구에 나오면 바로 앞에 있습니다.
터키는 이슬람 장례문화에 따라 화장도 이장도 할수없어 한국을 방문할수없는 가족들의 심경을 고려하여 이곳에 전사자 기념탑을 세우고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된 한분 한분의 묘지에서 한줌씩 흙과 은행나무 단풍나무를 가져와 탑 중앙에 모시고 벽면에 전사자 이름을 새겨 추모하는 공원을 조성한것입니다. 탑 중앙 석관에는 "여기 한국에서 헌신한 토이기 용사들의 묘로 부터 옮겨온 흙이 담겨 있노라"
한국공원은 터키공화국 건국 50주년을 맞이한 1973년 한국정부가 헌정하였다고 합니다. 불국사의 석가탑을 본떠 만든 '한국 참전 토이기 기념탑'입니다. 한국공원은 기념탑이 중심을 이룹니다. 앙카라 시청사 인근에 있습니다.
탑둘레 네 벽면을 빙둘러 전사자명단이 쓰여져있습니다. 신원 확인된 765명이라고 합니다. 1950년~1953년사이 1928년~1931년생으로 20~23세 꽃다운 청년들입니다.
625 전쟁당시 터키군은 참전국중 유일하게 부대내 한국인 고아를 위한 '앙카라 고아원'을 운영하였습니다. 당시 터키군 장교였던 (고)슐레이만씨는 전쟁참화에서 부모를 잃은 어린고아(김은자)를 터키어로 달이라는 뜻인 '아일라(Iyla)'라는 이름을 지어주면 아버지처럼 보살폈습니다. 전쟁이 끝난후 홀로 귀국하여 한국인고아를 60년간 잊지못하였습니다. 2010년 국가보훈처의 유엔참전용사 방한프로그램 초청되었던 (고)슐레이만씨는 방송을 통해 기적적으로 아일라(김은자)씨를 재회하여 당시 "아일라, 푸른 눈의 병사와 고아소녀"방송 프로그램으로 한국에서 방영되고 터키현지에서 소개되어 터키국민들의 감동과 화제가 되어 <아일라> 영화가 만들어졌습니다
1999년8월17일 강도 7.8 이스탄불지역의 터키대지진때 20여만명 이재민이 났고, 18,000명이 숨지고 42,000명이 부상당하였습니다. 한국정부가 보낸 구원자금은 7만불, 일본은 600만불, 빈민국 방글라데시 도 10만불을 보냈습니다. 당시 주한터키대사관의 국민성금을 알게되어 언론인. 의료인. 연예인. 방송인들이 모금 콘서트와 바자회를 통해 터키돕기운동으로 10만불을 모금해 보냈다고 합니다.
마켙에서 화장실을 갔다오는데 한 터키인이 나한테 "대한민국"소리치며 사랑한다고 해서 같이 사진을 찍었습니다.
터키인들은 한국민들을 우호적이며 "형제의 나라"로 소개합니다. 그이유는 터키인들은 자신의 나라를 '투르크'라고 부릅니다. 고구려시대때 돌궐이 투르크의 다른 발음이며 같은 우랄 알타이계통이며 고구려와 돌궐은 동맹을 맺어 가깝게 지냈으며, 돌궐이 위그르에 멸망한 후 남아있던 이들은 서방으로 이동하여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건설하게 됩니다. 돌궐과 고구려는 계속 우호적이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를 "형제의 나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지금의 터키에 자리잡은 그들은 고구려의 후예인 한국인을 여전히 그리고 당연히 '형제의 나라'라고 부르게 된것입니다. 터키어도 한국와 같이 어순이 똑같습니다.
한국공원 인근에는 터키국민들이 추앙하는 '무스타파 아타투르크 케말 파샤' 영묘(靈廟)'가 있습니다. 터키 근대화의 아버지이자 터키의 국부로 존경받고 있는 분입니다.
소금호수는 앙카라에서 카파도키아로 가는 도중에 있는 '투즈'호수입니다 투즈는 터키어로 소금입니다. 전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소금호수입니다.
터키 전체 소금 수확량중 60%, 년간 150만톤 소금을 생산한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바다였던 이곳은 지각변동으로 호수로 변했습니다.
비가 오지 않다고 보니 말라서 소금호수가 돼었다고 합니다. 이지역 전체가 나트륨성분이 많고 식용으로 쓰고 또 진흙과 잘 배합하여 소금항아리를 만들기도 합니다. 만든 항아리는 아무리 더워도 물이 얼음물같이 차고 변질이 안된다고 합니다. 상인들은 이소금 호수에서 나는 소금항아리를 최고의 상품으로 쳤다고 합니다.
이소금 호수 "투즈 골루"는 계절과 기온에 따라 색이 변하는데 그중에서도 4월과 6월사이, 9월과 10월에는 온통 분홍색으로 변합니다. 하지만 온도가 높은 7월과 8월사이는 얕은 호수물이 증발하여 사막같은 하얀 소금밭이 됩니다.
투즈골루는 소금뿐아니라 제비, 거위, 플라밍고(홍학)의 번식지이기도 합니다. 겨울철에 호수 염도가 묽어지면 번식하기 위해 이곳을 찾아 온다고 합니다.
보이는것이 왕릉인데 앞에보이는 사각표시가 도굴꾼들이 그곳을 파서 도굴하였다고 합니다.
아나톨리아 반도 중앙의 카파도키아 고원 아래에 부드러운 화산암을 깎아 만든 200개가 넘는 지하 도시들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곳 데린큐유. 한농부가 도망간 닭을 쫒아 들어갔다가 발견한 곳입니다.
1985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데린쿠유는 개미굴 처럼 지하곳곳으로 파내려간 대규모 지하도시입니다. 한때 아랍인들로 도피한 기독교인들이 거주한 곳으로 알려져있는데 내부통로와 환기구가 지하 각층으로 연결되어있고 교회와 학교 그리고 부엌 침실 우물등이 존재합니다
적의 침입에 대비해 둥근바위 모양의 돌덩어리를 통로마다 설치해 비상시 통로를 막았고 독특한 기호로 길을 표시해 외부에서 침입한 자는 길을 잃토록 미로처럼 여러갈래의 통로를 뚫어 놓았습니다.
최초의 터널들은 4천년전에 파였다고 추정하는 설도 있지만 터키문화부의 발표에 따르면 기원전 8~7세기 프리기아 인들이 착공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전성기는 동로마제국시대로, 당시 그리스도교도들이 무슬림 아랍인, 튀르크족의 습격을 받자 피신처로 이용했다고 합니다.
14세기 티무르가 공격할때는 정교회 원주민들의 피신처로 이용돼었습니다. 심지어 20세기까지도 카파도키아의 그리스인들이 오스만제국의 탄압을 피해 피난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터키전쟁 이후 1923년 그리스와 터키주민 교환으로 버려졌다가 1963년 재발견되었습니다.
데린쿠유는 2만명이 살수있는 크고 아름다운 규모이고 방과 방은 통로로 이어지는데 총11개층이 있고 지하 85미터 깊이까지 이어집니다. 더욱 놀라운것은 데린쿠유의 시설입니다. 곡물창고, 포도주와 기름 착유기, 식당, 학교와 예배당, 심지어 농장과 가축농장은 물론 감옥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시대의 이런 규모로 지하에 도시를 건설함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지하도시의 입구에는 작은 지상 마을도 존재하였는데 겨우 수백 명이 거주할수 있는 규모입니다.
특히 의문스러운점은 빛도 공기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지하동굴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살수있었는지였는데, 학자들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중앙에 있는 수직 환기구와 주위의 보조 환기구들을 통하여 공기가 들어오도록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곳은 부엌입니다.
거대한 바위문믈 이용해 지하도시를 성처럼 봉쇄할수 있어서 티무르의 공격에도 지하도시를 지킬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미닫이 문처럼 방과 방사이에 작은 틈새가 있고 그안에 돌맹이를 끼어서 적군이 들어오면 그 돌덩어리를 통로 중간에서 막아버리는 방식이었습니다. 심지어는 하나의 방 양쪽 출입구에 모두 바위문을 만들어서 적군을 아예 포위시킬수있는 방도 있었습니다.
방과 방 사이의 돌덩어리가 지상에서 만들어 지하도시로 이동하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지하에서 만들었을텐데 방과 방 사이를 막을려면 크기가 방 입구보다 커야하기에 미스테리입니다.
또한 가까운 지하도시 카이막르(Kaymakli)와도 길이 8km 터널도 연결되었습니다.
지하도시 위의 마을입니다.
이곳 여자들은 결혼할때 신랑이 신부측 집에 양을 결혼지참금으로 줍니다. 또 집안에 결혼 할 처녀가 있으면 집 지붕에 빈병을 올려놓습니다. 그것을 보고 총각이 그집을 방문합니다. 신부감 처녀가 몰래 지켜보다 차를 대접하는데 맘에 안들면 차에다 소금을 넣으면 성사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집에 이혼한 여자가 있으면 빈병을 꺼꾸로 지붕에 올려놓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