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중달 교수의 역사칼럼(93)
새 나라 신(新), 낡은 설계도
권중달(중앙대 명예교수, 삼화고전연구소 소장)
개혁이라는 말에는 언제나 기대가 따른다. 오래된 폐단을 걷어 내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겠다는 약속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청년의 일자리와 주거, 결혼에서 부동산과 민생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정책이 개혁의 이름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달라진 현실을 제대로 읽지 못한 채 과거의 성공 방식을 되풀이하거나, 현실에 맞춘다는 명분으로 정책을 자주 바꾼다면 개혁은 또 다른 혼란을 낳을 수 있다. 전한(前漢) 말 왕망(王莽)이 세운 신(新) 왕조의 개혁은 이러한 위험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왕망은 외척으로 권력을 장악한 뒤 서기 9년 전한을 대신하여 신(新)을 세웠다. 그는 토지와 노비, 시장과 화폐, 관제와 대외관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국호 신은 그가 신도후(新都侯)에 봉해진 데서 비롯되었다고 해석되지만, 《한서(漢書)》는 그 이유를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따라서 국호 자체에 개혁의 뜻을 담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새 왕조를 세운 왕망이 새로운 질서의 모델을 미래가 아니라 수백 년 전의 주나라에서 찾았다는 역설은 분명하다.
왕망이 주(周)나라의 제도와 예법을 내세운 데에는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한 왕조를 대신한 새 정권은 자신이 왜 천하를 다스려야 하는지를 설명해야 했다. 왕망은 평제(平帝) 때 정권을 보좌하던 시기부터 여러 학자를 모아 예악과 제도를 정비하고, 자신을 주공(周公)과 고대 성왕의 계승자로 내세웠다. 그의 복고는 사회경제정책인 동시에 권력 장악을 천명에 따른 질서 회복으로 설명하려는 건국 이념이었다.
그렇다고 왕망의 개혁을 현실과 동떨어진 기행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전한 말에는 토지가 황실과 외척, 고위 관료와 지방 호족에게 집중되면서 토지를 잃고 소작농이나 유민이 되는 사람이 늘어났다. 자영농민의 감소는 국가의 재정과 군사 기반까지 약화시켰다. 토지 겸병과 노비 매매를 억제하고 시장과 화폐를 통제하려 한 왕망의 판단에는 나름의 현실적 근거가 있었다. 개혁이 필요하다는 판단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무엇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있었다. 왕망은 천하의 토지를 왕전(王田)이라고 부르고 매매를 금지하였다. 한 집안의 남자가 여덟 명이 되지 않으면서 한 정(井)을 넘는 토지를 소유하면 남는 땅을 친족이나 이웃에게 나누게 했다. 노비는 사속(私屬)으로 이름을 바꾸고 매매하지 못하게 했다. 가난한 백성을 보호하고 자영농민을 회복하려는 정책이었지만, 그 기준은 당시의 토지 소유 실태와 지역별 경제구조가 아니라 고대의 정전제(井田制)였다.
그러나 왕망이 살던 중국은 이미 주나라 초기의 사회가 아니었다. 춘추와 전국, 진과 전한을 거치며 토지 매매와 화폐경제가 확대되었고 지역별 생산조건도 크게 달라졌다. 토지를 다시 나누려면 소유 실태를 정확히 조사하고 대토지 소유자의 저항을 제압할 행정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지방 호족은 관료조직과 지역사회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반면, 신 왕조에는 토지를 실제로 재분배하고 이를 농민에게 지속적으로 보장할 행정 장치가 없었다. 결국 왕망은 서기 12년 왕전의 매매를 허용하고 사속 매매에 대한 처벌도 중지하였다. 이름은 바꾸었지만 토지 소유구조는 바꾸지 못한 것이다.
왕망은 오균육관(五均六筦)을 시행하여 물가를 조절하고 백성에게 자금을 빌려 주며, 소금과 철, 술과 화폐 주조 등을 국가가 관리하려 했다. 여기에는 전한 무제 이래의 경제정책을 계승한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정확한 시장정보와 숙련된 관리, 부정을 감시할 제도는 부족했다. 상인 출신 관리들이 지방 관리와 결탁하여 이익을 챙기는 폐단도 나타났다. 화폐의 종류와 가치마저 거듭 바뀌자 백성은 새 화폐를 믿지 못하고 옛 오수전(五銖錢)을 몰래 사용하였다. 시장을 안정시키려던 정책이 오히려 거래의 혼란과 생활의 불안을 키운 것이다.
개혁의 속도와 일관성도 문제였다. 새로운 법령이 잇달아 내려졌지만 제도는 자주 바뀌었고 위반자에게는 무거운 형벌이 적용되었다. 《한서》는 제도가 안정되지 않아 관리들이 이를 이용해 농간을 부렸고 형벌에 빠지는 사람이 많았다고 기록하였다. 관직과 지명도 고대식으로 거듭 바꾸어 어떤 군은 이름이 다섯 차례나 달라졌다가 다시 옛 이름으로 돌아갔다. 흉노(匈奴) 선우에게 새 인장을 강요하고 칭호를 낮춘 조치도 갈등과 군사적 부담만 키웠다. 이름을 바꾸는 것과 현실을 바꾸는 것은 달랐다.
서기 11년 황하(黃河)가 범람하여 하북과 산동 일대에 큰 피해를 주었고, 이후 각지의 흉작과 기근, 전쟁과 징발이 겹치면서 유민이 늘어났다. 남방의 기근 속에서는 녹림군(綠林軍)이, 청주(靑州)와 서주(徐州) 일대에서는 적미군(赤眉軍)이 성장하였다. 서기 23년 녹림 계통의 경시정권(更始政權) 군대가 관중으로 진격하고 장안 내부에서도 봉기가 일어나자 왕망은 살해되었고 신 왕조도 무너졌다.
왕망의 실패를 복고주의 하나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자연재해와 기근, 정치적 정통성의 한계, 호족의 저항과 관료제의 부패, 잦은 정책 변경과 대외 갈등이 함께 몰락을 재촉했다. 그러나 왕망은 변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중국 사회가 이미 어떻게 달라졌는지는 충분히 읽어 내지 못했다. 개혁의 목표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 목표를 이상화된 과거에서 찾은 것이다. 고전을 현실을 비추는 자료가 아니라 현실을 대신할 설계도로 삼으면서 개혁은 앞으로 나아가는 변화가 아니라 과거로 돌아가려는 복고가 되고 말았다.
물론 왕망 시대의 전제적 통치와 오늘날의 민주적 정책결정 과정을 동일하게 볼 수는 없다. 그러나 현실 진단과 집행 능력, 정책의 예측 가능성과 신뢰가 개혁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점에서는 공통된 교훈을 찾을 수 있다. 청년 일자리와 주거정책은 정권 교체나 정책 기조의 변화에 따라 사업의 이름과 지원 기준, 추진방식이 달라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부동산정책도 세금과 대출, 공급과 규제의 기준이 자주 바뀌면 국민이 미래를 예측하기 어렵게 만든다. 상황이 달라지면 정책도 조정해야 하지만, 충분한 검토와 평가 없이 거듭 바뀌면 청년은 일자리와 주거, 결혼에 관한 장기계획을 세울 수 없다. 정책의 변화가 필요한 것과 정책이 흔들리는 것은 다른 문제다.
역사는 과거의 제도를 되살리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과거의 성공과 실패를 오늘의 조건에 맞게 해석하라고 가르친다. 왕망이 세운 왕조의 국호는 신(新)이었지만 그 설계도는 지나치게 과거를 향하고 있었다. 오늘날에도 새로운 이름을 붙이고 제도를 자주 바꾸는 것만으로 현실을 바꿀 수는 없다. 개혁의 성패는 구호의 새로움이나 정책 변경의 횟수가 아니라, 달라진 사회를 얼마나 정확히 읽고 그에 맞는 제도를 얼마나 일관되게 실행하느냐에 달려 있다.
첫댓글 현재 한국의 개혁문제의 본질과 그 성과를 과거 왕망의 제도 개혁에 비추어 해석하려한 점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를 단순히 게혁이라고 하는 차원에서 보는 것은 아무리 본질이 비슷하다 해도 현대를 이해하는 데에 어떤 도움을 줄 가요. 유형적 비교를 벗어나려면 이 논설의 목적이 무엇인 지가 천명되어야 하지 않을 가요? 마지막 결론은 참으로 우리에게 깊은 감명을 줍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