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회다리의 추억
(6월9일 동창회 후기)
강(江)은 누구에게나 어린시절 추억의 보고(寶庫)다. 조금 커서는 도둔 앞 홍천강에서 놀았지만, 초딩때에는 강으로 합류되는 지천(支川)에서 주로 놀았다. 홍천강은 서석에서 발원하여 상류로부터 내촌천, 장남천, 동면천, 성동천 등 주요 지천(支川)을 합한 뒤에 팔봉산으로 흐른다. 65년부터 70년까지 화계초등학교를 다닌 우리들 대부분은 성동천이 주놀이터였다. 성동천은 성동리, 화동리, 상화계리, 하화계리를 적시고, 공병대 밑 도둔에서 홍천강으로 합친다. (종노 등 중화계리 친구들도 패봉산의 방첩대 옆길을 넘어 성동천에서 수영놀이)
성동천이 상화계리와 하화계리를 양분하는 지점(공병대 밑)에 양회다리가 있었다. 돌터거리, 새둔지, 소단리, 백이 친구들은 주로 이곳에서 놀았고, 너구리터, 새터 친구들은 성동천 중하류 지점인 패봉산 밑에서, 상화계 친구들은 성동천 중류지점인 봉골다리 밑에서, 화동리 친구들은 성동천 상류지점인 윗봉골에서 각각 놀았다. 양회다리는 드럼통의 양쪽을 뜯고 연결해서 수로(水路)를 만들고, 그 위에 양횟자루(다 쓰고 남은 양회포대에 흙 등을 채워 넣은 포대)를 쌓아 만들었는데, 나중에 시멘트를 입히고 그 위에 벽으로 된 교각을 세워, 비밀방 같은 공간들이 여러 개 있었다.
다리 옆에는 명수네 무우밭과 옥수수밭이 있었다. 하교길에 무섭이가 무우를 발로 걷어차면, 우리는 하나씩 주워 들고, 다리 밑 비밀방에 숨어 먹었고, 어린 옥수수 대궁도 꺽어서 단물을 빨아 먹고는 했었다. 물고기 잡고 새 집 맡는 일은 동작 빠른 남선이가 특히 잘했다. 계리, 부러지, 탱가리, 꺽지도 많았었고, 가재를 잡으면 특히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남선이를 "털"이라고 불렀다. 그 당시에는 산이나 밭에 '천남성(天南星)'이라는 풀이 흔했다. 사투리로 '철남새'라 불렸었는데, 남선이의 이름이 이와 비슷해서, 별명이 '철남새'가 되었고, 나중에 '털남새'로 바뀌었다가, 결국에는 간단하게 그냥 '털'이 되었다. 하여간 초딩들 별명놀이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똑같이 유치하다.
책보 집어 던지고 멱감기(다이빙 포함) 하다가 다치기도 하고, 값비싼(?) 고무신으로 배를 만들어 냇물에 장난으로 띄우다가 잃어 버리고 울기도 했다. 겨울에는 얼음뗏목 놀이하다가 물에 빠져서, 옷을 입은채로 모닥불에 말리기 일쑤였다. 패봉산에서 총싸움놀이 하다가 진짜로 실탄을 주워서 방첩대에 신고하여 상을 받기도 했었다. 장마철에 비가 많이 내려 양회다리가 넘치면, 패봉산을 넘어 봉골다리를 거쳐 학교에 갔다. 상화계리는 북방면의 도심이라, 그곳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정수 등 터줏대감들로 부터 텃세를 받아야 했었고, 더 자라서는 양회다리 밑에서 상화계와 하화계 간에 패싸움을 벌이기도 했었다.
11사단 군용트럭이 일으키는 먼지를 하얗게 뒤집어 쓰면서 수도 없이 오갔던 그 비포장길! 하교길의 쉼터이자 가장 인기 높은 놀이터였던 그 양회다리! 다시 한번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걸어 보고 싶지만, 지금은 확포장 공사로 아쉽게 흔적조차도 없다.
그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들은 여전히 이렇게 애틋하고 생생하건만,
세월은 무심(無心)히 흐르고, 모든 것은 무상(無常)하다. 끝
첫댓글 아주아주 생생하게 어린추억과 개울(강)과 다리의 추억을 흑백TV이보듯 자세히 얶어주어 감회가 새롭기만 하다.
그랬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세월이 훌쩍지나 벌써 4-50년을 지나갔네.
주서비로 하여금 잠시나마 옛 동심으로 돌아가니 그때가 다시 그리워지는 이유는 무얼까?
이젠 반백이 넘어 할배 할매들이 되어가는 시점인데...
좋고 감동있는 추억의글 곰마~~
아웅
알게되고 역쉬주섭인 범생이영,,,머리인듯해
명이 그럴줄은 예전엔 이름으로 명을 많이 지어서 부르곤했지,
이
어쩜 세세하게도 역사적으로 잘도 썼다눈
몰랐던거 세
지금 그시절로 돌아간기분이네,,
우리도 상화계리 태산어빠네집아지트 추억거리 참많은데 정월보름날 태산어빠 여장하고 영주네동네 밥얻어온거며ㅡ
추억이 있어 행복한시간 더듬어봅니당,,무섭주섭 참 둘이 죽마고우,,천남성은 결혼해서 울가이버랑 산나물산행가면서
알게된거 그거 만지고 거시기 만지면 거시기가 부르튼다고 푸핫,,,
남선이
중화계리는 개울이 없구나 하고 생각해보니 맞는거 같으잉,,
주섭
우린 화동애들이랑 봉굴다리에서 영수랑 바위높은데서 다이빙 영수랑나랑은 다이빙 선수였지
상학이 물속에서 짖궂은 장난꾸러기,,,
옛추억이 새록새록 손이 아파서 타자치기두 힘드넹,,
남선이 별명이 많았지,,호남선,털남선,털남새,허털,털...`명수`는 까스활명수,활명수,깔명수,깔...
주섭이는 넙죽이, 진관술이는 진드기, 종국이는 쫑골,쫑골박, 종노는 쫀나...(종노야미안^^*),
무서비는 무말랭이,말래이,말,강돼지,돼지,탱크,여선생...(여자애들이 날좋아한다구 머슴애들이지은거^^)
글구 중화계 애덜은 방첩대앞 실개천(옛날엔 또랑물이 꽤넓었음)에서 멱감고 놀았고,
우리도(돌떡거리 애덜) 그 아래서 멱도 감고 고기도잡고 개구리도잡고 놀았음^^ 수정 | 삭제 | 신고
양애(양회)다리 비밀방벽에 숫검정으로 19금낙서도 무진장했었지...ㅋ.
태봉산(매봉산),봉골다리(이후엔 쌍다리라불렀고),괘리(계리),방첩대,책보둘러매고 무서리...
아! 이 정겨운 단어들을 달고살았던 그시절이 이젠 추억으로 가려진체 우리들만의 언어가 되어버렸구나!
잠시나마 타임머신을 타고 잊었던 기억의 강을 건너게 해준 주섭이가 고맙다.
19금낙서,,타임머신 나도 타고 있었어 오늘,,,
옛날일을 세세히 기억하고 글로 남긴 준섭이(원래이름) 고마우이. 읽다보니 절로 웃음이 나네.
털남선이가 이번에 안보여 아쉬웠다네,
우린 삼거리 애들 안볼려고 장그머기고개로 넘어 다녔드랬는데...
장연인 중화계리였나
준섭이 였어 주섭이가
준섭이! 오랫만에 듣는 반가운 이름이네 (중학교 갈때 호적등본 떼보니까 주섭으로 돼있는거야)
장연네집 생각난다. 화동 6중대 지나서 개울(성동천) 징검다리 건너 약간 높은터 그 집. 지금도 있냐?
화동 2대대(재구대대) 지나 개울건너 (예날엔 돌다리,지금은 큰다리), 옛집은 오래전에 없어지고 추억만 남았다네
우린어려서 낙서만했고 형누나덜은 야밤에 퍼포먼스를...ㅋ.ㅋ..
어려서
누나들 그누나들 누구영
초딩들에겐 낮의 물놀이터, 그 이상에겐 밤의 낭만놀이터. 그랬었지.
동네누나들중에서 이쁜누나가 있었는데 신문이누나라고...(남동생이름이 신문이라서 많이놀렸음)
공병대 군인아저씨랑 바람나서 제대후 야반도주했다고들었는데...여고생(?)때.
그누나 아버지도 군인이셨는데 무지무서웠어. 지금은 돌아가셨지만...청포도아저씨라고.
내기억으론 신문인 모르겠구 "김 기생"이 아니었나??
1년 후배...
같은 사람인진 몰라도 기생이 누나 엄청 이뻤던기억이...1년 선배
태산이기억력은 알아줘야될거같어.기생이 맞구여,신문이는 그옆집이고,,,어제정희랑잘들어갔니?
주서비놈 대단해 희미한 추억들을 생생하게 엮어내는 필력은 역시, 근데 중화계를 강도 없고 도로도 없는 깡촌으로 묘사하는 것같어 이놈 ㅎㅎㅎ 하여튼 주서비처럼 이런 글 올려놓으니까 옛날 생각 많이 나게 하네
미안하구만. 중화계리는 모든 화계리의 중심으로서, 그 유명한 솔밭도 있고 최근에는 읍내로 직선으로 통하는 새 도로도 생겼고, 인력개발원(준대학)도 있고,.. 이리저리 중화계리 전성시대 아닌가?
양회다리 ..
참으로 추억이 많은곳 이었지
주서비 글 읽으니 그때가 새록새록
그리워지는건 왜일까?
아마도 나이탓이라면 거부할사람 없을테고
아무튼 이젠 헛된 욕망의 친구가 아닌 고양된 영혼의 거쳐 까지
함께할 초딩친구들 ...
올여름도 건강하고 수박처럼
션한여름 보내시게나 ...
새둔지대표인 합장도 백이대표인 은배도 양회다리 다이빙 추억이 많을 듯...
양회다리의 추억이라는 장편 소설의 줄거리를 생생하게 그린 것 같다.
그 당시의 역사적인 배경과 지명 낯익은 인물들 그리고 추억까지 되짚어가게 하는
엄청난 필력에 감탄이 절로 난다.
60년대의 가물거리는 추억들을 글로 잘 표현 하셨군,
양회다리 고개를 오르면 함백상회란 가게집이 있었지,
어릴적 연(꼬리연,방패연)을 사러 다리를 건너 고개를 오르던 기억이 나네...
함백상회, 수도상회! 가장 크고 풍족한 집이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이제는 쇠락한 흔적 만이 남아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