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쓴 戀詩
수필 시작한 지 근 20년 되었다. 그동안 책 10권 냈으니 2년에 한 번 꼴이다. 그런데 어떤 시인이
'인간 감정 중에서 가장 황홀한 감정은 두말할 것도 없이 사랑의 감정이다'라고 했다. 옳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평생 연애편지 한 번 안 쓴 사람은 정서에 문제가 있을 법한 사람이고,
너무 많이 쓴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그도 문제없다 할 수 없다. 나는 후자에 속하여 좀
꺼림칙 하지만, 어쨌든 그동안에 쓴 戀詩를 소개한다.
첫사랑(1)
섬과 섬 사이로 가는 배처럼
그에게로 가고 싶었다.
산과 산 사이로 흐르는 물처럼
그에게로 가고 싶었다.
별과 별 사이에 길이 있다면
그 길로 그에게로 가고 싶었다.
그리움의 산 하나 만들어놓고
이제 노인이 되었지만,
나는 아직도 청초한 수선화 같은
그를 잊지 못한다.
첫사랑(2)
달빛은 예전 그대로지만
그는 아직 오지 않았고,
꽃빛은 예전 그대로지만
지는 꽃은 더 애처롭네.
누가 세월이 약이라 했나
행여 그 말은 믿지 마소.
첫사랑(3)
이제는 비 오는 밤거리 희미한 가로등이 된 그대.
푸른 파도 밀려간 모래밭 소라껍데기가 된 그대.
꽃 피는 봄철마다 애달픈 낙화가 된 그대.
파도
떠나간 누구 때문에 너는 그리 몸부림치느냐
수천의 물방울은 너의 눈물이더냐
바위를 흔드는 격정은 너의 미련이더냐
섬은 단 하나의 작은 점인데
바다보다 넓은 너의 가슴속에
파도는 어찌 그리도 밀려오는가.
별이 별한테 물어봅니다
옷깃 한번 스치는 것도 인연인데
멀리서 당신만 바라보다가
하나의 가스 불덩이로 변해
수억광년 멀고 먼 유성이 되어
흔적 없이 소멸한 별이 있습니다.
혹시 그 별 이름을 아십니까
별이 별한테 물어봅니다
청나비
검푸른 날개 달린 청나비처럼
훈풍에 나부끼는 보리밭 너머
도라지꽃 곱게 핀 돌담 넘어
오르락내리락 살랑살랑 날아
키다리 나리꽃 활짝 핀
소녀네 집으로 갈 수 없을까
금빛 아침 햇살에 세수한
수선화 옆에 갈 수 없을까
그의 집 탱자울타리 너머에서
밤마다 노래 부르던 소년은
너울너울 자유롭게 담을 넘는
청나비가 그렇게 부러웠다.
<돌 장승>
달 없으면 별 아래 서있으리
이슬 내리면 이슬 아래 서있으리
기다리다 기다리다 돌이 되려는가
풀벌레가 그에게 물어본다.
<그 사람>
푸른 사파이어처럼
그는 아름다웠다.
달빛 아래
경인미술관 뜰처럼
그는 비어 있었다.
백자항아리 술처럼
그는 향기로웠다.
안국역에서 만나
인사동 순례하다
<귀천>에서 헤어진
그의 푸른 스카프가
내 맘 속에 깃발처럼
나부끼고 있다.
<푸른 신호등>
버스는 빗길 속을 술 취한 듯
마구 달려갑니다.
평생 지워지지 않을 기억들이
라이트 불빛에 비치는 빗물처럼
와이퍼로 마구 지워집니다.
깜박이는 심야의 푸른 신호등 앞
비 젖은 그의 얼굴 앞에서
고물버스는 내 마음을 알았던지
잠시 바리톤 쉰 목소리로
클랙션 크게 한번 울리더니
부르르 몸을 떱니다.
낙엽
애잔한 달빛에 흔들리며,
누가 짚씨의 춤을 추는가.
화선지 같은 가을 하늘에
누가 落下의 시를 쓰는가.
이별의 말을 적은 엽서를
누가 손수건으로 흔드는가.
가을엔
빨간 고추잠자리처럼
코스모스꽃에 앉고 싶다.
한 마리 여치처럼
밤새도록 플루트 불고 싶다.
먼 하늘 기러기처럼
무작정 날아가고 싶다
돌아보면 아름답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그가 가난하거나 부자거나
젊었거나 늙었거나를 말하지 마라.
그가 한 때 언젠가 어딘가서
누군가의 사랑을 독차지한
꽃이었을 것이다.
청초한 수선화, 향기로운 매화였고,
고고한 난초, 요염한 장미였을 것이다
돌아보면 아름답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우리 모두 밤하늘에 사라지는 유성처럼
안타깝고 그리운 별이었을 것이다.
梅花
梅香良夜月方登 매화 향기로운 밤 달이 방금 돋았는데
錦衣幽人在空室 비단옷 그윽한 여인 빈 방에 홀로 있고
白露月窓水晶簾 흰 이슬은 달빛창에 수정 발 드리웠네.
曲眉之下淸眼湖 초승달 눈썹 밑 맑은 눈 호수 같은
公知此位是誰呀 공은 이 분이 누군지 아시겠는가
五十年前梅花恥 50년 전 매화가 부끄러워한 분이네.
첫댓글 김교수는 감정의 폭이 참 넓으시네.잘 읽었습니다
참으로 잘 써셨습니다.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