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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4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에베소서 2장 1절-10절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제가 부른 이 찬송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주제로 한 찬송입니다.
하나님의 놀랍고 풍성하신 은혜가 넘쳐 날 때, 저도 모르게 가슴 깊은 곳에서 찬송이 터져 나오는 데 언제나 부르는 찬송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려 주신 그 은혜를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저 같이 못난 사람을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로 세워주신 그분의 은혜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다고 고백하실 수 있으십니까?
2000년 전에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고 전적으로 은혜 안에서, 은혜를 감사하며,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신 분이 있으니 그분은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분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분이었던지 신약 성경 전체에 은혜라는 말씀이 155번 나오지만 그 가운데 133번을 사용할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쓴 서신 서를 보면, 편지를 시작하면서도 은혜, 편지의 중심에도 은혜, 그리고 마칠 때도 은혜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로마의 가이사 시위대 근처에 셋집에 로마 병정과 함께 쇠사슬에 묶여 있으면서 쓴 편지임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지극히 풍성한 은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크고, 누리고 있는 은혜가 얼마나 컸으면 이처럼 은혜를 강조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았고,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바울의 감사와 비교하면서 부족하다면 더 큰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먼저 바울이 이처럼 놀랍고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인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라는 존재를 바로 알았을 때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우리들도 바울처럼 나 자신에 대해 바로 알아서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찬양하는 귀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자신에 대해서 깨달을 것은 무엇입니까?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2절과 3절 말씀입니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의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바울이 깨달은 자신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공중 권세 잡은 자 곧 사탄의 종노릇하였고, 사탄이 시키는 대로 육체의 허망한 욕심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정말 바울은 그렇게 살았음을 부인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철저한 유대교 신봉자였으며,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던 사울은 열심히 지나쳐서 그리스도인들을 돌로 쳐 죽이는 일에는 신바람이 나서 앞장서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에 더 열심을 내어 그리스도인들을 죽이기 위해 대제사장의 공문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이른바 사울의 ‘대 회심’이었습니다.
이것만 해도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며 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인데, 그 후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더욱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그 후라면 언제입니까? 사도행전에 기록된 대 회심의 사건이 있은 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울의 대 회심 사건 이후에 곧바로 사용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이 더 철저히 깨달아야 할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3년 동안이나 아라비아 사막에서 경건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고향 다소에 내려보내 무려 10년 동안이나 경건 훈련을 계속하게 했습니다. 또한 바나바의 추천을 받아 안디옥 교회에서 1년간 목회 경력도 쌓았습니다. 훈련기간이 14년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선교사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이른바 살인자 바울, 해결사 바울에서 선교사 바울, 사도 바울의 삶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바울이 그의 첫 선교지인 ‘구브로’ 즉 지중해에 위치한 ‘사이프러스 섬’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행한 표적이 무엇이지 알고 계십니까?
안타깝게도 자신의 설교를 방해하는 박수 ‘엘루마’를 저주하여 장님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답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었어야 마땅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서슴없이 해대는 증오와 저주가 남아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말하자면 마음에 들지 않는 자들을 돌로 쳐 죽이던 예전의 살인자의 기질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혈기를 다스리지 못해 치유해야 할 자를 저주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하고, 다짐한 사람이 이렇게 처참하게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더 절실하게 깨달아야 할 일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서 로마서 7장 24절 말씀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라는 고백을 듣고 싶어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게 된 바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구원하여 주신 것이 지극히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곧바로 25절에서 그 분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죽을 수밖에 없는 저와 여러분을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죽으심으로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죽을 수밖에 없는 죄에서 용서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4절에서 6절 말씀입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우리는 죄로 죽어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긍휼에 풍성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큰 사랑으로 용서하여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처럼 부활하게 하시고, 천국에서 왕 노릇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시니 어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 그러한 죄에서 용서함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긴급체포 당해보신 경험이 있으십니까?
제가 회사를 운영하고 있을 때입니다. 그리고 신학대학원 2학년 재학 중일 때이기도 합니다. 아침에 학교에 가려고 지하실 차고에서 차를 막 타려고 할 때에 건장한 사람들 두 명이 저를 가로막았습니다. 그들은 검찰청에서 온 수사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저에게 하는 말은 “안홍기씨를 긴급체포합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차에 올라타고 검찰청으로 향했습니다.
제가 간 곳은 4충의 텅 빈 사무실에 철재 책상하나만 놓여 있는 검찰청 특수부였습니다.
이미 저희 회사에서 장부를 한 트럭이나 실어다 놓은 후, 집중으로 추궁하는 것입니다.
당시 농업협동조합과 축산업협동조합을 정부에서 주도하여 강제로 합병시킬 때의 일입니다.
이것을 부당하다고 항의하는 축산업 협동조합중앙회 회장의 비리를 캐기 위하여 당시 그 협동조합의 은행점포 공사의 전국의 3분의 2를 점유하고 있는 저희 회사와의 밀착관계 여부를 수사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 하나에게 검사가 2명, 수사관이 7명이 배당된 것입니다. 검찰청 특수부는 사업하는 사람들에게는 지옥이나 마찬가지인 곳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곳에 끌려오게 되었으니 없는 죄라도 시인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뇌물을 준 것을 시인하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인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내 죄가 뭐냐고 항의했지만 “그 협동조합에서 일한 죄”라고 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화가 나서 책상을 주먹으로 쳤습니다. 수사관들은 난리입니다. 감히 검사 앞에서 난동을 부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온갖 죄목을 들이대면서 “너는 이제 끝장났다.”고 으름장을 놓는 것입니다. 저에게 최소한 3년은 감옥에서 썩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식사 시간이 되어서 갖다준 설렁탕을 먹다가 내친김에 “밥 한 그릇을 더 달라”고 해서 먹었습니다. 그랬더니 어이가 없답니다. “내 수사관 생활 15년 만에 특수부에 와서 밥 두 그릇 먹는 사람 처음 봤다.” 하였습니다. 이렇게 이틀이 지났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4층에서 뛰어내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밤 10시쯤 되어서 검사가 저를 불렀습니다. 혐의가 없어 석방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검찰청 앞마당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하나님 다 죽었던 저를 살려 주시는 은혜를 절실하게 깨닫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죄를 용서함. 받았다는 것이 이런 것이군요. 감사합니다.”라고 미친 사람처럼 외쳤습니다. 마치 사형 선고를 받았던 사람이 사면을 받을 것 같은 기분이었으며, 죄에서 용서함을 받은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절실히 깨닫게 된 경험이었습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제가 무혐의로 풀려날 수 있었던 것은 검사 앞에서 책상을 주먹으로 치고 소란을 피운 것과 설렁탕을 두 그릇 먹은 것이었다고 합니다. 죄지은 사람은 결코 그런 행동을 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하였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떤 죄를 지었습니까?
단순히 몇 년 고생하면 죗값을 치르는 그런 죄입니까? 그러나 결코 그런 죄가 아닙니다.
죽어 마땅한 죄입니다. 몇 번을 죽어도 다 치를 수 없는 죄입니다.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입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이 되려 했고, 내가 하나님인 것처럼 살았던 죄입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이 죄에서 용서함을 받은 것은 어떤 대가를 치르고 얻은 용서와 자유입니까? 주께서 우리 대신 죽으시고, 용서하여 주시고, 구원하여 주신 은혜를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토록 크고 놀랍고 풍성하신 은혜를 받게 된 우리가 그 은혜를 보답할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그 은혜의 풍성함을 여러 세대에 전하여야 합니다.
7절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이토록 놀랍고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에게 전하여야 하는 것이 은혜를 입은 자가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일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실제로 이러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을 고린도 전서 13장 4절부터 7절에서 바울의 고백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젊은 날 수많은 사람을 돌로 쳐 죽이는데 앞장섰던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고, 고백이 이처럼 달라졌습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돌을 던지는 자들을 이렇게 사랑하고, 용서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여러 번 하였고,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은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여 폭풍 속에서 지냈으며, 강과 강도와 동족과 이방인과 시내와 바다와 거짓형제로 인해 위험을 당하였으며, 자지 못하고, 추위와 굶주림과 헐벗었습니다.
그는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던 자신을, 구원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하여 그 놀랍고 풍성하신 은혜를 자기 동족과 이방인들에게 전하다가 로마 감옥에서 참수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들은 어떠한 은혜를 받았습니까? 어찌하여 감사하지 못합니까? 바울이 받은 은혜와 다른 은혜를 받았습니까? 아니면 그것으로 부족합니까?
은혜를 받으면 예수 그리스도처럼 바울처럼, 자기에게 돌을 던진 자들도, 나를 죽이려 했던 자들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은 아직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슨 짓을 했는지, 내가 얼마나 흉측한 인간인지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갖 죄를 지은 죄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안아 주시고, 용서해 주신 것은 깨끗하고 예뻐서가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에게서 더럽고 추하고 냄새 나지만, 사랑하시고, 용서하여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고, 예수님의 기쁘신 뜻입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그토록 우리들을 사랑하셔야만 하셨습니까?
그 이유를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0절 말씀 속에 감추어 놓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사시려고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무엇이기에 우리 같은 것들과 함께 사시려고 죽으시기까지 하신다는 말씀입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그분이 자신이 행복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크고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우리가 어떻게 다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서 쓴다 하더라고 어찌 다 기록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분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이사야 43장 21절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