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칭 : | 설성, 세류성1417년(태종 17) |
시 대 : | 조선 |
소재지 : | 전남 강진군 병영면 성동리 |
규 모 : | 지정면적 93,139㎡ |
지정사항 : | 사적 제397호 |
상세내용
조선시대에 축조된 전라도 병마절도사의 병영성.
조선조 600년 간 호남과 제주도 53주 6진을 통할한 육군의 총 지휘부로 1417년(태종 17) 본래 광산현에 설치되어 있던 병마절도사영을 이설한 성이다. 초대 병사인 마천목장군이 꿈속에 계시를 받아 눈(雪)의 자국을 따라 축조하였다 하여 설성이라고도 하는데 평지에 축조된 성으로, "대동지지"나 "색지"등에 따르면 둘레 2,820척, 높이 18척, 옹성 12개소, 연못 5개소, 우물 9개소, 포루 2개소였고 성문 4개소, 연회장, 객사 등 15동의 부속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1599년(선조 32) 일시 장흥으로 이설되었다가 1604년 다시 이곳으로 옮겨왔으며, 제주도에 표착했던 네델란드인 하멜이 이곳으로 압송되어 8년여 동안을 억류생활 했던 곳이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으로 병영성이 함락되어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이듬해인 1895년(고종 32) 갑오경장때 폐영되었다. 전라병영성지는 당초 1992년 3월 9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140호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되다가 1997년 국가사적 제397호로 지정되었다. 당시의 성곽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어 그 역사적 중요성과 의의를 한차원 높이기 위해 성곽 등을 복원하였으며, 관련유적으로 하멜체류지, 한골목, 병영홍교, 비자나무, 은행나무 등이 있다.
1417년(태종 17)에 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에 있던 병영을 강진으로 옮겨 병사 마천목이 쌓았다고 하는데, 당시 성의 둘레가 2,820척이고 높이가 10척 8촌이라 하였다. 1599년(선조 32)에 병영을 일시 장흥으로 옮겼다가 5년 만에 성곽을 수리하여 다시 병영이 되었는데, 특히 이 성에서는 1656년(효종 7)부터 1663년(현종 4)까지 네델란드인 하멜 일행이 억류되어 생활한 바 있다. 현재 성은 남북으로 기다란 장방형에 가까운 평면으로, 성벽은 둘레 1,060m이고, 높이가 약 3.5m이다. 동서남북에 옹성을 갖춘 성문터와 동벽 및 서벽에 2개씩의 치성의 흔적이 남아 있고, 남서쪽에 2개소의 배수구 시설이 있다. 조선시대 읍성과 평지의 진영에 일반적으로 적용된 축조방법이 잘 남아 있어 당시의 성곽 축조술 연구에 좋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1555년(명종 10) 을묘왜변 때 왜구가 달량진으로 쳐들어오자 병사 원적이 달량진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출전하였으나 전사하고 성이 함락된 바 있으며, 이후 1581년(선조 14)까지 대대적인 수축이 있었다. 동학혁명기인 1894년 12월에는 동학농민군이 장흥성을 함락하고, 이어 병영성까지 함락한 바 있다. 당시 병영성은 인근 4개면 57개 마을을 관할하는 도회로서 유사시에 대비한 9개의 우물과 5개의 연못을 마련해 두었었다.
1992년 3월 9일 전라남도기념물 제140호로 지정되었다가 1997년 4월 18일 사적 제397호로 다시 지정되었다. 면적 93,139㎡로 조선시대 전라도 육군의 총지휘부이다. 1417년 태종(17) 본래 광산현에 설치되어 있던 병마절도사영을 이설한 것이다. 초대 병마절도사 마천목이 전라도 53주 6진을 통치하였을 때 축조하였다.
마천목의 꿈 속에 나타난 대로 눈의 자국을 따라 축조하였다고 하여 ‘설성’이라고도 한다. 당시 남해에 자주 출몰하던 왜구를 막기 위한 것으로 1599년(선조 32) 도위수 권율의 상소로 장흥으로 이설하였다가 1604년 다시 본래의 위치로 옮겼다.
1894년의 동학농민운동으로 병영성이 함락되어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이듬해인 1895년(고종 32) 복구되지 못하고 폐영되었다. 폐영 당시 1,889개의 가옥과 5,973명이 살고 있었다.
《대동지지》《색지》에 따르면 석축의 둘레 2,820척, 높이 18척, 여첩 302개, 옹성 12개, 포루 2개, 호지 5개, 우물 9개가 있었다.
또 2층 누로 이뤄진 남문·동문·북문 등이 있었고, 각종 관사와 누정은 일제강점기에 모두 훼철되었다. 평지에 축조된 성으로 남북으로 약간 긴 직사각형이며, 총 길이는 1,650m이다. 성의 형태는 남북이 길고 동벽의 길이가 서벽에 비해 약간 짧은 부정형의 형태이다. 성곽의 서북쪽에 개천이 흐르고 있는데, 이 개천을 해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축조 방법은 성벽의 안쪽과 바깥쪽을 모두 성돌로 쌓는 협축기법을 사용하였다. 성돌은 대부분 자연석으로 바깥면에는 다듬은 돌을 썼고, 보통의 성과 마찬가지로 하부는 큰 돌을 놓고 위로 올라가면서 작은 돌을 쌓는 방법을 썼다. 병영초등학교의 담장으로 이용되고 있는 성벽은 너비가 2m 이상이 될 정도로 넓게 안쪽까지 견실하게 마무리하였다. 반면 박삼옥 댁에 있는 성벽 중 일부는 외벽만을 쌓고 안쪽으로 흙을 쌓아 내탁하는 편축도 나타난다.
조선시대 서남부의 군사 본부로서 방어기지와 육군 지휘부가 되었고, 제주도에 표류 중이던 네덜란드인 하멜이 이곳으로 압송되어 약 8년 동안 억류되었다.

전라병영성(全羅兵營城)전라병영성 전경, 전남 강진군 병영면 성동리(사적 제397호)

전라병영성(全羅兵營城)전라병영성 성벽

전라병영성(全羅兵營城)강진현지도에 보이는 전라병영성, 해동지도(규장각도서)

전라병영성(全羅兵營城)강진읍지에 보이는 전라병영성 건물배치도

전라병영성(全羅兵營城)강진읍지에 보이는 전라병영성 위치도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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