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위세는 『宋書』·『양서』·『남사』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데, 서진말기 고구려가 요동을(略有遼東), 백제는 요서공략(據有遼西)을 감행하여 요서, 진평2군에 설치하였데, 그곳은 유성과 북평사이로 백제군을 설치하였으며 서진(西晉)이후 중국 여러나라를 병탄하였다.
『梁書』百濟-百濟者, 其先東夷有三韓國,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弁韓·辰韓各十二國, 馬韓有五十四國. 大國萬餘家, 小國數千家, 總十餘萬戶, 百濟卽其一也. 後漸强大, 兼諸小國. 其國本與句驪在遼東之東, 晉世句驪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
(참고; 요동-요녕이동, 요서-하북,요녕서부의 구분은 위진시대 부터 시작됨)
이 당시 백제위치는, 마한의 옛 땅에 기거하여 서쪽으로 큰 바다에 한계하고 남에 소해가 있다고 하여, 본래 한반도 서부 및 발해만 북부에 있다가, 소해(小海)로 인식된 황하택(黃澤) 즉 산동지역까지 진출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백제의 외교노력은 남조 송효무제(재위453~464)와 개로왕(재위455~475)사이에 이루어진 작위수여 이후, 동성왕과 남제(南齊), 그리고 무령왕과 양(梁)사이의 외교강화로 계속된다. 여기서 특기할 만한 사실은 남조에서 백제왕에게 작위수여 형식을 취하였지만, 실제로는 백제가 이를 요청하였다는 점이다.
『三國史記』蓋鹵王在位二十一年- 高句麗來侵圍漢城. 蓋鹵嬰城自固, 使文周求救於新羅得兵一萬廻, 麗兵雖退城破. 王死遂卽位. 性柔不斷, 而亦愛民百姓愛之. 冬十月移都於熊津.
고구려 대로(對盧) 제우(齊于), 재증걸루(再曾桀婁)와 고이만년(古尒萬年)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한성(漢城)을 공격한지 7일만에 함락시키고, 장수 걸루 등이 사로잡은 개로왕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죄목을 따진 후 아차성아래에서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 개로왕은 그의 아들 모도(夫餘牟都·文周王)에게 난리를 피하여 있다가 나라의 왕통을 잇기 바라면서, 왕자에게 목협만치(木劦滿致)와 조미걸취(祖彌桀取)와 함께 남쪽으로 떠나도록 하여 후에 웅진성을 세우고 천도하였다.
『日本書紀』 雄略天皇二十年條와 百濟紀-冬 狛大發軍兵 伐盡百濟 爰有小許遺衆 聚居倉下 兵粮旣盡 憂泣玆深 於是高麗諸將 言於王曰 百濟心許非常 臣每見之 不覺自失 恐更蔓生 請逐除之 王曰 不可矣 寡人聞 百濟國者爲日本國之官家 所由來遠久矣 又其王入仕天皇 四隣之所共識也 遂止之.
이 상황에 대한 『일본서기』(백제기)기록에는 유랴쿠왕(雄略,재위456~479)20년, 개로왕 을묘년(475) 겨울 박(狛)의 대군이 와서 큰 성을 밤낮으로 공략한지 7일 만에 왕성이 함락되어, 드디어 위례성을 잃고 왕과 태후, 왕자 등이 고구려군 의해 죽었지만, 장수왕이 백제군을 전멸시키지 않은 것은 왜(倭)와의 연원관계를 고려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이로서 백제는 멸망의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있었음을 알 수 있다.
南齊書南夷列傳百濟-牟大又表曰: 牟大又表曰按「牟大」通志及元龜並作「牟太」. 又元龜九百六十三:「齊武帝永明八年正月, 百濟王 牟太遣使上表, 遣謁僕射孫副策命」,知上此表在永明八年正月也.「臣所遣行建威將軍·廣陽太守·兼長史臣高達, 行建威將軍·朝鮮太守·兼司馬臣楊茂, 行宣威將軍·兼參軍臣會邁等三人, 志行淸亮, 忠款夙著. 往泰始中, 往泰始中 「泰始」原譌「太始」, 各本並譌, 今改正. 比使宋朝, 今任臣使,冒涉波險,尋其至効, 宜在進爵, 謹依先例, 各假行職. 且玄澤靈休, 萬里所企, 況親趾天庭, 乃不蒙賴. 伏願天監特愍除正. 達邊効夙著, 勤勞公務, 今假行龍驤將軍·帶方太守. 茂志行淸壹, 公務不廢, 今假行建威將軍·廣陵太守. (萬)[邁]執志周密, (萬)[邁]執志周密 據南監本·殿本·局本改. 按邁卽上所云之會邁也. 屢致勤効, 今假行廣武將軍·淸河太守.」詔可, 竝賜軍號, 除太守. 爲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 爲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按此句上有奪文. 使兼謁者僕射孫副策命大襲亡祖父牟都爲百濟王. 曰: 「於戲! 惟爾世襲忠懃, 誠著遐表, 滄路肅澄, 要貢無替. 式循彝典, 用纂顯命. 往欽哉! 其敬膺休業, 可不愼歟! 制詔行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百濟王 牟大今以大襲祖父牟都爲百濟王, 卽位章綬等玉銅虎竹符四. 卽位章綬等玉銅虎竹符四按此句疑有脫誤. [王]其拜受, [王]其拜受 據南監本·殿本·局本補. 不亦休乎!」是歲, 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入其界, 牟大遣將沙法名·贊首流·解禮昆·木干那率衆襲擊虜軍, 大破之.
개로왕 이후 동성왕에 이르기까지 부침(浮沈)을 거듭하면서 약해진 국가기반을 왜와 신라의 도움으로 마련하였다. 이후 백제는 남조 양(梁)과 수교 하는 등 옛 해외영유지에 대한 복원외교를 행한 것으로 보여진다.
단명한 어린 삼근왕에 대해, 일설에는 동성왕이 살해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후 모대(牟大)로 불리는 동성왕(東城王,재위479~501)은 근초고왕 이래로 중원왕조에 대해 전쟁을 통한 위대한 업적을 올린 왕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는 문주왕의 동생인 곤지의 아들로, 고구려와 결혼동맹을 맺은 적대세력 북위를 견제하기 위해 남제(南齊)등과 외교를 강화하였다. 특히 484년부터 시작된 백제와 북위(北魏)사이의 전쟁은 남제서(남동이열전) 백제기에 그 경과가 상세히 기록되어있다. 결과적으로 북위을 대패시키고 요서지방의 관리권을 유지하였는데, 형식상으로는 동성왕이 표문을 올린것이지만 실제로는 전공을 올린 사법명, 목간나, 찬수류, 해례곤 등에 대한 작위를 인정하여 달라는 내용이다.
북사 열전 권92
自晉、宋、齊、梁據江左,亦遣使稱籓,兼受拜封。亦與魏不絕。及齊受東魏禪,其王隆亦通使焉。淹死,子余昌亦通使命於齊。武平元年,齊後主以余昌為使持節、侍中、車騎大將軍,帶方郡公、百濟王如故。二年,又人余昌為持節、都督東青州諸軍事、東青州刺史。
송제양진시대부터 양자강 동서에 걸처 있었는데 번국을 칭하고 봉작을 받았다. 위덕왕(554~598)에게 대방군공백제왕과 동청주제군사 동청주자사 작위를 주었다.
이말은 백제가 한반도와 산동성 일대를 차지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제왕이 살아있을때 상대방이 주는 작위는 지배하고 있는 지역에 나라가 있다는 말이된다.
어쨌든 북위와 두차례에 걸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백제는 이후 산동,강소,절강지역 경략(經略)과 일정 기간 동안 국력이 회복된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러나 『梁書』는 동성왕 이후 백제는 국력이 약해져 남한(南韓)으로 세력을 옮겼다 기록하고 있다.
『梁書』 列傳第四十八 諸夷
百濟者...(중략)...齊永明中,除太都督百濟諸軍事,鎮東大將軍,百濟王.天監元年,進太號征東將軍.尋為高句驪所破,衰弱者累年,遷居南韓地.
백제는 고구려에게 격파 당하면서 약해져 결국 남한땅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따라서 서기 503년이후의 일로 보여진다. 이보다 먼저 살해당한 동성왕의 무덤은 당연히 중국에 있을것이며 신채호선생의 연구로는 산동성 청도에 [百支萊王之墓]로 남아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 유적이 6세기이전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남한은 지금의 한반도서부 지금의 夫餘 지방이였다고 보여진다,부여에서 발굴되는 유물은 화려하고 섬세하세련되어 공주지역의 거친듯한 유물과는 또 다르다. 결국 백제왕가는 본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200년넘개 차지했던 대륙의 산동과 양자강 유역의 백성은 그대로 두고...

당나라때 대륙을 방문하고 10년동안 머물렀던 옌닌이 목격한 신라인들은 서진말기부터 동성왕때까지 대량으로 대륙으로 진출한 백제인 조상을 둔 신라인이었을 것이다. 신라본기에는 산동과 복주등에 신라절도사 파견기록이 보이기때문이다. 이러한 정치적 행위는 고려 초기까지 계속되었다.
운영자 저서 발췌
심제.
첫댓글 엔닌 경유지 곳곳 백제만아니라 신라등 한민족지명산재합니다. 직업 특성나타내거나 지명목적 나타내는 한
자로 신라방이라하여 신라로 생각하였는데 전혀..중국인 지명엔 한반도인이라는 글자로 불려지는..옷수리,
여관,배수리,물관리,소금모아두는,둑,묘당,상가,유흥가,숯굽는곳 등 지명이..엔닌경로 연운항서 발견된 수많
은 백제추정고분지대,펑씨유래등. 내륙 깊숙한 사천성까지 나타나 확인하면 운하연결가능한 岩鹽산지..원말
장사성이 소금장수로 치국엔 별로라 평가받지만 주원장에게 오왕성에서 최후의 일인까지 옥쇄하는것을 보고
선 분명 혈연이나 지연의 끈끈한 연대감이 있었을 것이라 소금장수??혈연적 집단성 한민족후손??
언젠가 엔닌코스답사하고 지명들에 이야기하였다가 고서로 강단에서 말만 파는 학자라는 X한테 엄청 공격
당하였던 일이 생각납니다. 오직 고서로 그것도 자기가 생각하는 면만 받아들이며 나머지는 위작이라하고
현장엔 한번도 가본적없고 오직 고서! 현장갈때마다 달리보이는 공부한만큼만 보이는 것이 답사였는데 어떻
게 고서로만 참고운운 바이블처럼 끼고 사는 중국측자료는 8~90 년대 중국책..최근 고지도, 현대지도,위성지도
등고선지도,중국측 기록,지역의 연구자등 얼마나 많은 정보들이 넘쳐나는데..유리하면 고서 아니면 위작 춘추
필법! 지기님 글중 젤 가슴에 와 닿는 "인문학에 정답이 어디잇습니까?" 정말 명언이라고...
많은 근거를 축적해 두셨을 것으로 생각되니 천천히 이야기해 보도록 하지요. 백제가 하남성에 근거를 두었을만한 상황근거가 있습니다. 모르면 많이 쓰는 방법이 위작운운
말씀드렸듯 요즘 현장에서 불량이 나서 확실히 확인하였다고 직원이 답변하여도 제품에 정답이 어딨냐 며
질책에 사용하는 등.. 아무튼 저 인문학의 정답은 정말 " 一 針 見 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