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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조선대에서 열린 이청준 문학제에선 '이청준 문학과 금기(禁忌)'란 주제로 다양한 분석이 이뤄졌다. 18일 이청준이 잠들어 있는 전남 장흥의 '이청준 문학자리'에서 추모 행사가 열렸다. 장흥에 사는 소설가 한승원은 평론가 김주연을 보자 "그래, 김치수는 잘 보냈는가"라고 물었고, 김주연은 "그럼, 아주 잘 보냈지"라고 화답했다. 한승원은 "나이 여든이 돼가면 이승과 저승을 함께 사는 무당이 된다"며 "오늘 제가 '미백(未百)선생'(이청준의 호)과 여러분 사이를 잘 이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옛날을 회상했다. 그는 소설 '선학동 나그네'를 떠올리며 "선생은 선학동에서 신선이 돼 선경을 유유자적하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같은 강의실에서 공부했던 김치수, 이청준은 평론가와 소설가로서 인간적인 사귐만이 아니라 문학적 공감을 주고받았습니다. 오늘은 한 분이 이 세상을 떠났고, 또 한 분은 그분을 기념하는 축제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이승에서 가까이 지내며 공감하고 칭찬하던 친구를 하늘에서 만나 더 반갑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 17일은 문단에서 각별한 날이었다. 소설가 이청준(1939~2008)을 기리는 ‘이청준문학제’가 시작된 날이자, 14일 별세한 문학평론가 김치수(1940~2014)의 발인일이었다.
17일 전남 장흥에서 열린 ‘제6회 이청준문학제’에서 김주연 한국문학번역원장(왼쪽에서 세번째)과 김병익 문학평론가(다섯번째)가 이청준 선생 생가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문학과지성사 제공
이청준기념사업회장이자, 김치수 등과 1970년 계간지 ‘문학과지성’을 창간한 문학평론가 김병익(76)은 이청준문학제 학술대회에서 두 친구를 함께 언급했다. “이청준문학제를 열면서 6년째 해마다 장흥에 왔지만, 김치수를 보내고 온 올해는 마음이 또 다르다”고.
김병익과 평론가 김주연(73), 김치수, 김현(1942~1990)은 ‘문지’를 만들면서 성을 따 ‘4K’로 불렸다. 이들은 한글로 교육받고 사유한 첫 세대이자 4·19혁명과 함께 문학을 시작한 세대이기도 하다. 서울대에서 함께 공부한 4명의 평론가는 이청준과도 모두 각별했고, 우리 문단에 큰 족적을 남겼지만 이제 ‘4K’ 중에서 김병익, 김주연 두 사람만 남았다.
김병익·김주연은 이날 서울대병원에서 유족·문인 등 150여명과 김치수 평론가의 영결예배를 가졌다.
김병익은 ‘삼가 친구 김병익이 울음을 삼키며’라는 추도사에서 “한 시대, 한 세상을 같이하며 웃고 울며 더불어 살아온 우리는 더없이 쓸쓸한 마음을 자네의 영원한 길에 얹어드리며 우리의 이별 뒤에 이룰 새로운 만남을 기약하세. 이 세상에서 다사로운 우정으로 어울리다 먼저 간 김현과 인철이(황인철 변호사), 성원이(홍성원 소설가)와 청준이(이청준) 등등 이 세상의 멋진 글쟁이 친구들과 반갑게 만나 소식들을 전해주게”라고 밝혔다.
김주연은 “특별히 허전할 것도 없네. 사람이 만나면 헤어지듯, 친구들을 그렇게 하나둘씩 보내는 것도 익숙해진 나이가 됐다”고 말했다. 김병익·김주연은 이날 경기 양평의 장지까지 찾은 뒤 곧바로 제6회 이청준문학제가 치러지는 광주로 향했다. 막역지우인 김치수를 마지막으로 보내고, 곧바로 먼저 간 또 다른 친구를 기리는 자리로 발길을 돌려야 한 것이다.
이청준문학제 첫날은 조선대에서 이승우·이기호·정용준 소설가와 박인성·이수형·우찬제 문학평론가 등 100여명이 참석해 ‘내가 읽은 이청준’ ‘이청준 문학과 금기’에 대한 논의로 진행됐다. 이청준문학제가 광주에서 열린 것은 처음이다. 이청준이 가장 꿈과 번민이 많았고, 불행과 처참함을 처음 느끼며 유년 시절을 보낸 광주는 그의 문학의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지난 10월 17(금) 서울대학교 병원 장례식장에서는 고 김치수 교수 영결식이 있었다.
나는 고인의 서울대 문리대 불문학과의 3년 후배이다. 내가 일학년 때 고인은 4학년이었다. 그래서 나는 1944년 생이고, 고인은 1940년 생이다.
내가 문리대에 입학했을 때, 고인은 동기생 김현 김승옥과 함께 "산문시대"를 창간하여 활발한 문학운동을 시작했다. 당시 불문학과에는 소설쓰는 학생으로는 4학년에 김승옥이 있었고, 2학년에 김동선이 있었으며, 1학년에 내가 있었다. 일년 후에 내 아래 학년에 강준식이 입학하였다.물론 오상원은 훨씬 전에 졸업한 상태였다. 십년이 훨씬 흐른 후에 이인성과 최수철이 배출되었다.
서울대문리대불문학과는 그런대로 소설가들의 양성학과로서의 성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문리대불문학과는 소설가들의 배출보다가는 오히려 평론가들의 배출이 더 두드러진 양상을 보였다.
프랑스의 현대문학 이론을 연구하는 학과의 특성상 당연하다는 생각이다.
평론가들의 배출의 배후에는 해박한 사르트르 이론가인 정명환교수의 지도가 큰 버팀목이 되었다. 거기다가 김붕구 교수의 불문학 전반에대한 해박한 지식과 연구도 큰 도움이 되었다.
이런 여건 하에서 평론가로 활동해서 한국 현대 문학이론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사람이 고 김현 교수(1990년 작고)와 김치수 교수이다. 김현은 바슐라르 연구로, 김치수는 누보로망과 기호학이론으로 한국의 문학이론 정립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김현과 김치수는 문리대 선후배해 사이인 김병익, 김주연 등과 함께 "문학과 지성"을 창간하여 한국현대문학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나의 경우, 산문시대나 문학과 지성의 활동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영문학과 출신으로 문리대 동기생이고 동향인 윤재근과 함게 활동하였으며 윤재근의 소개로 현대문학지에 소개 되어 안수길 선생 추천으로 소설가로 등단하였다.
이것은 김현과 김치수 김승옥이 동향으로 동급생으로 뭉쳤기 때문에, 3년 후배인 내가 낄 자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와 이분들과는 문학의 행로가 다르다. 작가나 시인은 자기가 데뷰한 문예지를 통해서 활동하는 것이 통례이다.
그러나 이분들과 내가 뜨악한 사이였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까마득한 후배인 나를 언제나 따뜻하게 보살펴 주었다. 고 김치수 선생은 나의 첫 장편소설인 "천년을 내리는 눈"(현대문학 연재)의 발문을 써주었다. 그리고 김치수 교수는 자신이 재직하다가, 부산대학으로 옮겨가면서 자신의 옛 직장인 중앙고등학교 불어선생 자리를 나에게 넘겨주었다.
김현은 자신의 바슐라르 연구를 두번 출판했는데, 첫판인 곽광수와의 공저인 바술라르 연구(민음사)와 둘째 단독판인 바슐라르 연구를 보내주었고, 나의 첫 대학교수 직장이던 전남대학교로 나의 초청으로 내려오셔서 문학강연을 하였다. 김현 교수와 함깨 했던 수많은 술자리가 기억에 선하다.
두 분이 다 고인이 되셨으니 이제 한국평론문단의 4김 시대(김현 김치수 김병익 김주연)는 종언을 고한 것이다. 4김 다 문리대 출신이다. 김현 김치수가 불문학과, 김병익이 영문학과, 김주연이 독문학과 출신이다. 동급생이거나 한 두 해 선후배 사이이다. 4 김의 활동이 시들해진 후 두드러진 집단적인 평론가 그룹이 활동한 것같지가 않다.
나는 16일 빈소를 찾았다가, 17일 영결식장을 다시 찾았다. 고인이 나에게 베풀어준 따뜻한 정을 생각할 때 마지막가는 고인의 운구를 전송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결식장에서 문리대 동기생(영문학과) 구대열 교수를 만났다. 구 교수는 런던 정치경제대학 출신으로 이화여대에서 일생 재직하였으며, 고인과는 이대에서 일생 같이 봉직한 인연이 있었다. 구 교수는 건강이 시원찮은 아내와 함게 장지까지 가겠다고 나섰다.
조사에 나선 김병익 선생은, 고인의 남을 헐뜯거나 남을 폄하하는 발언을 단 한번도 들은 적이 없다고 하였다. 조사 도중 슬픔에 겨워 몇번이나 흐느꼈다.
아, 슬프다. 이 장수에 시대에 74세에 가시다니!
강남 무슨 호텔에서 있었던 구대열 교수 정년기념식전에 오셔서 후배들의 정년을 축하해 주시던 모습이 기억에 선하다.
그 찬란한 문학적 업적은 쉽게 사라지지않을 것이리라.
명복을 누리소서." 소설가 (sschung5) 필명을 밝히지않았지만 전제를 허락하시기에 옮겨 왔습니다...

내 보기엔 살아있는 아무개들은 죽은 ‘김현’만 못한 대우를 받고 있다. 김현 선생이 작고하신지는 벌써 25년 전의 일이다(1990년 타계). 살아있는 아무개들이 죽은 ‘김수영’만도 못한 지는 그보다 곱절의 시간이 지났다.(1968년 타계). 시간의 무게 앞에 망각의 영역으로 묻혀지기 마련인데 괴이하다. 아니 반대로 죽은 그들은 열정에 휩싸인 이미지 그대로 기억에 남는 수혜마저 입었다.
엊그제 김치수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20년 전 소심한 열정에 사로잡혀 문학과 관련한 책을 읽던 시절이 떠올랐다. 김현의 유작이었던 《행복한 책읽기》를 보면 다른 누구보다 김치수의 대한 각별한 애정이 느껴진다. 가령 그와 등산을 다녀오는 날이면 문장에 활력이 넘쳤다. 나는 그길로 책방에 달려가 바로 이 책 《문학사회학을 위하여》를 사서 읽었다. 이 책은 1979년 초판이 출판됐는데 그런 까닭에 약간의 한자 단어가 병기됐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88년에 나온 8쇄다. 대개가 1960년대 말부터 책이 나오기 전까지 쓰인 평론글이다. 선생은 서문에서 문학사회학이 필요한 시기여서 불가피하게 자신이 책을 엮는다고 하며 자신의 글을 세상에 펴내는 데 약간의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을 덧붙여 놓았다.
책의 구성은 문학사회학에 대한 부분, 문학사회학을 대입해서 구체적으로 문학작품들에 대한 평론글, 혹은 평론에 대한 평론 글,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학사회학의 방법론을 적어 놓았다.
나는 구체적인 평론의 글이 좋았다. 가장 좋았던 것은 서정인 선생에 대한 글이었다. 나는 《강》이라는 소설집을 읽었지만 그의 소설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 선생은 서정인은 사건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가가 아니라 인간의 관계를 통해 작품의 의미를 전달한다고 적어놓았다. 그 글을 읽고서 나는 나중에 《가위》같은 단편집을 읽었는데 글이 편히 읽혔다. 문학평론의 순기능을 체험한 셈이다. 융합되지 못한 삶이라는 제목의 평론에서 소설이 가지고 있는 가장 뚜렷한 특징을 〈인물〉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했는데 이후 나는 인물을 운영하지 못하는 모든 소설을 미개한 소설로 보는 악습이 생겼다.
책을 팔거나 글을 다루는 직업을 가지면서 그조차 일이 아니면 잘 보지 않지만 지금도 좋은 소설은 인물의 형상을 잘 빚어 인물을 빌어 이야기를 끌어가야 한다 생각한다.
김치수 선생의 글들은 그러나 문학의 고결함이라던가 문학의 순수함이라던가 문학의 고뇌 등을 헤아리는 범위 내에서 지어진 아름다운 문학의 시대의 글들이다. 그 반대의 가치는 일고의 고려가 없다. 생각난 김에 인터넷 서점(알라딘)에서 이 책을 검색해보니 검색조차 되지 않는다. 문학과 지성사 같은 훌륭한 출판사가 그들의 선배를 잘 대하고 있는 것인지 나는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