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사형수(최고수라고도 합니다)로 지금도 서울구치소에서 살고 있는 정 프란치스코가 제 글이 실렸던 어느 잡지에 보낸 편지입니다.
2007년 7월 어느날 서울구치소 사형수에게서 온 편지
안녕하십니까? 지난 호에 민들레 국수집 주인장이신 서영남님의 글 ‘루오의 어여쁜 베로니카’를 읽고 수사님과의 특별한 인연을 생각하며 몇 자 적을까 합니다.
제가 서영남님을 처음 만난 곳은 이곳 서울구치소 담장 안에서였습니다. 어느덧 10여년의 세월이 흘렀군요. 그즈음 서영남님이 천주교 교정사목 일에 열정을 가지고 일하실 때 저는 최고수(사형수)의 신분이었습니다.
1996년 가을 대법원에서 최종 사형이 확정되어 그야말로 생사의 기로에서 살얼음판 같은 매일을 살 때였지요.
한 올의 희망도 남아 있지 않은 절망스러운 삶을 원망하며 힘든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천주교 종교담당의 권유로 썩 내키지 않는 천주교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불편하고 지루한 미사 전례가 끝나고 교회당에 모인 수용자들 앞에서 서영남님이 짧은 연설을 하셨습니다.
이야기의 주제를 기억할 순 없지만 검소한 옷차림과 겸손한 말투에서 느껴지던 푸근한 첫인상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사실 그때 나는 종교집회에 참석하는 것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특별히 종교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또 나를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종교담당과 동료들의 권유에 떠밀려 따라나섰던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그 첫 번째 집회 참석이 내 신앙의 첫걸음이 된 셈이지요.
그 무렵 나는 죽음의 형벌 앞에서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세상적 가치와 기준에 맞춰 살아온 나에게 죽음이라는 단어는 숨 막힐 정도로 두려운 것이었고 그래서 그때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결국 그 해(1996년) 12월 18일 나는 많은 이들의 축복과 하느님의 은총 속에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자연 서영남님과도 만날 기회가 많아졌고 서영남님은 만남이 있을 때마다 나의 메마른 영혼에 단비가 되는 말씀들을 들려주셨습니다.
그러다가 몇 년 뒤 서영남님이 개인사정으로 수도원을 나오시게 되었고 그래서 만날 기회도 줄어들어 아쉬웠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서영남님은 수도원을 나오신 뒤에도 출소자 형제들과 함께 생활하시는 등 교정사목 일은 계속하셨고, 베로니카 누님과 결혼하신 뒤에도 서신 왕래를 계속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년에 한 번은 두 분이서 함께 면회도 와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베로니카 누님은 1년에 서너 차례 티셔츠, 내의, 양말 등 필요한 물품을 푸짐하게 보내 주십니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도 갇힌 형제들을 위해 매달 영치금을 넣어주시고 편지도 해 주시는 걸 보면서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주었다.” (마태 25,36)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기게 됩니다.
서영남님과 베로니카 누님은 너무 잘 어울리는 한 쌍인 것 같습니다. 민들레 국수집을 운영하면서 가난하고, 소외받고, 고통 받는 이들에게 사랑을 베풀며 사시는 서영남님, 그리고 그러한 서영남님의 삶을 드러나지 않게 물심양면으로 도우시는 베로니카 누님이야말로 부창부수이지 싶습니다.
참 복음을 사는 의미는 내 삶과 더불어 다른 사람의 삶도 행복해야 한다는 것. 내 마음을 기꺼이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의 삶을 통째로 하느님께 봉헌하다시피 하며 봉사와 섬김의 삶을 사시는 두 분에게 주님께서 더 크신 은총과 사랑을 베풀어 주시기를 바라면서 이만 줄일까 합니다.
갈라진 시대의 기쁜소식 가족 모두에게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하기를 빕니다.
2007년 7월 2일 주님 안에서 정 프란치스코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