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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울은 고린도교회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1:10)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1-5)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찌니라.”(갈라디아서 5:26)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히브리서 10:24) 요한은 요한1서에서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한1서 4:11) 베드로는 베드로전서에서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벧전1:22)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베드로전서 4:8)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하고”(베드로전서 4:9) 야고보는 야고보서에서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야고보서 5:9) .... 1) 바울, 요한, 베드로, 야고보...가 말은 모든 내용은 전적으로 회개용이기만 한가? 2) 교회를 어떻게 해보고자 하는 교인 관리차원에서 찾아진 해결책으로 이런 말을 했던가? 그렇지 않다. 이들이 말하고 있는 내용은 십자가의 은혜가 넘치고 있는 이들에게 성령으로 그리스도 몸을 통해 넘쳐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통해 예수가 그리스도요 주이심을 증거 하게 하려는 것이다. 마치 성전 미문에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하여 일으켜 세운 베드로를 향해 당신의 능력이 저 사람을 일으켜 세웠다고 하자. 그는 ‘내가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라고 했다. 이러한 일을 시키신 분이 주님이시다. 그런 베드로가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고 난 뒤 자기 의를 결국 챙기는 일을 하고 말았는가? 꼭 인간은 ‘성령의 열매까지도 자기 의를 내세우는데 이용해버리는 존재다’라는 공식을 내세우면 그것은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이 될 수 있다. 성령의 열매마저 인간이 자기 의로 돌리려는 인간이 있을 수 있기에 성령은 죄에 대해서만 지적하시는 분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령은 의에 대해서도 알려 주신다. ‘누가 하셨습니까?’ ‘주께서 하신 것입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요16:8) 성도는 성령이 거하는 전이다. 그러기에 성령의 간섭 하에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도 성령의 간섭이 싫어 주님의 의를 증거하는 간판(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되기를 거부하고, 자기 의를 자랑하려한다. 이를 성령은 가만히 있지 않으신다. 이를 때 마다 ‘죄에 대하여’ 지적하신다. 성령의 열매마저도 ‘자기 의’로 챙기려는 자에 대해서도 ‘죄에 대하여’ 지적받고 다시 십자가 앞에 서게 하여 회개케 하신다. 그렇게 함으로 십자가를 통하여 성도는 다시 ‘하나님의 한 의’를 찬양하게 한다. 바울, 요한, 베드로, 야고보는 결코 교회를 어떻게 해보고자 하는 교인 관리차원에서 찾아낸 해결책으로 위와 같은 말을 하지 않았다. 십자가의 은혜가 들어 왔기에 성령의 관리 하에 들어왔기에 마땅히 넘쳐 나와야 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성도가 자신의 환경과 시간과 처지를 내세워 사도들이 말하고 있는 내용들을 듣고도 거부한다거나, 성령의 열매마저도 자기 의로 돌린다면 회개해야 할 것이다. 그를 때 회개용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 맞다. ‘오줌이 차 있으면 마렵고 마려우면 화장실을 찾고 화장실을 찾아 그 속에 있는 오줌을 내놓는 것이 마땅하다.’ 교회는 계시록의 일곱 교회의 사라짐과 같이 사라졌다 다시 발생하고 있으며, 또한 교회는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시고 그의 몸의 지체로 구성되어 있기에 지금도 성령의 전으로서 성령의 역사로 구체적으로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심을 증거하게 하고 있다. |
손무성: 서신 속에 있는 하라와 하지 말라는 명령어들...
2006-09-26 16:54:26
바울은 서신에서 ‘사랑하라. 봉사하라. 온유하라. 남을 나보다 낫게 여겨라. 모이기를 힘쓰라.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뿐만아니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6:10)
“[개정]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데살로니가후서 3:13)
야고보, 요한 역시
“[개역]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야고보서1:19)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요한2서1:10)
“[개정]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한1서 2:15)....
등등의 수많은 명령어들이 있다.
혹시라도 누구든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있을까 싶어 걱정 어린 심정으로 이 글을 쓴다.
우리는 위의 내용을 보면서 바울, 야고보, 요한, 베드로 등의 사도들이 명령어들을 사용할 때 성도들을 향해
‘성도들이여 이 명령어 대로 해보라. 해 보려니까 못하지? 그러니까 너는 죄인이라니까! 이 명령어 대로 못하니까 십자가의 은혜가 필요한 거야!’ 라는 ‘차원으로만’ 주어진 것들인가? 라는 질문부터 해보아야 한다.
서신서의 명령어들이 과연 죄를 죄로만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만 주어진 또 다른 ‘율법의 행위’의 법인가?
만약 서신서의 명령어들을 ‘율법의 행위’로만 간주하게 된다면 이런 논리가 성립된다.
* 바울의 경우 에베소서 2장에서 하나님의 선물로 주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 받았다라고 했다가 4장 이후의 ‘명령어들 즉 율법의 행위를 제시한 것은 성도에게 ’너는 봐! 어쩔 수 없는 ‘하라와 하지 말라’ 라는 이 말씀을 실천 못하는 죄인 맞지‘ 이것을 드러나게 하기 위해 이 명령어들이 주어 졌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십자가의 은혜가 은혜 되게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믿음으로 구원을 이야기 하고 그 다음 ‘명령어들’(율법의 행위)을 던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오직 믿음이라는 일관성 있는 맥도 제시하고, 십자가의 은혜의 은혜 됨이 더 더욱 드러난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냉정하게 서신을 쓰고 있는 바울과 그 외 사도들의 입장을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는 여기 한 부분 즉, ‘사랑하라, 겸손하며, 돈을 사랑하지 말며...’등의 말씀에 이르지 못하는 자신의 죄가 드러날 때 비로소 ‘십자가의 은혜가 절실히 필요한’ 것에 대해서는 변함없이 동의 한다.
그러나 서신서를 기록하고 있는 야고보, 베드로, 요한과 바울이 과연 앞에서 말하고 있는 입장으로만, 즉 명령어들을 율법의 행위로 간주하여 제시하여 성도는 어쩔 수 없이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만’ 기록한 것들인가? 이 말에 대해서는 동의 할 수 없는 것이다.
분명 바울과 다른 사도들이 일관성 없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라고 한 후에 율법의 행위(명령어들) 라는 차원에서 제시하지 않았다.
바울은 로마서 1장17절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러니 사도들의 일관성 있는 표현은 믿음 + 행위를 제시하지 않았고,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이나 다른 사도들이 믿음으로 구원을 이야기 하다 ‘...행하라. ...섬겨라.... 하지말라...’ 라는 문구에 유의 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바울이 제시한 바는 ‘믿음으로’를 이야기 했다가 행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분명 일관성 있게 믿음을 주장했다. 믿음에 이르게 하시는 분이 ‘주님’이시오. 구원을 이루신 분이라는 것을 증거하며 드러나게 하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서신서를 쓰는 사도들과 바울은 특이한 문구를 계속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안에서, 사랑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도들은 서신서 전반부에서는 믿음으로 구원을 철저히 말하고 이어 명령어들의 문장들을 나열하고 있다. 명령어 문구 꼭 앞 문장에서는 위의 문구를 먼저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악서세리나 겉치레의 표현이 아니다. 명령어들을 선포하는 사도들은 그 특이한 문구 ‘성령 안에서.....’라는 용어를 통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성전)로 삼은 자들에게 드러내고 싶은 것이 있다.
‘주의 이름.’ ‘주님의 마음(....사랑, 봉사, 구제 등<주께서 우리를 위해 가난해 지심으로 우리를 부유롭게 하심-고린도후서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이 이렇다.
십자가의 주님은 이 세상에서 이런 대우(주의 이름으로 고난 받아야 하는 이유, 복음과 함께 고난 받아야 하는 이유)받았다. 이러한 주님 때문에 구원 받았다는 것을 성전(십자가의 죽음으로 3일 만에 세운 주님의 몸)을 통해 성령이 주체가 되어 드러내고 찬양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된다.
물론 어떤이들은 이것도 모르고 자기들이 나서서 지켜보려고 한다는 것이다.그렇게 되면 큰 코 다치는 명령어들이다. 이 명령어들은 인간이 주체가 되어 지켜 내거나 지킬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체가 되어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을 포기 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성령께 위탁해야할 부분이다.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안에서, 믿음 안에서...’라는 말씀을 통해, 구원도 믿음으로 받았으면 ‘그 구원을 이루신 분이 주님 이십니다.를 드러내는 일을 즉, 주체 자를 하늘 소관에 맡기며 자기를 부인하고, 의지하며 살자는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하면 ’믿음으로‘ 살라는 것이다. 그럴 때 요한 1서에서의 말씀하는 식의 ’주님의 사랑이 나오게 되어 있고‘, ’주께서 주시는 힘으로 봉사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도들의 서신서에서 나오는 명령어들은 철저히 주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고(인간의 아름다운 덕이 아님과 인간의 도덕 윤리 보여주기 위함 아님) ‘주님의 이름’을 드러나게 하기 위한 성령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나타나는 것이요. 나타나게 하시는 것이다.(제 3자들이 보면 성도 개인의 인격변화나 도덕 윤리적 도약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은 주님을 드러냄이 목적하는 바이다.)
만약 이 명령어들은 인간이 나서서 행해 보려 했다가는 판판히 죄인 된 자신의 죄를 드러내게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성령 안에서 행하고’도 자신이 한 것처럼 하여 자기 공로를 내세우기도 한다. 그를 때 성도는 성령 안에서 서로 권하여 회개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성전 된 그리스도의 몸은 ‘인간의 이름’이 끼어들 틈이 없게 하시고 ‘주의 이름’만 높이게 하기 위해 성령이 거하는 성전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의 서신에 있는 명령어들을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죄를 죄로 드러나게 하기 위하여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활동하여 ’주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라는 사실까지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성도들은 오해하기 싶다.
그렇게 되면 성령이 주체가 되어 성도의 삶 속에서 ‘주의 이름’이 증거 되게 하는 삶을 무시하게 되고, 마치 발생되게 하고 드러나게 하는 일이 내게서 일어나면 안 되는 것처럼 여기고 율법의 행위로만 간주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성전 된 우리들에게 어떤 목적을 두고 활동하고 계신가를 다시 눈을 들어 살펴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