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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한 자(마 5:5)
우리는 지금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산상보훈 중에 팔복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제가 이번 주 설교를 준비하면서 여덟 가지 복 중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복을 든다면 이 세 번째 복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온유한 자에게 땅을 주시겠다고 하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워낙 땅을 좋아하니까 참 좋아하겠구나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여러분, 땅을 가지고 싶습니까? 온유한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틀림없이 땅은 갖고 싶어 하면서도 온유한 자가 되라는 말씀은 아마 별로 달갑게 듣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현대인들에게 온유하다는 말이 그렇게 좋은 이미지를 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글자 그대로 말을 하면 마음씨가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온유'하면 유약한 성격을 가진 이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하면 성격이 부드러워서 남에게 싫은 말 한 마디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떠오릅니다. 또 좀 무기력하고 우유부단해서 무슨 일을 맡겨도 안심이 안되는 사람, 또 어떤 경우에는 지나치게 비굴하게 굽신굽신 거리는 사람, 이런 이미지가 우리 마음에 떠오르기 때문에 "온유하다" 그렇게 좋은 것 같지 않은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적자생존의 냉험한 원리가 그대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강한 사람이 좋다. 강한 사람이 이긴다. 그러므로 줄을 서도 강한 사람 편에 서라. 또 자기 자신이 남에게 약하게 보이는 것은 싫어하는 생각을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주님이 "온유한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을 받을 것이요" 하는 말씀이 별로 그렇게 달갑게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고 묵상해보면 결국 천지가 변해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온유한 자가 가장 강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땅을 차지합니다. 여러분, 토끼와 호랑이, 당연히 호랑이가 온 세상을 정복하고 온 세상에 가득할 것 같은데 실제로 어느 것이 더 많아졌습니까? 호랑이는 희귀해졌습니다. 그러나 토끼는 참 많습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온유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어떤 부드러운 성격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을 마음에 모시고 주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기대댈 수 있는 후천적인 성품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계셔서 우리 심령을 가난하게 해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닌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나의 죄악과 부족을 깨닫고 하나님 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갈망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렇게 심령이 가난한 자의 특징은 애통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는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보니 참으로 추하고 더러운 죄악으로 가득한 죄인 중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니 애통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두번째 성품인 애통함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심정으로 나 자신과 오늘의 세상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릴 때 세번째 단계로 넘어갑니다. 성령께서 그 심령을 온유하게 해주십니다. 우리 모두가 충동을 받으면 야생마처럼 난폭하기 쉬운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이 난폭해지기 쉬운 우리의 성품을 통제하시고 균형을 잡아 주실 때 나타나는 것이 온유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헬라어의 프라오스(praos)라는 말인데 그 뜻은 "하나의 힘이 잘 조절되고 다스림을 받아들이는 성품"을 가르칩니다. 예수님은(마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님도 온유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온유하다는 말은 결코 약한 것이 아닙니다. 강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통제하시고 균형을 잡아 주심으로 잘 다스려지는 인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천적으로 마음이 조금 부드럽다고 해서 성경에서 말하는 온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를 보면 그 안에 온유가 들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23을 보면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아홉가지가 모두 예수님의 인격과 성품을 드러내는 요소입니다. 그 가운데 온유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온유는 성령님이 우리 육체에 임재하심으로 나타나는 열매인 것입니다. 성령님을 우리 마음에 모시면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과 기질을 바꾸어 줄 때 비로소 우리가 온유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생애 속에 나타난 온유함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을 봅시다.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조카 롯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롯의 하인과 아브라함의 하인들 사이에 땅 때문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아브라함은 롯과 갈라야 서야 할 입장임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땅을 나누는 데 롯에게 제안하기를 먼저 선택하라고 하였습니다. 당시의 상황에서 강자는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친구요 종이었습니다. 집안의 관계로도 아브라함이 롯보다 어른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온유한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의 힘을 사용하였습니다. 이것이 온유입니다. 아브라함이 롯에게 먼저 선택하라고 하자 롯은 물이 넉넉하고 기름진 땅인 요단들을 선택했습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잘 아는 소돔과 고모라도 있었습니다. 당시 그곳은 풍성한 복을 누리고 있었지만 죄악이 가득했다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택하였습니다. 그런데 결국의 축복은 아브라함이 받았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요셉도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요셉은 형들에게 배신을 당했습니다. 애굽에 노예로 팔려와서 살만하다 생각하였을 때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받고 거절하자 무고한 고발로 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셉을 긍휼히 여겨서 마침내 애굽에서 바로 왕을 제외하고는 제일 높은 자리에 앉혔습니다. 요셉은 강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못살게 군 보디발의 아내에 관해서 침묵을 지킵니다. 그리고 자기를 죽이려고 하고 노예로 팔아 먹었던 형들이 가나안땅이 기근이 들어 양식을 구하러 애굽 땅까지 찾아 왔습니다.
그들은 애굽의 총리가 요셉인 줄을 몰랐으나 요셉은 알았습니다. 요셉은 강자로 서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모든 역사와 환경은 하나님의 주관하에 이루어지는 사건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의 형제들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용서하고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요셉의 모습에서 온유한 하나님의 사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윗도 역시 마찬가지로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사무엘상에 보면 다윗의 인기가 높아지자 사울의 질투가 불같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죽이려고 군사들이 이끌고 추격합니다. 그러다 어느 날 동굴 속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동굴 속에는 다윗이 먼저 들어가 있었습니다. 사울이 거기서 잠을 잤고 다윗은 그를 보고 있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누가 강자입니까? 다윗이 복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칼을 빼어 사울의 옷자락만 베었습니다.
그 후 다윗은 하나님이 세운 사람의 옷자락을 베었다는 사실로 통렬하게 가슴 아파합니다. 온유한 사람 다윗의 모습입니다.
사무엘하 16장에 보면 다윗에게 못된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압살롬으로 다윗을 반역하고 반란을 시작합니다. 다윗의 처지가 점점 난처해져서 결국은 다윗성을 떠나 피난 길에 있었습니다. 이때 사울의 부하 시므이가 곤경에 처한 다윗을 찾아와서 마구 저주하며 돌팔매질을 합니다. 그러자 다윗의 곁에 있던 다윗의 비서 아비새가 "왕이시여, 허락만 해 주십시오. 내가 머리를 베어 가지고 오겠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때 다윗의 대답이 감동적입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셨기 때문에 저 사람이 저러는 것이니 그냥 놔둬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다윗이 말하기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고 합니다. 참으로 온유한 인격의 다윗의 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떠하였습니까? 로마 군인들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께 침을 뱉고 욕설을 퍼붓고 저주를 하였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원하시기만 하면 자기를 못박고 침을 뱉는 그 사람들을 혼내 줄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그의 힘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가 하나님의 뜻이고 그로 인하여 사람들이 구원될 수 있다면 그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예수님이었습니다. 여기서 온유한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가리켜서 이사야 선지자는"저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욕을 받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위협을 받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모든 것을 판단하시는 하나님께 부탁하셨다"고 말하였습니다. 온유하신 분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 온유함을 나타내야 할까요?
1. 억울한 환경 속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억울한 삶 속에 나타나는 온유한 인격이 진정한 온유입니다. 시편 37편 11절을 보면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이것은 다윗의 시로서 그가 고통스런 환경 중에서 읊은 것입니다. 시편 37편 1절에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할 때 다윗은 오해와 중상모략을 받고 있었으며, 말할 수 없는 역경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말합니다. "여호와를 의뢰하라 여호와를 기뻐하라"(3-4절). 그리고 8절을 보면,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다윗은 억울한 중에도 온유한 태도를 보였습니다.(벧전 2:19,20)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이처럼 우리의 온유한 인격과 태도에는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할 때 그 상황속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2. 말씀을 받는 태도가 온유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1장 19절에 보면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성내는 것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룬 역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성내는 것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21절에는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사울왕과 다윗왕의 대조적인 태도를 볼 수가 있습니다. 사울왕과 다윗왕 모두 호되게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메세지를 통해서 책망을 받는 사울왕과 다윗왕의 태도가 아주 다릅니다. 사울은 사무엘에게 책망을 받았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의 불순종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울의 왕위가 떠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울은 치를 떱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가 찾아와서 그의 죄를 책망할 때, 한 나라의 왕이었지만 옥좌에서 내려와서"선지자여 당신의 말이 맞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했습니다"라고 회개하였습니다. 이는 다윗이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가 위대해지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다윗을 가리켜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태도가 온유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에 도전을 받지 못하고, 이 말씀이 영혼을 소생시켜 새롭게 할 수 없고, 이 말씀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할 수 없다면 이 사람은 오만한 껍데기일 따름입니다. 말씀은 도전을 요구합니다. 성경은 말씀을 받는 우리의 태도가 온유하기를 요구하십니다.
3. 죄를 범한 자에게 온유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1절을 보면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주변에서 죄를 범한 사람을 보면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성경은 온유한 심령으로 그런 사람을 바로 잡으라고 말씀합니다. 이 『바로 잡으라』는 말은 두 가지 용도로 쓰였습니다. 하나는 탈골된 뼈를 제자리에 갖다 맞출 때이고, 또 하나는 그물이 찢어졌을 때 그 그물을 원래의 상태대로 회복시킬 때에 이 『바로 잡는다』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이 말의 촛점은 회복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잘못을 보았을 때 그 영혼을 사랑하며 안타까이 여겨 그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태도로 접근하고 계십니까? 그를 용서하고 치유하기를 원하십니까? 성경은 범죄한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온유함이 나타나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4. 공동체의 조화를 위해서 온유해야 합니다.
온유하지 못한 사람이 공동체에 들어오면 그 공동체가 깨어집니다. 바울은 교회 공동체의 생활 원리를 가르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엡 4:1-3)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하나가 되는 데에 제일 중요한 것은 온유한 태도입니다. 온유하지 못한 사람들의 발언, 태도, 인격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개인과 가정, 직장, 그리고 교회가 큰 상처를 받게 되고 하모니가 깨어집니다.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남의 마음에 큰 상처를 입혀놓고 "나는 뒤 끝이 없어요"라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나는 앗쌀해요"라고 말합니다. 어느 날 빌리선디 목사님께 한 부인이 와서 "나는 성질 잘 내는 것이 큰 흠입니다. 그러나 나는 오래 가지 않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빌리선디 목사님은 "자매님, 그러나 당신이 성냄을 인해서 누군가의 마음속에 남겨두었던 그 상처는 오래! 오래! 아주 오래! 간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라고 말하였습니다.
5. 나를 반대하는 사람에게도 온유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합니까? 디모데후서 2장 24,25절을 보면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거스리는 사람에게 오히려 온유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세를 이 지면에서 가장 온유한 자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온유하다고 말씀하셨을 때 상황이 민수기 12장에 있습니다.
모세가 장가를 들었는데 구스 여인을 그의 아내로 맞았습니다. 구스는 에디오피아로 아프리카 쪽입니다. 그리하여 그녀의 얼굴이 까맣습니다. 그러자 모세의 형과 누나 아론과 미리암이 책망을 하였습니다. 여자가 없어서 까만 여자를 데리고 왔느냐 면서 비방하였습니다. 뿐 만 아닙니다. 모세의 지도력에도 대항을 합니다. 모세만 지도자냐 우리도 지도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미리암과 아론의 반대와 비방 속에서 모세는 아무 소리하지 않고 침착하게 행동합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모세를 보시면서"온유하기가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뛰어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있는 모세를 대신하여 그 문제를 하나님이 해결해 주십니다. 누가 우리를 거스린다고 대적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온유함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어떤 분은 "목사님! 저는 천성적으로 온유하지 못합니다"라고 말합니다. 묻습니다. 모세가 천성적으로 온유한 사람입니까? 그는 자기의 동족을 멸시하는 애굽사람을 죽였습니다. 그 행동 속에서 그가 천성적으로 온유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차차 온유해졌습니다. 바울이 원래 온유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온유해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온유해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세 가지로 온유하게 하십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난처한 환경을 집어넣고 훈련시킵니다. 천성적으로 온유하지 못한 모세에게 주변에 불평하는 사람들을 모아 놓음으로 그의 인격을 만들어 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얼마나 불평을 많이 했습니까? 바울도 그렇습니다. 유대인들과 고린도 교인들이 말할 수 없이 불평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난처한 환경을 만날 때 하나님이 우리의 인격을 훈련시키기 위한 상황이 아닌지를 살펴야 합니다.
둘째로, 성령충만하면 온유해집니다.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가 온유입니다. 우리가 성령충만하면 성령께서 우리를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성령님을 우리의 인격을 통제하고 우리의 삶을 이끌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성령을 사모하십시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우리의 속사람이 힘을 얻고 주님의 심령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을 언제나 바라보십시오. 우리에게는 온유의 성품이 없습니다. 혹 있더라도 사람을 구별하여 온유한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린 아이와 세리와 창기에게까지도 온유를 보여 주셨습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에게까지도 온유를 보여주셨던 예수님을 바라 보십시오. 예수님을 닮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은 온유한 자들에게 땅을 기업으로 주십니다. 이것을 이 땅에서 부자된다는 의미로만 해석하지는 마십시오. 물론 현세적으로 볼 때 하나님은 온유한 자를 쓰셔서 그의 뜻을 이루십니다. 온유하지 못한 자는 철저하게 깨뜨려 온유하게 한 다음 쓰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쓰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이 온유하지 않기 때문은 아닌지 주 앞에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온유한 사람을 쓰시며 그를 통해서 능력을 나타내시어 영광을 보여 주십니다.
나아가서 천국은 온유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입니다. 성경은 "너희가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할 것이요"(딤후2:12)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들은 마침내 영광스런 천국의 기업을 얻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충만함으로 예수님의 온유한 성품을 닮아가고 성령의 열매인 온유를 소유하심으로 땅을 기업으로 얻는 복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